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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도 코미디요, 이길 수는 없어도 즐길 수는 있거든”

폐암투병 이주일의 심경고백 3시간

  • 육성철·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ixman@donga.com

“암도 코미디요, 이길 수는 없어도 즐길 수는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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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등학교 3학년 때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어온 소년. 얼굴이 못 생겼다는 이유로 온갖 수모를 당했던 무명배우. ‘실수’로 2주일만에 떠서 20년째 ‘코미디황제’로 살아온 풍운아. 그는 시시각각 숨통을 조여오는 암세포조차 코미디로 해석했다.
‘당신이 병원에 입원하던 날, 텅빈 방에 앉아 당신 사진을 보았소. 그토록 건강한 당신이… 정말 미안해 여보 미안해…’

‘코미디황제’ 이주일(62·본명 정주일)씨가 1988년 12월에 취입한 ‘당신’이라는 노래가사의 한 구절이다. 당시 이씨는 자신을 뒷바라지하느라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던 아내 제화자씨에게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이 노래를 불렀다. 주변에서는 ‘나이 쉰이 넘어서 무슨 가수냐’며 핀잔을 주기도 했지만, 이씨는 기어코 아내에게 ‘당신’을 바쳤다.

그로부터 13년. 이주일씨는 ‘당신’의 주인공처럼 병마와 싸우고 있다. 이번엔 아내가 남편을 돕기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제씨는 남편의 휴식을 위해 외부인의 접근을 철저히 차단했다. 경기도 분당의 이주일씨 전원주택은 평일에도 손님이 많기로 유명하다. 하지만 이주일씨가 폐암 진단을 받았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한낮에도 좀처럼 대문이 열리지 않는 곳으로 변했다.

2001년 11월23일 오전. 이주일씨와 어렵게 전화가 연결됐다. 기침 때문에 이따금씩 말이 끊기기는 했지만 목소리는 비교적 건강하게 느껴졌다.

―좀 어떠십니까.

“그런 대로 지낼 만해요. 괜찮습니다.”

―스포츠신문과 여성지에 아프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그거 참 이상해. 나는 기자를 만난 적이 없는데, 어떻게 내 얘기를 기사로 쓸 수 있지? 자기들 멋대로 추측이나 하고…. 왜들 그러는지 모르겠어.”

―한번 찾아가도 괜찮으시겠어요.

“언제든지 놀러와요. 할 얘기도 많으니까….”

23일 오후 6시. 이주일씨 집 앞에 도착했다. 앞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아무리 두드려도 인기척이 없다. 뒷문도 마찬가지. 마당에서 일하는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기자를 발견하고는 “외출하셨다. 다음에 찾아오라”고 말했다.

“우리나라 대학병원 엉터리”

다음날부터는 전화까지 불통이었다. 전국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피하기 위해 아예 플러그를 빼놓은 것. 우여곡절 끝에 26일 오전이 돼서야 이주일씨와 통화할 수 있었다. 그는 먼저 미안하다는 말부터 꺼냈다.

“기자가 잘 이해하쇼. 일하시는 분들이 나를 너무 생각하느라 없다고 둘러댄 모양입니다. 오늘 시간이 괜찮으면 놀러오세요. 기다리겠습니다.”

저녁 5시. 집 앞에서 전화를 걸자 대문이 열렸다. 입구에서 안채까지는 100m 이상을 걸어야 한다. 길 옆으로 이주일씨가 정성껏 가꾼 분재와 텃밭이 펼쳐져 있다. 잔디밭 한가운데로 나있는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 현관문을 열었다. 이주일씨는 소파에 누워 있다가 기자를 맞았다.

“왜 이제 오는 거요? 아침부터 하루 종일 기다렸잖아. 우리가 얼마 만이지?”

―지난해 ‘신동아’에서 축구특집을 할 때 뵙고 처음이니까 1년이 지났습니다.

“그랬지. 축구 때문에 만났었지…. 한국축구가 잘 돼야 하는데 말이야. 정몽준 회장이 내 말대로 했으면 지금쯤 달라졌을 텐데.”

이주일씨는 자다가도 축구 얘기만 나오면 벌떡 일어나는 사람이다. 2000년에 기자는 ‘축구광 5인이 말하는 한국축구 회생책’이라는 특집기사를 준비하면서 이주일씨를 만난 적이 있다. 그때 이주일씨는 무려 2시간이나 열변을 토했다. 다소 황당한 주장이었지만, 그 속에는 한국축구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기발한 ‘상상’이 담겨 있었다.

“내가 축구협회 회장이면, 비싼 돈 들여가며 외국 감독을 불러오지는 않을 거요. 그 돈 있으면 차라리 국가대표팀을 1년 동안 브라질로 보내라 이거야.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거기서 1년 동안 구르면 뭔가 달라지지 않겠어? 아무리 뛰어난 감독도 한국선수들을 1년 만에 바꿔놓을 수는 없거든. 내가 축구를 해봐서 잘 안다니까.”

쑥 들어간 눈과 거무튀튀한 얼굴. 첫 눈에 이주일씨의 몸이 예전 같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호흡곤란을 막기 위해 코에 끼워넣은 튜브가 무엇보다 안쓰러웠다. 뿔테 안경 너머로 보이는 주름살과 아래 얼굴을 덮어버린 수염은 1년 전의 모습 그대로였지만, 악수하면서 만져본 그의 손끝에서 힘이라고는 거의 느낄 수 없었다.

