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9월호

“국민경선 없는 후보는 없다”

이 악문 노무현

  • 김기영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hades@donga.com

    입력2004-09-01 17: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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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후보는 침묵하고 있지만 그의 지지자들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노무현을 지키기 위해 민주당 입당도 불사하겠다는 후원그룹의 물밑 논의가 무르익어가는 가운데 민주당사 주변에서는 친노·반노 진영간의 반목과 갈등으로 긴장감이 높아가고 있다.
    요즘 노무현(盧武鉉) 후보는 말을 아끼고 있다. 가장 최근 그가 언론을 향해 입을 연 것은 지난 8월9일, 재보궐선거 직후 기자간담회 자리에서였다. 이날 노후보는 재보궐선거 패배에 대한 자신의 입장과 신당 창당과 재경선, 그리고 당 지도부 인책 문제 등 민주당의 현안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그뒤 노후보는 한동안 언론과의 접촉을 끊었다. 그가 침묵하는 사이 민주당은 친노(親盧)와 반노(反盧) 진영으로 나뉘어 치열한 대결을 벌이고 있다. 이인제(李仁濟) 의원을 중심으로 일부 의원들이 탈당을 결행할 것이라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신당 창당에 앞서 분당(分黨) 절차를 밟을 것이라는 관측이 서서히 힘을 얻고 있다.

    소란의 와중에 노후보는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재보궐선거 이후 최근까지 공식행사도 별로 없었고 공휴일에는 아예 공식일정 없이 휴식을 취하며 앞으로의 정국구상을 다듬는 ‘여유’를 보이고 있다. 과연 노후보는 자신과 민주당의 앞날을 헤쳐나가기 위해 어떤 전략을 세우고 있을까.

    노무현의 선전포고

    이에 앞서 8월9일 기자간담회에서 밝힌 노후보의 정국 인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민주당의 운명과 신당 창당 등 향후 정국전망에 관해 자신의 속내를 비교적 솔직하게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날 노후보가 밝힌 입장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신당이 창당되기 전까지 후보 사퇴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노후보는 “선거패배 책임 문제로 사퇴를 거론하는 분들이 있는 것 같은데 대안 없이 사퇴하는 것만이 책임지는 방법도 아니고 또 능사도 아니다”라며 “당을 마비시키고 표류시키겠다는 저의를 가지고 당 지도부의 총사퇴를 요구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말했다.

    둘째는 신당 창당 논의를 적극 수용하겠다는 것이다. 노후보는 “신당 논의는 배척하지 않겠다”며 “단지 신당의 방향과 내용에 관해서, 여러가지 목적이 다르고 의견들이 있기 때문에 어떤 신당을 어떻게 할 것이냐에 대해서는 당에서 논의하는 대로 나도 그때그때 의견표명을 하고 또 결과에 참여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셋째는 신당의 후보선출은 반드시 국민경선으로 결정해야한다는 것이다. 노후보는 “경선이든 신당이든 실제로 그 핵심에는 후보문제가 있는데 후보문제는 국민경선으로 매듭지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더욱이 국민경선은 지난번 민주당 정치개혁의 핵심적인 성과이기 때문에 신당한다는 명분으로 적당히 폐기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사실 이날 노후보의 발언을 꼼꼼히 뜯어보면 반노 진영의 분노를 살만한 요인들이 적지 않았다. 신당은 하되 후보와 지도부 사퇴를 반대한 것과 신당의 대선후보도 반드시 국민경선으로 뽑아야 한다는 주장은, 신당을 구성하든 민주당으로 남든 노무현 본인은 사실상 후보자리를 내놓을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하는 선언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형식적으로는 신당 창당을 수용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면서 내용적으로는 기득권을 놓지 않겠다는 노후보의 발언은 곧바로 반노 진영의 거센 반발로 이어졌고, 마침내 이인제 의원 측근 의원들을 중심으로 탈당불사라는 극단의 카드를 꺼내들게 만들었던 것이다.

    침묵으로 이 상황을 지켜보는 노후보 진영은 뜻밖에도 반노 진영의 탈당설에 대해 태연하다. 뿐만아니라 “나갈 사람이 있으면 어서 나가달라”는 듯한 태도로 사태를 관망하고 있다.

    노후보의 한 측근은 “어차피 우리와 당을 함께 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면 이번 기회에 탈당하는 게 서로에게 이로울 것”이라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 측근은 “사석에서는 노후보도 우리와 같은 생각임을 숨기지 않고 말한다”며 “당을 나갈 생각이 있다면 하루라도 빨리 떠나달라는 게 우리 진영의 솔직한 심정”이라고 말했다.

    노무현 후보마저 이인제 의원을 비롯한 반노 진영의 탈당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다는 이 측근인사의 전언은, 노후보가 왜 후보직을 내놓지 않고 국민경선을 고집해 왔는가를 짐작하게 하는 근거가 된다. 한마디로 노후보는 8월9일 기자간담회를 통해 사실상 반노 진영에게 ‘민주당을 떠나달라’는 메시지를 던졌다는 것이 정치권 인사들의 대체적인 관측이다.

