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9일 한국 정부는 문제의 교과서를 포함한 일본의 역사교과서 전체에 대한 한국 관련 기술의 오류를 수정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런 한편, 일본에서는 ‘모임’을 중심으로 한 우익들이 각 지방의회와 교육위원회, 중학교 등에서 문제의 교과서를 채택하는 운동을 벌이고 있고, 지금은 전례없는 일반 서점 판매를 강행하고 있다.
지난 5월19일, 한일민족문제학회는 일본 역사교과서 문제에 대한 한·일 지식인간의 대화를 위해, 일본 지식인을 좌우에 걸쳐 초청하여 토론회를 개최하였다. 당일의 토론자로는 가토 아키라(일본거주 저널리스트), 구로다 가쓰히로(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 미즈노 순페이(전남대 전임강사 대우), 안자코 유카(역사문제연구소 상임연구원), 정혜경(국가기록연구원 연구기획국장) 등과 내가 참가하였고, 사회는 영산대의 최영호 교수가, 종합 진행은 서울대의 정대성 초빙교수가 맡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전날 밤 토론자로서 내한한 가토 씨를 통해 ‘모임’의 회장인 니시오 칸지씨가 한국민 앞으로 메시지(이하 ‘니시오 메시지’)를 전달해 왔기에, 토론회 당일은 참고자료로서 그 메시지를 요약 번역하여 배포했다. 토론회에서는 ‘니시오 메시지’에 대한 비판, ‘모임’의 교과서를 옹호하는 의견(구로다 씨), 역사 윤색에 대한 일반적 비판, 문제의 역사교과서 제작에 대한 비판 등의 의견이 나왔지만, 인식의 차이가 있다는 것만 확인했고 시간 제약으로 충분한 토론이 전개되지는 못했다.
그런데 토론회 이후 니시오 씨는 가토 씨를 통해 자신의 메시지가 일부만 공표되었다는 것에 불만을 표시하며, 그 전문을 공표해 달라고 요구했다 한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문득, 과연 니시오 씨는 자신의 메시지를 한국의 누구에게 이해시키려는 것일까, 한국 사회 내에 자신들의 동조자라도 있다고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다행히도 이번에 ‘신동아’ 편집부에서 ‘니시오 메시지’에 관심을 가져 그 전문을 게재하는 배려를 해주었으므로 자세한 내용은 게재된 전문을 참조해주길 바란다.
동경재판을 부정할 자격이 있는가
이 메시지를 전부 읽고 난 감상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일본은 대단한 대외적 피해 망상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익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는 시종일관 일본은 외세의 위협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그 방어를 위해 전쟁을 했다고 변명하고 있다. ‘모임’ 그룹이 사용하는 ‘동경재판사관’과 ‘사회주의 환상사관’이란 용어는 역사학에서도 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냥 동경재판, 사회주의 등을 사용하기로 한다.
니시오 씨가 동경재판을 부정하는 것은 일본 현대사를 무시하는 무책임한 사후론(事後論)이다. 동경재판을 부정하는 것은 패전 후 일본이 택한 길을 부정하는 것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일본제국주의는 1945년 8월15일에 천황의 이름으로 연합국측의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고 항복했다.
동경재판은 그 포츠담 선언의 ‘비군사화, 민주화’라는 방침을 실천한 것이다. 일본이 침략 전쟁을 수행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구실을 한 군부와 일부 관료들만 전범으로 처벌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배려’로 명치 헌법상의 최고 권력자인 천황은 처벌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 후 일본은 미국 군정기를 거치면서 민주적인 헌법을 비롯한 각종 정치경제제도가 개혁되었다. 그리고 1950년 한반도에서 발발한 전쟁으로 호황을 누려 경제 발전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1951년에 소련과 중국 및 한반도가 제외된 미·영 중심의 연합국들과 전후처리를 매듭짓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맺고 국제사회에 복귀했다. 그러나 이후의 냉전기에 펼쳐진 미국의 반공정책 덕택에 전범과 군국주의자들이 전부 원상회복되었다. 일본은 미일안보조약을 맺어 국방을 미국에 의존하고, 미국의 경제·기술 원조와 거대한 시장을 제공받아 경제를 성장시킬 수 있었다. 즉 오늘날 경제대국 일본이 존재하게 된 것은,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고 패전을 인정하고, 동경재판에서 부분적으로나마 전쟁 범죄를 심판받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환상사관의 허구
그런데도 니시오 씨가 ‘일본인은 동경재판사관을 승복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무책임한 언사라 주장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말하는 ‘일본인’은 우익 세력이며 자국사에 맹목적이고, 이기적이며 아시아 주변국을 무시하는 일본인들을 가리키는 것이리라. ‘메시지’ 중에서 ‘경제번영을 이룬 것은 일본인의 지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하고는 ‘그 교묘한 삶으로 인해 일본의 역사를 잃어버렸다’고 하는 것은 우익의 왜곡된 현실 인식이다. 그들은 전후 55년간 일본이라는 국가가 선택한 항로에 동승하여 갖가지 혜택을 누려오지 않았던가?
