일제히 돌팔매질이 시작되었다. 벌떼같은 공격이었다. 장원씨의 성추행사건을 계기로 시민단체들은 몰매를 맞았다. “이제 누구를 믿느냐” “시민단체도 별수없다” “위선자의 행태”라는 탄식과 비난이 쏟아졌다. 썩어빠진 한국사회의 각 분야에서 개혁과 반부패의 깃발을 높이 들었던 시민단체도 이제 더 이상 도덕성의 표상일 수 없다는 주장이 기세를 올렸다. 특히 언론이 앞장을 섰다. 난폭한 일반화의 논리가 횡행했다. 마치 모든 시민단체 지도자들이 부도덕하다는 식이었다. 시민단체들은 날개도 없이 바닥 모를 늪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민단체는 얼마전까지만 해도 이 땅의 양심세력이자 도덕적 상징이 되어 있었다. 권력남용과 정치권의 부패를 견제하고 재벌의 폐해를 공격하며 사회복지와 인권의 옹호자로서 온갖 활동을 벌여오던 시민단체들이 얻은 자연스런 결과이기도 하였다. 개발독재와 오랜 권위주의 정부하에서 무너진 공익을 일으켜 세우고 참여를 통한 민주주의를 주창하던 시민단체들은 국민들의 신뢰를 받기 시작했다. 정부기관과 검찰, 사법, 심지어 언론마저도 불신받는 상황에서 시민단체와 시민운동의 지도자들은 언제부터인가 국민들의 희망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때 만난 비난 공세
그런 상황에 장원씨 사건은 하나의 충격이었다. 장원씨는 교수이자 환경운동가로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난 수개월동안 총선연대 대변인으로서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녹색연합이라는 우리나라의 메이저급 시민단체의 사무총장으로 10여년을 활동해 온, 시민단체의 지도급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그가 국민들에게 관심의 표적이 된 것은 총선연대 대변인으로서였다. 단 100일 동안이었지만, 총선연대 활동은 이 땅에 거대한 폭풍을 몰고 왔다. 파죽의 위세를 떨친 총선시민연대의 폭풍 맨 앞에 그가 있었다. 매일같이 언론에 비친 그의 얼굴로 말미암아 그는 시민운동의 상징처럼 인식되었다.
그가 18세의 여대생을 호텔에서 추행했다는 소식은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5·18기념식 전야에 광주에서 벌어진 이른바 386정치인들의 추태가 알려진 직후라 그 충격은 더했다. 그것은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을 뿐 아니라 파렴치한 범죄행위였다. 총선이 끝난 지 불과 한두 달 지난 시점에 벌어진 그 일로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10년 공든 탑이!
오죽하면 ‘음모론’이 머리를 들었을까.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을 부인하고 싶은 속성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도대체 왜 그 여대생이 부산까지 갔으며 그 야심한 시간에 호텔로 들어갔느냐는 식의 의문도 꼬리를 물었다. 더구나 장원씨 본인은 혐의사실 일부를 부인했다. 단지 술에 취해 팔베개를 했을 뿐이라는 장원씨의 변명은 옹색했다. 설사 그 여대생에게 문제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의 책임이 결코 가벼워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술에 취해있었다고 해도 그 정황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는 이미 변명으로 헤어날 수 없는 도덕적 상처를 입은 것이다.
문제는 그 상처가 장원씨 자신이나 그가 소속된 녹색연합에만 미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시민단체 전체의 위신이 함께 훼손당했다. 시민단체가 그간 쌓아온 공신력이 와르르 무너지고 있었다. 단체마다 항의와 비난의 전화가 이어졌다. 심지어 회원 탈퇴를 통고하는 전화도 잇달았다. 총선연대를 통하여 한묶음이 됐던 시민단체들은 전전긍긍했다. 총선 과정에 힘을 발휘하고 기대를 모았던 만큼 시민들의 실망이 컸고 비례해서 쏟아진 질타도 컸다.
총선연대와 이름이 비슷한 참여연대에 빗발친 항의전화에 자원봉사자와 간사들은 기어코 눈물을 쏟고 말았다. 생각해보라. 한 명의 회원을 가입시키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줄줄이 탈퇴하겠다는 전화가 왔으니 어찌 눈물이 나지 않으랴. 장원씨 사건은 그동안 시민단체를 못마땅해하던 사람들에게는 공격과 비판의 빌미가 되었으며 지지했던 시민들에게조차 불만과 이탈의 원인이 되었다.
사실 얼마나 많은 활동가들이 시민단체에서 일하며 공익수호의 최전선에서 청춘을 바쳐왔던가. 얼마나 많은 밤을 잠도 잊은 채 사회불의에 맞서 왔던가. 어느 시민단체든, 특히 자정 가까운 시간에 한번 찾아가 보라. 수십만원의 월급, 그마저도 가끔은 거르는 보잘 것 없는 보수를 받으며 이들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토록 일해왔던가. 온 세상의 누가 무슨 말을 한다 해도 오직 사회 공익과 정의를 지키며 국민의 질높은 삶,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젊음을 불살라 왔다. 이번 사건으로 이들의 헌신마저 매도된다면 그건 진정 안타까운 일이다. 한 사람의 실수와 잘못 때문에 시민운동가들의 삶이 한꺼번에 부정된다면 그 손해는 바로 우리 사회 전체에 돌아갈 수밖에 없다.
장원씨 사건을 보면서 나는 많은 사람들을 떠올렸다. 총선을 앞둔 3∼4개월 동안 총선연대 사무실을 지킨 그 젊은이들이 생각났다. 수십 개 단체에서 파견된 상근자들, 한 시대의 흐름과 대의에 동참하고자 몰려들었던 자원봉사자, 행사 하나를 준비하기 위해 밤샘을 하며 플래카드를 만들고 무대를 설치하던 사람들, 그런 행사를 한두번도 아니고 매일같이 100일간 해낸 사람들이었다.
그뿐인가. 찐빵을 쪄 나르고 김밥을 말아주시던 시민들, 한푼 두푼 성금을 모아온 정겨운 이웃들, 깃발과 전단을 들고 집회에 참석해 주신 주민들, 그리고 마침내 선거일에 총선연대가 꼽은 낙선후보에게 단호한 심판의 표를 던졌던 분들―이 모든 이들이 지난 낙선운동의 주역들이었다. 이들의 노고와 희생이 매도되고 망각된다는 것은 슬픈 일이었다. 한국 정치사에서 최초로 유권자들의 힘을 보여줌으로써 정치개혁의 시발점이 된 낙선운동, 일본에까지 수출되어 세계인들관심을 받았던 낙선운동―이 모두가 장원씨 사건 하나로 물거품이 된다는 것이 어찌 안타깝지 않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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