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9월호

마약상 위장 최영재 기자 북한산 마약 밀매 현장 최초 확인

“목숨? 기건 담보못하오 물건? 기건 확실하디요 ”

  • 최영재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cyj@donga.com

    입력2004-09-03 15: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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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약 산업은 북한이 국가 차원에서 공공연하게 벌이는 외화벌이 사업이다. 현재 한국과 일본에서 소비되는 필로폰과 헤로인, 아편의 40% 정도는 북한산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산 마약이 제조되어 최종 소비자 손에 전달되는 과정은 세 단계로 요약할 수 있다. 첫번째는 북한 내부의 마약공장에서 만들어져 북한 국경으로 이동하는 과정. 두번째는 제3국으로 나가는 전진기지인 중국으로 넘겨지는 단계, 세번째는 중국에서 한국과 일본으로 수출되는 단계다. 지난 8월 초순, 기자는 마약상으로 위장하여 북한산 마약의 유통거점인 중국 지린성 옌볜조선족자치지구에 잠입해 거래 현장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장백산(암호명·조선족 밀수업자)은 쉽사리 접선할 수 없었다. 중국 지린(吉林)성 옌지(延吉)시 00호텔에 진을 친 지 사흘째인 8월6일, 장백산은 기자를 계속 의심하고 만나기를 거부했다. 그의 의심은 당연한 것이었다. 중화인민공화국 형법 제 347조는 다음과 같이 적시하고 있다.

    ‘마약을 밀수, 판매, 운송, 제조하였고 다음 각호의 하나에 해당한 자는 15년의 유기징역, 무기징역 또는 사형에 처하고 재산몰수를 병과한다. (1) 아편 1000g 이상, 헤로인 또는 메틸벤졸프로필아민(필로폰) 50g 이상 또는 기타 다량의 마약을 밀수, 판매, 운송, 제조한 자 (2)마약을 밀수, 판매, 운송, 제조한 집단의 수모자 (3)마약의 밀수, 판매, 운송, 제조를 무력으로 엄호한 자 … (4)조직적인 국제 마약 판매 활동에 참여한 자’

    마약에 관한 중국의 법은 이처럼 엄중하다. 이 법이 적시한 것처럼 중국은 필로폰의 경우 50g 이상만 소지해도 총살형에 처한다. 만약 기자가 중국 공안의 끄나풀이라면, 그는 목숨을 보전할 수 없을 것이다.

    할 수 없이 장백산을 기자에게 소개한 탈북자 A씨에게 SOS를 쳤다. 현재 서울에 있는 A씨는 탈북하기 전 함경북도에서 두만강을 통해 옌볜(延邊)지역 중국인들과 밀무역을 벌이던 사람이다. 그는 자동차, 송이버섯, 잣, 아편·헤로인·필로폰 등 달러를 벌 수 있는 물건은 가리지 않고 밀무역을 했다. 북한 공무원 신분이던 A씨의 밀수는 개인적인 이익을 챙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북한이 국가 차원에서 벌이는 사업이었다. 당연히 북에서는 범죄가 될 수 없는 사안이다. 특히 A씨는 북한의 마약 밀매를 직접 이끈 당사자였다.

    장백산은 A씨의 중국쪽 밀무역 파트너였다. A씨에 따르면 장백산은 담력이 세고, 몸이 날랠 뿐만 아니라, 두만강 국경지역의 중국 공안, 세관, 국경수비대에 친구가 많아 밀수 상대로는 적격이라고 한다.



    국제전화는 도청당할 가능성이 높지만 별 수 없었다. A씨는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게 ‘약어’로 장백산에게 “내가 보낸 사람이니, 최선생이 하자는 대로 도우라”고 전화를 해주었다. A씨의 전화는 금세 효과를 발휘했다. 장백산은 의심을 풀고 기자를 옌지시 외곽 모처로 불러냈다.

    장백산을 만난 것은 8월6일 오후 4시. 기자의 신분은 북조선과 마약 거래를 할 수 있는지 알아보러 나온 한국 사업가 최아무개라고 소개했다. 마약 조직들은 원래 ‘큰 장사’를 시작하기 전에 조직원을 미리 파견해 판매 루트를 사전 답사하고, 견본을 확인한 뒤, 본격적으로 작전을 짠다. 기자는 말하자면 ‘큰 장사’ 이전에 파견된 사전 답사요원이 된 셈이다. 장백산은 차림새가 어울리지 않는 한국 마약상(?)을 의심하지 않았고 여러 상황을 묻지도 않았다. A씨가 소개했으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생사고락을 같이한 사람 사이에서 통하는 끈끈한 의리와 믿음. A씨와 장백산 사이에는 그런 끈이 존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장백산은 기자에게 질이 좋은 우롱차를 권했다.

    “북한산 마약은 두만강 국경을 통해 중국으로 넘어옵니다. 지금이라도 한국사람이나 일본사람이 달러를 들고 와서 부탁하면 내가 얼마든지 그 사람을 데리고 국경으로 가서 북한산 마약을 구해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갈 데까지 갔을 때 마지막 수단으로 마약 장사를 합니다. 필로폰의 경우 50g만 넘게 갖고 있으면 총살이기 때문에 빚에 몰려 파산 직전이거나, 어지간히 돈에 몰리기 전에는 밀수업자라도 마약 장사에 손을 대지 않습니다. 그러나 북조선에서는 능력만 있으면 아무나 마약장사를 하고, 국가도 이를 방치합니다. 특히 고위 공무원들이 더 앞장서지요.”

    한국에서 홍수가 나던 8월6일, 옌볜에는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장백산과 기자는 산책을 했다.

