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오쩌둥과 덩샤오핑, 장쩌민의 시조(始祖) 원적지 논란이 한창인 것을 보면 성씨와 조상의 유래 찾기에 광적으로 매달리는 중국인들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그들은 타지에 정착한 지 1000년이 지나도록 옛 조상의 언어와 습속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만만디란 좋게 말하면 ‘느긋하게 여유를 즐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만만(慢慢)’은 느릿하다란 뜻이고, ‘디(的)’는 조사다. 하지만 대개는 세월아, 네월아 하며 아주 느려터진 사람을 일컫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놀라운 것은 만만디가 이렇듯 여전히 그들의 삶 깊숙이 스며들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만(慢)’을 권유하는 팻말이 곳곳에서 길을 막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때의 ‘만’은 ‘천천히’란 뜻이니, 속력을 내서는 안된다는 ‘강요성 권유’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중국에선 갑자기 소낙비가 내려도, 누군가가 자기를 해치려 달려든다 해도 뜀박질치며 달아나는 사람이 드물다.
만만디는 남의 일에 간섭하길 싫어하고 또 남이 내 일에 참견하는 것을 참지 못하는 ‘메이관시(沒關係 : ‘신경쓰지 않는다’ 또는 ‘신경쓰지 말라’는 뜻)’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해도 웬만해선 그것을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는 포커페이스류의 ‘무표정’과도 통한다. 쉬 데워지지도, 쉬 식지도 않는 데다 속내마저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무쇠솥. 바로 이게 중국인들의 정신자세다.
외국인들은 이런 중국인을 두고 ‘지금 같은 초(超)스피드 시대에 만만디가 웬 말이냐’고 비웃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정작 중국인들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만만디를 아직도 버리지 못한다. 아니 어떻게든 지키려 한다. 바로 그런 기질이 수천km에 이르는 만리장성을 쌓아올릴 수 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큰일은 만만디의 자세로만 이뤄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어떤 이는 중국인들의 만만디를 경쟁 부재(不在)의 사회주의 체제가 남긴 유산으로 본다. 사회주의 체제가 그걸 부추긴 측면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긴 어렵지만, 그게 이유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 그 훨씬 이전부터 만만디는 중국인의 삶과 함께해 왔다. ‘우공이산(愚公移山)’과 ‘수도거성(水到渠成)’이란 고사가 이를 여실히 증명한다.
우공이산이란 언뜻 보기엔 미련한 듯하지만 몇 대에 걸쳐 같은 일을 지속적으로 하다보면 산도 옮길 수 있다는 뜻이고, 수도거성이란 물이 오래 흐르다 보면 도랑이 저절로 생긴다는 말이다. 씨를 뿌리면 싹이 돋고, 그게 열매를 맺으면 수확하는, 다시 말해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자세가 바로 중국인의 삶의 태도라 할 수 있다. 일수(一樹)가 십확(十穫)이 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힘으론 어찌 할 수 없는 ‘하늘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들은 누구보다도 잘 안다.
만만디에는 이렇듯 때를 기다리는, 그래서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내공의 노력이 숨어 있다. 그렇다면 만만디를 그저 느려터진 것으로만 치부해선 안 될 일이다. 그러다간 중국인의 정체라는 핵심을 놓칠 수 있다. 요즘 사람들은 스피드, 스피드 하면서 그게 성공으로 이끄는 주요소라고 하지만, 일의 성패를 가름하는 것은 그저 빠르기만 한 스피드라기보다 정확한 타이밍이다. 그런데 타이밍에 관한 한 누구보다 할 말이 많은 게 중국인들이다.
바둑은 중국인이 개발한 두뇌 스포츠다. 바둑에는 수순(手順)이란 게 있다. 그때그때 돌아가는 판세에 따라 큰집이 될 만한 곳을 찾아 돌을 하나둘 놓으면서 승세를 굳힌다. 바둑의 수순이 판세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중국인 특유의 타이밍 감각을 간파해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바둑을 모른다 해도 중국 무협영화를 즐겨 본 사람이라면 주인공이 스피드의 완급을 정교하게 조절하며 검(劍)을 다루다 최후의 승자가 되는 모습을 자주 봤을 것이다. 그들은 공격과 수비에도 그에 맞는 타이밍이 있다고 믿는다.
