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정원의 한 공작팀이 영화 ‘간첩 리철진’에서나 볼 수 있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1998년 이 공작팀은 중국 선양(瀋陽)에서 북한 대외경제위원회 소속 북한인을 불법으로 납치해 와, 안가에서 고문하다가 그를 놓쳐버린 것이다. 국정원의 감시 소홀을 틈타 안가를 탈출한 이 북한인은 1998년 7월16일 새벽 A일보를 찾아가 구원을 요청하고 기자를 만났다…. 이 사건은 러시아 주재 한국대사관의 조성우 참사관 추방사건에 가려 지금까지 공개되지 않았다. 그러나 A일보만은 이 사건의 진실을 알고 있다. 국정원 공작사상(工作史上) 최악의 공작으로 기록될 이 사건의 전말을 공개한다.
이러한 보도가 나가자 많은 독자들이 “사실이냐?”고 물어왔다. 일부 독자들은 “△△일보가 어디냐? 납치돼 온 북한인의 인적 사항을 공개할 수 없는가?”라고 묻기도 했다. 많은 것을 생각하는 독자들은 “국정원에서 항의가 없었냐?”고 물었다. 기자가 “국정원으로부터 항의는 없었다”고 대답하자, 그들은 “사실이구먼”하며 자답(自答)하기도 했다. 일부 독자들은 “노벨평화상 수상자를 배출한 나라에서, 그것도 정보기관의 불법 납치와 고문을 법적으로 금지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국가정보 기관원이 북한인을 불법으로 납치해 왔다니 말이 되는 소리인가” 하며 분개했다.
그러나 의문을 표시하는 독자도 적지 않았다. 어떤 독자는 신동아가 북한인의 신원과 △△일보를 공개하지 않은 것을 들어, “허위 보도가 아니냐?”며 의문을 제기했다. 일부 독자들은 “국정원이 총풍사건을 만들기 위해 북한인을 납치해온 증거가 있냐?”고 따지기도 했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기자로 하여금 2차 취재에 나서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예상보다 많은 방해자들이 나타났기 때문에 2차 취재는 보다 은밀히 추진해야만 했다. 기자는 취재를 하는 과정에서 방해자들과 밀고 당기는 상당한 신경전을 펼쳤다.
2차 취재를 통해 기자는 국정원이 북한인을 납치한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2차 취재에서는 지난 8월호에서 공개하지 못한 북한인의 신원이 정확히 밝혀졌다. 국정원이 불법으로 납치해온 북한인은 중국 랴오닝(遼寧)성 선양(瀋陽)에 머물고 있던 최인수(崔仁洙·1998년 당시 43세)다. 최인수를 기억하는 사람들에 따르면, 그는 외국기업의 북한 투자를 유치하는 북한 대외경제위원회 소속 요원이었다. 최인수를 국정원의 한 공작팀이 불법 납치해온 과정에 대해서는 이 기사 중간 부분에서 밝히기로 한다.
둘째, 북한인 최인수가 국정원 안가를 탈출한 것은 1998년 7월15일 밤이거나 7월16일 새벽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최인수가 7월16일 새벽에 △△일보를 찾아온 데서 유추된다.
셋째,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일보는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있는 ‘A일보’다. A일보로 뛰어든 최인수를 상대로 그가 불법 납치돼온 과정과 고문받은 이야기, 그리고 안가를 탈출하게 된 계기 등을 상세히 취재한 사람은 이 신문 정치부 통일외교팀의 북한문제 전문기자인 이모 기자다. 이기자는 1998년 7월16일 오전 최인수를 세 시간여 동안 취재했고, 최인수의 사진도 찍어놓은 것으로 확인되었다(A일보는 이른바 빅3 신문사 중 한 곳이다).
2차 취재를 통해 기자는 최인수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여럿 만났다. 이들의 기억에 따르면 최인수는 북한의 김형직사범대학 출신으로 영어를 매우 잘하고, 북한인 치고는 매우 드문 6척 장신이다.