    “내가 최선생을 믿는 것은 형님(A씨) 때문입니다. 이 바닥에서는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몇 달 전에도 옌지 청수동의 한 사우나 주인이 중국 안전부에 체포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북인지 남인지 알 수 없지만, 특무(스파이)였습니다. 이 사우나도 북과 남 둘 중의 한 정부가 돈을 대서 운영한 것입니다. 최선생이 어지간한 사람이면 두만강변에 데리고 나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릴 수도 있습니다. 탈북자들이 넘나드는 국경에서 외국인 하나쯤 없애버리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닙니다. 당신이 달러 다발을 갖고 왔더라도 돈만 뺏고 없애버릴 수도 있습니다. 탈북자 소행으로 위장하면 그만입니다. 지금 두만강변 조선족 마을에는 탈북자들의 강도행각 때문에 집집마다 문과 창에 쇠창살이 쳐져 있습니다.”

    “많은 양은 여러 선에서 구입하라”

    엄혹한 상황일수록 여유를 가져야 하는 법. 위축될 필요는 없었다. 장백산에게 북한산 마약을 대량으로 구입할 수 있는 방법을 좀더 구체적으로 캐물었다.

    “대량으로 구입하려면 한 거래선에서 많은 양을 주문하면 안됩니다.”

    이는 마치 수면제를 한 약국에서 대량으로 판매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북조선에서 국경에 나와 마약을 파는 이들은 북조선 국경 수비대와 한통속이고, 또 이들이 중국 공안과 결탁되어 있다고 보면 됩니다. 마약 밀수에 항의하는 중국쪽의 압력이 있기 때문에 북조선도 중국쪽에 생색을 내야 합니다. 이들은 마약을 팔기도 하지만, 대량으로 구입하는 고객이 있을 땐 역으로 정보를 중국에 흘립니다. 두만강에서 마약 거래가 이루어지는 현황을 북조선측 국경경비대는 망원경으로 다 보고 있습니다. 북한의 마약 판매 현황은 북한 당국이 도 단위로 집계합니다. 많은 양을 사려면 동쪽 끝 나진에서 서쪽 끝 신의주까지 두만강, 압록강 국경선을 따라 조금씩 사모아야 합니다.”

    장백산은 운전할 기운이 없는지, 친구에게 무산군 앞 국경까지 안내를 부탁했다. 장백산의 친구 또한 근방 국경은 눈을 감고도 다니는 터줏대감이었다. 그가 모는 자동차를 타고 두만강을 따라 무산군까지 이동했다. 그는 중국군 국경수비대 초소 위치와 밀수거래가 가능한 곳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는 마약상(?)인 기자가 국경수비대 눈을 피해 사진 촬영을 할 수 있는 곳을 일일이 찍어주었다. 그가 찍어주는 곳은 바로 마약을 거래할 수 있는 후보지였다.

    난핑진에서 무산군 앞 국경까지는 자동차로 30분 거리. 강폭은 15∼20m 정도였다. 이 중에서도 거래가 이루어지는 곳은 강폭이 유난히 좁은 곳이었다. 지린성 허룽시 광핑 같은 곳은 강폭이 1.5∼2m 정도밖에 안된다고 한다.

    가다보니 강 건너 북한쪽에 공장으로 보이는 회색 건물이 나타났다. 물어보니 닭공장이란다. 한국의 양계장격이다. 닭을 키우고 있느냐고 질문하니 텅 비어있다고 한다. 사람 먹을 곡식도 없는데, 닭을 키울 여력이 없다는 것이다. 자동차가 가파른 고갯길을 오르다보니, 중국군 초소가 나왔다. 여기서 쉬어가기로 했다. 장백산의 친구는 손을 써놓았으니, 태연하게 행동하라고 충고한다. 전망대처럼 높은 초소에서 중국군 병사 4∼5명이 망원경으로 북한쪽을 주시하고 있다. 룽징시에서 파견 나온 인민해방군 무장경찰대라고 한다.

    최근 중국 정부는 조·중 국경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그래서 이곳에서 3∼4시간 거리인 룽징시 병력이 여기까지 증원 배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시 고개쪽으로 자동차를 몰았다. 정상에 도달했을 무렵 강 건너에 회색빛 시가지가 훤히 내려다 보였다. 함경북도 무산군 무산읍이다. 북한쪽 강변에서 아이들이 물장구를 치며 놀고 있다. 아낙네가 강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다. 장백산의 친구가 빨리 사진을 찍으라고 손짓했다. 북한쪽 강변을 보고 열심히 셔터를 눌렀다.

    오후 3시, 장백산과 함께 두만강을 뒤로하고 옌지시로 행했다.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3시5분, 중국 국경수비대 검문소다. 들어올 때는 ‘니 하오’ 한 마디로 무사통과했는데, 차를 세우는 병사들의 태세가 심상찮다. 유리창을 내리니, 우의를 입은 병사가 장백산에게 나를 가리키며 뭐라고 묻는다. 장백산은 열심히 설명했다.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 다리 밑에 숨긴 카메라와 취재수첩을 들킨다면 간첩죄로 체포될 수도 있다. 식은땀이 흘렀다. 장백산이 팔꿈치로 쿡 찔렀다. 여권을 달란다.

    ‘여기서 잡히는구나….’

    안주머니에서 여권을 꺼내 넘겨주었다. 장백산이 휴대전화를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중국말로 열심히 떠들다가, 검문하는 병사에게 다시 몇마디했다. 병사는 ‘통과’하라는 듯 손짓을 했다. 장백산에게 어떻게 무마했는가를 묻지 않았다. 그도 설명하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비는 계속 내리고 비포장도로는 진흙탕으로 변했다. 바닥이 낮은 승용차로는 달리기 힘들다. 시야도 흐려 4∼5m 앞을 보기 힘들었다.