공자(孔子)의 언행을 제자들이 기록한 ‘논어(論語)’의 첫머리에 나오는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란 말도 타이밍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대목이다. 학이시습지의 ‘시(時)’는 시간이나 스피드가 아니라 ‘때에 맞게(時宜)’를 뜻한다. 타이밍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이 대목의 해석을 두고 이론(異論)이 있으나, 필자는 ‘배우고 그것을 때에 맞게 익히면 기쁘지 않겠는가’라고 해석한다. ‘기(機)’와 ‘맥(脈)’ 등의 개념을 개발하고 그걸 생활 속에 응용하는 중국인들이기에 시를 ‘때에 맞게’로 해석하는 게 옳을 듯해서다. 논어와 함께 ‘사서삼경’의 하나인 ‘중용(中庸)’에 나오는 ‘시중(時中)’ 또한 그런 의미로 쓰였다.
그러므로 만만디는 긴 호흡을 요한다.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려야지, 서둘러서는 절대 안된다고 생각하기에 그렇다. 그들은 단기전으로 승부를 내려 하기보다는 ‘최후의 웃는 자’가 되려 한다.
한때 중국대륙을 지배한 이민족들은 지금에 와선 흔적을 찾기 어렵게 됐지만, 한족(漢族)은 피지배의 아픔을 이겨내고 지금 그 땅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들은 무력만 내세워 55개 소수민족을 거느리고 있는 게 아니다. 그 배경에는 남다른 인고(忍苦)의 자세와 기다림의 문화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중국인들의 그 긴 호흡을 가능케 해주는 힘이 과연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하는 점이다. 다시 말해 만만디를 지탱케 해주는 힘 말이다. 꼭 10년 전 중국대륙에 처음 발을 디딘 이후 지금껏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이 궁금증을 풀 수 있는 한 가닥 실마리를 나는 이번 중국여행에서 찾을 수 있었다.
안후이(安徽)성 남부에 자리한 명산 황산(黃山)을 둘러본 후 다음 목적지인 후난(湖南)성의 장사(長沙)로 가기 위해 그 중간에 있는 난창(南昌)에 내렸다. 무더운 날씨에 사람들로 가득찬 열차를 타고 더이상 가기 어려울 것 같아 시원한 고속버스로 갈아타기 위해서였다.
에어컨이 그런 대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무심코 펴든 현지 신문 ‘양성만보(羊城晩報)’ 1면에 “삼대 영수(領袖) 모두가 동일 조적(祖籍) … 공교롭게도 신중국 3대 영도자의 조적이 모두 강시에 있다”란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다. ‘조적’이란 말은 낯설지만 마오쩌둥(毛澤東)과 덩샤오핑(鄧小平), 그리고 장쩌민(江澤民) 주석 등 신중국을 이끈 3대 영도자의 집안에 관한 기사라는 것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서툰 한문 실력으로나마 전체 기사를 찬찬히 읽어보았다.
조적은 성씨의 시조(始祖)가 되는 조상의 원적을 말하는 것이고, 3대 영도자의 족보를 중심으로 그들의 조적을 조사해보니 공교롭게도 모두 강시(江西)성인 것으로 밝혀졌다는 내용이다. 그들이 몇 세대 전의 것도 아니고, 자그마치 700∼800년 전, 무려 20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조상의 출신지를 아직도 문제 삼고 있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역시 족보를 중시하고 조상숭배에 관한 한 결코 남에게 뒤지기 싫어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구 410만의 난창은 강시(江西)성의 성도(省都)다. ‘江西’란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강시성은 양쯔강을 끼고 있다. 그런 만큼 강시성은 강남 땅이다. 중원(中原) 땅은 아니나 중원과 아주 가깝다. 강시에는 예로부터 ‘강시의 현관’이라 불렸던 제일 북쪽의 주장(九江)을 가로질러 양쯔강이 흐르고, 주장에서 가까운 리산(驪山)에는 시인 이백이 그 아름다움을 시로 읊었던 우라오펑(五老峰)이 있으며, 중국 도자기 명산지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징더전(景德鎭) 또한 거기서 멀지 않다.
이밖에도 마오쩌둥이 국·공분열 뒤 농홍군(農紅軍) 3000여 명을 이끌고 들어가 국민당군에 대항하는 본거지로 삼았다가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자 1만2000km나 떨어진 옌안(延安)까지 달아났던 대장정의 출발점 징강산(井岡山), 인민해방군의 탄생지인 난창 등의 명소가 있다. 이름깨나 날렸던 인물들도 다수 배출됐다. 하지만 근래에는 사는 형편이 이웃 성에 비해 크게 떨어졌다. 산업이 낙후한 탓이다.
