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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식 기자의 Face to Face 22

신(神)에게 무릎 꿇은 ‘한국 대표 지성’ 이어령

“나 아닌 사람을 진정 사랑한 적이 있던가”

  • 조성식│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airso2@donga.com

신(神)에게 무릎 꿇은 ‘한국 대표 지성’ 이어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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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나는 아직도 광야에서 방황 중
  • ● 구원은 천당 가는 게 아니라 영의 정화
  • ● 지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 하지 말라
  • ● 단군상 모가지 자르는 사람들, 기독교 정신 전혀 몰라
  • ● 한국교회 너무 많이 갖고 있으나 내 눈의 들보가 크니…
  • ● 기독교에 기초한 생명자본주의로 새로운 문학 시작
신(神)에게 무릎 꿇은 ‘한국 대표 지성’ 이어령

●1934년 충남 아산 출생
●서울대 국문학과
●서울신문·경향신문·중앙일보·조선일보 논설위원
●이화여대 교수
●문학사상사 주간
●1990년 문화부 장관
●2002월드컵조직위원회 공동의장
●새천년준비위원회 위원장
●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중앙일보 상임고문, 이화여대 학술원 명예석좌교수

신(神)은 죽음과 더불어 인간의 영원한 숙제다. 2000년 전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후 서양의 지성은 유신론에 지배돼왔다. 기독교 사상은 정치 사회 문학 철학 음악 미술 등 인간사의 모든 분야에 깊숙이 뿌리를 내렸다. 인본주의(人本主義)를 내세운 르네상스를 기점으로 신에 대한 저항이 일어나긴 했지만, 대세를 거스르기엔 역부족이었다. 인간의 원죄의식과 구원에 대한 갈망을 파고들면서 신 앞에서의 평등과 사랑을 내세운 기독교 정신은 서구 정신문명의 근간을 이뤘다.

기독교는 제국주의 팽창에 힘입어 동양인의 정신세계도 빠른 속도로 점령했다. 오늘날 한국은 세계적으로 드물게 기독교 열기가 뜨거운 국가로 꼽힌다. 몇 년 전 한국의 대표적인 지성이 기독교에 귀의했다고 해서 화제가 됐다. 바로 이어령(77) 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다. 그는 다재다능한 문인(평론가, 소설가, 시인, 수필가)이자 언론인, 교수로 왕성한 집필활동을 하며, 시대변화를 앞서 읽는 예지력과 통찰력으로 한국 지식인 사회의 한 축을 형성해왔다. 인본주의 전도사로서 신을 부정하고 종교를 비판해온 그였기에 그의 ‘변절’ 혹은 ‘굴복’은 뜻밖이었다.

그런 그가 지난해 3월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신앙고백서를 펴내 또 한번 화제가 됐다. 이 책은 6개월 만에 30만부가 팔리며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 지난해 11월엔 산문집 ‘어머니를 위한 여섯 가지 은유’와 시집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를 잇달아 펴냈다. 출판사는 신문에 세 책을 묶어서 소개하는 전면광고를 여러 차례 내며 그의 이름이 가진 위력을 한껏 과시했다.

콧대 높은 석학이 받아들인 신은 과연 어떤 존재일까. 그는 진정 엎드린 것일까. 서구 합리주의와 실존주의로 무장했던 그가 비과학의 극치인 부활과 영생을 믿는 ‘예수쟁이’가 된 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혹시 딸 때문에 잠시 몸을 낮췄다가 남이 눈치 채지 않게 예전의 완고한 인본주의자로 되돌아가 있지는 않을까(그가 신앙인이 된 표면적인 계기는 독실한 신자인 딸이 실명(失明) 위기를 맞았다가 ‘기적처럼’ 회복된 사건이다). 그에게 신과 종교를 주제로 인터뷰를 요청한 것은 일대 전환을 한 한국 대표 지식인의 정신세계를 엿보려는 것이었지만 어쩌면 나 자신의 영혼의 목마름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신을 논하는 것은 곧 인간을 논하는 것이니까.

가족에게 닥친 불행

인터뷰는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첫 인터뷰는 그가 이사장인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에서, 두 번째 인터뷰는 그가 상임고문으로 있는 중앙일보 사옥에서 진행됐다. 익히 알고 있던 대로 그는 하나를 물으면 열을 대답해 듣는 사람을 행복하게 하거나 난감하게 만들었다.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기 위해선 요령 있게 말허리를 끊어야 했는데,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분수처럼 내뿜는 화려한 수사와 비유에, 빈번한 영어 사용까지.

1월5일 이 교수는 삼성의 회장단과 사장단을 대상으로 강연을 했다. 주제는 스마트 경영. 첫 질문으로 이날 강연에 대해 묻자 그의 입에서 말 폭포가 쏟아졌다. 요지는, 아무리 하드웨어가 좋고 프로그램이 좋더라도 인문학과 접목되지 않으면 문명의 흐름에 뒤처진다는 것, 지식이 아니라 지혜를 가진 자가 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이폰을 만든 스티브 잡스가 몇 번 거론됐다.

여기서 잠깐 그가 기독교를 받아들이기 전에 그와 그의 가족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정리해보자. 2006년 5월 일본에서 홀로 생활하던 그는 딸 민아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는다. 하와이병원에서 실명 진단(망막박리)을 받았다는 소식이었다. 하와이로 날아간 그는 딸의 권유로 현지 교회에서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약속한다. “만약 민아가 어제 본 것을 내일 볼 수 있고 오늘 본 내 얼굴을 내일 또 볼 수만 있게 해주신다면 저의 남은 생을 주님께 바치겠나이다”라고.

이후 딸은 한국으로 들어와 재검사를 받았고 하와이병원의 진단이 오진이었음이 드러난다. 2007년 7월 그는 딸과 약속한 대로 세례를 받는다. 두 달 후 민아의 큰아들이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갑자기 쓰러져 19일 만에 숨을 거둔다. 버클리대학을 졸업하고 변호사사무실에서 일하던 25세의 촉망받는 젊은이였다.

“한동안 신앙심이 흔들렸지요. 지금도 대단한 신앙심은 아니지만. 그런 시련을 겪으면서 배운 말이 ‘그럼에도 불구하고’예요.‘하박국’에 나오는. 신이 정말 존재하는가. 있다면 참 잔인하다. 혹은 무분별하다. 왜 악인은 멀쩡하고 선한 자는 비참한가. 이런 회의를 안 겪은 사람이 없지요. 그것을 극복하는 게 바로 ‘그럼에도 불구하고’예요. 나 또한 그런 체험을 겪으면서 신앙인이 되는가 보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내 신앙은 아직 남에게 말할 게 못 돼요. 아직도 광야에서 방황하고 있는 거죠. 내가 교회의 간증 요청이나 강연을 극도로 사양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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