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탄생부터 정파간 타협의 산물이었던 국무총리. 때로는 독재권력자의 방패막이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정치적 희생 제물로 전락하면서 제 기능을 찾지 못해온 국무총리. 과연 그대로 둘 것인가. 발전적 대안은 없는가.
흔히 국무총리를 조선시대의 영의정에 비유하여 일컫는 말이다. 임기나 권력 등 모든 면에서 영의정만은 못해도 총리를 배출한 집안은 재상이 났다 하여 가문의 영광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제왕적 대통령제 아래서 총리의 위상은 매우 모호하다. 현행 헌법 86조는 “국무총리는 대통령을 보좌하며, 행정에 관하여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각부를 통할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총리는 대통령의 최고보좌관으로서, 그것도 대통령의 명을 받아 집행하는 행정부의 수장인 것이다. 실제로 김영삼 정부 시절 이회창 총리의 사표파동도 대통령의 명을 받아야 한다는 문구의 해석을 둘러싼 논란에서 비롯됐다.
물론 형식적으로는 각 부처의 장(장관)을 제청하고, 국무위원의 해임을 건의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총리가 장관을 추천한 예는 거의 없었고, 더우기 각료에 대한 해임건의를 한 사례는 알려진 바조차 없다. 18년간 총리실에서 근무했던 정두언 씨는 자신의 저서 ‘최고의 총리 최악의 총리’에서 “총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대통령의 바람막이나 정치적 희생양 역할일 수밖에 없다. 이런 국무총리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그 많은 예산과 인원을 사용해야 할 필요가 있는지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국회는 실질적 권한도 없는 국무총리를 상대로 국정 전반에 대한 답변을 요구하고 정치적 책임을 추궁하는 우스꽝스러운 일을 지금까지 되풀이해온 것이다”라고 날카롭게 힐난하고 있다.
정치적 타협의 산물 총리제도
가뭄에 콩 나듯 실세총리가 등장한 적은 있지만 대부분의 총리는 대통령을 대신하는 의전총리나 방탄총리 노릇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대통령은 총리지명자에게 가문에 영광(?)을 던져주고, 간혹 의도와 상관없이 대권후보의 반열에 올려주고, 대신 실정(失政)이나 정치공세에 대해 기꺼이 방패가 되어 주길 바랐다. 이것도 일종의 ‘정치적 딜’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총리의 권한을 제대로 발휘할 수가 없다. 헌법상 문서로 하게 돼 있는 대통령의 국법상 행위에 대해 다른 국무위원들과 함께 부서(副署)하는 것이 고작이다.
총리에 대한 인사청문회가 도입되기 전까지 총리로서의 자질과 능력은 의미를 가질 수가 없었다. 대부분 지역안배나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 혹은 기타의 정치적 이유가 총리 인선의 기준이었다. 실례로 영남을 지역기반으로 집권한 김영삼 정부는 지역적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초대 총리로 호남 출신의 황인성씨를 지명했다. 그리고 김대중 정부는 공동정부라는 이유 때문에 자민련의 김종필씨를 초대 총리로 지명했다.
거슬러 올라가면 총리제도는 1948년 정부수립 당시부터 정략적 타협의 산물이었다. 대통령제에 강한 집착을 보인 이승만 대통령과 내각제를 추진한 대부분의 의원들이 야합한 결과, 정치적 사생아인 총리제도가 탄생했다. 여기에는 영도자적 지위를 꿈꾸는 이승만 대통령의 야욕과 대통령 권력의 절대화를 견제하고자 하는 국회의원들 사이에 팽팽한 긴장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54년여의 현대 한국정치사에서 1960년 내각책임제의 짧은 실험을 제외하고 계속되고 있는 대통령제는 필연적으로 대통령의 권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유신헌법에 명문화한 ‘영도자적 대통령’이 단적인 사례다. 유신헌법에서 대통령은 입법, 사법, 행정을 초월해 국가를 통치하는 제왕으로서의 권력을 행사했다. 당연히 국회의장, 대법원장과 균형을 맞춰줄 행정부의 대표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국무총리제도는 유지되고 살아남았던 것이다. 대통령 권력의 분산을 목적으로 도입한 총리제도는 박정희 시대를 거치면서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다.