시간이 넉넉지 않았던 나는 주장과 리산, 징더전 등을 둘러보지 못하고 단지 경유할 생각으로 난창에 닿았기에 곧바로 장사행(行) 버스에 올랐다. 그런데 그곳에서 펴든 신문에서 ‘강시성은 신중국 3대 영수의 조적지이자 물자가 흔하고 많은 인재가 배출된 복받은 땅(物華天寶, 人傑地靈之福地)’이라고 선전한 것을 본 것이다.
아무튼 이곳에서 살던 조상을 둔 세 영도자가 공교롭게도 신중국을 잇달아 통치하고 있으니 강시 주민들에겐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었고, 난창에서 발행되는 양성만보는 이를 소상히 밝히고자 마침 오일절(五一節·노동절) 휴일을 맞아 현지에 기자를 파견했던 것이다.
마오쩌둥(1893∼1974)의 고향이 후난성 샹탄현(湘潭縣) 샤오산(韶山)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마오쩌둥은 후난성의 성도 장사에서 서남쪽으로 90km 정도 떨어진 그곳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초등학교를 나올 때쯤부터 집안이 기울면서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했고, 16세 되던 1909년에야 장사로 나가 처음으로 바깥바람을 쐬었다.
‘바깥바람’이란 진보사상과의 만남이다. 봉건체제에 반감을 가진 그가 진보사상에 물들자 혁명지식인들의 모임인 ‘신민학회’를 조직하는 등 자신의 생각을 실천에 옮길 조직작업에 들어갔다. 1922년 제1차 전국대표자대회에 후난성 대표로 참석하면서부터 중국공산당의 일원이 됐다.
그는 생전에 자신의 조상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한 바가 없다. 부친과의 불편했던 관계가 그렇게 만들었을 수도 있겠지만, 봉건체제를 타도하려는 그의 혁명이념과도 상충되기 때문에 설령 자랑할 게 있었어도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내세울 만한 조상도 없는 듯하다. 그는 샤오산 마오씨의 시조가 외지에서 흘러들어 왔다고도 생각지 않았던 같다. 그의 전기나 그가 쓴 책 어디에도 그런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마오씨 집안의 조적이 강시성 지수이(吉水)일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7년이 지난 1991년, 샤오산 마오씨의 족보를 오랫동안 연구한 사람의 주장이다. 일이 이렇게 되자 샤오산에 보관돼 있던 마오씨 족보와 지수이의 마오씨 족보를 대조하지 않을 수 없게 됐고, 그 결과 둘이 서로 일치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하여 1996년 7월1일, 105번 국도가 지나는 강시성 지수이현 바두진(八都鎭·鎭’은 우리의 읍에 해당) 마을 입구에 ‘毛澤東祖籍八都’라는 일곱 글자를 마치 제목처럼 적어놓은 높이 3m의 입간판이 세워졌다. 그 아래엔 작은 글자로 이런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고 한다.
“족보와 사료 등을 두루 살펴본 결과 샤오산 마오씨의 원적은 강시 지저우 룽청(龍城), 지금의 강시 지수이현 바두진으로 밝혀졌다. 샤오산 마오씨의 족보에 따르면 전쟁이 끊이지 않던 원말 명초, 마오씨의 비조(鼻祖)가 되는 태화공(太華公·1341년 출생)이 조용한 곳에서 살고 싶어 가족들을 이끌고 강시 지저우 룽청에서 윈난(雲南)으로 이사했다. 그러나 그는 오래지 않아 홍무제(명나라 태조)의 명을 받아 후난 땅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때가 홍무13년인 1380년이었다. 그는 그로부터 10년 뒤 샹탄현 치두치쟈(七都七甲 : 지금의 샤오산)에 정착했고 그 집안에서 마오쩌둥이 태어났다. 태화공으로부터 따져 20대손이다. 이 점에서 샤오산 마오씨 족보의 기록과 지수이 바두의 마오씨 족보 기록은 일치한다.”
홍무제란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을 말한다. 그는 명나라 수도인 난징(南京) 서북쪽 화이수이(淮水)변 작은 마을의 미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야망만은 누구 못지않게 컸다. 당시 중국대륙을 지배하던 원의 세력을 물리치고 한인이 주인 되는 나라를 세우려는 꿈을 키우고 있었다.