김형직사범대 출신
북한 대외경제위원회에 적을 둔 최인수는 인민학교(한국의 초등학교에 해당) 교사인 부인과 두 아들을 북한에 둔 채, 중국 선양(瀋陽)과 옌지(延吉)에 주로 머물며 외국기업의 북한 투자를 유치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선양과 옌지에 머물기 전에는 마카오와 러시아에도 머문 것으로 확인되었다. 최인수는 대외경제위윈회 일과는 별도로 북한에서 밀반출한 골동품을 한국의 고미술상들에게 밀수출하는 장사를 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본업을 이용해 부업을 한 것이다.
북한 골동품을 밀반출하는 과정에서 그는 국정원 요원들과도 접촉했다. 국정원의 한 공작팀은 정기적으로 최인수를 관리하며, 골동품 거래를 미끼로 최인수에게서 북한 정보를 뽑아내온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최인수는 국정원에 협조하는 ‘망원’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최인수는 꾀가 많아 국정원 직원들을 골탕 먹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때문에 최인수를 손보고 싶어하는 국정원 직원들도 꽤 있었다고 한다.
최인수에게 ‘불행의 그림자’가 드리운 것은 1998년 6월말 혹은 7월초인 것으로 보인다. 최인수는 북한에서 밀반출한 골동품 중 일부를 외상으로 한국 고미술상에게 공급해 놓고 있었다. 그런데 이 시기 평소 최인수와 거래해오던 국가정보원의 관계자가 “외상으로 깔아놓은 골동품 값을 받게 해줄 테니 잠깐 서울에 들어가자”고 제의했고, 최인수는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정보기관 요원은 크게 외교관으로 위장해서 나가는 ‘화이트(white)’와, 상사원 등으로 위장해서 나가는 ‘블랙(black)’이 있다. 화이트는 공식적으로는 외교관이기 때문에 면책 특권이 있다. 그러나 외교관이니만큼 이들의 신분은 주재국에 정확히 통보된다. 신분이 노출되기 때문에 이들은 주재국 정보기관에 정보기관 출신이라는 것을 알린다.
주재국 정보기관은 이렇게 자진 신고한 정보요원에 대해서는 정기 혹은 부정기적으로 만나주며, 서로 필요로 하는 정보를 주고받는다. 화이트는 양국 정보기관간의 교류를 이어주는 공식 창구인 것이다.
외상값 받아준다며 유인
블랙은 주재국 국가정보기관에 통보되지 않은 첩보원이다. 이들은 주재국이 공개하기 싫어하는 첩보를 수집하는 데 주로 투입된다. 때문에 주재국의 정보기관은 다른 나라에서 파견한 블랙을 추적하는 데 많은 신경을 쓴다. 블랙은 비밀공작을 하는데 유리하다. 하지만 이들은 면책 특권을 가진 외교관 신분이 아니기 때문에, 주재국 국가정보기관에 걸려들면 간첩죄 등으로 기소된다는 부담이 있다.
선양은 조선족이 많이 살고 탈북자들도 많은 중국 동북3성의 중심지다. 때문에 한국은 중국 정부에 대해 이곳에 한국영사관의 설치를 허가해 달라고 요구했다. 북한은 선양에 영사관이 있다. 북한은 중국 외교부에 “선양에 한국영사관을 허가하지 말라”고 압력을 넣었다.
선양과 완전 반대되는 경우가 홍콩이다.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것은 1997년 7월1일인데, 홍콩이 반환되자 북한은 “홍콩에 북한영사관 설치를 허가해 달라”고 요구했다. 홍콩에는 오래 전부터 한국의 총영사관이 있다. 한국은 중국 정부에 대해 홍콩 주재 북한영사관의 설치를 허가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이러한 와중이었기 때문에 1998년 선양에는 한국영사관이 없었다. 하지만 1994년 12월부터 중국 선양에 정기편을 취항해온 대한항공은 선양에 지점을 두고 있었다. 국정원은 대한항공 선양지점을 동북 3성에 투입한 블랙 지휘 거점으로 활용했다(한국이 선양에 영사관이 아닌 영사사무소를 설치한 것은 1999년이다).