    이런 노후보의 전략은 한편으로 민주당을 개혁신당으로, 즉 노무현 후보의 색깔이 잘 드러나는 ‘노무현당’으로 개조하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으로 이어지고 있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 그 상징적 사건이 지난 13일에 있었던 ‘국민후보 노무현 지키기 2500인 선언’ 기자회견이다.

    이 운동을 주도한 사람은 최근 노후보 지지를 공개적으로 선언한 시사평론가 유시민씨. 유씨를 중심으로 노후보의 정책조언자인 국민대 김병준 교수, 고려대 최장집 교수, 함세웅 신부, 영화배우 문성근, 명계남씨, 이해학 목사, 청화 스님, 이용철·문재인 변호사 등은 지난 13일 서울 여의도의 한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국민후보 노무현 지키기 활동’을 선언하고 온라인 서명운동을 벌여나가기로 결의했다.

    이들은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 빗대어 ‘노무현 상병을 구하라’는 구호를 내걸고 ‘위기에 처한 노무현’을 구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벌여나가기로 결의했다.

    또한 회견에서 ‘국민후보 지키기 2500인 선언’에 참여한 각계 여론 주도층 2503명의 서명서를 공개하고 “정당한 이유 없이 노후보를 공격하고 후보교체와 무원칙한 신당 창당 등 민주주의 기본원칙을 파괴하려는 민주당 일부 세력은 국민경선 정신을 부정하는 행위를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이날 선언에는 학계 558명, 법조계 135명, 종교계 220명, 문화계 213명, 여성계 163명, 의료계 239명, 시민단체 333명 등이 참여했다.

    기자회견을 마치고 대표단은 민주당 한화갑(韓和甲) 대표를 방문해 “한대표와 민주당이 노무현 후보를 지키는 데 적극 나서줄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방문단을 맞은 한대표는 “노후보를 지키고 싶으면 밖에서 그럴 것이 아니라 신당에 참여해 도와달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런 한대표의 말에 자극을 받아서였던지 그날 이후 노후보 지지자들의 생각에 중대한 변화가 발생했다.

    이들의 ‘단체행동’이 서명이나 당사 항의방문 수준에서 그치지는 않을 전망이다. 이날 행사를 마친 뒤 대표단은 기자회견을 위해 지방에서 올라온 지역책임자들과 서울시내 모처에서 긴급 간담회를 열었다. 간담회에서는 노후보를 지키기 위한 다양한 실천방안들을 논의했다고 한다.

    이번에 노후보 지키기 서명에 참가한 2500명은 지난 민주당 경선 때 전국에서 노후보 지지를 선언했던 지식인들로 사실상 노풍을 일으키고 확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한 참석자는 이날 간담회에서 “국민후보로 노무현을 당선시키기만 했지 후속조치를 전혀 하지 못해 오늘날 노후보가 민주당 내에서 어려움에 처했다고 참석자들이 자기반성을 자연스럽게 제기했다”고 말했다.

    이렇게 시작된 논의는 곧바로 어떤 후속조치로 노후보를 도울 것이냐로 모아졌다고 한다. 앞서의 참석자는 “노후보가 오늘날 위기에 처한 것은 민주당내에서 노후보를 지키고 지지해줄 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며 “따라서 적극적으로 지지서명에 참가한 지식인들이 신당에 참가해 민주당을 노무현 후보 색깔에 맞는 신당으로 바꾸는 일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이들의 논의에 불을 댕긴 가장 직접적인 계기는 13일을 전후해 흘러나온 이인제 의원 중심의 반노 진영 집단 탈당설이었다고 한다. 만약 이의원과 반노진영이 탈당을 감행한다면 그 빈자리를 노후보의 적극적 지지자들로 채움으로써 노후보가 명실상부한 당내 다수파가 되도록 하자는 데 의기투합했다는 것이다. 앞서의 참석자는 “비록 과정은 다소 왜곡됐지만 우리 힘으로 민주당을 개혁신당으로 변모시키자는 데 참석자들이 의견의 일치를 봤다”고 말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참여함으로써 민주당을 ‘재건축’수준으로 변모시키자고 의기투합을 했다고 한다. 단순한 ‘리모델링’으로는 국민의 지지를 모을 수 없고 노풍을 다시 일으킬 수도 없다는 이유에서다. 리모델링이 ‘IJ세력의 축출’ 수준이라면 재건축은 ‘큰 세력이 합류해 당을 변모시키는 것’이라고 내부적으로 정의내렸다고 한다.

    참석자들의 논의를 ‘조직적인 신당 참여’ 쪽으로 이끈 장본인은 유시민씨였다. 유씨의 적극적인 제안에 참석자들이 동의하면서 신당참여 논의는 급물살을 타고 있다는 후문이다.

    현재 이들이 구상하고 있는 신당 참여방식은 1987년 이후 세 차례에 걸쳐 김대중 대통령이 보여줬던 정계개편 방안과 같다. DJ는 정치적 고비 때마다 신당 창당으로 정면돌파를 시도했는데 그때마다 자신과 가까운 외부 지식인그룹이나 재야인사들을 영입해 당의 외연을 넓히고 지지층을 확대해 나갔다.