그 꿈을 이루려면 먼저 서북방을 공격해야 했지만, 그렇다고 남부를 그냥 둘 수도 없었다. 남부를 자신의 세력권으로 끌어들이지 않고서는 서북부 공격을 지속적으로 해낼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따라서 그는 쓰촨(四川)과 윈난을 손에 넣고자 원정군을 현지로 파견했다. 후일 샤오산 마오씨의 시조가 된 태화공은 그때 자원해서 원정군의 일원이 됐고, 그때의 공로를 인정받아 원정이 성공리에 끝난 다음 ‘백부장(百夫長)’이란 지방 유수 자리에 제수됐다. 중국 최남부에 위치한 윈난 지역이 중국 중앙정부의 통제 아래로 들어간 것은 그때가 처음이다.
당시 양쯔강 이남에는 한인들이 많지 않아 태화공 등은 현지 소수민족 여자들을 아내로 맞았다. 태화공은 그 사이에서 청일(淸一), 청이(淸二) 등 네 아들을 두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남부지방에 돌림병이 나돌아 죽고 병들자 그도 어쩔 수 없이 가족을 이끌고 고향인 룽청으로 되돌아갔다. 몇 년 후 괴질이 잠잠해지고 나서야 청일과 청사 두 아들만 데리고 후난의 샤오산으로 다시 부임했다.
그 뒤로 태화공과 그의 후손들은 샤오산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샤오산은 마오씨의 본향이 됐으며, 그 집안에서 1893년 마오쩌둥이 태어난 것이다. 마오쩌둥이 세상을 떠난 지금 그곳에는 그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생가와 그의 동상, 그리고 기념관이 세워져 방문객들을 맞고 있다.
마오씨들은 물론 강시성 바두진에도 살고 있다. 뒤로 산을 업고 앞으로는 무논을 거느리고 있는 녹색의 바두는 지금도 180여 가구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에 불과한데 마오씨가 그 대부분을 차지한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며 신중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실용주의와 현실주의라고 역설한 덩샤오핑(1904∼97)은 쓰촨성의 작은 마을 광안(廣安)에서 태어난 객가(客家)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덩샤오핑의 맏딸 덩룽(鄧榕)은 ‘나의 아버지 덩샤오핑’에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우리집 사람들은 모두가 쓰촨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나 쓰촨 사람을 대할 때만은 광안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광안은 쓰촨성의 성도(省都)인 청두(成都)로부터 동쪽으로 200여km, 양쯔강의 중심도시 충칭(重慶)에서 북쪽으로 약 100km 떨어져 있는데, 지금의 난충(南充) 지역이 바로 그곳이다. 그곳은 지금까지도 철도가 나있지 않으며, 중요 통로는 여전히 육로와 수로에 의존한다.”
덩룽은 집안의 유래에 대해서도 몇 가지 중요한 단서를 제공했다. 그중 하나가 아버지의 성씨가 과연 덩씨인가 하는 것으로, 여기에 대해선 이런 말을 했다.
“아버지의 생애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연구했지만 우리 집안 내력을 고증한 이는 한 사람도 없다. 우리 조상들이 후베이(湖北)에서 왔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광둥(廣東)의 객가인(客家人)이라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버지가 덩씨가 아니라 원래는 한씨(氏)였다고 하면서 ‘한쩌가오(澤高)’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이런 말들이 하도 많아서 어느 게 맞는지 모를 정도다. 나의 숙부도 어릴 때 ‘덩씨는 후베이에서 이사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족보에 관한 논란도 있다. 명나라 초기부터 기록해온 ‘덩씨 족보’에 따르면 “제1대 선조는 덩허쉬안(鄧鶴軒)이며, 원적(즉 조적)은 강시 지안부(吉安府) 루릉현(盧陵縣)이라는 것이다. 등학헌이 광안에 자리잡은 것은 홍무13년(1380) 병부(兵部) 원외랑(員外郞)의 직위로 촉의 땅으로 들어오면서부터였다”는 것이다. 덩룽은 그 말미에 이런 말도 덧붙였다.
“말하자면 우리 덩씨 가문의 조상은 강시 지안의 루릉 사람이다. 명 태조 때 병부의 원외랑이란 무관을 지낸 분이 쓰촨 광안에 취임하게 되는데, 바로 그 사람이 쓰촨 광안에 덩씨 가문을 세운 것이다. 명나라 이전 덩씨 집안에 관한 사항은 덩허쉬안 사람만이 알 터인데, 아마 다른 사람에게는 알리지 않았던 모양으로 실전(失傳)된 셈이다.”