이러한 블랙 중 한 팀이 최인수와 접촉해왔고 이 팀이 최인수에게 “깔아놓은 골동품 외상값을 받으러 서울에 가자”고 제의한 것이다. 그러나 북한인인 최인수가 한국행 비행기를 탄다면 선양공항 출입국관리국 직원들이 수상히 여길 수밖에 없다.
항공사 직원은 출입국관리국 등을 거치지 않고 전용루트로 출국장에 들어갈 수 있다. 국정원 공작팀은 이 루트를 통해 요원과 최인수를 선양공항 출국장에 보냈다. 그리고 별도의 자동차를 이용해 계류장에 대기중인 대한항공기로 옮겨가 탑승했다(반면 다른 일반 승객들은 출입국관리국 등을 거쳐 출국장에 나온 후 버스를 타고 대한항공기에 탑승했다).
최인수를 태운 이 비행기는 아무일 없이 이륙해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김포공항에는 국정원이나외교통상부 요원들이 입국절차 없이 들어오는 별도의 입국 루트가 있다(자국의 첩보원과 외교관이 비밀리에 드나드는 루트는 세계 어느 나라 공항에나 다 있다).
때문에 국정원 요원들과 최인수는 선양공항과 김포공항에 각각 출국과 입국 기록을 남기지 않고 서울에 들어올 수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최인수는 말로만 듣던 서울을 구경하고 외상값을 받아 선양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꿈은 국정원 공작팀이 그를 서울 서초구 내곡동 국정원 청사 부근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안가로 데려가면서부터 산산이 부서졌다(최인수를 조사한 안가가 청사 부근에 있었던 것은 여러 취재원으로부터 확인되었다). 이 안가는 2층 건물이었는데, 2층에 있는 방으로 안내된 최인수는 밤에 덮고 잘 담요 한 장과 사발면 한 그릇을 받았다.
이때부터 국정원의 공작팀과 안가관리팀, 탈북자를 전문으로 조사하는 팀이 교대로 방에 들어와 최인수를 조사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최인수는 골동품 값은 받아주지 않고 왜 조사를 하냐며 거칠게 항의했다. 덩치가 크고 힘이 좋고 성격마저 억센 최인수는 마구 대들었는데 이것이 화를 불렀다. 그렇지 않아도 그를 얄밉게 봐온 국정원측이 손을 보기로 한 것이다.
최인수는 상당한 구타를 당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자 최인수는 자살할 생각으로 마침 자기 앞에 있던 가스 라이터를 삼켰다. 1998년 7월16일 A일보를 찾아왔을 때 최인수의 뱃속에는 이 라이터가 그대로 들어 있었다.
이렇게 버티는 사이 최인수는 적잖은 거짓말을 둘러댔다. 확인 결과 최인수의 말이 거짓이라는 게 밝혀지자 국정원 팀은 고문의 강도를 좀더 높였다. 최인수는 억울하다고 버티며 거짓말을 하고, 국정원 팀은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하며 폭행과 고문의 강도를 올리는 악순환이 벌어진 것이다(국정원이 최인수에게서 뽑아내려고 한 정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기로 한다).
시간이 흐르자 국정원은 최인수를 잘못 데려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최인수는 애초 그들이 기대했던 정보를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국정원 측은 최인수를 신문할 의지를 잃어갔고, 자연 최인수에 대한 감시가 소홀해졌다.
1998년 7월15일 날이 저물고 밤이 찾아왔다. 이날 밤 국정원 직원들은 긴장이 풀렸는지 최인수를 조사실에 혼자 두고 어디론가 몰려나갔다(단체로 저녁 회식을 하러 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최인수의 몸을 묶어놓지도, 조사실 문을 잠그지도 않았고, 안가의 문도 잠그지 않고 나가버렸다. 이때 상처투성이인 최인수는 반바지와 러닝셔츠만 걸치고, 발에는 슬리퍼를 꿰고 있었다. 국정원 직원들이 사라진 것을 안 최인수는 조사실 문을 열고 나왔다. 그리고는 짙게 어둠이 깔린 1층 마당으로 뛰어내렸다.
