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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현기영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

“서정주, 親日은 밉지만 문학은 존중해야”

  • 조성식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mairso2@donga.com

“서정주, 親日은 밉지만 문학은 존중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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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월6일 오후 2시.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실에 들어서자 반백의 머리칼이 눈에 들어온다. 그는 회의용인지 접대용인지 가늠할 수 없는, 의자가 여럿 딸려 있는 볼품없는 탁자에 고개를 약간 숙이고 앉아 있었다. 뭔가 깊은 생각에 빠진 듯 인기척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인사를 건네자 그제야 알은 체하며 일어서서 악수를 청한다. 시골 냇물과도 같은 상쾌함과 아늑함이 느껴지는 눈길이다.
3월24일 건강 문제로 사직한 이문구씨의 뒤를 이어 민족문학작가회의 제7대 이사장에 취임한 현기영씨(60). 그는 전임자의 잔여임기인 올 연말까지 이사장직을 수행할 예정이다. 점퍼에 노타이 차림의 그에게서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이라는 직책이 풍길 법한 권위를 찾지 못한 기자는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와 오늘 나눌 대화의 주제는 다양하다. 문학권력, 문언유착, 안티조선, 친일문학 논쟁 등으로 문단 안팎이 시끄러운 탓인지 그의 이사장직 취임은 언론의 관심을 끌었다.

일찍이 작가회의 활동에 열성을 보였던 그는 ‘4·3 작가’로 불릴 정도로 유난히 제주 4·3 항쟁을 다룬 소설을 많이 써왔다. 봄 향기가 진동하는 4월이 되면, 그는 바쁘다. 개나리 진달래가 피어나는 것에 맞춰 그의 마음속에선 핏빛 서린 4·3의 꽃이 피어난다. 그는 요 며칠 동안 그 일로 바빴다.

“4월 초가 되면 제주도에서 4월제 행사가 열려요. 광주에 5월제가 있듯. 행사는 4월1일부터 일주일 동안 계속돼요. 서울에서도 관련 행사가 열리는데 올해는 4월1일 성균관대에서 추모제와 학술토론회가 있었습니다. 다음날 제주도에 내려가 작가회의 제주지회가 주관하는 4·3문학 토론회와 4·3 관련 중·단편 선집 출판기념회에 참석했어요. 이튿날은 술도 먹고 좀 쉬었다가, 그 다음날은 내가 초대소장을 지낸 ‘제주 4·3 연구소’가 주최하는 4·3학술회의에 참석했습니다.”

‘순이 삼촌’

어차피 물어볼 터였는데, 현이사장이 먼저 꺼내니 질문 순서를 바꿔 4·3 얘기부터 하기로 맘먹었다. 작가 현기영을 알기 위해선 4·3을 알아야 한다. 제주도 출신인 그는 197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후 4·3을 세상에 알리는 것을 문학적 소명으로 삼았다. 1978년 4·3 문학사에 기념비가 된 중편 ‘순이 삼촌’을 ‘창작과비평’에 발표한 데 이어 이듬해 ‘순이 삼촌’을 비롯해 ‘해룡이야기’ ‘도령마루의 까마귀’ 등 4·3을 배경으로 한 일련의 소설을 담은 작품집을 출간했다. 이런 문학적 활동과 더불어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진 젊은이들과 함께 ‘4·3을 생각하는 모임’을 조직하고 추모제를 여는 등 꾸준히 4·3 관련 활동을 벌여왔다.

1987년 6월 항쟁 이전까지 4·3 행사는 당국의 눈을 피해 ‘게릴라식으로’ 비밀스럽게 진행됐다. 역대 군사정권하에서 4·3은 금기였기 때문이다. 숨통이 트인 것은 1988년 노태우 정부가 들어서면서. 그 해 4월3일 여의도 100인회관에서 열린 학술토론회가 첫 공개행사였다. 이어 1989년엔 공식 추모제가 서울과 제주에서 동시에 열렸다.