―그 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이주일씨는 답답한 심정을 털어놓을 말상대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무심코 던진 안부인사에 쌓였던 감정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여보게 기자 양반, 이 얘기는 꼭 쓰쇼. 우리나라 대학병원 이거 엉터리요. 엉터리도 이런 엉터리가 없어. 내가 7월에 몸이 좀 이상한 것 같아서 종합진단을 받았는데, 아무 이상이 없다고 나온 거야. 그래서 제주도에 내려가서 낚시하고 골프치고 술 먹고 신나게 놀았지. ‘그러면 그렇지 내 몸에 무슨 이상이 있겠어’ 하고 그냥 놀아제쳤다니까.”

갑자기 찾아온 폐암

이주일씨가 집 다음으로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 바로 제주도다. 1991년 11월 애지중지했던 6대 독자를 교통사고로 떠나보낸 뒤 그는 혼자 있고 싶을 때마다 서귀포를 찾았다. 이곳에 두칸 짜리 집까지 마련해두고 동네사람들을 위해 잔치를 베푼 적도 있다. 그래서 서귀포에서는 “이주일씨가 제주도로 이사왔다”는 소문이 나돌기까지 했다.

이주일씨는 서귀포 아래쪽에 있는 지피도라는 섬을 자주 찾았는데, 이곳에 갈 때는 라면 2박스, 소주 1박스 등을 배에 싣고 혼자서 떠났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낚시를 하다가 양식이 떨어지고 사람이 그리워지면 다시 뭍으로 나오는 것이다. 이주일씨는 종합진단에서 이상이 없는 것으로 나타나자 다시 제주도에 내려가 골프와 낚시에 푹 빠졌다고 한다.

“그런데 자꾸 몸이 무거운 거야. 피곤하고 졸리고 아프고…. 살아오면서 이런 일이 없었거든. 다시 검사를 받아볼 생각으로 서울에 올라왔는데, 여느 때 하고는 기분이 다르잖아. 그래서 종환이(박종환 전축구대표팀 감독)한테 전화를 걸었어. 내가 ‘야 이거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다’고 하니까 종환이가 걱정하지 말고 병원에 가보라고 해. 그랬더니 병원에서 ‘주변정리를 하세요’ 그러는 거야. 내가 화가 나서 ‘의사라면 고쳐보겠다고 해야 정상이 아니냐’고 따지니까, ‘이미 늦었습니다’ 하는 거야. 이거 참. 대한민국 대학병원이 이래도 되는 거요? 3개월 전에 발견했으면 감기치료 정도로 끝날 수 있었다는데, 그걸 몰랐다고 하잖아.”

그랬다. 이주일씨의 병명은 말기 폐암이었다. 이주일씨는 처음에 술과 담배를 의심했지만, 그것과는 전혀 관계 없는 암이었다. 폐암 중에서도 남자에게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여자들이나 가끔씩 걸리는 아주 특별한 종류였다.

“하도 답답해서 종환이한테 전화를 걸었어. ‘야 내가 축구를 그렇게 좋아하는데, 잘못하면 월드컵도 못 보고 갈 것 같구나. 어쩌면 그게 천추의 한으로 남을지도 모르겠다’고 했지. 그랬더니 종환이가 내 얘기를 주변 사람들한테 전한 모양이야. 그때부터 사방에서 전화가 오고 난리가 났어.”

이주일씨와 박감독이 만난 것은 1950년대 말 춘천고 시절이다. 두 사람은 당시 여학생들에게 최고 인기였던 축구부의 주전으로 나란히 신흥대(경희대의 전신)에 진학하기도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을 평생친구로 이어준 끈은 다른 데 있었다. 실향민에 가난한 생활, 그리고 술과 싸움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호기와 근성….

이주일씨는 고교시절 자신이 박감독보다 축구실력이 뛰어났다고 회고한다. 박감독이 수비수였을 때 자신은 라이트 윙을 맡았고, 경기를 읽는 눈이나 패스의 정확성에서 한수 앞섰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축구를 계속했다면, 아마 박감독의 좋은 라이벌이 됐을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장래가 촉망됐던 이주일씨는 아주 어이없게 축구를 포기하고 말았다.

“신흥대에 합격하고 자취를 시작했어요. 그런데 고향의 부모님이 보내준 입학금으로 ‘섯다’ 판을 벌인 겁니다. 처음엔 시간 때운다는 생각으로 했는데, 결국 등록금을 모두 날리게 됐죠. 그러고나서 오랫동안 축구를 잊고 살았어요.”

이주일씨가 축구와 다시 인연을 맺은 것은 1982년이다. 박종환 감독이 멕시코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서 4강에 오른 것. 당시 이주일씨는 미국 순회공연중이었는데, 때마침 브라질과의 4강전이 LA공연 날짜와 겹쳤다. 천하의 이주일도 이때 만큼은 축구열기를 꺾을 수는 없었다. 이주일씨는 ‘친구’ 때문에 공연을 망친 셈이었다. 하지만 그는 귀국하자마자 박감독을 찾아가 스텔라 승용차를 선물했다.

이주일씨가 박감독 얘기를 할 때마다 빼놓지 않는 대목이 있다. 바로 이주일씨가 무명배우로 지방을 떠돌던 시절이다. 이씨의 부인 제화자씨는 서울 상계동 단칸방에서 세를 살고 있었는데, 박감독이 제씨의 출산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듣고 쌀과 미역을 사다준 것. 이주일씨는 뒤늦게 이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옛 친구일 뿐, 서로 만날 정도로 가깝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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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성철·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ixm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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