크게 긴장한데다 어둠마저 짙었으므로 최인수는 마당에 떨어지는 순간 발을 헛디뎌 한쪽 발목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슬리퍼마저 잃어버린 최인수는 부러진 다리를 이끌고 안가를 둘러싼 담 쪽으로 접근했다. 안가는 높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으나, 신기하게도 담장 한쪽에 있는 문이 열려 있었다. 최인수는 이 문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와, 논틀밭틀을 지나 끊임없이 자동차 불빛이 달리고 있는 도로가로 접근했다.
최인수는 비록 서울은 초행이지만, 오랫동안 해외생활을 해온 관계로 택시를 세워 탈 줄 알았다. 운 좋게도 그는 야밤 도로를 질주하는 빈 택시를 잡았다. 한국 형편에 대해 대충 알고 있던 최인수는 야당 당사로 가면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한나라당으로 가자”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여의도에 있는 한나라당 에 도착했을 때 당사의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그러자 최인수는 다시 “A일보로 가자”고 했다고 한다. 최인수는 왜 A일보로 가자고 했을까.
기자는 2차 취재를 하며 처음으로 A일보 이모 기자를 만나 많은 것을 물어보았다. 그러나 이기자는, 기자가 취재해온 것을 설명하며 “이런 일이 있지 않았냐?”고 물을 때만 “그렇다”고 대답했다. 사실 여부만 확인해줄 뿐 그만이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밝히지 않으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기자는 “최인수는 왜 A일보를 찾아갔냐?”란 질문에 대해서는 자기도 궁금해서 최인수에게 물어보았다며 이렇게 설명했다.
“나도 최인수가 A일보로 찾아온 이유가 무척 궁금했다. 그래서 ‘왜 택시기사에게 A일보로 가자고 했냐’고 물어보았다. 최인수의 설명은 ‘북한에서 가장 큰 언론은 조선중앙방송이고 중국에서는 중앙전시대(中央電視臺·CCTV)다. 따라서 한국에서도 A일보가 가장 클 것이라고 생각해, A일보로 가자고 했다’고 설명하더라. 그는 자신의 억울함을 밝히기 위해 A일보를 찾아온 게 아니라, 언론사로 피신하면 목숨을 건질 수 있다고 판단해, A일보로 온 것이었다.”
A일보에 도착했을 때 최인수는 반바지에 러닝셔츠 차림의 맨발이었므로 일전 한푼 없었다. 최인수는 A일보 경비원을 붙잡고 “조선족인데 억울한 사정이 있어 기자를 만나러 왔다”고 사정했다. 경비원은 차비를 대신 내주고, 그를 편집국으로 데려갔는데 이때가 대략 7월16일 새벽 3시쯤이었다.
“잃어버린 사람 있소”
이 시간이면 조간신문 편집국은 시내판 마감을 끝낸 뒤라 매우 조용하다. 편집국장을 대신한 야간 데스크와 기자들은 소파에 누워 잠을 청하고, 한두 명만이 바둑을 두거나 외국 TV를 시청하며 아침을 기다린다. 최인수를 맞은 것은 이렇게 날밤을 새던 기자들이었다. 최인수는 기자들에게 골동품 장사를 하는 조선족인데 억울한 사연이 있어 찾아왔다고 밝혔다고 한다.
기자들은 북한전문 기자인 이기자를 불러들일 생각을 했으나, 새벽에 이기자를 깨울 만큼 급한 일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최인수를 한쪽 회의실로 안내한 후 담배와 음료수 등을 갖다주고 아침까지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리고 날이 밝자 전화를 해, 오전 7시쯤 이기자가 편집국에 도착해 최인수를 만났다. 이때부터 약 3시간 가량 이기자는 최인수를 여러 각도로 취재했다. 국정원 관계자를 통해 확인한 사실이지만, 이때 이기자는 고문으로 인해 상처투성이가 된 최인수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3시간 동안 취재를 하고 난 이기자는 다른 것은 몰라도 국정원의 안가를 탈출했다는 최인수의 주장만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국정원측에 “잃어버린 사람이 있냐”고 전화를 걸었는데, 그 순간 국정원은 “있다”며 반색을 했다.