─많은 독자들이 현기영 하면 ‘순이 삼촌’을 떠올립니다. ‘순이 삼촌’은 우리 문학사에서 4·3을 처음으로 다룬 작품으로 알려져 있지요?

“꼭 그렇진 않아요. 그 전에도 몇몇 작품이 4·3을 다루긴 했습니다. 슬쩍 언급하고 지나간 작품도 있고, 당시 가해자 위치에 있던 서북청년단 시각에서 쓴 소설도 있었어요. 그런데 대부분 가해사실이나 비참한 상황이 묘사되지 않고 모호하게 처리됐어요. 내 소설이 갖는 의미라면 (4·3의) 성격을 분명히 하고, 신원 또는 해원되지 않은 떼죽음을 고발하고 진상규명을 호소한 점이라고 할까요. 가해양상과 피해양상을 처음 드러낸 것이죠.”

4·3을 맞는 소회

─지난해 1월 4·3 특별법이 공포됐고, 특위의 진상규명과 피해보상작업이 진행중입니다. 지난 3일로 52주년을 맞았는데 소회가 남다를 듯싶습니다.

“착잡하죠. 어쨌든 특별법이 통과된 데는 이 정부의 공이 큽니다. 이 정부가 인권을 신장하려 애쓰는 것은 사실인 것 같아요, 다른 정책이야 어떻든 간에. 4·3을 해결할 공간을 마련해준 거죠. 그런데 특별법엔 몇 가지 미비한 점이 있어요. 우리가 너무 목말라 있던 터라 허겁지겁 서둔 탓인데, 앞으로 개정해야죠.”

─어떤 점이 미비합니까.

“우선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와 달리 조사권이 보장돼 있지 않아요. 조사위원회가 군이나 경찰 수사기록, 국방부 전투기록을 요구할 수 있는데, 관련 기관에서 없다고 하면 더 손쓸 수 없게 돼 있습니다. 또 하나는 군법회의에서 일종의 약식재판이라도 받은 사람들은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는 점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희생자가 군법회의를 거치지 않았지만, 재심청구 규정이 빠져 있는 것도 문제입니다.

아마도 이런 조항들을 집어넣으려면 반대세력과 싸워야 할 겁니다. 예비역 장성 모임인 성우회를 비롯한 극우세력이 4·3 진상규명을 가로막으려고 방해공작을 하고 있어요. 그들 주장은 군법회의에서 처단된 범법자들까지 어떻게 무고한 희생자로 보느냐는 거죠.

그러나 당시 상황을 제대로 알면 그런 얘기 못할 겁니다. 주민들은 한라산에 입산한 게 아니라 탄압을 피해 피난간 거예요. 해변으로 내려가면 다 죽였거든요. 아녀자 노인들이 무슨 게릴라 활동을 했겠어요. 경찰은 산에서 내려오면 전비전과를 묻지 않겠다며 선무공작을 폈어요. 그 약속을 믿고 산에서 내려오면 약식재판에 넘겼는데, 젊은 남자들은 육지로 보내버렸어요. 그들 중 상당수는 전쟁 때 죽거나 월북하거나 옥사해 다시 돌아오지 못했어요. 재심을 청구해 그들이 무죄임을 밝혀내야죠.”

1948년 4월3일 발생한 4·3항쟁의 성격을 올바르게 규정하기 위해선 사건의 배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4월3일 새벽 2시, 한라산에서 내려와 도내 경찰서를 공격했던 3000여 명의 제주도민들이 외친 구호는 ‘미군 철수’ ‘단독선거 반대’ ‘이승만 타도’ ‘경찰 철수’ 등이었다.

항일전통이 강했던 제주도에서 광복 직후 정국 주도권을 장악한 이들은 일제 때 독립운동을 했던 좌파 계열이다. 1946년에 치른 남조선 과도입법의원 선거에서 좌파가 당선된 곳은 제주도뿐이었다. 제주도에 진주한 미군은 다른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독립운동가들을 배척하고 군정기관에 친일세력을 중용함으로써 주민들의 극심한 반발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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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식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mairso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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