역대 야당도 누가 총리가 되느냐에 큰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통령 비서실장이나 중앙정보부장, 심지어 경호실장의 인사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총리는 단지 대통령 인사의 상징적 수준을 의미할 뿐이었다. 다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총리는 국회의 인준동의를 받도록 돼 있었기 때문에 야당은 임명동의안이 국회로 넘어오면 거부의사를 표현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집권당이 과반수에 미달한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사실상 인준이 부결되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는 출발부터 이러한 관행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김대중 정부의 초대총리 지명자 김종필씨에 대한 국회의 인준 표결은 투표방식을 둘러싸고 여야간 몸싸움 끝에 투표함이 열리지 못한 채 봉(封)해지는 사태에 직면했다.
이러한 초유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각 당의 의석 변화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96년 15대 총선 결과 신한국당(한나라당의 전신)은 총 299석의 의석 중 157석, 국민회의(민주당의 전신)는 78석, 자민련은 45석의 의석을 얻었다. 1997년 12월 대선을 앞두고 의석 분포에 변화가 일어났다. 이인제 의원 등 일부 의원들이 신한국당을 이탈했다. 반면 이기택씨가 이끌던 작은 민주당과 통추(국민통합추진회의)의 제정구 의원 등 10여 명이 신한국당과 합당, 한나라당을 만듦으로서 이탈세력의 공백을 만회해 한나라당은 여전히 150석 이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이렇다할 의석의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연말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된 뒤 이듬해 들어 의석분포에 상당한 변화가 발생한다. 공동여당인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각각 103석과 52석으로 대선 전보다 30여 석이 늘어나 과반수를 상회하게 되었다. 한나라당의 의석은 대폭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130석 이상을 가진 거대 야당으로 남아 있었다. 문제는 여기서 비롯됐다.
소속의원들의 줄 이은 이탈로 한나라당은 초긴장 상태가 되었다. 한나라당은 즉각 야당파괴공작이라며 대여(對與)투쟁에 나섰다. 김대중 정부의 입장에서도 산적한 국가 현안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원내 과반수의 확보가 시급한 과제였을 것이다.
이러한 양측의 절박한 정치적 이해가 1998년 3월2일 김종필 총리 내정자에 대한 국회인준 표결을 공동여당이 강행하는 과정에서 전면적인 충돌로 표면화 한 것이다. 이때부터 김종필 총리 내정자는 5개월 이상 ‘서리’라는 꼬리를 달고 총리 노릇을 했다. 이로써 김총리 서리는 제1공화국에서의 3명의 총리(신성모, 백두진, 허정)를 제외하고 최장수 총리서리라는 기록을 세웠다.
총리인준을 둘러싼 여야간의 불신은 극에 달해서 정치는 실종되고 민생은 철저히 외면됐다. 8월17일 우여곡절 끝에 임명동의안이 국회를 통과해서 정식 총리가 됨으로써 김종필 총리는 명실상부한 여권의 2인자 자리를 굳혔다. 하지만 총리인준문제로 김대중 대통령이 입은 정치적 내상도 심각한 상태였다. 총리인준도 처리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국정의 안정적 운영을 기대할 수 있겠느냐는 여권의 자탄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올 정도였다.
사실 당시의 국가적 상황은 매우 긴박했다. 나라는 IMF의 구제금융을 받아 겨우 연명하고 있었고 실업자가 200만명에 육박하고 길거리에는 노숙자가 넘쳐나는 실정이었다. 여기에 노사 합의에 의한 구조조정과 각 분야의 개혁을 추진해야 하는 등 국가적 현안이 산적해 있었다. 정치권도 마지못해 이러한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국회 차원의 뒷받침에 합의했지만 총리인준 문제를 둘러싼 대립과 충돌로 국회는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결국 김대중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자민련 몫의 김종필 총리 문제처리에 엄청난 정치적 에너지를 쏟아 부음으로써 국정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상당한 진통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서리라는 꼬리를 뗀 김종필 총리는 자신의 주장처럼 법이 보장한 총리의 각종 권한을 떳떳이 행사하기 시작했다. 자민련은 JP의 정치적 활동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국민회의와 사전 약속한 ‘국무총리 지위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자고 압박하기 시작했다. 1998년 8월4일자 한 신문의 사설을 보면 “만일 한나라당이 이런저런 이유로 인준 절차를 지연시킬 경우 그 정치적 파장은 엄청날 것이다. 우선 김총리 서리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을 것이고 그가 사퇴한다면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공동정권은 사실상 붕괴하는 것이다. 표면상으로는 두 정당의 연합이지만 공동정권의 사실상 기반은 ‘김대중 대통령+김종필 총리’이기 때문이다. (중략) 따라서 한나라당이 그런 의미로 인준을 미룬다면 그것은 야당으로서 해볼만한 정치적 모험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이 사설이 어떤 의도를 가졌든 간에 김종필 총리 문제가 김대중 정부의 국정운영에 최대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했다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5개월여의 총리서리와 17개월 가까이 총리로 있으면서 JP는 각료 몇 자리와 다수의 산하 단체장 임명권을 차지하는 권력을 누렸다. 그러나 그 대가로 내각제 추진 합의를 잃었고, 내각제적 요소를 강화한 총리지위법도 제정하지 못했다.
