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세를 풍미한 싱어송라이터 이장희. 이제는 LA ‘라디오코리아’ 그룹 대표이자 여행가로 또다른 삶을 살고 있다. 천재끼 번득이던 어린 시절, 인기 절정의 순간에 몰아닥친 대마초 파동, 고독한 영혼을 사로잡은 미 대륙의 광막한 자연. “내 맘대로 살겠다”던 열두 살 적 다짐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던져온 이 사내는 인생 55년에 무엇을 건졌는가.

”형 나 이번에 곰이랑 세 번을 마주쳤잖아.” 햇살 작열하는 압구정동, 물질과 인공의 거리에서 툭 튀어나온 곰이란 단어는 생뚱맞기까지 하다. 티스푼으로 막 녹기 시작한 팥빙수 얼음을 뒤적이던 ‘형’은 “그으래?” 하며 자세를 고쳐 앉는다.

“어디서?”

“존 무어 트레일이라고, 미국에선 되게 유명한 산악종주코스거든.”

“야, 너 여전히 그런 데 뒤지고 다니냐?”

“어이, 형은. 그게 얼마나 좋은데.”



“그래, 좋다 치고.”

“그게 한 20일 걸리는 코스야, 형. 먹을 걸 다 등에 지고 가야 되거든. 난 이번이 두번짼데, 지난번엔 한 번도 마주치지 않은 곰을 내리 세 번 본 거야. 배낭에 땅콩이랑 미숫가루 같은 게 들어있으니까 냄새를 맡고 온 거지.”

“위험하진 않았어?”

“뭐 괜찮았어. 한번은 모닥불 피워놓고 침낭에서 자는데 무슨 소리가 들리더라구. 슬쩍 보니까 곰이, 왜 엄청 덩치 큰 미국산 브라운 베어 있잖아, 그게 나뭇가지에 걸어놓은 배낭을 턱 채가는 거야. 겁도 나고 해서 멀리서 지켜보다 사라진 뒤 가봤더니 먹을 건 거의 다 뒤져갔더라구. 근데 미숫가루는 싫었나봐. 덕분에 근근이 며칠을 더 버틸 수 있었지.”

얘기를 듣던 형은 특유의 헛헛한 웃음을 날리며 고개를 슬슬 젓는다.

“난 도무-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가. 그렇게 열심히 가면 뭐 이쁜 여자가 기다린다던가, 좋은 술이 있다던가, 그런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땀 뻘뻘 흘려가며 사서 고생을 하냐-.”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형의 입가엔 뿌듯한 미소가 감돈다.

‘멋진 놈이야, 진짜 수컷이라구.’

형은 지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거다.

그을린 얼굴, 작지만 다부진 체구, 잘 울리는 목소리가 인상적인 ‘동생’은 일세를 풍미한 싱어송라이터 이장희(55)다. ‘그건 너’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한 잔의 추억’ ‘그 애와 나랑은’ ‘자정이 훨씬 넘었네’…, 이런 당대의 히트곡들을 짓고 불렀다. 정미조의 ‘휘파람을 부세요’, 김세환의 ‘좋은 걸 어떡해’, 록그룹 ‘사랑과평화’의 ‘한동안 뜸했었지’ ‘장미’ 같은 노래들도 그의 작품이다.

1970년대, 콧수염과 오토바이가 트레이드마크인 이 ‘시건방진’ 청년에게선 파격과 재기가 넘쳐흘렀다.

“어제는 비가 오는 종로 거리를/ 우산도 안 받고 혼자 걸었네/ 우연히 마주친 동창생 녀석이/ 너 미쳤니 하면서 껄껄 웃더군/ …전화를 걸려고 동전 바꿨네/ 종일토록 번호판과 씨름했었네/ 그러다 당신이 받으면 끊었네/ 웬일인지 바보처럼 울고 말았네/ 그건 너…” 이런 ‘되도 않는’ 가사들을 조영남으로부터 음치 판정을 받은 느적느적한 목소리로 잘도 읊조리고 다녔다. 그는 가요 가사에 언문일치를 도입한 최초의 가수였다.

이장희는 또한 라디오 스타였다. 한국의 사오십대라면 1970년대 최고 인기 프로그램인 동아방송 ‘0시의 다이얼’을 기억할 것이다. 주철환 이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도 한 글에서 “공부가 지겹던 수험생 시절 한밤에 라디오를 틀면 늘 거기 그가 있었다. ‘In the year of 2525’라는 시그널 음악으로 시작되던 그 프로그램을 잊을 수 없다”고 적고 있다.

1980년 미국으로 이민 간 그는 현재 LA ‘라디오코리아’ 그룹 대표다. 1992년 LA폭동 당시 ‘라디오코리아’는 단연 돋보이는 활약으로 교민사회의 구심점이 됐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위상은 흔들리지 않고 있다.

오랜만에 고국을 찾은 이장희 앞에서 맞장구인지 딴죽 걸기인지 모를 말을 툭툭 던지고 있는 이는 가수 조영남(57)이다. 두 사람의 인연은 4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영남이 강문고등학교 1학년, 이장희가 서울중학교 2학년생일 때 일이다.

“그때 우리집에 아버지 이복동생, 그러니까 삼촌이 같이 살고 있었거든요. 영남이형은 우리 삼촌 학교 친구였어요. 어느 날 오후 집에 들어갔는데 웬 쬐그만 고등학생이 툇마루에 앉아 기타를 퉁기며 노래를 부르고 있더라구요. ‘마이 베이비…’ 뭐 그렇게 나가는 팝송이었는데, 전 너무 놀라 졸도하는 줄 알았어요. 그렇게 충격적으로 좋은 건 세상에 나서 처음 봤거든.”