    “밀수를 하기에는 이런 날이 오히려 좋습니다. 겨울에 눈이라도 와서 길이 얼어붙으면 밀수꾼들은 오히려 더욱 활개치지요. 단속 차량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밀수차량들은 빙판길에서도 과속으로 달립니다. 어차피 목숨 내걸고 하는 사업이니까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합니다. 마약 밀수차량을 덮치는 세 마리의 독수리가 있어요. 세관 차량, 공안부 차량, 국경수비대 차량이죠. 악천후에는 그 들을 따돌리기가 한결 쉽습니다.”

    “아까 휴대전화로 서로 연락을 한다고 했는데요. 휴대전화가 생기기 전에는 어떻게 연락을 취했습니까?”

    “A선생이 아무 말 안하던가요. 그때는 무전기로 연락했지요. 우리는 공안들의 주파수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교신내용을 도청하면서 장사했습니다.”

    너무 자세히 묻지 않기로 했다. A씨가 알만한 사항까지 캐물으니 장백산은 기자의 신분이 궁금한 모양이다. 자동차가 허룽시로 들어왔다. 허룽시부터는 포장도로다. 자동차는 진흙투성이였다. 국경에 갔다온 흔적을 지우기 위해 기름을 넣고, 세차를 했다.

    허룽시를 떠나 룽징시로 향했다.

    “만약 오늘 제가 강가에서 필로폰 10kg을 넘겨받았다면, 어떻게 한국으로 가져갈 수 있습니까?”

    “그것도 제 도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북한에서 물건을 넘겨받았다면, 한시라도 빨리 중국 땅을 벗어나야 합니다. 시간을 끌면 재미 없습니다. 140km가 밀수차의 규정속도입니다. 지린성의 육상교통과 해상교통을 책임지는 현통그룹이라는 운수회사가 있습니다. 이 회사 소속 화물선이 한국, 러시아, 일본 등 주변 항구로 취항합니다. 이곳 직원과 짜야 합니다. 현통운수 직원에게 돈을 쥐어주며 ‘금지 의약품’인데 어느 항구까지 실어달라고 부탁합니다. 마약이라는 이야기는 절대로 하면 안됩니다. 그 놈들도 대충 짐작은 하지만 그래도 마약 이야기는 하면 안됩니다. 이 모든 것이 전격작전식으로 바로바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미리 치밀하게 작전을 짜야지요. 일단 한국에 물건이 떨어지기만 하면 몇십배로 튀겨 먹지 않습니까? 큰 장사니까, 목숨을 내걸고 하는 거지요.”

    조선족 마약업자 김영광은 중국을 통하지 않고 북한에서 곧바로 마약을 한국이나 일본으로 수출하는 경우도 있다고 증언했다. 그는 “북한의 수정무역회사 직원들이 마약의 해외 판매를 담당하는데, 일본의 경우 북한 배가 일본 항구에 곧바로 들어갑니다. 올해 초, 일본이 침몰시킨 북한의 괴선박은 바로 마약선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단속이 심해 제3국 선박에 부탁하거나, 아예 일본배가 북한으로 들어오기도 합니다”라고 말했다.

    자동차는 룽징시를 통과해서 옌지시로 향했다. 비는 그쳤다.

    “A선생이 북한산 필로폰을 가능하면 한 봉지 가져오라고 부탁했습니다. 얻을 수 있겠습니까?”

    “구할 수는 있는데, 비싼데요. 자금이 있습니까?”

    탈북자 A씨는 서울에서 기자에게 북한의 마약 제품에 관해 “제가 북한에 있던 1998년 무렵, 필로폰은 태국산으로 위장해서 포장했습니다. 한 봉지가 330g이었습니다. 이 봉지에 붉은색 잉크로 상표를 찍었는데, 사자 두 마리가 공을 받치고 있는 모양이었습니다. 이 필로폰 세 봉지, 그러니까 거의 1kg을 미화 1만달러씩 받고 두만강 국경에서 중국으로 팔아 넘겼습니다. 헤로인은 1kg 단위로 포장했는데, 1kg에 역시 미화 1만달러를 받았습니다. 북한 마약이 공해(公海)상에서 판매될 때는, 해상이라 품이 많이 들기 때문에 kg당 1만5000달러를 받았습니다. 비용도 그렇고해서 거래는 역시 두만강을 통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라고 설명했다. 장백산은 A씨가 말한 당시 가격이 지금도 여전하다고 전했다.

    기자는 장백산에게 견본이라도 필요하니 북한산 필로폰 1회 투약량 정도만 구해달라고 했다. 중국 옌지시에서는 한두 사람이 1회 투약할 정도의 분량을 중국돈 500위안(한화 8만원)에 팔고 있었다.

    장백산은 어디론가 휴대전화를 걸었다. 기자와 장백산은 마지막 식사를 위해 북한 당국이 경영하는 옌지시 유경호텔로 향했다. 옌지를 떠나는 기자의 비행기 출발 시간은 저녁 8시였다. 식사를 시작한 지 30분 뒤, 장백산의 친구라는 30대 남자 두 명이 나타났다. 부탁한 ‘물건’을 가져온 사람이다. 물건은 약첩처럼 꼬깃꼬깃 접은 하얀 종이에 들어 있었다.

    “최상급품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평소보다 양이 많고 좋은 물건이군요. 옌볜 지역의 마약은 별다른 공급 루트가 없기 때문에 모두가 북한산입니다. 이 물건도 북한산이 분명합니다. 중국말로 이런 물건을 ‘유 빙(기름진 빵이라는 뜻)’이라고 부릅니다.”

    “한국으로 이 견본을 가져갈 수 있겠습니까?”

    “글쎄요. 요즘 중국 공항의 마약 단속이 엄중한데 걸리면 어떡합니까?”

    장백산의 말은 사실이었다. 옌지에서 북경을 거쳐 서울로 돌아와야 하기 때문에, 한국 공항이라면 정보기관에 미리 통보하고 협조를 구할 수 있지만 중국 공항의 검색이 문제였다. 결국 ‘북한산 필로폰’견본을 사진 촬영만 하고 국내 도입은 포기했다.