박태준 축출한 JP
이 무렵, 국민회의 내부에서는 공동정권에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는 요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JP는 분노했고 2000년 1월 총리직을 버림으로써 결별에 나서는 듯했다. 또 당장은 눈앞에 닥친 4월 총선에서 존립의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당시 자민련의 절박한 과제였다. 자민련은 JP의 총재직 복귀를 요청했다. 하지만 당시 자민련 총재는 박태준씨였다. 따라서 JP가 복귀하려면 박태준이라는 걸림돌을 뛰어넘어야 했다.
그래서 노회한 JP는 박태준씨를 자신의 후임 총리로 추천하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이것은 사실상 박태준씨를 자민련에서 축출하는 비책이었는데 여기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다. 공동여당을 포기하면서 자신의 후임 총리를 추천한 것도 이상하거니와, 이를 흔쾌히 수락한 김대중 대통령은 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다. 대통령이 아닌 사실상 JP가 지명한 박태준 총리내정자가 2000년 1월13일에 국회의 인준을 받아 제 32대 총리가 되게 했다.
당으로 복귀한 JP는 한나라당의 총재권한대행을 거친 이한동 의원을 자민련 총재로 선출하고 자신은 직전까지 몸담았던 김대중 정부를 거칠게 공격하면서 득표활동을 벌였다. 심지어 낙천 낙선운동을 벌인 시민단체인 총선연대를 김대중 대통령의 홍위병으로 몰아붙이기까지 했다.
2000년 4월 16대 총선의 결과를 보면 한나라당이 133석, 새천년민주당이 119석, 무소속이 4석 그리고 자민련은 교섭단체에도 못미치는 17석을 얻는 데 그쳤다. JP는 정계를 은퇴하라는 여론의 거센 압박을 받았고 청구동 자택에서 칩거에 들어갔다. 그러나 총선 민심은 어느 당에도 과반수를 부여하지 않음으로써 JP는 특유의 줄타기로 정치생명을 연장했다.
여기서 또 한가지 재미있는 일은 총선기간 내내 김대통령과 민주당을 거세게 비난하면서 야당임을 선언했던 JP가 선거참패의 후유증으로 자택에 칩거중일 때 김대중 대통령은 최측근인 한광옥 비서실장을 보내 위로했다는 사실이다. 그후로도 JP는 당사와 국회가 아닌 골프장에서 시간을 보내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언론들은 자민련을 골프당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JP의 기다림은 오래가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민주당과의 공조복원이 논의되고 있던 시점에 자신이 지명한 박태준 총리가 부동산 투기 의혹으로 5개월 만에 총리직에서 도중하차했다. 김대중 정부 총리직은 자신의 몫이라는 기억이 새삼 떠올랐던 것인지 알 수 없으나 JP는 자민련 총재로 영입한 이한동씨를 국민의 정부 3대 총리로 추천했고 김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여 총리서리에 임명했다. 이로써 JP는 국민의 정부에서 세번째 총리를 사실상 지명했다. 이쯤되자 항간에는 총리를 하고 싶으면 JP에게 가보라는 말이 나돌았다.
바꾸어 말하면 이때까지 김대통령은 자신의 정부에서 총리를 지명하는 권한을 행사해본 적이 없다는 얘기다. 김영삼 대통령이 재임 중 6명의 총리 전원을 자신이 지명하고 인준을 받은 경우와 확연히 비교가 된다. 물론 원내 과반수에 못미치는 소수당으로 집권한 김대중 정부의 태생적 한계가 총리 지명의 자율권을 잃어버린 일차적 원인이다.
여기에 정치개혁 차원에서 2000년 2월에 개정된 국회법에 따라 도입된 국무총리 인사청문회법은 김대통령의 입장에서 보면 총리지명의 자율권을 강하게 제약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인사청문회제도는 역대 대통령에 의해 ‘통법부’로 전락한 국회의 기능을 정상화해 대통령의 제왕적 권력에 대한 견제장치를 마련했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어쨌든 이한동 총리내정자는 민주당과 자민련의 공조를 바탕으로 처음 도입된 인사청문회(인사청문회법은 이한동 총리 인준 후에 통과)를 통과해서 총리가 되었다.
