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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보드에 망한 ‘담다디’ 길보드로 웃은 ‘존재의 이유’

길보드 차트를 통해 본 한국 대중가요

  • 임진모

길보드에 망한 ‘담다디’ 길보드로 웃은 ‘존재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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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은의 ‘담다디’는 리어카 음반상을 오늘날의 ‘길보드’로 뿌리내리게끔 만들어준 가수로 평가된다. 하지만 이상은은 ‘길보드’의 폭발적 인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가시밭길을 걸었다. 이상은과 정반대로 김종환은 백번이라도 길보드에 절을 해야 할 처지다. ‘존재의 이유’가 길보드를 강타하면서 그는 무명 세월을 청산했다.
대한민국의 음반시장 규모는 과연 세계 몇 위쯤 될까. 놀랍게도 세계 10위에 올라 있다. 국제음반연맹(IFPI)이 음반매출액을 기준으로 공식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물론 공식집계라기보다는 추산에 가깝지만) 1993년부터 90년대 내내 약 4000억~5000억 원 규모로 미국 일본 독일 영국 프랑스 등에 이어 세계 11위를 유지해왔다.

과거 패티김의 ‘이별’과 남진의 ‘님과 함께’가 음반판매량 10만장을 넘어섰다며 놀라던 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우리 음반시장은 90년대 들어 기적에 가까운 급성장을 거듭했다.

한국 음반시장이 비약적 성장을 이룩한 것은 1991년부터였다. ‘내 사랑 내 곁에’의 김현식, ‘보이지 않는 사랑’의 신승훈, 이듬해 봄 ‘난 알아요’의 서태지와 같은 ‘큰 가수’가 출현하면서 예전엔 상상도 못 했던 일들이 벌어졌다.

이후 김건모 룰라 조관우 H.O.T. 조성모 등이 나타났고 국내 음악팬들은 인기가수의 앨범 100만장 판매고를 그다지 신기한 뉴스로 여기지도 않게 되었다. IMF라는 직격탄을 맞아 문화수요가 줄어들면서 현재는 우리 음반시장이 세계 17위 혹은 21위로 추락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하지만 아직까지 어떤 나라든 한국 음반시장을 무시하지 못하고 있다.

외국 음악 평론가들은 한국 시장을 표면적 규모보다 더 크게 본다. 세계 11위가 아니라 너끈히 7~8위는 된다는 분석이다. IFPI 보고대로 한국 음반시장의 단순한 외형은 5000억 원일지 몰라도 실제는 6000억 원에 이른다고 보는 사람이 많다. 왜 1000억 원이 불어난 것일까?

이 부분이 바로 불법 복제시장 또는 리어카 판매시장으로 얘기되는 ‘길보드’ 매출이다. 공식 매출에다 무시할 수 없는 비공식 시장이 존재하므로 한국 시장은 예상보다 더 무게가 나간다고 보는 것이다. 결국 한국 음반시장이 서너 계단 위로 평가되는 것은 길보드 덕분(?)이다.

길보드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리어카에서 판매되는 불법 복제음반시장이며 다른 하나는 ‘길거리의 인기순위’다. 한국에서 길보드란 조어(造語)가 생겨난 것은 후자의 의미 때문이다.

길보드는 미국의 유명한 인기가요순위 차트인 ‘빌보드’에서 따왔고 보드 앞에 붙은 ‘길’은 순우리말이다. 결론적으로 ‘길거리의 빌보드’인 셈이다.

그런데 미국의 빌보드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은 음반 판매량과 방송횟수를 정확하게 포착하여 음악의 인기흐름에 관한 한 ‘공신력’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1990년 중반에는 마이클 잭슨과 머라이어 캐리처럼 일주일 만에 신곡이 차트 정상에 오르는, 과거에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져 제작사의 강제적 마케팅에 오염되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음악팬들은 여전히 빌보드 인기순위가 공정하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결국 길보드는 비록 길거리가 매기는 판매량과 인기서열이지만 상당히 믿을 만하다는 인식이 내재돼 있다. 따라서 그것은 결코 불법 시장이라는 나쁜 의미만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길보드엔 길거리의 위력을 높이 쳐주는, 미화(美化)적 이미지마저 있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에서 매기는 가요 인기차트와는 다른 시정(市井)의 별도 차트라는 것 말고도, 거리라는 이미지가 주는, 제도권의 과장과 형식주의와는 선을 긋는 실제적 ‘진실’이 있다고나 할까. 다시 말해 길보드가 방송보다 더 공신력이 있는 인기흐름을 반영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바로 이 때문에 길보드는 불법이라는 낙인 속에서 폐지 여론이 들끓고 있음에도 모진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정부나 가요계 해당기관이 대대적 단속을 펼쳐 곧 없어질 것 같은 데도 늘 살아 있다. 항상 위태로우면서도 동시에 맥박의 간격은 일정하다. 참 신기하다. 마치 잡초처럼 목숨이 그렇게 질길 수가 없다.

