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 박성현(21·전북도청) 선수의 세 발만 남았다. 실수 없이 9점만 쏘면 우승. 그러나 두 번째 화살이 빗나가 8점을 쏘았다. 중국팀은 우승이 결정되기라도 한 듯 좋아했다. 이제 박 선수의 마지막 화살에 운명이 걸렸다. 8점이면 패배, 9점이면 동점 연장전, 10점이면 우승. 긴장의 순간, 한국팀의 27번째 화살은 보기 좋게 10점을 쏘았다. 올림픽에서 여자 개인전 6연패에 이어 단체전 5연패의 신화가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이튿날 같은 장소에서 남자양궁단체 결승전이 치러졌다. 단 4점만 쏘아도 이기는 게임. 박경모(29·인천계양구청) 선수는 끝까지 침착하게 10점을 쐈다. 올림픽 남자단체 2연패도 달성됐다.
한국 양궁이 아테네에서 금메달 3개, 은메달 1개를 거머쥐는 쾌거를 이루기까지 선수와 함께 마음속으로 시위를 당기는 이들이 있었다. ‘자, 좋은 느낌으로 쏘는 거야. 힘 하나도 안 들이고 화살이 쑥쑥 잘 나가네. 좋았어! 이 느낌이야. 내 타이밍을 지키며 슈팅하는 거야. 떠난 화살에 대해 미련을 두지 않는 거야. 그래, 이 시합은 이길 수밖에 없었어.’
서울대 스포츠심리연구센터 정청희 교수(책임연구원·체육교육·61)를 포함한 5명의 연구원은 한국 양궁이 무난히 목표치를 달성했을 때 지난 1년간 매달린 심리기술훈련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현대경제연구원은 ‘한국 여자양궁 신화와 기업 경영전략’이라는 보고서에서 한국 양궁의 경쟁력 요인을 생산요소, 연관·지원사업, 전략·구조·경쟁메커니즘, 수요 여건 등 4가지 측면에서 분석했다. 생산요소란 바로 최고의 코치진과 선수층. 한국에서 80위면 세계랭킹 5위나 마찬가지고, 한국 여자양궁 국가대표 선발전을 통과하기가 올림픽 금메달 따기보다 어렵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이처럼 치열한 경쟁 속에 살아남은 선수들은 하루 300~500발 이상 연습하고 올림픽에 임박해서는 1000발씩 쏘며 강행군했다.
이들의 실력을 더욱 정교하게 만든 것은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선수육성 시스템이다. 1986년 이후 양궁은 시력측정기, 시신경감응도 측정기 등 첨단장비를 훈련에 적극 도입해왔고 여기에 선수 개인별 성향에 맞춘 고도의 심리훈련을 병행함으로써 20년 동안 세계 1위 자리를 지켜낼 수 있었다.
눈앞의 금메달을 놓치는 이유
한편 이번 올림픽에서 호주, 이탈리아, 중국, 말레이시아, 인도, 미얀마, 멕시코, 룩셈부르크가 모두 한국인 감독을 영입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른바 한국양궁의 ‘전술 프로그램’을 벤치마킹하려는 나라가 늘고 있다. 그러나 한국 양궁팀의 심리기술훈련 프로젝트를 총지휘한 정청희 교수는 “장비라면 가져다 쓸 수 있고 감독은 모셔 가면 되지만 심리기술훈련법은 설령 알려준다 해도 쉽게 따라할 수 있는 게 아니다”고 잘라 말한다.
양궁의 슈팅 동작은 안정된 자세를 유지한 채 신체적, 정신적 몰입상태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때 강한 근력과 근육의 정교한 사용이 함께 요구된다. 슈팅 순간의 미세한 오차는 화살의 비행거리가 길어질수록 커져 기록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선수는 지극히 안정된 상태에서 정확하고 일정한 슈팅 동작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다시 말해 우수한 양궁선수는 슈팅 자세에 동요가 없는 신체적 안정성과 고도의 긴장감 및 심리적 압박감을 극복할 수 있는 정신적 안정성, 일정한 페이스로 계속 슈팅할 수 있는 생리적 안정성을 동시에 갖춰야 한다(정청희 ‘운동수행 향상을 위한 심리기술 훈련’에서).
그러나 막상 중요한 경기에서 긴장해 서두르다가 혹은 겁먹어 경기를 망치는 일이 허다하다. 배드민턴에서 ‘라켓을 거꾸로 들어도 금메달’이라던 나경민·김동문조가 8강에서 탈락한 후 나 선수는 “어떻게 졌는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50m 권총에서 은메달을 딴 진종오 선수는 우승을 눈앞에 두고 실수로 6.9점을 쏘는 바람에 금메달을 러시아 선수에게 내주고 말았다. 남자 50m 소총3자세 결선에서 2관왕을 노리던 미국 선수가 옆 선수의 표적을 쏘아 0점으로 꼴찌를 한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양궁에서도 종종 남의 표적을 맞히거나 과녁을 못 맞히는 어처구니없는 실수가 나온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여자양궁 단체전 준결승전에서 바로 그런 상황이 재현됐다. 대만과 중국의 경기. 5점만 쏘아도 이기는 상황에서 중국 선수가 쏜 화살은 과녁을 벗어나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