조영남의 ‘졸도할 만큼 멋진 노래’는 탐험가가 꿈이던 말없는 소년을 단박에 음악의 세계로 끌어들였다. 그렇게 시작한 두 사람의 인연은 화려한 무교동 ‘쎄씨봉’ 시절을 거쳐 고달픈 미국 생활, 머리칼 히끗해서도 ‘하고 싶은 일’에 대해서만큼은 양보가 없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이장희는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콧수염도 밀어버렸다. 독재의 검열과 마리화나의 회색지대, 애증의 폭풍을 뚫고 그가 안착한 곳은 돌과 별과 바람의 세계다. 자유 앞에 거짓 없는 삶이 고팠던 이 사내는 인생 55년에 무엇을 건졌는가.

“어느 날 장희가 그래요. ‘형! 평생 잊을 수 없는 곳을 구경시켜 줄게!’ 좋다고 따라나섰지. 깜깜한 밤에 자동차로 6시간이나 달려 도착한 곳이 데스 밸리였어요. 계란 프라이가 될 것처럼 찌는 더위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사막 한가운데서 나는 헉헉대며 물을 수밖에 없었어. ‘이게 끝이야? 왜 왔니?’”

이 즈음 이장희는 다시 마리화나에 손을 댔다. 그러나 오래 가지는 않았다. ‘마약은 나쁘다’는 확신이 드는 순간 단번에 손을 놓았다.

“뭐가 안 좋으냐고요? 건강에 안 좋고, 그걸 같이 하는 사람들이 안 좋죠. 약물 끊기가 어렵다지만 금연이 더 힘든 일일 수도 있어요. 관둬야겠다는 생각만 확실하다면 누구나 나쁜 상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35세는 그에게 여러모로 의미 깊은 나이였다. 그때 처음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고, 자신이 가정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란 점도 깨달았다. 또 한 가지는 좀더 명확한 삶의 비전을 갖게 된 것이었다.

“제 좌우명이란 게 단순하죠. 내 맘대로 살리라. 근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어요. 도대체 내 맘은 어느 쪽을 향해 가고 있는지, 내가 정말 좋아하는 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하잖아요. 서른다섯 살 때 ‘나는 누구인가’라는 노래를 만들었는데, 그 작업을 하며 제 자신에게 수도 없이 메스를 가했어요. 사람이란 게 그렇게 한번 잔혹스레 휘젓고 보니 끝없이 깊고 기막히게 혼란스런 존재더군요. 자꾸 물었지요. 니가 정말 좋아하는 게 뭐냐. 돈이냐 명예냐 노래냐 여자냐 섹스냐 마약이냐…. 그때 깨달았죠. 자연이란 걸.”

LA폭동, 그리고 라디오코리아

1988년 이장희는 여행과 성찰, 탐색과 방황으로 분주했던 미국 생활을 접고 귀국할 계획을 세운다. 가장 큰 목표는 서울 가족과의 재결합이었다. 또 미국에서 보고 느낀 많은 것들, 그속에서 쌓고 다진 대중문화에의 꿈을 펼쳐보이고도 싶었다. KBS로부터 토크쇼 제의를 받았다. 월~목요일은 그가 진행하고 주말은 재미(在美) 코미디언 쟈니 윤이 맡는다는 복안이었다.

귀국 직후 그가 달려간 곳은 설악산이었다. 열흘은 호텔에 묵고 이후 석 달간은 흔들바위 옆 조그만 암자인 개조암에 은거했다. ‘미국 때’를 벗기 위해서였다. 서울로 올라와선 김완선 노래도 작곡하고 그동안 준비한 곡들을 모아 새 앨범도 냈지만 영구귀국의 꿈은 끝내 접을 수밖에 없었다. 아내와 살림 합치는 일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떨어져 있는 사이 서로 아주 다른 사람이 돼버렸어요. 낯설기까지 했어요. 그래서는 함께 살 수가 없지요. 그냥 별거하거나 이혼하면 될 것 아니냘 수도 있는데 제겐 두 가지 다 해서는 안될 일로 여겨졌어요. 별거하는 연예인과 그 가족이 어찌 대중의 호기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으며, 또 아이가 둘이나 되는데 서로 증오하는 것도 아니면서 이혼하는 일 또한 내키지 않았지요.”

그래서 그는 귀국을 포기했다. 대신 아내와 아이들을 다시 미국으로 불러들였다. 그에게 사업은 절박한 것이 됐다. 우연히 LA한국일보를 방문했다 답을 찾았다. 미디어 산업이었다. 그 중에서도 자본과 인력이 적게 들고 나름의 노하우도 갖고 있는 라디오를 선택했다. 이전에 있던 교민방송은 미리 신청을 해야만 들을 수 있는 형태였는데, 이장희는 스튜디오를 빌리고 AM주파수를 사 LA지역이면 어디서나 들을 수 있게 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교민사회의 대소사, 온갖 민원과 문의와 토론과 오락, 나아가서는 어젠더 설정 기능까지 라디오코리아로 모아졌다. 1992년 LA폭동 기간중 ‘라디오코리아’가 상황실·대피소·자위대 본부 역할을 하고, 부시 전 대통령과 교민대표 간의 협상 장소로까지 쓰였던 일화는 유명하다.

현재 이장희가 운영하는 업체는 3개다. 라디오코리아, ‘스포츠서울, USA’ 옐로페이지 사업을 하는 ‘인포코리아.’ 내년쯤엔 스크린 4개 규모의 코리아극장도 설립한다. 전체 직원 수는 110여 명. 경제적 성공은 물론 교민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에서도 이장희는 가수가 아닌 또 다른 의미의 ‘공인’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하고 있다.