또 한 ‘광안주신지(廣安州新誌)’라는 씨족지에서 다음과 같은 기록도 찾아냈다고 한다.
“덩씨에 관한 옛 문헌을 보면 선조는 원래 강시의 루릉인데, 명나라 홍무 연간에 허쉬안이란 자가 난징의 병부 원외랑으로 천거돼 쓰촨으로 들어와 광안주 북쪽 야오핑(姚平)에 자리잡았다고 씌어 있다. 그들 조상의 무덤은 전부 야오핑에 있으며 조상을 모시는 사당이 있다.”
광안 덩씨의 시조가 되는 허쉬안이 쓰촨 땅에 오게된 것은 공교롭게도 마오씨의 태화공과 같이 명나라 초기의 일이었다. 다른 점은 덩허쉬안은 태화공과는 달리 병부의 원외랑(덩룽은 이를 낮은 직위로 보았으나, ‘양성일보’는 지금으로 보면 국방부 부부장, 즉 차관급 정도의 직위에 해당된다고 설명한다)이라고 하는 고위직이었다는 사실이다.
주원장은 홍무13년(1380)에 쓰촨 지역을 평정하기 위해 덩허쉬안은 등을 쓰촨 광안 작전에 투입했는데, 원정이 끝난 뒤로 인구가 급격히 줄고 그에 따라 농지가 황폐화하면서 초근목피로 끼니를 때우는 사람들이 늘었다고 한다. 이를 보다못한 주원장은 쓰촨을 그냥 둬서는 안된다고 판단, 곧바로 쓰촨 개발에 들어갔다. 사람들을 대거 쓰촨으로 이주시키고 조정 관료들을 파견하는 등 지역 개발을 독려했다.
덩허쉬안이 광안 야오핑에 정거(定居)한 것도 바로 그때다. 그로부터 625년의 세월이 흐른 뒤인 1904년, 그 집안에서 시셴(希賢)이 태어났다. 덩허쉬안의 19대 손인 그가 바로 덩샤오핑으로서, 시현은 그의 아명이다.
현재 중국의 최고 지도자인 장쩌민(1926∼ ) 주석의 고향은 장쑤(江蘇)성의 양저우(揚州)로 알려져 있다. 그의 전기나 자서전 등이 나오지 않아 그의 집안 내력에 대해서는 그다지 자세한 정보가 없는데, ‘양성일보’는 그의 조적 역시 강시성 우위안(源)이라고 한다.
우엔은 원래는 안후이성에 속했으나 1949년 해방 직후 강시성으로 편입됐다. 황산 아래에 위치한 우엔은 경관도 뛰어나지만 무엇보다 명차(名茶)의 산지로 유명하다. 더욱이 지리적으로도 안후이·강시·저장(浙江)성이 만나는 접점에 자리한 덕분에 예로부터 상업이 발달했고, 자녀교육에도 열성을 보여 우수한 인재들을 대거 배출한 촌락이다. 장쩌민 주석의 일가가 이곳을 떠난 것은 약 120년 전인 그의 조부 시절이다. 조부는 그때 북쪽으로 올라가 양저우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우엔 장완진(江灣鎭)의 장완촌 현지를 답사한 ‘양성일보’ 기자는 현(縣) 위원회 선전부장에게서 장쩌민 주석이 지난해 5월30일 친히 그곳을 다녀갔다는 얘기를 들었으며, 그때 장쩌민 주석이 큼지막하게 써놓고 간 ‘장완(江灣)’이란 글씨가 지금 마을 입구의 용문(龍門) 위에 걸려 있다고 보도했다.
마오쩌둥은 앞서 말한 대로 자기네 조상이나 고향에 대해 특별히 언급한 바가 없고, 생전에 자주 찾지도 않았다. 덩샤오핑 또한 그랬다. 덩룽은 이와 관련하여 ‘나의 아버지 덩샤오핑’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는 고향을 방문하려고 하지 않는다. 하물며 가고 싶어하는 우리들에게도 좀처럼 허락을 안한다. 공연스레 동네사람들에게 폐만 끼치게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아버지 몰래 고모와 함께 아버지의 고향집을 찾았던 얘기를 하면서 그 모습을 이렇게 전했다.