니시오 씨가 ‘사회주의 환상사관’이라고 비판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의 역사학연구에서 주류를 이룬 마르크스적 실증주의 사관과 관계가 있다. 그러나 일본 사회에서 사회주의적 사고가 압도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고 하는 그의 의견은 현실감이 있는 판단으로 보기 어렵다.
그들이 만든 역사교과서의 서문에 ‘역사는 과학이 아니다’라고 적혀 있듯이, 역사 기술을 옛날이야기 차원으로 시도하는 그들에게 과학적 실증주의 사관으로 기술된 역사는 적성에 맞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이러한 의견은 편견이라 할 수 있다. 패전 직후에 일본은 미군정이 추진한 전반적인 민주화 정책으로 인해, 천황제 파시즘제에서는 압살되었던 사회주의 운동이 활성화되었다. 연구의 자유를 박탈당했던 학문세계에서도 사회과학이란 이름으로 마르크스주의적 방법론이 부활하였다. 교육계의 민주화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1940년대 말부터 미군정은 철저한 반공주의 정책과 기업합리화 정책을 추진하여 일본사회 내의 사회주의 세력은 쇠퇴했다. 그 여파는 오늘날까지 계속되어 현재 일본 사회주의 세력은 국회에서 소수를 차지하고 있다. 지금까지 일본 학교교육은 나름대로 민주주의적 교육 체계를 확립하는 데 노력해 왔다지만 최근 들어 국가주의 정책에 따라 이른바 ‘평화주의’에 입각한 인권 중시의 보편적 가치관이 흔들리고 있다.
또한 세계사적 측면에서 현대 자본주의는 ‘성장’ 위주의 체제에 ‘복지’를 강조하는 사회주의적 요소를 도입해 발전시켜 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는 자본주의 체제의 발전을 위한 원활한 노동력 수급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었다. 현대 일본도 결코 예외가 될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니시오 씨의 ‘사회주의 환상사관’은 비현실적인 과대망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니시오 씨가 일본역사에는 독일처럼 대량학살을 일삼은 전쟁이 없었다며, 과거 일본이 일으킨 전쟁을 유럽에서 일어난 전쟁과 차별화하려는 것은 이기적인 자기 미화에 불과하다.
이는 과거 일본군이 주변국에서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무지의 소치일 것이다. ‘썩은 것은 뚜껑을 덮는다’는 일본 속담처럼 자기들에게 불리한 것은 애써 감추려는 비겁한 자세라고 할 수 있다. 과거 일본군이 동학농민군 학살(1894년), 3·1독립운동시의 제암리 민간인 학살(1919년), 관동대지진시의 조선인 학살(1923년), 중국 남경의 대학살(1937년)을 저지른 사실이 사료상으로나 피해자 및 목격자의 증언 등으로 증명되고 있다. 독일 나치스가 유럽에서 일으킨 전쟁이나 일본 파시즘이 아시아 태평양지역에서 일으킨 전쟁은, 침략전쟁이란 면에서는 본질적으로 동일선상에 있는 것이다.
또한 니시오 씨는 일본 히로시마의 원폭 돔이 아우슈비츠와 같이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미국을 전범재판에 세운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했다. 원폭 투하는 바람직하지 않지만, 원인은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제공했다. 원폭돔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것은 두 번 다시 과거와 같은 전쟁을 되풀이하지 말라는 의미인 것이다.
니시오 씨는 일본의 문명은 ‘수동적’이기 때문에, ‘외압’에 대한 ‘주체성을 지키려는 싸움을 했다’고 주장했다. ‘외압’을 핑계로 일본의 침략 행위를 합리화하고 있는데, 이는 과거의 ‘대동아공영권 찬미론’과 동일한 논리다. ‘백촌강 전투’에서 백제 및 일본 군이 패한 것이 어떻게 일본에게 외압이 되는가? 히데요시가 두 번에 걸쳐 조선을 침략한 것이 서양의 ‘외압’때문이라니 정말 어이가 없다. 그러한 이유로 7년간이나 남의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도 좋다는 이야기인가? 히데요시는 제후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국내 불만을 국외로 돌리기 위해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미국과 벌인 전쟁도 외압 때문이라고 강변하는데, 만주에 괴뢰국을 세운 것은 일본이었다. 이에 대해 구미 열강이 국제연맹을 통해 일본에게 원상 복구하라고 요구하자, 일본은 파시즘적 고립주의 기치를 걸고, 중국과 전면전을 감행했다. 뒤이어 일본으로서는 이기기 힘든 미국까지도 기습공격했던 것이다. 이러한 외압 때문에 일본은 어쩔 수 없어 전쟁을 했다는 것이 니시오 씨의 논리다.