    마약 전문가들에 따르면 북한산 마약은 품질이 좋기 때문에 한국과 일본에서 최고품으로 꼽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한 마약 전문가는 북한산 필로폰의 특징을 이렇게 설명했다.

    “필로폰은 투약하면 공황장애라는 증상이 나타난다. 공황장애란 투약 후 약 8시간 후에 손발이 저리고 몸에 경련이 일어나는 등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증상을 말한다. 구체적으로는 사람이 많은 곳을 피하고 폐쇄된 공간을 찾으며, 자기 건강을 스스로 의심하는 등 심리적·육체적으로 극도의 불안감에 시달리게 된다. 그런데 북한산 마약은 놀랍게도 이런 공황장애가 없고 인간의 초능력을 극대화시켜 주는 장점을 갖고 있다.”

    북한산 마약은 이미 중국 사회를 심각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장백산에 따르면 옌지시의 경우 청소년들도 오락실같은 곳에서 북한산 마약을 손쉽게 구입할 수 있다고 한다.

    8월5일 기자는 옌지시에서 북한산 마약의 피해자인 조선족 윤아무개(여)씨를 만났다. 북한의 나진 선봉 지역을 오가며 해삼과 전복 장사를 하던 그의 오빠는 북한 사람의 꼬임에 빠져 마약 중계상 노릇을 하다가 15년형을 선고받고 옌지감옥에서 복역중이라고 했다. 원래 윤씨의 오빠는 창춘감옥에 복역중이었으나 서울에서 가정부로 일하고 있는 어머니가 번 돈을 뒤로 먹여(뇌물로 주어) 겨우 옌지감옥으로 빼내왔다고 한다. 윤씨는 “북한에서는 굶어죽게 되니까, 돈이 되는 것이라면 닥치는 대로 한다. 마약도 그런 차원에서 공공연하게 제조된다. 죄 없는 우리 오빠는 그런 북한 사람들 꼬임에 빠져 이 고생을 하고 있다”고 눈물을 흘렸다.

    저녁 8시30분. 베이징행 에어차이나 여객기가 옌지공항 활주로를 박차고 올랐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두만강을 사이에 둔 중국의 조선족 마을 난핑진과 북한 칠성리의 오후 풍경이 떠올랐다. 동네에 나다니는 사람이 없기는 한가지인데 난핑진 사람들은 과식하고 낮잠을 자느라 그렇고 칠성리 사람들은 굶주려 돌아다닐 힘이 없어 그랬다. 오빠가 북한산 마약을 팔다가 감옥살이하고 있다는 조선족 여인 윤아무개씨의 하소연도 귀에 쟁쟁했다.

    “도대체 국민을 마약 농사로 내모는 저 나라가 언제까지 갈 것인가?”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시간이 너무 걸리지 않습니까. 이 사업은 신속성이 생명인데, 그러다가는 꼬리를 잡힐 것 같은데요.”

    “얼마나 필요하신지 모르겠지만, 톤 단위의 물량이 필요하다면 북조선 나진으로 들어가십시오. 나진에 가서 빚에 쪼들려 죽기 직전의 조선 사람을 찾는 것이 가장 빠른 길입니다. 러시아, 한국, 일본에서 나온 마약조직들도 한꺼번에 많은 물량이 필요할 때는 모두 나진으로 움직입니다.”

    해가 저물어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조선족이 운영하는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외국인이 아니라, 중국 서민들이 식사를 하는 곳이었다. 손님은 우리뿐이었다. 옌볜에서는 개고기요리가 일품이다. 30∼40년 전 시골 냄새가 물씬 나는 이 식당에서 삶은 개고기와 토장국, 지린성 고량주를 시킨 뒤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물건과 대금을 주고받는 방법을 좀 더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십시오. 최근에는 중국의 단속이 심해 돈거래는 국경이나 옌지 같은 곳에서 하고, 현물은 북조선에서 곧바로 배편으로 일본이나 한국으로 간다는 정보가 있던데요.”

    기자는 장백산을 만나기 하루 전인 8월5일 옌지 시내 모처에서 만난 조선족 마약업자 김영광(가명)의 말을 떠올리며 이렇게 물었다.

    김영광은 몇 해 전에, 북한 내부에서 헤로인 장사를 하다가 북한 보위부에 체포된 적이 있다. 당시 김영광은 중국 국적자이고, 거래량이 적어 사흘 동안 두들겨 맞은 뒤 석방되었다. 하지만 그는 지난해에도 필로폰을 투약한 사실이 들통나, 중국 공안에 체포된 적이 있었다.

    김영광은 자신이 마약 중독자라는 사실을 기자 앞에서 떳떳하게 밝혔다. 고개를 갸웃하자 증거를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오전에 투약하고 남은 것이라며 껌종이에 싼 필로폰 가루를 꺼내 보여주었다. 김영광은 지금도 북한 내부를 제집처럼 드나들며 마약 사업을 하는 것 같았다.

    “어제 함북 무산으로 가다가 두만강 물이 불어 건너가지 못했다. 오늘 북한으로 가는 통행증을 끊었다. 내일 아침 일찍 무산으로 넘어가서 청진까지 갈 것이다. 내 증명서로는 무산까지밖에 못 간다. 하지만 무산의 ‘00 초소’에 내가 잘 아는 이가 있다. 그는 보위부보다 막강한 실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 ‘빽’으로 청진까지 갈 수 있다.”

    그러나 김영광은 “나는 마약 사업에는 개입하지 않는다. 이 사업은 걸리기만 하면 작살난다. 내가 지난해에 중국 공안에 붙들렸을 때도 마약 조직에 관련된 것이 드러났으면 끝장났을 것이다. 나는 단순 복용자로만 드러났기 때문에 고생 좀 하다가 풀려났다”며 자신의 마약 사업 개입은 강력히 부인했다.