“본채의 큰 문에 걸려 있는 액자에는 ‘덩샤오핑 동지가 살던 집’이라고 단정하게 씌어 있었다. 방에 들어서니 문득 황량한 느낌이 들었다 … 아버지는 예전부터 고향집이 어떻게 됐는지 물어본 적도 없었다. 그러니 고향집에다 기념관을 만든다고 하는 데에는 더더구나 내켜할 리 만무하다.”
한국에선 큰 꿈을 가진 정치인들은 대통령 선거 출정에 앞서 조상의 묘소를 이른바 ‘명당자리’로 옮기는 등 야단법석을 떨곤 하는데, 신중국의 영도자들에겐 그런 구석이 없는 모양이다. 다만 장쩌민 주석만이 조적지를 몸소 찾아 자신이 방문한 흔적을 글씨로 남겨놓았을 뿐이다.
중국인들이 영도자의 조적보다 더 관심을 갖는 것은 자기네 성씨나 집안의 유래다. 그들이 많이 찾는 관광명소에선 으레 ‘성씨의 유래’를 적은 쪽지들을 팔고 있으며, 황산 아래의 민속마을 시디(西遞)에서는 족보 서점도 눈에 띄었다.
그렇지만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그들의 귀성 행렬이다. 우리의 추석 귀성이 장난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들이 ‘춘절(春節·설날)’을 전후해 벌이는 귀성행렬은 이농의 역사가 우리보다 짧아서인지는 몰라도 가히 전쟁을 방불케 한다. 그래서 ‘춘절 귀성을 위해 꼭 알아둬야 할 23가지 요령’이라는 것까지 등장했다. 그중엔 이런 것도 있다.
“기차를 타기 위해 역으로 가는 날은 반드시 몇날 며칠 빨지 않아 더러워진 옷을 입고 가라. 일주일 전부터 양치질을 하지 않는 것도 잊지 마라. 가능하면 대파를 몇 줄기쯤 씹고 가라. 열차를 타고 내리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런저런 것들을 떠올리며 조적 관련기사를 다 읽고 나자 중국인들의 호흡이 긴 까닭이 어렴풋이 잡히기 시작했다. 그들의 조적에서 중요한 것은 조상들 가운데 고위직을 지낸 인사가 얼마나 되나, 다시 말해 출세한 자가 많으냐 적으냐가 결코 아니다. 그들이 궁금해하는 것은 시조가 언제 어디서 어떤 이유로 지금의 땅으로 오게 됐는가 하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해석하게 된 데에는 나름의 근거가 있다. ‘객가(客家)’의 예가 바로 그것이다. 객가란 1000년 또는 2000년 전에 중원의 땅에서 광둥(廣東)이나 푸젠(福建) 땅으로 남하한 집단을 말하는데, 그들은 현지의 언어나 습속 등 토착문화에 동화되지 않고 먼 조상이 처음 고향 땅을 떠날 때 가졌던 언어와 습속을 지금껏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다.
오늘날의 화교들도 이 점에서 다를 게 없다. 세계 어느 곳에 가더라도 화교들의 관혼상제는 동일하다. 객가인이란 가령 광둥지방에 살면서도 광둥어로 말하지 않는 사람으로, 이들은 스스로를 광둥인이라 하지 않고 반드시 ‘객가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객가의 언어는 정체돼 있다. 언어는 일반적으로 시대의 변화에 따라 발음이나 용법이 바뀌게 마련인데, 객가어는 그렇지 않다. 처음 떠나올 때의 상태 그대로 하염없이 이어질 뿐이다. 그러다보니 재미있는 일도 생긴다. 객가어의 하나인 ‘민난어(南語)’에선 감사하다는 말이 일반 중국인들이 사용하는 보통어의 ‘셰셰(謝謝)’가 아니다. 우리가 쓰는 ‘깐싸(感謝)’다. 이를 보면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한자와 그 독음은 조선조 초기 명나라에서 들어온 것이 그대로 고착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변화에 따른다는 것은 현지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고향을 떠난 객가인들이 지금 살고 있는 곳, 즉 이향(異鄕)을 임시 거처로 생각하고 현지 문화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옛 전통을 고집스레 지키며 살아간다면 거기에는 분명 그에 합당한 까닭이 있을 터인데, 과연 그게 뭘까. 우선 생각나는 것은 고향인 중원(中原)의 수준 높은 문화를 향유하고 있다는 자긍심이다. 중원은 문명의 땅이니 당연한 일일 법하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그건 가(家)의 정통성을 이어간다는 자부심의 발로가 아닌가 싶다. 그들에게는 땅도, 국가도 큰 의미가 없다. 그것들은 자신의 집안(家)이 먼저 선 다음에야 비로소 의미를 가질 뿐이다. 그런 그들이라 왕조사의 변혁을 ‘역성혁명(易姓革命)’이라 일컫고, 그리하여 한나라를 유(劉)씨 왕조, 당나라를 이(李)씨 왕조, 송나라를 조(趙)씨 왕조, 명나라를 주(朱)씨 왕조로 구분한다.