그 직후 해외공작을 담당하는 모(某)국 요원과 공보 관계자들이 A일보로 달려와 최인수를 데려가려고 했다. 당황한 것은 A일보와 이기자였다. 국정원측은 최인수를 데려감과 동시에 A일보에게 이 일을 기사화하지 말아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이때 국정원장은 정치인 출신의 이종찬(李鍾贊·65)씨고, 북한과 해외를 담당하는 제1차장은 학자 출신인 나종일(羅鍾一·61)씨, 최인수를 한국으로 불법납치해온 팀의 국장은 공군장교 출신의 C씨였다. 최인수의 신병을 인수한 국정원은 즉시 공보보좌관을 중심으로 회의를 열고 대책마련에 들어갔다.
A일보로부터 최인수 사건을 보도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국정원은 다른 언론사가 이 사실을 알고 보도하는 것을 막는데 진력했다. 이를 위해 국정원은 주요 언론사의 편집·보도국장을 강북 롯데호텔로 초청해 간략히 “공작을 하는 과정에서 북한인을 데려와 조사했는데 잘못돼서 이 자(者)가 탈출해 A일보를 찾아가는 사건이 있었다. 북한인을 데려온 것이 알려지면 국익에 큰 손해가 일어나니 보도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보도 막은 국정원
자초지종을 알지 못하는 타사 국장들은 국정원이 대북공작을 하는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던 것으로 이해하고 국정원의 요구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때는 국민의 정부가 출범한 지 채 5개월도 되지 않은 때라 언론과 정부 사이는 비교적 원만했다.
최인수 사건을 모르는 다른 언론사라면 몰라도 A일보의 이기자만은 그후에라도 이 사건을 보도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기자는 “최인수 사건을 보도하고 싶지 않았는가?”란 질문에 대해서도, 예외적으로 자신의 심정을 피력했다.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지 채 5개월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국정원의 북한인 불법 납치와 고문, 그리고 북한인의 탈출 사실을 보도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만약 그때 최인수가 신동아로 뛰어들었다면, 신동아는 최인수 사건을 보도할 수 있었겠는가? 나는 최인수 사건을 특종으로 취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지만, 시기가 시기니만큼 특종으로 보도할 기회는 갖지 못했다.”
국정원이 최인수를 데려갈 때 이기자는 국정원측에 두 가지를 부탁했다고 한다. “어찌되었건 최인수는 살기 위해 A일보로 뛰어든 사람이다. 그러니 최인수를 데려가되 그의 신변안전을 보장해 달라, 또 최인수의 신병을 어떻게 처리했는지에 대해서도 투명하게 알려달라.”
국정원측은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으나 불행히도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국정원은 최인수의 신변을 끝까지 보호해 주지 않았다.
소식통에 따르면 그후 국정원은 최인수를 귀순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했다고 한다. 귀순을 시키더라도 최인수는 고(故) 이한영(李韓永)씨처럼 나중에 언론사를 찾아가 “나는 국정원에 의해 불법으로 납치돼 왔다”고 떠들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다.
이런 점을 고려한 국정원은 6개월 후 서울로 데려올 때의 역순(逆順)으로 최인수를 은밀히 선양으로 다시 집어넣었다. 그 얼마후 최인수는 북한으로 들어갔는데 그후 최인수에 관한 소식은 완전히 끊어졌다. 그러자 선양에서는 “최인수는 북한에 끌려가 그곳에서 처형되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최인수 사건 당시 안기부 간부였던 B씨는 이와 관련해 “북한에 들어간 후 최인수의 생사 여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최인수는 우리가 쓰던 망원인데 말을 듣지 않아 데려왔다”고 말했다.
불법으로 데려온 최인수를 고문하다 놓쳐서 언론사까지 찾아가게 했다면, 이러한 잘못을 한 공작팀에 대해서는 문책이 있었어야 한다. 더구나 최인수 사건을 일으킨 국(局)의 실수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최인수 탈출사건이 일어나기 불과 1주일여 전인 1998년 7월4일 러시아의 연방보안부(FSB)는 주러시아 한국대사관의 조성우(趙成禹) 참사관을 ‘기피인물(persona non grata)’로 규정해 72시간 내 출국하도록 요구했다.