    장백산은 김영광의 ‘현금 따로, 물건 따로’거래설을 단칼에 잘랐다.

    “모르는 소리 마십시오. 북조선과 하는 모든 밀수 거래는 현금치기가 원칙입니다. 조선측 강변에 나와있는 아이들은 돈만 주면 원자탄도 갖다줄 수 있다고 허풍을 칩니다. 북조선 아이들이 갖고 나오는 물건은 매번 약속한 것보다 수량이 안 맞거나 질이 떨어집니다. 그러니 어떻게 믿습니까? 북조선은 일본에서 폐차 직전의 중고차를 밀수입해서 두만강 국경을 통해 중국에 밀수출하는데, 이런 자동차 밀수도 현금치기가 원칙입니다.”

    기자는 서울로 돌아와서 A씨를 다시 만나 이 부분에 대해 자문을 구했다. A씨는 마약이라는 물건 특성상 ‘현금치기’거래를 할 수밖에 없다며 장백산의 증언을 뒷받침했다.

    “A선생이 나에게 최근에는 어떤 경로로 북조선 마약을 얻을 수 있는지 알아오라고 부탁했습니다. A선생이 있던 몇 년 전 상황과는 루트가 많이 달라졌을 것 아닙니까? 가능하면 저에게 그 루트를 상세하게 보여주십시오. 돌아가서 A선생과 북조선 마약 수입 여부를 의논해보아야 합니다.”

    기자는 장백산에게 A씨가 서울에 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고 상해쪽에서 무역을 하고 있다는 정도로 얼버무렸다. 장백산은 A씨가 탈북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그가 국정원에 포섭되어 한국으로 간 사실은 모르는 것 같았다. 물론 그가 꼬치꼬치 캐물었다면 들통날 수 도 있었지만 그런 것을 문제 삼지 않았다. 기자가 A씨의 부탁을 받고 왔다는 것, 그것 하나만 확인되면 끝이었다.

    “형님(A씨)이 웬만한 루트와 방법은 다 알고 있을 겁니다. 그 뒤로 바뀐 것도 별로 없구요. 하지만 형님 부탁이라니, 내일 거래가 이루어지는 두만강 국경으로 같이 가 봅시다. 당신 같은 한국인이 마약 거래나 밀수를 하려면 저 같은 조선족 전문가를 끼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최근에는 탈북자 문제 때문에 한국인이나 외국인은 두만강 국경에 얼씬도 할 수 없습니다. 요즘 변경지역에선 한국 사람에 대한 단속이 심합니다. 두만강 국경으로 가려면 검문소를 수도 없이 통과하고, 가는 중간에도 공안이나 세관, 국경수비대 차량을 여러 차례 만나야 합니다. 이들은 24시간 교대로 국경 근처를 순찰하고 잠복 근무도 합니다. 한국 사람들이 중국에서 금지하는 불교를 변경에서 퍼뜨리거나, 탈북자를 접촉하기 때문에 중국 공안이 눈에 불을 켜고 있어요. 하지만 걱정할 것 없어요. 걔들이 모두 내 친구예요.”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니, 어느덧 고량주 한 병을 다 비웠다. 장백산은 사양하지 말고 더 들라며 고기와 술을 계속 권했다. 그에게서 사람 냄새가 났다. 특히 한번 맺은 의리는 절대로 저버리지 않는다는 그곳 사람들의 정서는 서울 사람과는 사뭇 달랐다. 고량주 한 병을 더 시키려고 했으나, 다음날 일정 때문에 자리를 파했다. 8월7일은 새벽부터 장백산이 모는 자동차를 타고 두만강 국경 현장으로 이동해야 한다.

    8월7일 아침 6시30분, 장백산의 자동차를 타고 함경북도 무산군쪽의 두만강변으로 출발했다. 옌지시를 벗어난 뒤, 자동차는 왕복 4차선으로 시원하게 뚫린 도로를 달렸다. 윤동주 시인의 고향인 룽징(龍井)으로 가는 길이다. 중국 땅에서 오래간만에 보는 도로다운 도로다. 길 가운데 중앙분리대가 있고, 바닥은 아스팔트가 아니라 시멘트다. 양옆은 나지막한 구릉지대다. 이 길을 따라 계속 달리다 오른쪽으로 꺾어 5시간 넘게 달리면 백두산이 나온다.

    7시 무렵 룽징시를 지나쳤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꺾어 투도시(市)로 향했다. 길 정면이 백두산 방향이다. 왕복 2차선 국도를 달렸다. 길 양쪽은 백양나무가 울창하게 들어서 터널을 이루고 있다. 백양나무 터널 바깥은 들판이다. 벼가 새파랗게 자라는 논도 보이고, 옥수수밭도 보인다. 우마차가 지나간다.

    “밀수를 할 때는 왕복 2차선밖에 안되는 좁은 이 길에서 시속 140km를 밟습니다. 죽기살기지요. 140km보다 속도가 떨어지면 반드시 꼬리를 잡히거나 무슨 사고가 납니다. 오늘은 연습이니 쉬엄쉬엄 갑시다.”

    그 말을 듣고 속도계를 보니 바늘은 시속 80km를 가리키고 있다. 오전 8시10분, 짙은 안개가 몰려들었다. 의미심장하게 장백산에게 물었다.

    “밀수 경험이 많은 것 같은데 주로 무슨 물건을 다룹니까?”

    “나는 최근에는 거의 손대지 않았어요. 요새는 송이버섯 철이라 친구들이 송이 밀수를 많이 합니다. 질이 좋은 북조선 송이를 두만강을 통해 사들입니다. 밀수니까 당연히 관세를 물지 않고, 한국이나 일본으로 수출하면 한몫 잡습니다.”