그런 만큼 중국인들은 세계 어느 민족보다도 앞서 내 집안과 남의 집안을 구분해왔다. 역사시대의 인물은 말할 것도 없고, 전설상의 황제들에게도 희(姬·黃帝), 강(姜·炎帝), 요(姚·舜帝) 등의 성씨를 붙였다. 이는 아직도 성을 갖지 않은 일본의 천황가와 대조를 이룬다. 일본은 역성혁명을 거친 경험이 전무하므로 천황가를 다른 성씨와 구별할 필요가 없어 지금까지 성을 갖지 않고 있는 것이다.
북송시대 초에 일개 서생이 자주 눈에 띄는 성씨들을 4자1구 형식의 운문으로 지어 읽고 외우기 쉽게 만든 ‘백가성(百家姓)’에 따르면 당시 중국에는 504개의 성씨가 있었다고 한다. 그중 단성이 444개, 복성(두 자 이상으로 된 성)이 60개였고, 성씨별 인구는 ‘조전손이 주오정왕(趙錢孫李 朱吳鄭王)’ 순이었다. 성씨가 3050개나 되는 지금은 이씨가 전체 한족의 7.7%를 차지하여 최대 성씨가 됐고, 그 다음이 7.4%의 왕씨, 7.2%의 장씨 등으로 이어진다.
‘가’의 역사를 중시하는 중국인들은 문명을 기록의 총화로 이해한다. 기록되지 않은 것은 역사가 되지 않으며, 문명 또한 될 수 없기에 가의 기록, 즉 족보와 왕조의 기록인 실록을 중히 여긴다. 그렇지 않다면 사마천(司馬遷)이 각고의 노력 끝에 완성시킨 자신의 역사 저작물에 ‘사기(史記)’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다. 이걸 이해해야만 그가 왜 본기(本紀)·세가(世家)·표(表)·서(書)·열전(列傳)이라는 다섯 가지 각기 다른 역사기술 방식을 한데 묶어 ‘기전체(紀傳體)’라는 특별한 역사기술 방법을 고안해냈는지도 알 수 있다.
본기는 제왕의 행적을 연대기적으로 기술한 것이고, 세가는 제후, 열전은 개인의 활동을 서술한 것이다. 또한 표는 여러 사건의 시간적·공간적인 연관성을 밝혀주고, 서는 문물제도의 연혁과 그 원리를 서술한 것인데, 분명 복잡한 체계라 아니할 수 없지만 인간의 삶과 그 의지를 종합적으로 서술하는 데는 이보다 더 나은 방법이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역사의 구심점이 무엇인가 하고 매달린 끝에 그 방법론으로 사마천이 찾아낸 것이 바로 기전체라는 역사서술 방식인데, 그는 그 해답을 개(個)와 가(家), 그리고 왕조임을 사기를 통해 밝혔다.
사기의 예에서도 보듯이 중국은 역사서의 나라다. ‘춘추’에서부터 시작된 역사서 편찬 역사는 중국문명의 역사만큼이나 장구하다. 역사서의 편찬은 역사의 의미를 밝혀내는 가치 창조의 작업이기도 하지만, 어느 시점의 역사인식을 마치 최고의 해석인 양 고착시켜 후세 사람들에게 주입시키는 역할도 한다. 중국인들이 현실적이 된 것도 어쩌면 눈에 보이는 이런 기록을 중시한 결과 자연스레 형성된 성향이 아닌가 싶다.