“사업 원칙은 단순해요. 바르게 운영한다, 재기 넘치는 사람보다 성실한 사람을 쓴다, 단점보다 장점을 본다, 많은 토론을 한다…. 제가 사업 시작한 게 1989년 1월인데 그때부터 10년 이상을 함께 일해 온 직원들이 적지 않아요. 결국 신뢰지요.”

이장희는 1년 중 2~3달을 여행지에서 보낸다. 미국 전역은 물론 아마존 정글, 남태평양의 작은 섬들, 유럽·아시아의 일부 지역까지 섭렵했다. 그중 가장 좋아하는 것은 역시 미국 자동차 여행이다.

그를 위해 이장희는 15년 동안 같은 색, 같은 디자인의 복스 왜건 캠퍼 세 대를 샀다. 20만㎞쯤 뛰고 나면 차를 바꿔야 했기 때문이다. 그 차를 타고 그는 LA를 출발해 애리조나, 뉴멕시코, 텍사스, 오클라호마, 캔자스, 와이오밍, 유타주를 가로질러 다시 캘리포니아주로 돌아오는 자동차 여행을 여러 번 감행했다.

LA에서 알래스카 유전으로 유명한 북위 70도 프루도만(Prudhoe Bay)까지달려간 일도 있다. 왕복 9000마일, 1만4500㎞에 달하는 대장정이었다. 종단여행, 횡단여행 다 해본 그가 ‘초보자’에게 권하는 최고의 자동차여행 코스는 애리조나, 뉴멕시코, 유타주를 지나 캘리포니아주의 빅 베이 마운틴에 이르는 길이다.

얼마 전 이장희는 피나클 캠퍼(캠핑용 버스) 한 대를 구입했다. 주방, 목욕탕, 에어컨, 냉장고는 물론, 4명이 편히 잠들 수 있는 침상도 있다. 이 차를 몰고 친구들과 긴 여행을 떠나는 것이 그의 가장 큰 즐거움이다.

또한 이장희는 섬을 사랑한다. 하와이는 50번쯤 갔다 왔다. 캐러비안 아일랜드는 3번, 타히티도 한 번 갔다.

오랜 꿈이던 아마존 여행도 1991년과 1995년 두 차례나 다녀왔다.

가장 최근에 한 여행은 존 무어 트레일 종주다. 시에라 네바다 산맥을 타고 요세미티국립공원까지 이어지는 이 코스는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트레일이다. 존 무어는 19세기 자연보호운동가로 세상에 요세미티국립공원의 가치를 처음 알린 사람. 존 무어 트레일은 그가 산맥을 탐험하며 걸었던 길을 고스란히 따라간다.

“2000년에 처음 갔는데 그때는 완주를 못했어요. 짐 싸는 노하우가 부족해 빨리 지친 거죠. 이번엔 계획을 잘 세워 짐 무게를 21.3kg에서 15.9kg로 줄였어요. 1인용 비박텐트에 음식도 밥은 포기하고 미숫가루, 견과류 같은 걸로 채워넣었죠. 매일 900m 이상 높이의 산을 올라갔다 내려와야 하는데, 물론 굉장히 힘들어요. 고도까지 높아 숨쉬기도 쉽지 않은데, 그렇게 먼길을 하염없이 걷다보면 지나온 삶의 순간순간들이 참 깊이 들여다뵈죠. 코발트빛 하늘, 쨍한 공기, 기암괴석, 쏟아지는 별빛, 짐승의 울음, 폐부 찌르는 고독. 다 좋지요. 아주 좋아요.”

“다 이루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꽉 찬 삶을 산 그에게도 회한이 있을까. 뜻밖에도 이장희는 “내 마음 깊은 곳엔 실패자라는 자괴감이 자리하고 있다”고 했다.

“전 가정을 지키지 못했어요. 젊은 시절엔 그게 얼마나 중요한지 몰랐어요. 1990년대 들어서 아내와 이혼했는데, 또 그 사이 한두 명의 여성과 뜨거운 사랑도 나눴지만 어쩐지 잘못 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문득문득 가슴이 아파와요.

인간처럼 복잡한 건 없죠. 매일 상처받아요. 그러니 누군가를 단칼에 좋다, 나쁘다 평가하는 것은 죄악이죠. 사랑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고통 그 자체, 아픔 그 자체일 수 있죠. 그러니 지금 가정으로부터 떨어져 나오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환상을 버려라, 모든 걸 다 가질 순 없다고 충고해주고 싶어요.”

아이들에게 그는 어떤 아버지였을까. 음악교사로 캐나다인과 결혼해 거기서 사는 딸(27)은 얼마전 그에게 손자를 안겨줬다. 1978년생인 아들은 미국에서 공부를 마친 후 올해 초 LG그룹에 입사했다.

“부모의 별거와 이혼으로 아이들이 받을 상처가 두렵지 않았냐”고 물었다.

“도대체 상처 없이 크는 아이가 있나요. 부모의 이혼이 좋은 일은 아니지만 아내나 저나 그 이상의 것을 채워주려 애를 많이 썼어요. 가치관은 늘 변합니다. 기차 속도에 비례하던 인간 마음의 한계도 어느새 초음속 제트기만큼 넓어졌죠. 전 아이들이 환경에 구애받기보다 용기와 비전을 가진 사람으로 크길 바랬어요. 여행을 많이 다녔고 그러면서 함께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지요. 우린 정말 친구로 지내는데 연애담, 집안일, 인생관까지 얘기하지 않는 것이 없어요. 결과적으로 아이들은 잘 자랐죠. 고마운 일이에요.”

