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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주도 국제금융 시스템의 위기

프랑스 조절학파의 태두 미셸 아글리에타

미국 주도 국제금융 시스템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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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셸 아글리에타는 지금 세계를 풍미하고 있는 미국 경제학 사조의 흐름에서 벗어나 있는 인물이다. 그는 시장의 무제한적인 자유와 개인간의 무한경쟁을 추구하는 이른바 신자유주의 사조가 세계적 금융위기를 불러왔다고 지적하며, 시장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규율을 강조하는 조절이론(Regulation Theory)을 창안했다. 이 글은 전체 세 단락으로 나누어 1부에서 미셸 아글리에타의 학문과 사상 전반을 조망하고, 2부에서 곧 출간될 그의 저서(제목 미정)에 수록될 논문 한 편, 3부에서는 유럽연합의 향후 진로와 관련해 그가 프랑스 언론과 한 최근 인터뷰(‘Alternatives Economiques’ 41 특별호)를 소개한다.<편집자 주> 》
프랑스 당대 최고의 경제학자로 손꼽히는 미셸 아글리에타(Michel Aglietta)는 파리 10대학 교수이며 CEPII(총리 산하 국가연구기관)와 프랑스 중앙은행 고문으로 일하고 있다. 특히 조스팽 정부하에서 구성된 경제분석위원회에 참여해 현실에서 정책적 대안을 모색하는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아글리에타의 작업은 이론과 정책, 역사와 현실, 화폐와 실물세계의 접속을 추구하는 것에 중심을 두고 있으며, 이것이 좌파적 기반에도 불구하고 그의 연구 결과가 모든 이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이유가 될 것이다.

프랑스 알프스 지역의 사브와(Savoie)에서 중소기업가의 아들로 태어난 아글리에타는 프랑스의 최고 엘리트 과정을 착실하게 밟았다. 이공과대학인 에콜 폴리테크니크에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그는 자신의 문제의식을 더욱 구체화하기 위하여 ENSAE(경제응용통계 국립학교)에 진학, 자신의 학문세계를 넓혀 나갔다.

이러한 학습과정은 아글리에타 이론의 이면에 깔려 있는 경제학적 소양, 역사적 관점, 그리고 수학과 계량경제학에 대한 뛰어난 이해의 기초가 됐다. 드골이 주도한 국가경제 개발계획의 열기가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사회발전에 대한 낙관주의가 풍미하던 60년대에 그는 공적 부문과 사적 부문을 지배하는 사회 권력들이 모여 국가의 경제정책을 결정하는 협상포럼인 제6차 국가경제개발계획에 참여하기도 했다.

프랑스 조절학파의 태두

현실적 정책결정 작업을 경험한 아글리에타의 관심은 제도와 조절이라는 개념으로 옮겨갔다. 70년대 초 하버드 대학에서 2년을 보낸 그는 미국 경제 분석에서 고전으로 평가받는 저서 ‘자본주의의 조절과 위기’를 쓰고 프랑스 조절학파의 초석을 세웠다.

여기서 조절이란 영미적 의미에서의 규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복잡한 시스템을 균형상태로 유지하게 한다는 의미로 쓰이는 개념이다. 즉 조절이란 다양하고 이질적인 경제과정들이 필연적 혹은 우연적 요소들과 결합돼 하나의 경제 시스템을 유지·발전시키는 방식이며, 여기서 ‘조절양식’이란 개념이 파생된다. 조절양식은 국민경제 내부에서 자본의 축적으로 인해 발생하는 갈등을 완화하면서 사회적 응집력을 유지해주는 구실을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2차 세계대전 후부터 70년대 초반의 황금기를 주도한 ‘포디즘’이었다.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에 이해관계의 모순을 증폭시키는 자본의 축적과정은, 이윤의 분배를 둘러싼 노·자 간 협상과정을 거치면서 임금 상승을 통해 부를 재분배하고, 이는 대중적인 수요 증가와 이에 따른 투자 증가를 초래하면서 성장을 유지한다.

