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동을 매개로 그리스 문명권과 접촉한 중·서부 유럽 집단들은 엄청난 변화를 경험했다. 우선, 미노아·미케네 문명의 수요로 인해 그리스 지역과 인접한 발칸 반도에서 많은 양의 청동이 빠져나갔다.
그런데 광산에서 구리를 캐는 작업은 매우 힘들고 위험한 노동이다. 따라서 사회 구성원의 자발적 노동으로 그때그때 필요한 만큼의 구리 광석을 채굴하던 예전과 달리, 노예 노동력에 의존해 구리를 확보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리스 문명권과의 접촉으로 중부 유럽 지역의 청동 생산 시스템의 규모는 확대되었으나, 이러한 경제적 발전의 이면엔 구리 채광을 전담하는 노예 계층 형성이라는 어두운 현실이 있었다. 한편으로 이러한 노예 계층의 형성은 위계 사회로의 전환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리스 문명권과의 접촉은 중·서부 유럽 교역망에도 큰 영향을 끼쳤으며, 이 또한 사회 변화를 가져왔다. 중·서부 유럽에는 벌써부터 광범위한 교역망이 구축되어 있었다. 이 교역망을 통해 중부와 남동부 지역의 청동기가 대서양 연안, 북부 스칸디나비아 지방, 발트해 지역 등으로 전해졌고, 그 대가로 지급된 호박석이나 모피가 다시 유럽 각지로 퍼져나갔다. 교역망의 각 지점에는 외국산 제품과 현지 물품 교역을 관장하는 집단들이 있었고, 그들은 이 특권을 기반으로 엘리트 계층을 형성했다. 게다가 이러한 기존 교역망에 그리스의 원거리 교역이 가세하면서 교역 물량이 늘어났고, 그 결과 교역을 조직하던 집단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더욱 키워나갈 수 있었다. 또한 교역을 관장하던 엘리트는 그리스 지역으로부터 유입된 선진 문물을 독점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자신들의 사회적 입지를 굳건히 하고, 자신들과 공동체의 나머지 구성원을 더욱 차별화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스칸디나비아의 엘리트 무덤에서 발견된 미케네 문명의 접이식 의자가 그러한 기능을 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그리스 문명권과의 교역이 본격적으로 이뤄지면서 그 교역망에 관여하는 정도에 따라 사회적 차별화가 이뤄졌던 것으로 보인다.
戰士 문화

10세기 영국 웨일스에 도착한 켈트족 생활 모습을 재연한 모습.
철로 만든 제품은 청동기보다 기술적으로 뛰어나다. 철제 도구나 무기는 청동으로 만든 제품보다 더 단단하며 날도 더욱 뾰족하다. 그런데 철의 또 다른 특징은 원료인 철광석이 청동의 원료인 구리와 주석보다 더욱 넓은 지역에 걸쳐 분포하며 그 매장량도 훨씬 더 풍부하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청동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범유럽적인 교역망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나, 철은 그 지역에서 나오는 원료를 이용해 생산할 수 있었다. 따라서 각 지역의 집단들은 더 이상 서로에게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고, 그 결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지역 정치체(polity)들이 등장했다. 고고학자들은 이와 같은 지역 정치체들이 존재하는 사회를 흔히 ‘족장 사회’ 혹은 ‘군장 사회’라고 부르는데, 켈트족 사회도 이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철기의 사용은 중요한 경제적 변화를 가져왔으며, 켈트족 사회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앞서 언급했듯 철이라는 소재는 청동에 비해 확보하기가 쉬웠다. 따라서 중부와 서부 유럽의 철기 시대 집단들, 즉 켈트족은 철제 무기뿐만 아니라 철제 농기구도 만들어 사용했다. 땅을 더 깊게 갈 수 있는 쇠로 만든 보습이나 수확을 더 용이하게 하는 철제 낫 등이 널리 보급되면서 농업 생산성이 청동기 시대보다 크게 높아졌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 성장은 켈트족 사회의 기반을 튼튼하게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