그는 요즘 은퇴 계획을 세우느라 마음이 분주하다. 그에게 은퇴란 ‘정말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사는 삶’을 의미한다. 그를 위해 제일 먼저 한 일은 울릉도에 작은 집 한 채를 마련한 것. 6년 전 친구가 권해 찾은 울릉도의 원시림과 절벽에서 바다로 곧장 낙하하는 장대한 폭포에 마음을 빼앗겼다. 얼마 전에도 오랜 친구인 기타리스트 강근식과 열흘을 머물며, 사람 안 다니는 옛길로 긴 산책을 하고 소맥(소주+맥주)에 취해 달빛 아래 껴안고 자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거말고도 파리, 베이징 같은 도시에서 3개월, 6개월씩 밥해 먹으며 살아보거나 멋진 음식점 차려 웨이터로 일하고픈 꿈도 있어요. 공부를 더해 국립박물관 같은 데서 외국인 대상으로 우리 문화재를 소개하는 안내인 역할을 하고 싶기도 하죠.”

그런 꿈들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빈자에게 여행, 자유, 은퇴 후의 낭만이란 불가능한 아닐일까. 이장희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은 행복을 향해 달리죠. 그러면서 모두 생각해요. 돈 벌면 여행도 가고 멋지게 살겠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꿈이에요. 여행을 안 다녀본 사람이 갑작스레 그 묘미를 터득할 수 있나요. 사람 욕심은 끝이 없어요. 물론 매달 생계를 위한 최소한의 돈은 필요하겠지만 그 다음은 마음먹기 나름이에요. 여행이 꿈이면 지금 바로 떠나야지요. 국내든, 국외든, 그 어디든 말이에요.

전 예금통장을 가져본 적이 없어요. 들어오는 돈이 있으면 다 써버려요. 살고 싶은 대로 살려면 돈에 연연하면 안돼요. 돈은 언제나 모자라니까요. 로마황제 시저는 엄청난 낭비가였답니다. 늘 재산보다 빚이 많았대요. 하지만 그 사람은 행복했을 거예요. 글쓰고, 대장군으로 천하를 호령하고, 아름다운 여성들과 눈부신 사랑을 나누고…. 평생 빚지고 살았다 해서 그 사람의 삶이 불행했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어요. 빚이 정답은 아니지만, 후회 없이 살려면 그런 식으로 배수진을 칠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게 제 생각이에요.”

이틀에 걸쳐 9시간 가량 계속된 대화가 비로소 끝이 났다. 그는 오랜 친구들과 저녁 모임을 갖기로 했다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가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한자리에 모이는 사람들은 조영남, 김민기,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조동진, 이상벽, 이두식(화가), 이백천(가요평론가), 최인호 등이다. 함께 시간 빼기란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유명인사들을 전화 한 통으로 불러모을 수 있는 이, 그가 바로 이장희다. 드라마 보다가도 삐질삐질 눈물 흘리고, 와인 한 병이면 하루가 행복하고, 가정 못 지킨 자괴감에 종종 우울에 빠지고, 이젠 손자까지 봐 마침내 할아버지 대열에 낀 그는, 그러나 여전히 자유롭고 건강하고 열애중이며 꿈도 많았다. 아직도 그는 ‘수컷’이었다.

이장희의 고향은 경기도 화성군 오산읍 부산리다. 장남으로 남동생 하나, 여동생 하나를 두었는데, 그중 드라마작가 정성주씨의 남편 이승희(음악인)씨는 2000년 초 암으로 먼저 세상을 떴다.

“제 생애 첫 기억은 동네 물방앗간에 대한 거예요. 세 살 때쯤인가, 김 나오는 파이프에 뺨도 대고 엉덩이도 대보고, 그러며 놀던 일이 생각나네요.”

네 살 되던 해 천자문을 배웠다. 재주가 있었던지 곧잘 따라갔다. 마을에는 ‘면서기 집 장남이 될 성부르더라’는 얘기가 돌았다. “신동이셨다면서요?” 했더니 “어이, 신동은 무슨…. 그냥 다른 애들이랑 똑같았죠” 하며 무척이나 쑥스러워한다. 오십 넘은 나이에도 수줍어할 줄 아는 남자는 매력 있다.

6·25 전쟁 후 이장희 일가는 마산으로 가 정착한다. 그곳에서 초등학교 저학년까지의 시절을 보냈다. .

“요릿집 방 한 칸을 얻어 온 식구가 같이 살았어요. 옆방하고는 장지문 하나 사이였죠. 근데 앞집 억만이네는 일본식 단층가옥을 통째로 써요. 그때 처음으로 빈부 차라는 걸 알았죠. 어머니 따라 가끔 그 집에 놀러가면 세발자전거를 집어타고 손바닥만한 마당을 뱅뱅 돌며 좋아 어쩔 줄 몰랐어요. 그래서 나중에 첫아이를 낳았을 때 가장 먼저 사들인 것이 세발자전거였죠.”

그렇다고 가난 때문에 기죽어 살진 않았다. 다들 어려웠던 시절이라 그러려니 했다. 동무들과 부두로 몰려나가 “부산 가요” “통영 가요” 하는 여객선 호객꾼 구경도 하고, 아기 손바닥만한 게 다리에 실을 묶어 경주도 시켰다. 그러나 가장 좋아하는 놀이는 따로 있었다. 영화 관람이었다.