1970~80년대 이른바 ‘빽판’의 바통을 이어받아 80년대 중반 생겨난 이 리어카 시장의 생명력을 그토록 길게 부지시켜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그 불법 시장에서 음반을 사는 사람이 꾸준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수요가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길보드는 노점이나 리어카를 넘어 하나의 음악매체로 자리잡기에 이르렀다.

이제는 신문에서도 대놓고 길보드를 언급한다. 인기가수 유승준의 경우를 보자. 지난 1998년 유승준이 ‘나나나’로 히트를 치고 있을 때 한 신문은 ‘유승준, 길보드 강타!’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다. 이쯤 되면 거의 실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셈이다.

뿌리칠 수 없는 무한매력

왜 음반 소비자들은 일반 레코드 가게를 놔두고 길보드에 기웃거리는가? 첫째, 음반이 너무 저렴하기 때문이다. 처음엔 테이프가 주력이었으나 지금은 CD도 막강하다. 테이프의 길보드 판매가는 1500원에서 2000원이며 CD는 3000원이다. 레코드에서 음반을 사는 것에 비해 3배 정도 싼 셈이다. 합법적 음반매장에서 테이프는 5000원에서 6000원, CD는 1만원이 기본 가격이다.

문화비용 지출에 인색한 국내 수요자들 처지에서 보면 너무도 고마운, 일종의 사은품이다. 자기가 아무리 미치도록 좋아하는 인기가수라도 누가 CD를 3000원에 사고 싶지 1만원짜리를 내고 싶겠는가? 그래서 길보드는 보편화된 우리의 에누리 정서, 싼것을 밝히는 인지상정과도 잘 부합한다. 테이프의 경우는 물론 음질이 좀 나쁘지만, 그 정도는 참을 수 있다. 우리가 언제부터 질(質)을 운운했나.

길보드의 매력을 알기 위해 1997년에 나온 한 길보드 제품의 수록곡을 보자.

‘그녀를 위해’(이정봉), 비련’(구피), ‘소원’(일기예보), ‘사랑을 위하여’(김종환), ‘무아지경’(DJ. DOC) ‘A Lover’s Concerto’(사라 본) ‘사랑해 누나’(유승준) ‘자유롭게 날 수 있도록’(H.O.T.) ‘결혼해 줘’(임창정) ‘송인’(쿨) ‘수필 러브’(주주클럽), ‘배신감’(젝키),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김경호)….

언뜻 봐도 당시 쟁쟁했던 최고 가수의 인기가요가 모두 들어 있다. 음반 제목도 ‘최신 다운타운 톱 가요’로 붙어 있다. 길보드가 왜 거리의 인기차트인지를 실감나게 한다. 아마 당시 공중파 TV 인기가요 순위라고 해도 틀림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히트곡 레퍼토리가 한 장에 몽땅 실려 있다는 것이다. 아마 소비자로서 이 모든 곡을 정품으로 구하려면 각 아티스트의 독집을 모두 다 사야 할 것이다.

아티스트 독집 30장의 현 히트곡을 골라내 하나에 담았으니 음반 소비자는 앨범 30장 살 가격을 한 장 값으로 그것도 아주 싸게 손에 쥘 수 있는 것이다. 정품으로는 경험할 수 없는 히트곡 컬렉션이다. 아니 정품은 이렇게 만들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비록 음질은 열악하지만 그 속에 담긴 다양한 레퍼토리는 입이 벌어지게 한다. 길보드는 바로 이런 불가능에 가까운 ‘히트곡 총집합’ 전략으로 우리 음반산업의 어두운 뒤안길을 불 밝히며 든든하게 터를 잡았다.

또 다음과 같은 이점도 있다. 음반 구매시장이 합법과 불법이라는 두 채널로 존재하면서 소비자는 두 가지 음반구매 패턴을 병행할 수 있게 되었다. 좋아하는 가수의 음반은 ‘정품 CD’로 사고 ‘한번 그냥 들어볼까’ 하는 가수의 음반은 ‘리어카의 테이프’로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팬으로서는 기분 좋은 ‘구매패턴의 이각(二角)화’다.

종로 2가에 자리를 튼 한 음반 리어카 상은 말한다.

“지난 1993년 서태지가 ‘하여가’ 2집을 냈을 때 서태지와 경쟁하던 다른 인기가수의 테이프가 먼저 나왔어요. 그 테이프 참 무지하게 많이 팔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서태지 테이프가 나왔지요. 당연히 많이 나갈 줄 알고 서태지 테이프를 많이 깔아놨어요. 그런데 서태지 것이 생각 밖으로 안 나가는 겁니다. 왜 그런가 했더니 애들이 서태지 앨범은 우리 테이프가 아니라 정품 CD나 LP로 사려는 심리가 있었던가 봅니다. 기다렸다가 레코드 가게에서 정품을 사서 소장하겠다는 거죠. 그래서 다른 가수 것은 많이 나갔는데 서태지 것은 나가지 않았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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