조참사관은 외교관으로 위장해 러시아에 나가있던 국정원의 화이트였다. 러시아 연방보안부는 조참사관이 발렌틴 모이세예프 러시아 외무부 아주국장에게 정기적으로 금품을 제공하고 러시아정부의 비밀문건을 건네받은 것을 포착했다. 그러나 조참사관이 면책특권을 가진 외교관 신분이기 때문에 추방령을 내린 것이었다.
스파이 세계에서 정보를 빼내려다 걸리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때는 재빨리 ‘잘못했다’고 사과하고 사건을 최소화하는 게 현명한 처사다. 그러나 국정원은 오만을 부렸다.
주한 러시아대사관에는 러시아 해외정보부(CSV)의 화이트인 올레그 아브람킨 참사관이 있었다. 한국은 아브람킨 참사관이 불법활동을 한 것이 포착되지 않았는데도 ‘기피인물’로 규정해 72시간 이내에 한국을 떠나라고 맞대응한 것이다. 이에 대해 러시아는 “우리가 잘못한 게 무엇이냐”며 거세게 항의했으나, 아브람킨은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한국은 자존심을 회복하고, 역사상 최초로 외교관을 추방한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참사관을 맞추방한 것은 그후 한·러 관계를 매우 힘들게 하는 요소가 됐다. 이후 러시아는 모스크바까지 찾아간 탈북자들이 유엔난민구제고등판무관실에서 난민 판정을 받아도 다시 북한으로 송환시키는 등, 사사건건 한국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국정원은 러시아를 달래기 위해 해군에 대해 ‘러시아제 킬로급 잠수함을 도입하라’고 제안하는 무리수를 두었다. 자존심을 세우려다 손해만 보게 된 셈이다.
조참사관 사건에서 비롯된 외교관 맞추방 조치를 추진한 국(局)이 바로 최인수 사건을 일으킨 공작팀이 속한 국이다. 한 국에서 1주일여의 사이를 두고 연속해서 불미스러운 사건이 일어났으면 최소한 국장에 대해서는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러나 C국장뿐만 아니라 이 국의 중간간부들은 전혀 책임추궁을 받지 않았다. 국정원은 다만 최인수 사건을 아는 외부인들에게 “이 사건과 관련해 국장과 과장 등이 인사조치되었다”는 소문만 퍼뜨렸다. C국장은 1999년 5월26일 천용택(千容宅)씨가 이종찬씨 후임으로 국정원장이 된 후 간부들을 물갈이할 때 조용히 퇴직했다.
대한항공 선양지점장 체포
천용택씨가 국정원장에 취임한 바로 다음날(1999년 5월27일) 놀라운 소식이 선양에서 날아왔다. 대북공작의 전초기지 사령관인 대한항공 선양지점장 원용수(元容秀·39)씨가 간첩죄 혐의로 중국의 국가정보기관인 국가안전부에 전격 연행된 것이다. 중국의 국가안전부는 6개월여 동안 종적이 묘연했던 최인수가 어느날 갑자기 선양에 나타난 것을 알고 조사에 들어가 국정원이 그를 납치해 데려갔다가 돌려놓은 사실을 확인했다. 중국인은 물론이고 중국에 거주하는 외국인을 중국의 허락을 받지 않고 제3국이 마음대로 데려간 것은 중국의 주권을 침해한 것이 된다.
주권 침해를 당하고도 가만히 있을 나라는 없다. 중국 국가안전부는 보복을 결심한 듯 원용수 지점장 주변을 조사하다, 천용택 원장이 취임한 바로 다음날 전격적으로 원지점장을 연행했다. 국정원 직원이 중국 국가안전부에서 조사를 받게 되면 상당한 비밀이 누설될 수가 있다. 또 그가 간첩죄로 중국 법정에서 신문을 받게 되면, 한국의 국가 비밀은 법정 진술을 통해 만천하에 공개될 수밖에 없다. 당황한 국정원은 즉각 중국 국가안전부와 협상에 들어갔다. 중국의 국가안전부는 원지점장을 석방해줄 테니 국정원이 중국에 침투시킨 블랙 요원을 전부 철수시키라고 요구했다.