    예를 들어 평민당 창당시 문동환 목사 등 재야 종교계 인사들을 ‘평민연’이라는 이름으로 끌어들였고, 신민당 창당 때는 작고한 이우정 여사 등 재야 인사들을 ‘신민연’이라는 이름으로 끌어들였다. 그후로도 김근태 의원 중심의 재야 세력도 신당 창당이라는 이벤트를 통해 주변으로 불러들였다.

    서명 참가자들은 자신들도 이같은 방식으로 민주당이 주도하는 신당에 합류한다는 원칙에 동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차적으로 유시민씨와 영화배우 문성근씨 등 1970년대 중후반에 대학을 다닌 40대 인사들이 입당원서에 도장을 찍을 예정인 것으로 전해졌다. 민주당이 오래전부터 탐내온 운동권 출신 변호사 이정우씨의 이름도 거론되고 있다.

    앞서의 참석자는 “이인제 의원측의 탈당설이 나오기 때문에 입당을 결심한 것은 아니다”며 “당을 개혁신당으로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그는 “DJ가 신당을 창당할 때 명망가 몇 명만으로 생색을 낸 것과 달리 명망가는 없지만 다수가 조직적으로 입당함으로써 당에 새바람을 불어넣을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작 이런 움직임을 노후보 본인은 잘 모르고 있었고 사후에 보고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8월초 유시민씨 등 몇몇 인사들을 중심으로 노후보 지키기 서명운동을 시작했고 13일 기자회견을 계기로 갑자기 일이 커져버린 까닭에 노후보에게 알릴 사이도 없이 일이 진행됐다는 것이다.

    함세웅 신부 등 이번 서명운동을 이끌었던 종교인의 경우 노후보와는 그다지 교류가 없었다고 한다. 이들 재야 명망가들을 노후보 지지자로 연결해준 사람들이 바로 앞서의 40대 지식인그룹이라고 한다.

    노후보 지지자들의 움직임과 관계없이 노후보는 당분간 당의 분란을 가라앉히는 데 최선을 다할 계획이다. 노후보측은 16일 민주당 의원 지구당위원장 연석회의를 앞두고 자체토론을 벌인 결과, 반대파들도 적극 아우름으로써 탈당의 명분을 주지 않는 기존의 전략을 고수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노후보는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16일 연석회의에서 발표할 자신의 정견문을 직접 다듬었다고 한다. 하지만 노후보의 온건노선이 그리 오래 갈 것으로 보는 이는 없다. 반노 진영에서 탈당이라는 최강의 카드를 뽑아든 이상 노후보 역시 적극적인 공세로 나갈 가능성이 높다는 게 노후보 주변의 대체적 관측.

    8~9월이 최대 고비

    지난 14일 노후보는 노사모 회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방선거, 8·8 재·보선 등 중요한 선거를 앞두고 당이 분열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없어 그동안 말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며 “이제 할 말을 하겠다”고 밝혔다. 노후보는 또 “상황을 정리해낼 테니 당내 문제는 내게 맡겨주고 다가올 더 큰 승부를 준비하는 여유를 가져 주시기 바란다”며 결전을 앞둔 장수처럼 다부진 각오를 밝혔다. 15일에는 그동안 자제하던 기자간담회를 열어 이인제 의원측의 탈당설을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사리에 맞지 않는 주장에 대해 굽히지 않고 정면 돌파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노후보 지지자들 사이에 개혁신당 창당을 위한 구체적인 집단행동이 시작된 만큼, 민주당은 어떤 식으로든 변화의 진통을 겪을 것으로 예상된다. 마치 훈족의 유럽침공에 게르만족이 대이동을 하고 그 결과 서로마제국이 무너지고 유럽의 질서가 달라졌던 것처럼 민주당도 바깥에서 들어온 노무현 지지성향의 개혁세력에 의해 당의 성격에도 큰 변화가 나타날 전망이다.

    그럴 경우 민주당의 분화현상에도 가속도가 붙을 것으로 예상된다. 당의 개혁노선에 반대하는 중도파들의 추가탈당도 예측 가능한 시나리오. 하지만 노후보측은 “탈당자는 이인제 의원과 그 주변사람 몇 명에 그칠 것”이라고 낙관하고 있다. 탈당을 강행하기에는 명분이 부족하다는 것이 노후보 진영이 낙관하는 근거다.

    현재 노무현 지지그룹은 8월말 이내 신당참가 선언을 하기 위해 물밑 준비작업을 벌이고 있다. 이런 움직임과 함께 노후보도 침묵에서 벗어나 민주당과 반대파를 향한 공세적 메시지를 던질 태세다.

    과연 노무현 후보는 침체에서 벗어나 제2의 노풍을 일으킬 수 있을까. 민주당은 과연 노무현 지지자들의 참여 속에 개혁신당으로 변신할 수 있을까. 노무현 후보에게 2002년 8~9월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대한 고비가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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