“극장 앞에 가만 서 있다가 입장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러는 거예요. 아저씨, 같이 들어가요. 그때는 어른이랑 같이 들어가는 애들은 돈을 받지 않았으니까. 그때 본 영화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게 자니 와이즈뮬러가 주연한 ‘타잔’이에요. 너무 멋있어서 가슴이 마구 뛰었죠.”

초등학교 4학년 때 서울로 이사를 갔다. 창신초등학교 학생이 됐다. 같은 학년에는 미래의 스타 문희와 윤여정도 있었다. 4~5학년 때 생활은 즐겁지 않았다. “경상도 문둥이”라는 놀림에 시달렸고 간혹 매도 맞았다. 속상하고 분한 마음에 여러 번 울기도 했다. 그러면서 다짐했다. 진짜 남자가 되겠다고.

그가 인생관을 결정한 건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이후의 삶은 그 하나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던져온 시간에 다름 아니었다. 깨달음은 엉뚱한 곳에서 왔다. 영화 ‘드라큘라’였다.

“영화를 보고 한 달 동안 잠을 못 잤어요. 드라큘라가 아니라 죽음이 두려워서. 그 실체가 너무 생생히 다가오는 거예요. 언젠가 나도 죽겠구나, 죽으면 아무도 날 기억해주지 않겠구나, 그럼 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인생은 일회뿐이라는 사실에 전율하며 결심했지요. 나는 나 살고 싶은 대로 살리라. 내게 주어진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리라,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내 결정대로만 하리라. 그래서 결국 가정하고는 인연이 없어져버렸지만….”

영화만큼 탐닉한 또 하나가 있다면 전기와 모험소설이었다. 그리스의 대웅변가 데모스테네스, 북극탐험가 윌리엄 패리, 한니발과 나폴레옹, 아문센, 리빙스턴, 그리고 ‘솔로몬의 동굴.’ 뭐든 하고 싶고 뭐든 될 수 있다고 믿었던 시절이었다.

“제 인생을 지탱하고 일관되게 한 모든 것은 초등학교 때 형성됐어요. 책과 영화에서 쏟아져 나오는 온갖 모험과 거대한 자연의 파노라마가 제 일생을 잡아당겼죠. 나중에 미국 가서 처음 서부 대자연을 접했을 때 제가 속으로 뭐라 그랬는 줄 아세요? 아, 여기 ‘솔로몬의 동굴’이 있구나. 그 광대함, 그 황막함. 정말, 너-무 좋았어!”

치열한 입시경쟁을 뚫고 명문 서울중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공부는 뒷전이었다. 책 읽고 영화 보고 거리를 쏘다녔다. 2학년 때 몇몇 친구들과 도봉산에서 캠핑을 했다. 텐트 치고 밥하고 꽁치찌개 끓여 먹는 일들이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다. 계곡물소리, 무섭도록 촘촘히 박힌 별빛에 둘러싸여 담배 한 대를 피워 물었다. 집에 가기 싫었다.

“친구 하나를 억지로 붙들어 하룻밤을 더 잤어요. 덕분에 월요일 수업을 빼먹었죠. 화요일날 학교에 갔더니 선생님께서 너 어제 왜 학교 빠졌녜요. 사실대로 말했어요. 도봉산에서 잤다고. 솔직해 좋다며 그냥 넘어가 주시대요.”

도봉산에서의 이틀 밤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자신이 자연에 맞는 사람이라는 것, 그 속에 있을 때 가장 편하고 행복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때 그 산, 그 공기, 그 감동이 가슴속에 고스란히 되살아난단다.

어영부영하는 사이 고등학교 입시가 다가왔다. 이미 중2 시절, 조영남을 통해 기타와 팝송의 세계에 푹 빠져버린 그가 공부를 열심히 했을 리 없었다.

“어느 날 어머니께서 학교에 다녀오시더니 자꾸 우세요. 담임선생님께서, 장희는 좋은 고등학교 못 갑니다, 어디 어디 수준 위로는 어렵습니다, 그러신 거지. 어머니께서 하도 속상해 하시기에 까짓 밑져야 본전이다 싶어 책을 잡았죠. 시험이 채 한 달도 안 남은 때라 머리 굴리고 할 새가 없었어요. 그냥 중학교 1학년 때부터 3학년 때까지 교과서를 과목당 이틀씩 배정해 정독했어요. 수학도 그렇게 했고요. 운이 좋아 서울고등학교에 합격했지요.”

세상에 그런 운은 없다. 그때 서울고가 어디 아무나 벼락공부해 들어갈 수 있는 학교였던가. 그런데 이장희의 대학입학 스토리까지 듣고 나면 ‘정말 운이 좋은가 보다’, 아니 ‘정말 천재끼가 다분한가 보다’ 하고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게 된다.

“뭐 비슷해요. 그땐 밤새 AFKN 듣고 아예 학교 친구들이랑 그룹 활동까지 하던 땐데…. 입시철이 다가오니 또 학교 다녀오신 어머니가 힘이 하나도 없는 목소리로 그러시대요. 너 그냥 모모대학 가라, 할 수 없잖니…. 고생 많은 어머니께서 그리 섭섭해 하시는데 모른 척하기 힘들었어요. 선생님께 사정해 연세대 생물학과에 원서를 넣었죠.”

그 대학, 그 학과를 선택한 이유는 하나였다. 전 해 경쟁률이 1.8대1이었던 것. 한 명만 제끼면 되겠다 싶어 고교 입시 때 썼던 방법을 또 시도했다. 이때는 과목당 두 번 읽을 시간도 없어, 군데군데 나오겠다 싶은 부분이 있으면 그것만 한번씩 더 훑어봤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 ‘두 번 읽은’ 부분에서 대다수의 문제가 출제된 것이다. 전해 경쟁률이 낮았던 탓일까, 무려 18 대 1로 치솟은 경쟁률에도 불구하고 그는 합격했다. 세브란스의대도 너끈히 들어갈 성적이었다.