나는 이번에 중국을 여행하면서 통역이나 안내인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필담(筆談)만으로 중국인들과 의사를 소통했다. 그들은 내가 무언가를 하얀 메모지 위에 쓰면 한자 한자 눈여겨보았고, 내가 그걸 내밀면 그에 대한 대답이나 자신의 생각을 또박또박 써서 보여주었다. 멋있게 휘갈겨 쓴 사람은 보란 듯이 흐뭇한 표정을 짓곤 했다. 그들은 글을 안다는 사실을 그처럼 자랑하듯 나타내 보였다. 글자를 읽고 쓸 줄 안다는 것만큼 중국인들에게 커다란 긍지를 심어주는 것도 달리 없을 것 같았다.
실제로 중국인들만큼 문자로 많은 기록을 남겨놓은 민족을 달리 찾을 수 없다. 중국에선 어디에 가든 문자가 넘쳐났다. 책이나 비문, 석각, 현판 등은 말할 것도 없고 보잘것없는 물건 하나 사는 데도 영수증이 꼭 따라다녔다. 그들이 쓰는 한자는 뜻글자(表意文字)다. 함축적인 표현이 가능해 소리글자(表音文字)에 비해 많은 자모나 글자가 필요하지 않은데도 중국이 문자로 넘쳐난다면 그 많은 문자들은 도대체 무얼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또한 뜻글자는 소리글자와는 달리 오랜 세월이 흐른다 해도, 얼마간의 공간적인 거리가 있다 해도 그 뜻이 쉬 바뀌지 않는다. 시간과 공간의 벽을 뛰어넘는 힘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긴 호흡을 갖게 된 데에는 한자라는 뜻글자의 존재도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가의 역사가 중시되는 곳에선 효(孝) 또한 숭상된다. 효하면 먼저 떠오르는 게 공자다. 그가 말한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 治國平天下)’에서 가가 천하의 요체라는 그의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공자는 지금으로부터 2500여 년 전 천하가 어수선하던 춘추전국시대 산둥(山東)의 취푸(曲阜)란 곳에서 태어났다. 공자의 고향에는 그의 생가를 토대로 하여 세운 공묘(孔廟)의 대성전(大成殿)과 공씨 일가의 저택과 관공서, 정원이 모여 있는 공부(孔府), 공자로부터 시작해 지금의 77대에 이르는 공씨 집안사람들의 무덤이 들어선 공림(孔林)이 아직도 건재하다.
대부분의 방문자들은 공묘와 공부, 그리고 공림에 있는 공자의 무덤과 그 좌우에 자리잡은 아들 공리(孔鯉)와 손자 자사(子思)의 무덤(이 형상을 흔히 ‘携子抱孫’, 즉 ‘아들을 거느리고 손자를 품었다’고 표현한다) 정도만 보고 취푸를 떠나지만, 나는 공자 후손들의 수많은 무덤과 제 마음대로 자란 떡갈나무가 숲을 이뤄 산야를 방불케 하는 드넓은 공림의 구석구석까지 보고 나왔다. 족보가 종이 위에 쓰여진 조상의 명부라면 조상의 유골이 묻힌 공림은 땅 위에 쓰인 조상의 명부라 할 수 있다. 그만큼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다. 문화대혁명 시절 홍위병들에 의해 공림이 파괴됐지만, 그것은 무덤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공림은 참으로 대단한 규모를 자랑했다.
참으로 조용한 공림에서 나는 공씨 집안 사람들의 유장한 시간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2500여 년 전의 공자를 아득히 먼 과거의 조상으로서가 아니라 마치 지금 살아있는 집안 어른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2500년의 세월을, 심하게 말해서 찰라 정도로 생각할 정도라면 뭘 한답시고 서둘러야 할 까닭이 있겠는가.
더욱 놀라운 것은 중국 관광객들이 취푸를 마치 점령한 듯 가득 메우고 있다는 사실이다. 외국인을 보기는 힘들었지만 관광버스는 전국각지에서 찾아온 관광객들을 연신 토해내고 있었다. 그들은 왜 공자의 고향 취푸를 찾아와 대성전과 공부, 공림으로 연신 발걸음을 옮기는 것일까. 지금의 중국 정부는 ‘1가구 1자녀’를 강요하면서 중국민족이 자랑하는 찬란한 문화유산인 가의 근간을 자꾸만 무너뜨리고 있는 듯한데….
그 이유가 무엇이든 한가지 분명한 것은 ‘공자는 아직 죽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더 정확히 말해 공자는 아직 살아있었다. 바로 그 중국인들의 가슴속에. 그렇다면 가의 역사도 아직 살아있다고 볼 수 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그들은 아직도 긴 호흡을 하고 있다고 말이다. 만만디는 결코 쉬 버려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