    ‘長白山 195km’라고 씌어진 표지판이 나타났다. 도로 사정 때문인지, 백두산은 여기서도 자동차로 5시간은 족히 걸린다고 한다.

    “마약 대금은 어떻게 강변으로 갖고 갑니까?”

    “비닐로 둘둘 감아서 이런 차에 싣고 갑니다. 10만달러 정도도 비닐로 감아서 강변으로 가지고 갑니다. 강변에서 물건을 받고 돈을 넘깁니다. 중국쪽에서 현금을 들고 북조선쪽으로 건너가기도 하고, 북조선에서 물건을 들고 중국쪽으로 넘어오기도 합니다. 적은 양일 때는 돌멩이에 묶어서 강 건너로 던집니다. 돈도 마찬가지로 돌멩이에 묶어서 던집니다”

    반대 차선에서 공안 차량이 다가온다. 하얀 바탕에 앞문이 검정색이고 앞쪽 보닛에 ‘公安’이라고 씌어 있다. 중국 옌볜에서 굴러다니는 승용차는 거개가 낡아빠진 소형차지만 공안 차량은 일제 중형차다. 방금 지나친 공안 차량은 혼다 2000cc급이었다.

    “저 차들이 모두 북조선이 일본에서 밀수입해 중국으로 밀수출한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폐차 직전의 차지만, 여기서는 제일 성능 좋은 승용차입니다. 형님(A씨)과 내가 저 장사도 많이 했지요. 중국 당국은 저 밀수차를 압수하거나, 몰래 사들여 개조한 뒤 공안 차량으로 쓰고 있습니다.”

    밀수를 단속해야 하는 공안 당국이 밀수품을 순찰차로 쓰고 있다니, 중국은 이해할 수 없는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 휴대전화로 교신

    “마약 거래를 할 때 연락은 어떻게 합니까?”

    “중국 휴대전화로 시간과 장소를 정합니다. 중국 휴대전화는 북한의 두만강 국경 쪽에서도 터집니다. 마약 장사하는 북조선 아이들은 모두 중국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북조선 아이들이 시간을 안 지켜서 허탕을 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 놈들은 국경수비대가 보내주지 않아서 늦었다, 길이 안 좋아서 그랬다는 둥 이 핑계 저 핑계를 댑니다. 실제로 북조선은 도로 사정이 엉망이라 제 시간에 대기가 힘듭니다. 거래를 성공시키려면 작전을 잘 짜야 합니다.”

    자동차가 허룽(和龍) 시가지를 지났다. 이곳에서는 3층 건물이 가장 높다. 국경이 가깝기 때문에 여기서부터는 한국사람 같은 외국인이 접근할 수 없다. 5분 정도 달리자 시내를 벗어났다. 비포장 도로가 시작된다. 이곳이 북위 43도 부근이라 그런지 8월 초순인데도 코스모스가 피어있다. 길을 떠난 지 3시간이 지났다.

    아침 9시20분. 3000cc급 일제 도요타 승용차가 쏜살같이 우리를 앞질렀다. 아무런 표시도 없는 녹색 승용차인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이곳에서 굴러다니는 일제차는 대부분 관용차다. 장백산에게 물으니 예상대로다.

    “밀수 단속 차량입니다. 제 친구들이지요. 쟤들이 두 사람씩 조를 짜서 이 일대를 24시간 순찰합니다. 차량으로 돌다가 길목에 숨어있기도 합니다. 강변에서 매복도 하지요. 하지만 다 내 친구들이라, 아무 문제 없습니다. 저 친구들에게 전화를 쳐보지요.”

    이곳에서는 전화를 ‘건다’는 표현을 ‘친다’고 말했다. 장백산은 휴대전화를 꺼내 우리를 앞지른 도요타 승용차 탑승자에게 전화를 ‘쳤다’. 함경북도 사투리와 중국어를 반쯤 섞어서 말해 잘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대충 국경에서 만나자는 이야긴 듯싶었다.

    “곧 중국군 초소가 나옵니다. 아무 소리 말고 앉아만 계십시오.”

    오성홍기가 휘날리는 가건물이 하나 나왔다. 중국군 초소다. 81식 반자동소총을 어깨에 멘 인민해방군 병사가 자동차를 세웠다. 장백산은 차창을 내리고 “니 하오?” 하고 큰 소리로 인사한다. 중국군 병사는 곧바로 차를 통과시켰다. 장백산이 미리 손을 써놓은 결과다.

    초소를 지나치자 장백산이 입을 열었다.

    “장교들은 다 낯을 아는데, 전사들은 자주 바뀌어서 얼굴을 모르겠습니다.”

    “끝발이 대단한데요. 진짜 장사할 때도 이런 식입니까?”

    장백산은 미소만 짓는다. 길 옆에 새파랗게 물이 오른 콩밭과 고추밭이 펼쳐진다. 삼거리가 나왔다. 오른쪽은 백두산 가는 ‘숭선’길이고 정면은 국경 마을인 난핑(南平)진이다. 우리는 난핑진으로 향했다. 왼쪽으로 ‘선경대’라는 관광지가 다가선다. 언덕 위에 지은 중국식 정자가 우람하다. 오른쪽 길 아래는 계곡이다. 밀수 단속 차량을 다시 만났다. 그야말로 불시 순찰이다. 하지만 장백산과 함께라면 문제없다.

    9시55분, 국경지역에 거의 다다랐다. 북한의 산이 정면에 보이기 시작했다. 두만강과 압록강 국경지역에서 북한의 산과 중국쪽 산을 구별하는 쉬운 방법이 있다. 북한의 산은 거의 꼭대기까지 다락밭이라고 부르는 밭을 일구어 산이 온통 누더기다. 그나마 여름에는 푸른 작물이 자라기 때문에 표시가 덜 나지만, 가을이 지나면 볼썽 사나운 맨 흙이 그대로 드러난다. 중국쪽 산은 소나무가 울창하다.