“근데 수학은 빵점을 맞았어요. 나중에 들으니까 수학 빵점 맞고 들어온 학생은 저밖에 없대요. 면접 보던 교수님들께서 그냥 떨굴까 하다가 다른 과목 성적이 아까워 붙여주셨다나요. 그러니 다 운이지요.”

“맘대로 살겠다더니 어머니 말씀은 잘 들었나보다”고 했다. 그럴 리 있었겠냐며, 그래도 장남 프리미엄 덕에 아낌은 많이 받았단다.

“아버지는 어떠셨어요.”

“어렸을 땐… 아버지를 증오했어요. 일식당 주방 일도 보고 나이트클럽 지배인도 하고, 그렇게 참 어렵게 사셨는데 아주 완고한 분이셨어요. 많이 맞았지요. 전깃줄 꼰 걸로 핏방울이 튀도록 등짝을 후려치곤 했으니까. 근데 한 서른다섯 살쯤 되고보니 미움이 많이 사그라지대요. 이제는 그저 잘해야겠다, 어머니도 돌아가셨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이해하게 된 거죠. 사람이란 다 그렇다는 걸. 완벽한 인간은 없잖아요. 아버지도 한 인간일 뿐인데. 또 그런 과거의 모든 경험이 어우러진 결과가 바로 지금의 나인데. 저라고 하늘에서 뚝 떨어졌겠어요. 피 튀기던 고통도 어떤 식으로든 제 인생에 약이 된 측면이 있겠지요.”

어쨌든, 해리 벨러폰테와 행크 윌리엄스의 노래에 미쳐있던 아마추어 뮤지션 이장희의 대학 생활은 한마디로 “재미없었다.” 고교 시절 휘말린 주먹다짐으로 왼편 눈의 망막이 망가진 것부터도 늘상 현미경을 들여다보아야 하는 생물학과 수업과 맞질 않았다. 1968년 결국 그는 대학을 그만둔다.

“집안의 반대가 심했어요. 하지만 관둘 수밖에 없었죠. 보세요. 중·고등학교 6년 동안 내가 한 일이라곤 음악 듣기뿐인데, 지금껏 공부에만 매달려온 친구들을 당해낼 수 있겠어요. 그런 요행은 없죠. 또 제가 생물학과 나오면 뭐 합니까. 학교 그만두고 음악 친구들이랑 여기저기 휩쓸려 다녔죠.”

홍대 학생이던 음악다방 ‘쎄씨봉’의 명사회자 이상벽을 통해 같은 학교의 기타리스트 강근식을 만났다. 고교 동창이자 대학 동급생인 윤형주, 역시 ‘쎄씨봉’ 멤버인 조영남, 신중현, 서유석, 송창식, 김세환, 김민기, 김도향 등과도 밥을 나누고 잠자리를 나눴다. 1967년 이후에는 강근식과 듀오가 돼 밤무대를 뛰었다. 업소에선 “너무 생경하다”며 마뜩치 않아 하는 걸, 이미 스타가 된 트윈폴리오(윤형주·송창식)나 김세환 같은 이들이 “이게 진짜 잘 부르는 노래다, 이 친구 안 쓰면 우리도 안 부른다”며 팍팍 밀어준 덕분에 제법 괜찮은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직접 곡을 쓰기 시작한 건 1969년부터였을 거예요. 트윈폴리오 같은 친구들 히트곡이 대개 번안가요였어요. 왜 외국 노래만 부르나 싶어 작곡을 시작했죠. 전 감동으로 만들고 노래해요. 일단 가사부터 쓰고 따라 나오는 대로 자연스레 곡을 붙이는 거죠. 노래 하나 만드느라 한 달이 갔다, 두 달이 갔다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전 그건 아니라고 봐요. 노래는 흘러나오는 거거든요.”

남의 노래만 지어주다 인기DJ 이종환씨의 권유로 1집 앨범 ‘겨울이야기’를 낸 게 1971년이다. 1972년 2집 앨범을 냈다. 평단의 극찬과 함께 ‘그애와 나랑은’ ‘그 여인 그 표정’ 같은 노래들이 큰 인기를 끌었다. 마침내 1973년 1월1일 ‘0시의 다이얼’ DJ를 맡으면서 이장희는 완전히 ‘떠버렸다.’ 같은 해 발표한 곡 ‘그건 너’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1974년 영화 ‘별들의 고향’에 쓰인 노래들만 모아 낸 판도 역시 대박. 그중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와 앞서 발표한 ‘그건 너’는 당시 열애에 빠져 있던 한 이화여대 불문과 학생에게 바친 노래였다.

1974년 7월1일 이장희는 첫사랑 그녀와 결혼한다. 사귄 지 3년 만이었다. 아내는 재벌 D방직의 금지옥엽. 반대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마이크 하나로 장안의 젊은이들을 좌지우지하는 그의 능력과 사람됨에 처가는 높은 점수를 주었다.

삶에 있어, 인기에 있어 절정을 치닫던 그에게 시련이 닥쳤다. 1975년 1차 가요정화운동 때 ‘그건 너’ ‘한잔의 추억’ ‘불꺼진 창’ 등 히트곡 대부분이 금지곡 목록에 오른 것이다.