국정원은 이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연행 11일 만인 6월7일 원지점장은 한국으로 추방되고 이어 중국에 심어놓은 국정원의 블랙 요원들이 대규모로 철수했다. 최인수 사건을 잘못 다룸으로 인해 국정원은 애써 구축해 놓은 공작망까지 다 잃게 된 것이다. 그러나 최인수 사건에서 비롯된 일련의 실수에 대해 책임지는 사람은 없었다. A일보가 취재한 이상 최인수 사건은 언젠가 공개될 수밖에 없는 것인데도, 전전긍긍하며 보도를 막는 데만 주력했다.
이제 남은 의문은 과연 국정원이 총풍 사건을 만들기 위해 최인수를 납치해 왔냐는 부분이다. 총풍사건은 1997년 12월 베이징의 캠핀스키 호텔에 간 장석중·한성기씨가 북한인을 만나 15대 대선 직전 한나라당 후보에게 유리하도록 판문점에서 사격을 해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 요체다. 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국정원이 장석중·한성기씨 등을 국정원으로 불러들여 조사한 것은 1998년 9월초다. 그리고 10월1일부터 도하 언론에 크게 보도되면서 이 사건은 세상에 알려졌다. 반면 최인수 탈출 사건이 일어난 것은 장석중씨 등이 국정원 조사를 받기 두 달 전인 그해 7월16일이었다.
국정원의 한 소식통은 “당시 국정원은 최인수를 통해 장석중씨 등이 총격을 요청한 증거를 잡으려 했다. 그러나 최인수는 1997년 12월 장석중을 만난 사실이 없었다. 그 바람에 장석중씨 등을 정말로 모르냐고 압박을 가해 폭행이 일어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장석중씨도 “내가 최인수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1997년 12월 훨씬 이전이다. 국정원 공작팀이 총풍사건에 대한 혐의를 잡기 위해 최인수를 납치해 왔다면 크게 잘못 판단한 것이다”고 말했다.
총풍사건 재판에서 원고는 검찰이다. 하지만 총풍 사건을 1차로 수사해 검찰에 넘긴 것은 국정원이다. 검찰은 장석중씨 등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등으로 기소했는데 국가보안법 위반사항은 1심에서는 유죄였으나 2심에서 무죄가 되었다. 그러나 남북교류협력법을 위반한 것은 인정돼, 장씨 등은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이에 대해 장씨 등은 남북교류협력법도 위반한 사실이 없다며 대법원에 상고해 놓고 있다. 총풍사건은 보안법 위반여부가 핵심 쟁점인데 이 부분은 일찌감치 무죄 판결이 나온 것이다. 따라서 국정원이 최인수를 납치해 총풍사건 증거를 포착하려 했다면, 최인수 납치에 관여한 사람들은 납치와 고문 혐의 외에도 무고(誣告) 혐의를 받을 수도 있다.
북한 반격에 대한 대책은 있는가
최인수를 조사했던 국정원 관계자들은 한사코 총풍사건을 만들기 위해 최인수를 납치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B씨를 비롯한 당시의 국정원 간부들도 최인수와 총풍사건 부분만은 연관이 없다고 주장한다. 최인수는 국정원이 그를 납치해온 것이 총풍사건과 관련 있는 것인지를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증인이다. 그러나 그는 북한으로 들어간 후 생사가 불분명한 상태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총풍사건과 최인수 사건은 연결고리를 찾을 수 없다’고 판단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국익(國益)을 위해서라면 정보기관은, 귀순의사가 없는 북한인도 납치해 올 수 있어야 한다. 정보기관의 공작은 원래 그런 것이다. 그러나 납치한 북한인을 감시 소홀로 놓치고 탈출한 북한인이 언론기관을 찾아가게 한 것은 용서하기 힘들다. 귀순하지 않는다고 다시 중국으로 돌려보낸 것은 무슨 조처인가. 만약 북한이 이렇게 해서 돌아온 최인수를 내세워 “햇볕정책을 펼친다는 한국의 정보기관이 북한인을 불법으로 납치해 고문했다. 한국은 인권유린 국가다”라고 떠든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이러한 위험을 차단하고 국정원이 국익을 위해 공작할 수 있는 기강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라도 최인수 사건은 더욱 철저히 조사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