    또 다른 특징은 북한의 산에는 한국처럼 입광고판이 곳곳에 서 있다는 점이다. 한국과 다른 것은 광고판 내용이 기업 선전이 아니라, 김일성·김정일 부자를 선전하는 구호라는 점. 두만강 가는 길에 맨 먼저 만난 북한의 산에는 ‘21세기의 위대한 태양 김정일 지도자 동지 만세’라고 씌어 있었다.

    함경북도는 1992년 김일성이 이곳을 현지 지도하면서 아편을 공식적으로 재배하기 시작했다. 당시 북한의 경제는 엉망이 되어 생산의 모든 부분이 멈춘 상태였다. 김일성은 함북도당 확대전원회의에서 “앞으로 전쟁이 일어나도 함경북도는 중앙으로부터 지원을 기대하지 말라. 자체적으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라. 일제시대에 함경북도 연사군에서 아편농사가 잘 되었는데 연사군에서 아편을 재배하여 외화를 벌어들이는 방법을 연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지시에 따라 보위부의 감시 통제 아래 함경북도에서 아편 농사가 시작되었다.

    마약은 북한의 국가사업이다. 북한의 마약 산업은 다른 나라처럼 지하조직이아니라, 평양에 버젓이 본부를 둔 국가의 무역회사나 군부가 주도한다. 1998년 9월 탈북해, 그 해에 한국에 입국한 북한 보위부 출신의 한 탈북자는 “북한은 헤로인과 아편의 원료인 양귀비를 재배하여 인민무력성 보위국이 관리하는 청진시 나남구역의 나남제약공장으로 운반한 다음 이곳에서 가공하여 완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나남제약공장에는 태국인 마약 기술자들이 근무했는데, 이곳에서 헤로인과 필로폰을 각각 매월 1t씩 연간 24t을 만든다. 다른 보위부 요원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평양시 교외에도 마약 제조공장이 있다고 한다”고 밝혔다.

    이 탈북자는 “생산된 마약 판매는 보위사령부가 운영하는 ‘수정무역합영회사’가 담당하고 있는데, 주로 해외에 나가는 출장원, 대남공작부서 요원들이 해상루트를 통해 남한·일본·대만 등으로 판매하거나 국경지역을 통해 중국 지역에 팔았다. 그 중에서도 일본으로 가장 많이 흘러 들어간다”고 증언했다.

    옌지(延吉)에서 만난 조선족 마약업자 김영광은 앞서 언급된 ‘수정무역합영회사’가 지금은 ‘장생무역’이란 회사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그는 ‘장생무역’ 이외에도 역시 평양에 본부가 있는 ‘록산’이란 회사도 마약 밀수, 자동차 밀수 등을 한다고 밝혔다.

    김영광은 또 “헤로인은 양귀비로 만들지만, 필로폰은 화약약품으로 만든다. 그 필로폰 제조공장이 신의주에 있다. 이 공장에는 태국기술자들이 초청되어 있는데, 한국인 기술자도 1명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 한국인은 일본의 야쿠자 조직과 관련 있는 인물이다. 현재 단둥과 옌지에는 당신처럼 북한의 마약을 사려고 출장 나온 한국 사람들이 많다”고 말했다. 김영광의 증언은 앞서의 탈북자 증언과 연결된다. 그는 한국에서 마약을 구입하려고 출장 나온 한국 조직폭력배를 만난 적도 있다고 말했다.

    북한의 조직적인 마약재배는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서울에 있는 한 북한 마약 전문가는 “북한은 국가안전보위부에서 통제구역으로 특별히 관리하고 있는 함경북도 청진, 회령시와 함경남도 요덕군, 평안남도 북창군 등지에 마약 제조시설을 갖추어놓고 정제된 완제품을 철도와 국도를 이용해 비밀리에 운송하고 있다. 일단 조·중(朝中) 국경 도시인 혜산시로 운반된 마약은 중국의 마약밀매 조직으로 넘어간다. 그후 청진항과 원산항으로 옮겨진 물건은 일본 니가타로 공급되며, 평양 근교 남포항으로 운송된 마약은 동남아 및 중국 상하이(上海), 다롄(大連)으로 각각 수출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 탓에 북한 가운데서도 특히 북부지방에서는 마약이 지천으로 널려 있어 마약중독자가 양산되고 있다고 한다. 탈북자들에 따르면 주민들은 아편이 설사나 복통 등에 만병통치약이라 하여 아무 생각 없이 손을 대고 있으며 불치병에 걸리면 통증을 없애기 위해 아편을 복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탈북자 A씨는 기자에게 함경북도 무산군 근처 두만강 국경 북한쪽 산에서 양귀비밭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A씨는 “1997년께부터 김정일의 직접 지시로 함경북도 농장마다 10정보(3만평) 씩 양귀비 농사를 지으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양귀비는 7월 말부터 8월 중순 사이에 하얀 꽃이 핀다. 그 꽃밭을 중국쪽에서 촬영할 수 있다”고 말했다. 북한은 양귀비를 무산군 일대뿐만 아니라 개마고원 일대 백암산, 검덕산, 그리고 김형권군 등지에서 집중적으로 키우고 있다고 한다.

    개마고원 일대는 토양과 기후조건이 양귀비를 기르기에 최상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이곳은 대부분이 산악지형이어서 산 속 깊은 곳에 양귀비밭을 만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주민들이 살고 있는 농가와도 멀리 떨어져 보안에 큰 어려움이 없다고 한다.

    드디어 두만강이다. 두만강의 너비는 1년 중 물이 가장 많을 때인데도 4∼5m 정도였다. 이 부근의 두만강은 상류라서 여름 장마로 물이 불었을 때도 최고 수심이 2m 정도고, 강폭도 가장 넓은 곳이 15∼20m 안팎이다. 겨울에는 이 강이 얼어붙고, 봄·가을 갈수기에는 물이 말라, 바지를 걷고 건너다닐 수 있다고 한다.