“근데 이유가 웃겨요. ‘그건 너’는 남에게 책임을 전가시킨다고, ‘불꺼진 창’은 창안에 남녀 그림자가 어른거린다는 가사 때문에 불륜을 그렸다는 이유로 금지된 거였어요.”

6개월 후인 12월3일에는 더 큰 사건이 터졌다. 윤형주, 이종용 등 인기연예인 80여 명과 함께 대마초(마리화나) 파동에 연루돼 철창 신세를 진 것이다.

“그땐 대마초를 피면서도 죄의식이 없었어요. 전세계적으로 히피문화가 득세하던 시절, 법으로는 금지됐지만 음악인들 사이에선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었죠. 그걸 피면 환청이나 환각 같은 게 찾아오고, 음악을 들으면 소리 하나하나가 유리알처럼 선명하게 튀어 올라요. 마약이란 게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던 시절이었죠.”

그는 연행 20여 일 만에 풀려났다. 모진 닥달에도 친구들 이름은 하나도 ‘불지’ 않았다. 구치소 문을 나서며 그는 결심했다. 노래를 포기하겠다고.

“서대문 구치소에 수감됐는데 겨울이라 밖에 눈이 내리고 있었어요. 고요히 나를 되돌아봤죠. 한국 제일의 스타라는 자가 지금 여기서 뭘 하는 건가. 큰 사건이 터졌으니 음악활동도 쉽지 않을 테고, 그런 상황에서 한쪽만 바라보며 한숨짓는 건 할 짓이 못된다고 봤어요. 운명을 거역할 순 없으니 딴 일을 하자. 단칼에 내린 결정이었고, 조금의 미련이라도 남기지 않기 위해 노래를 떠날 수밖에 없는 조건 속으로 나를 밀어넣었어요.”

1976년, 친구 권유로 종로구 서린동에 반도패션 종로지점을 냈다. 기성복이 처음 등장한 때라 장사는 놀랄 만큼 잘됐다. 판매원 수만 20여 명에 이를 정도였다. 그렇게 사업가로 2~3년을 정신없이 보냈다. 자리가 잡히고 나니 노래판이 그리웠다. 작곡과 음반 제작을 시작했다. 1978년 그의 손에서 탄생한 록그룹 ‘사랑과평화’ 1, 2집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김수철, 김현식 같은 신인가수들도 발굴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음악활동에는 제약이 많았다. 신곡들도 운전기사 이름, 친척들 이름을 빌려 발표해야 했다. 고뇌가 없고 염증이 나지 않았다면 거짓일 것이다.

그 와중에 의류사업은 슬그머니 막을 내렸다.

“옷도 월부판매를 했는데 언제부턴가 수금이 잘 안되더라구요. 이거 불경기가 오겠구나, 팔아버릴 적기다 싶었지요.”

1980년 5월에는 좀 엉뚱한 사업 구상을 했다. 제주도에 갔다 내쳐 마라도까지 둘러봤는데, 거기 농토에서 무공해 채소를 키워 상위 1% 부자들에게 팔면 돈이 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마라도 땅 구입이 여의치 않아 성산포 앞 농토를 조금 사놓고 공항으로 갔어요. 무슨 일 때문인지 비행기가 뜨지 않았죠. 할 수 없이 배를 타고 목포로 갔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어요. 광주항쟁이 시작된 거죠.”

그렇다고 설마 길까지 막아놓았으랴. 오토바이 한 대를 사 뒷길을 타고 서울로 가려 했다. 하지만 정말 모든 길은 막혀 있었다. 이장희는 다시 배를 타고 제주도로 향해야 했다.

같은 해 가을, 외국 갈 일이 생겼다. 김태화가 부른 ‘바보처럼 살았군요’가 몬트리올에서 열리는 태평양가요제에 초청 받은 것. 작곡가 김도향, 가수 김태화와 함께 제작자 이장희도 캐나다행 비행기에 올랐다.

“내친김에 셋이 미국 여행을 갔죠. 뉴욕에 첫발을 내딛는데 바로 그 생각이 들대요. 여기가 내가 살 땅이다. 3주쯤 지나니 다른 두 사람은 집에 가고 싶다고 난린데 전 전혀 아니었어요. 그 넓은 땅덩어리를 샅샅이 뒤져보고 싶었죠.”

때마침 역시 미국 여행을 온 소설가 최인호와 맞닥뜨렸다. 최인호는 이장희의 중·고·대학 동창인 최영호(현라디오코리아 사장)의 형이자 서울고 2년 선배였다. 이전부터 친분이 깊던 두 사람은 의기투합해 미국 자동차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이장희의 영혼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놓은 대장정의 시작이었다.

“1980년 10월이었어요. 제가 중고차를 사고 형이 가스 값을 대기로 했죠. LA를 출발해 캘리포니아주 이곳저곳을 돌아, 애리조나주의 그랜드 캐니언, 유타주의 자이언국립공원·브라이스 캐니언·모뉴먼트 밸리 등을 헤맸어요. 거기서 다시 세인트 조지로 돌아가 허리케인을 거쳐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로 갔죠. 평원 저 멀리 보이는 밤의 라스베이거스는 숨 막히도록 찬란했어요.”

이장희와 최인호가 달린 길은 미국 서부의 장대한 풍광, 거친 자연의 절정을 맛볼 수 있는 코스다. 시속 120㎞, 140㎞로 달려도 서너 시간 동안 차 한 대 만나기 힘든 곳도 많다. 녹색을 거부하는 땅은 태양처럼 뜨겁고, 바위 그 자체인 산과 깊이 모를 계곡은 압도적이다. 극단의 황막함이 주는 극단의 아름다움이다.