이한동 제33대 총리는 2001년 민주당과 자민련의 공조가 완전히 붕괴돼 내각에서 자민련 장관들이 철수할 때 배신자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잔류를 택했다. 이한동 총리의 잔류결정은 김대통령 입장에서는 집권 이래 처음으로 반쪽짜리나마 자신이 총리를 결정했다는 데 나름의 의미가 있다. 그나마 이한동씨의 고뇌에 찬 결단(?)에 힘입어서 말이다.
지난 7월11일, 임기 7개월을 남겨놓고 김대통령은 집권 이후 최초로 JP에 대한 부담없이 장상씨를 이한동 총리 후임으로 지명, 서리에 임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장상 서리 앞에는 인사청문회라는 가혹한 검증의 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7월31일의 인준투표 결과는 예상보다 큰 표차로 부결되고 말았다. 헌정사상 첫 여성 총리 탄생으로 기대를 모았던 장상 서리에 대한 국회 인준 실패는 김대통령의 임기말 통치력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다. 이로써 김대통령은 집권 4년 반 동안 단 한번도 자신의 손으로 총리를 임명해보지 못한 선례를 남길 위기에 직면해 있다.
그러나 사실상 ‘김대중 정부의 총리론’은 이미 결론이 내려졌다. 앞서 살펴본 대로 국민의 정부에서 적어도 총리에 관한 한 김대통령의 총리론은 ‘JP 총리론’으로 바꿔 부를 수밖에 없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지난 8월9일 임명된 장대환 총리서리에 대한 8월27일 인준투표는 김대중 대통령에게는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
요컨대 대통령제를 채택해온 현대 한국정치사에서 총리제도는 서로 다른 정치적 목적을 가진 세력간의 절충이 낳은 기형적 산물이었다. 김대중 정부는 소수여당이라는 한계로 인해 총리의 임명을 둘러싸고 혹독한 정치적 시련을 겪어왔다. 그러나 역으로 보면 지난 50여년간 유지돼온 총리제도의 모순이 유감없이 드러나는 과정이기도했다. 이를 계기로 차제에 총리제도에 대한 획기적 개선이 필요하다는 여론도 만만치 않다.
총리서리 제도만 해도 그렇다. 애초에 태어나서는 안될 제도가 국부(國父)를 꿈꾸던 이승만 대통령이 (대통령제의)국회통과가 어려운 상황에서 편법으로 도입한 이후, 관행이라는 미명하에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이 이어져 왔다. 여기에 삼권분립의 위에 서서 영도자적 지도자를 도모한 박정희 대통령은 총리를 대외적 장식물 정도로 격하시켰다. 총리를 대통령의 바람막이쯤으로 생각해온 것은 김영삼 정부까지 지속됐다. 그러나 자민련과 공조를 하는 동안의 김대중 정부에서는 이러한 과거 정권의 통념이 파괴되었다. 특히 김종필씨가 총리로 있는 동안은 인사권 등에서 헌법이 보장하는 총리의 권한을 뛰어넘었다고 볼 수 있다. 모두가 공동정부라는 이름 아래서 행해진 역편향 현상이다.
최근 정치권에서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책임총리제 도입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권력분산을 위해서라지만 권력의 속성을 감안한다면 정치적 속셈이 들여다보이는 얘기다. 그래도 이마저 안 나오는 것보다는 낫다고 위안을 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국민이 직접선거로 선출한 대통령이 지명권을 갖고 있는 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기에는 한계가 있다. 특히 헌법 86조 ②항에 규정된 “…대통령의 명(命)을 받아 행정 각부를 통할한다”는 조항의 존치(存置) 상태에서는 헌법에 보장된 어떠한 총리의 권한도 제대로 행사하기 어렵다.
대통령제에서 형해화되고 있는 총리제도를 폐지하고 부통령제를 도입하는 안을 전향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물론 이 문제는 헌법의 변경을 요구하는 사안이므로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할 수밖에 없다. 대선을 앞둔 시점이라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각 정당과 후보자들이 이번 대통령 선거의 공약으로 이 문제를 채택하는 방안을 생각해볼 수도 있다.
어쨌든 김대중 정부에서 전면적으로 드러난 모순투성이의 현행 총리제도는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