조절이론의 관점에서 볼 때 자본주의란 각국의 역사적·사회적 상황에 따라 다르게 생성되고 발전한다. 따라서 조절이론은 나라에서 상이하게 진행되는 자본주의를 분석하기 위해서 자본주의의 역사와 제도적 연구에 핵심적인 중요성을 부여한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의 발전형태는 한 가지일 수가 없다는 것이며, 이런 점에서 조절이론은 순수한 가정(假定)으로 존재하는 ‘비역사적인 사회’를 수학적 도구만 갖고서 분석하는 신고전학파적 방법론과 구별된다.

조절이론의 분석은, 한편으로는 마르크스 ‘자본론’ 이후 한 세기 이상 진행된 자본주의의 경제적·제도적 차원의 변화를 고려하는 마르크스주의적 분석관점을 다시 취하는 것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조절이론은 경제균형을 결정하는 수요와 화폐의 구실에 주목한 케인스의 분석에 영향을 받았다. 즉 수요는 경제성장의 핵심 고리며, 화폐는 경제 외부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단순한 교환수단이 아니라 경제활동 내에서 신용 형태로 주어지는 필연적 산물로서 경제활동의 조건에 실질적인 영향을 끼치고 산업적 측면과 금융적 측면을 연결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글리에타는 ‘프랑스의 포스트 케인지안’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아글리에타가 창설한 조절학파는 프랑스 좌파 경제학의 주류를 형성하면서, 동시에 세계 경제학계에서 중요한 하나의 맥을 이루고 있다.

‘화폐의 폭력’에 담긴 철학

50∼60년대에 국가는 금융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그것을 산업투자에 배분하는 방식으로 경제성장을 유도하는 중심 역할을 담당했다. 거의 폐쇄적이었던 하나의 국민경제 내에서 물가는 상승하고 이것이 투자를 촉진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시스템의 유지와 성장에 도움이 되던 이런 방식의 물가상승은 시스템 작동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소유한 부의 가치가 인플레이션으로 침식당하는 것에 염증을 느낀 저축자들은 그들의 돈을 더 잘 보호할 수 있는 좀더 경쟁적인 시스템을 모색했다. 이것이 바로 80년대 금융자유화의 파도였다. 경쟁에 의거한 새로운 조절이 나타난 것이다.

여기에 아글리에타는 더욱 구체적으로 화폐의 구실을 통합하면서 자신의 화폐론을 발전시켜 나갔다. 거의 철학적인 관점에서 쓰인 저서 ‘화폐의 폭력’에서 그는, 화폐는 교환을 은폐하는 투명한 베일이 아니라 상품경제에 존재하는 기본적인 사회 관계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마르크스의 논리와는 반대로 화폐는 논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상품관계 이전에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서 아글리에타의 이론체계에서 마르크시즘은 사라지게 된다. 화폐가 사회와 개인을 연결하는 핵심적인 사회관계라는 것은, 개인이 화폐에 의해 상품화되며 개인의 경제활동 가치는 화폐를 통해 평가된다는 의미다. 이러한 화폐가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통용되는 것은 화폐에 대한 집단적(혹은 종교적) 신뢰에 근거한 지불공동체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현대사회에서는 이것이 국가 주권을 기반으로 한 중앙은행의 독점적 화폐발행으로 표현된다. 따라서 아글리에타에 따르면 경제학은 수학적 기법에 근거한 순수한 과학일 수 없다. 경제의 기초인 화폐가 경제학적 논리의 바깥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앙은행의 중요성 역설

80년대의 급격한 금융자유화와 세계화는 그의 관심을 자연스럽게 금융부문으로 향하게 했다. 시장의 불안정성과 불완전성은 경제 주체들이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기보다는 리스크를 보편적인 위기로 확장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가져온다. 한 은행의 파산이, 다른 은행도 파산할지 모른다는 예금자들의 불안을 증폭시켜서 폭발적인 예금인출 사태가 벌어지고, 은행시스템이 마비되는 것이 하나의 예가 될 수 있다.

금융자유화와 세계화는 시장의 불완전함을 더욱 가속시킨다. 자본의 국제적 흐름은 통화 당국에 어떠한 통제 가능성도 허용하지 않는다. 즉 세계적 차원의 위기가 금융시스템 내부에 항상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글리에타는 영미권에서 주류를 이루는 자유주의적 경향과는 달리, 국제금융 시스템은 최소한의 안정을 유지할 필요성이 있다고 강조한다. 그것이 단지 금융시장을 효율적이게 하는 것에 불과할지라도, 즉 그것이 가장 이윤이 많이 나는 곳에서 돈을 관리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시스템의 위기는 막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과거 시절의 강제적인 통제로 다시 복귀할 수는 없으며, 또 정부들간의 협력은 그 복잡하고 상이한 이해관계 때문에 오래 지속될 수 없다.