특히 이장희를 사로잡은 건 다시 캘리포니아주로 돌아오는 길에 들른 데스 밸리(Death valley) 국립공원이었다. LA에서 차로 6시간 남짓한 거리에 있는 데스밸리는 말 그대로 죽음의 계곡이다. 1949년 서부 금광을 찾아 떠났던 20개 개척팀 300여 명이 120도를 오르내리는 더위와 마시면 죽는 소금물 때문에 몰살당한 곳. 그러나 오색의 바위산, 물결치는 모래파도, 까마득한 대평원, 별 쏟아지는 밤하늘의 웅대함은 태고적 신비를 담은 듯 오싹한 아름다움을 내뿜었다.

“데스밸리는 나신(裸身)이에요. 뼈다귀만 남은 산이죠. 청결하고 순수하고 불덩이 같아요. 그때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한 200번쯤 갔을 거예요. 너무 좋지요.”

그 여행은 두 사람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장희는 미국에 살 결심을 굳혔고 최인호는 당시의 경험을 재료 삼아 단편소설 ‘깊고 푸른 밤’을 썼다. 이 작품은 1982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됨으로써 최인호의 문학적 입지를 굳히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대중들에겐 배창호 감독의 영화 ‘깊고 푸른 밤’(1985)이 더 잘 알려져 있지만 소설 줄거리는 영화와 많이 다르다. 소설 ‘깊고 푸른 밤’의 주인공은 한국에서 대마초 파동에 휘말렸다 미국여행길에 오른 인기가수다. 그는 지도 한 장 달랑 들고 황량한 미국 서부를 여행하면서 깊은 절망 속에 자아성찰의 시간을 가진다. ‘그가 살아온 모든 인생, 그가 보고 듣고 느꼈던 모든 삶들, 그가 소유하고 잃어버리고 허비했던 명예와 허영, 그가 옳다고 믿었던 정의와 법, 때로는 성공하고 때로는 배반당했던 그의 욕망, 그가 한때 가지고 버렸던 숱한 여인들, 그 모든 것들로부터 무참하게 얻어맞고 마침내 처절하게 패배당한 것 같은 느낌’들이 칼바람 되어 스쳐간다.

1985년 미국에 ‘깊고 푸른 밤’을 찍으러 온 배창호에게 데스밸리(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이곳에서 촬영했다)를 직접 소개해준 이장희였지만 정작 영화는 보지 못했다. 소설 ‘깊고 푸른 밤’도 몇 년 전에야 읽었다. 그러고는 화가 나 최인호에게 마구 대들었다고 한다. “왜 나를 형편없는 인생 실패자로 그렸느냐”는 것이다. 최인호는 “야, 임마. 악당이라도 내 소설의 주인공이 됐으면 영광이지 뭘 그래” 하다가 다시 읽어보니 아무래도 심한 것 같아 “미안하다”고 슬쩍 사과했단다. 물론 둘 사이는 여전히 편안하다.

미국에 정착키로 한 이장희는 LA의 한인 라디오방송국을 찾아가 무보수 DJ를 자청했다. 대신 취업비자를 받아 서울에 있는 아내와 딸, 아들을 불러들였다. 의류 사업 접고 남은 돈으로는 신정동 상가 터를 사뒀다. 언젠가 한국에 돌아올 때를 대비해서였다. 그 땅을 이장희도 모르는 새 아버지가 처분해 버렸다. 하지만 이제껏 아버지 앞에서 그 문제를 꺼낸 적은 없다고 한다.

“재주껏 은행 융자를 받아 ‘로즈 가든’이라는 영국식 레스토랑을 차렸어요. 그때는 아직 코리아타운이라는 게 완전히 형성되기 전이었죠. 분위기가 괜찮았던지 손님이 들끓었는데 할리우드 스타들도 꽤 찾아왔어요. 한번씩 언더그라운드 파티 같은 걸 하면 호응이 참 좋았지요. 그때 드나들던 젊은 가수 중에는 조지 마이클도 있어요.”

1983년, 그의 인생에 메가톤급 폭풍이 몰아친다. 아내와 별거에 들어간 것이다.

“전 결혼에 적합지 않은 사람이에요. 하고 싶은 대로 사니까. 맘 내키면 어디든 훌쩍 떠나곤 했는데 아내로선 그런 가장을 견디기가 쉽지 않았겠죠.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간 다음부터 한 4년간은 목적 없는 방황이 이어진 거친 날들이었어요.”

이장희는 당시를 ‘마이 와일드 데이즈(My wild days)’라고 부른다.‘로즈 가든’ 운영에는 여전히 간여했지만 처음만큼 열정적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장사는 잘됐다. 남는 시간 동안 그는 서울서 온 친구들과 어울리고 여기저기 여행을 다녔다. 가수 조영남은 그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나말고도 조동진, 김중만(사진작가), 전인권, 한상원 같은 친구들이 돌아가며 걔네 집 신세를 졌는데, 이건 아주 제멋대로예요. 방은 얼마나 어질러져 있는지 발끝으로 물건을 치우며 걸어야 할 정도고, 우린 밤새도록 어울리느라 해가 뜨는 줄도 몰랐지. 그렇게 새벽녘이 다 돼 잠자리에 들면 일찌감치 일어난 장희는 비몽사몽간인 우리들을 억지로 두들겨 깨워 식당으로 몰아 가. 아침은 꼭 먹어야 된다나. 그래 놓고는 또 다 끌고 산책을 가요. 참 엉뚱하고 희한한 녀석이었는데 카리스마 하나는 끝내줬지.”

조영남도 이장희의 손에 이끌려 데스 밸리를 구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