    여기가 바로 북한과 중국의 마약 밀거래 현장이었다. 장백산은 곧 차를 세웠다. 백두산쪽에서 흘러내려오는 강줄기가 눈앞에서 굽이를 트고 있다. 장백산은 이곳을 ‘새골’이라는 지명으로 불렀다. 몇 년 전 A씨가 북한에 있을 무렵, 그와 함께 이 지점에서 자동차 밀수를 크게 했다고 털어놓았다.

    “강을 통해 자동차 밀수를 어떻게 합니까?”

    “북조선 아이들이 한국이나 일본에서 밀수입한 자동차를 강변에 끌고 나옵니다. 그리고는 곧장 자동차를 몰고 강을 건넙니다. 강물이 얕기 때문에 갈수기에는 충분히 건널 수 있습니다. 건너오면 현금을 치르고 우리는 넘겨받은 자동차를 몇 군데로 나누어서 단속반을 따돌리며 룽징이나 옌지쪽으로 가지고 나옵니다.”

    오전 10시30분, 지린성 허룽시 난핑진이라는 조선족 마을에 도착했다. 개울 같은 두만강 건너편은 칠성리라는 북한 마을이다. 장백산의 안내로 한 조선족 민가를 방문했는데, 출입문과 창에 서울의 아파트에서나 볼 수 있는 방범창이 달려 있다. 집 앞마당에 토마토와 양배추, 가지, 고추를 키우는 이 시골집에 방범창이라니…. 어울리지 않았다. 이유를 물으니, 식량이 떨어진 북한 칠성리 사람들이 밤이면 강을 건너와 도둑질을 하기 때문이란다.

    8월 초순은 송이버섯 철이라 이 일대 사람들은 송이버섯을 캐느라 여념이 없었다. 한국에서 온 낯선 사람에 대한 주위의 시선을 의식한 탓인지 장백산은 중국군 국경수비대장, 밀수단속반원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자고 제의했다. 장소는 닌핑진의 한 식당. 메뉴는 양고기 꼬치와 돼지 염통 꼬치구이였다. 여기에 장백산의 친구들이 갓 따온 송이버섯을 되는 대로 죽죽 찢어 고추장을 발라 가져왔다. 참나무숯불이 이글거리는 화로를 앞에 놓고 국경수비대장, 밀수단속반원과 지린성 맥주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양고기가 구수하게 익고, 송이버섯의 향긋한 냄새가 코끝에서 맴돌았다. “일 송이, 이 능이, 삼 표고, 사 석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수많은 버섯 중에 송이를 으뜸으로 꼽는 말이다. 허준은 ‘동의보감’에서 송이를 “향기롭고 산중 고송의 송기를 빌려서 난 것이라, 나무에서 나는 버섯 가운데 으뜸이다”고 하였다. 송이는 이렇듯 귀하고 비싼 물건이라, 마약과 함께 두만강의 밀수품목 가운데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술이 몇 잔 돌자, 경직된 분위기가 서서히 풀렸다. 장백산은 이런 식으로 중국 관원들과 친교를 트고 있었다. 그와 같이 왔으니, 한국의 마약상(?)인 기자도 문제될 것이 없었다. 인민해방군복을 입은 국경수비대장은 술을 몇 차례 권하자 목 끝까지 채웠던 군복 단추를 가슴께까지 끌렀다. 얼굴이 발그레해진 그는 북한 양귀비밭의 최근 동정을 들려주었다.

    그에 따르면 북한은 지난해까지만 해도 중국쪽에서도 훤히 보이는 다락밭에 양귀비를 대량으로 재배했다. 그러나 올해는 재배하다가 5∼6월경에 갈아엎었다고 한다. 중국 정부의 항의가 엄중했기 때문이란다. 탈북자 A씨가 서울에서 전한 말은 사실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양귀비밭 사진 촬영은 불가능했다. 오전 11시경 시작된 점심식사는 오후 1시를 훌쩍 넘겨서까지 이어졌다. 맥주병은 쌓이고 낮술이 취할 지경이었다.

    오후 1시45분. 술자리 같은 점심식사가 끝났다. 국경수비대장도, 밀수단속반원도 낮잠을 늘어지게 잘 태세였다. 새벽부터 운전을 한 장백산도 피로한 기색이었다. 중국 사람들은 이럴 때 뒷일을 신경쓰지 않고 오수를 즐긴다. 마약 밀거래는 이 부근과 여기서 백두산쪽으로 20여km 거리인 함경북도 무산군 앞 두만강가에서 주로 이루어진다. 거기까지 가야 한다. 수비대장도 단속반원도 낮잠을 잘 것이니, 현장을 확인하고 사진을 찍는 데는 절호의 기회였다.

    식사를 마친 뒤, 어슬렁거리며 마을을 둘러보았다. 컹~ 컹~ 개 짖는 소리 빼고는 적막하다. 그 정적이 한가하고 평화롭고 시골답다. 구들장이 깔린 안방, 파리가 웅하고 날아오르는 재래식 변소, 허리 높이의 나무 울타리, 새까맣게 그을려 세상 모르고 뛰노는 아이들. 영락없는 20∼30년 전 한국의 시골마을이다.

    개울 건너 북한 칠성리는 조선족 동네 난핑진과 한 동네나 다름없다. 사투리도 같고, 동네 모양도 비슷하고, 나다니는 사람이 없는 점도 흡사하다. 하지만 다른 점도 있다. 난핑진에는 음식이 남아돌고, 칠성리에는 입에 풀칠할 곡식이 없다. 난핑진 사람들은 점심식사 때 과식을 해서 오후에 낮잠을 자고, 칠성리 사람들은 배를 곯아 힘이 없어 집안에서 웅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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