따라서 그는 물가안정을 정책목표로 하고 금융시장에 대한 이해에 기반하여, 시장에 올바른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단기 금융의 과도한 유동성을 제한하고, 사적 금융주체들과 협력하여 국가의 금융시장을 감독하는 중앙은행을 조직적 대안의 하나로 제시한다.

이를 위해서 중앙은행의 독립성 확보는 핵심적 과제다. 중앙은행은 다른 어떤 경제주체보다도 빨리 경제흐름을 파악하고 위기 가능성을 진단하여 적절한 처방을 내릴 수 있다. 특히 유동성 위기에 직면할 경우 화폐발행권을 가진 중앙은행은 ‘최종 대부자’로서 위기 확산을 막을 수 있다. 80년대 중반 이후에 쓰인 그의 많은 논문은 중앙은행과 시스템의 위기관리 방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아글리에타의 이러한 작업은 금융 변화에 대한 열정적이고 명쾌한 분석을 제공하는 ‘금융거시경제’에 나타났으며, 이 책이 출판된 1995년에 프랑스 경제경영 잡지인 ‘신(新)경제학자’는 그를 ‘올해의 경제학자’로 선정했다.

아시아 경제위기는 국제금융 시스템 관리에 대한 그의 관심을 더욱 촉진하는 계기가 됐다. 그에게 위기를 관리하기 위한 핵심 처방은 ‘신중한 정책’과 위기를 관리할 ‘제도적 장치’를 설립하는 일이다. 여기서 ‘신중한 정책’이란 금융시스템을 강화하기 위한 제반 정책을 말한다. 예를 들어 예금보험이나 은행의 자기자본비율 등이다.

아글리에타가 수행한 금융위기의 역사분석에 따르면, 국제 차원에서는 최종 대부자가 필요하다는 합의와 이를 위한 제도만으로는 최종 대부자(즉 국제 차원의 중앙은행)를 설립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국제 차원에서는 정치권력에 의해 정당성을 부여받은 화폐 권력인 중앙은행이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한 가지 대안은, 국제결제은행 내에 각국 중앙은행들이 협력하면 금융시장에 개입함으로써 위기를 해결해가는 방식이다. 다시 말해 이들이 비록 모호한 형태나마 국제 차원의 최종대부자 노릇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글리에타의 이런 견해를 뒤집어보면, 미국 자본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계약에 근거해 유동성을 공급하는 국제통화기금에 대한 비판이 될 수 있다. 그에게 국제 차원의 최종 대부자는 어떤 특정 국가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국제적 차원에서 지불시스템의 연속성을 보장함으로써 세계시스템의 안정을 목표로 하는, 화폐에 개입하는 주체다.

스스로 프랑스인임을 자부하는 아글리에타의 또 다른 핵심적인 작업은 향후 진보적인 유럽의 밑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유럽적인 새로운 성장모델의 탐구, 계층간 평등, 그리고 여성의 사회적 권리 강화는 그가 꿈꾸는 유럽의 기본적인 사상적 토대를 이루고 있다.

올해 62세로 프랑스인들의 전형적인 취미인 축구와 영화를 즐기는 아글리에타의 작업은, 한 경제학자가 관료로 변신을 꾀하기보다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자기 이론을 무기로 현실정책에 개입해 나가는 전형적인 학자의 방식을 보여준다. 또한 미국의 경제학 이론을 비판없이 꿰어 맞추려 하기보다는 자신이 발을 디딘 곳을 기반으로 해서 어떻게 ‘프랑스적인 경제학’을 만드는가를 보여준다. 언젠가 아글리에타 교수가 필자에게 던진 한 마디.

“아이디어 제공은 내몫이지만 아시아와 한국의 문제를 고민하고 구체적으로 풀어나가야 하는 것은 바로 너의 책임이다!”

♣글·김은경(파리 10대학 박사과정·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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