그러나 일본이 당시 국제사회의 약속이었던 ‘협조외교의 틀’을 지키려고 노력했다면 전쟁의 참화는 막을 수 있었다. 자신의 돌출된 과격행동으로 재앙이 발생했는데, 그 원인을 타자에게서만 구하려고 한다면 이는 결코 객관적인 이해가 아니다. 니시오 씨는 자기들 ‘모임’은 ‘옛날의 국가주의와는 완전히 다르다’고 단언하고 있으니 우습기만 하다. 그는 과거 일본의 국가주의자들이 되뇌던 ‘대동아공영권론’과 다를 바 없는 자기중심적 방어 논리로 일본의 침략 전쟁을 미화하고 있지 않은가. 방어를 핑계로 타자를 침략한 행위가 어떻게 정당한 것이란 말인가?
니시오 씨는 자기들 ‘모임’에는 정치적 흑막은 없고, 노소를 불문한 우국지사들이 모여 자원봉사를 한다고 하지만, 전혀 믿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번에 모임이 만든 중학교용 역사교과서의 원형은 니시오 칸지 씨가 쓴 ‘국민의 역사’(1999년)이고, 그 중심이 되는 근현대사 부분의 서술은 일본 국회의원들의 모임인 역사검토위원회가 만든 단행본 ‘대동아전쟁의 총괄’(1995년)을 모델로 하고 있다.
역사검토위원회는 1993년 호소카와(細川) 당시 수상이 일본이 ‘침략전쟁’을 했다고 발언한 것에 반발한 자민당 소속 국회의원들이 만든 단체다. 역사검토위원회에 참가한 의원들의 활동무대가 ‘영령(英靈)에 보답하는 의원협의회’, ‘전쟁유가족(戰爭遺家族) 의원협의회’, ‘다같이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는 국회의원의 모임’ 등인 것으로 보아, 성향이 보수 우파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들 국회의원들은 1996년 6월에 ‘밝은 일본 의원 연맹’(중·참의원 116명)이라는 단체로 확대 재편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임’의 지부들이 자민당계열의 의원 사무실이나 후원회 사무실과 동일한 장소라는 점도 그들이 정치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국제·평화적인 감각이 필요하다
니시오 씨는 한국인이 일본에게 지배받은 사실을 잊지 않고 있다면서, ‘(한국인이) 오랜 역사 동안 중국에게 지배당한 사실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라고 묻고 있다. 이는 근대 이전의 조선과 중국의 책봉관계를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동일시한 몰이해에서 나온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있어온 중국을 중심으로 한 책봉체제는 ‘사대교린’이라는 외교 질서에 의한 것이었지, 근대 제국주의적인 완전 지배와 피탈의 관계가 아닌 것이다. 당시 ‘사대’로 인한 대상국의 사회경제적·문화적 이점에 대해서는 이미 학계에서 논증된 부분이다.
니시오 씨의 메시지는 ‘역사교과서는 어디까지나 일본 국내 문제다’ ‘한국 측의 집요한 수정요구는 일본이 주권국가인 이상 내정간섭’이라며,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달라’고까지 요구하고 있다. 니시오 씨는 입장을 바꿔 왜 한국측에서 그러한 요구까지 하게 됐는가도 생각해 주길 바란다. 한국은 일본의 역사교과서 검정제도나 교과서의 전체 내용을 대상으로 문제를 제기하지는 않는다.
이번에 검정을 통과한 ‘모임’의 교과서는 고대나 중세 및 근대 등에서 한국과 관련있는 기술에 문제가 많다. 동아시아 지역은 고대부터 근대까지 역사가 겹치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자국 중심으로 역사 교과서를 기술하면 국제적인 분쟁이 일어나기 쉽다.
더욱이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자국의 역사인지 확실하지 않은 고대 부분을, 신화(그것도 이웃 나라와 깊은 관련이 있는)만을 근거로 사실처럼 역사교과서에 기술한다는 것은 학교교육이나 국제관계에서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신화를 자국에게 유리하게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교과서에 기술하는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 군국 파시즘이 횡행하던 시대의 ‘식민지사관’을 방불케 한다. 특히 한국과 일본의 근대사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부분이 많으니까 역사 기술을 할 때에는 주의를 요한다.
지나친 노파심을 버려라
한국측에서 수정을 요구하는 이유는 단지 한국과 관련된 기술을 이쪽의 자존심도 고려해서 해달라는 것이다. 그리고 가능한 한 과학적 실증에 근거한 역사연구의 결과를 역사교과서의 기술에 반영해 달라는 것이다. 이러한 한국측의 요구를 무조건 ‘내정간섭’이라고 일축하는 태도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모임’이 문제의 역사교과서를 만든 목적은 일본의 ‘21세기 국민통합’을 위해, 환언하면 국가관이 약한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애국심(내셔널리즘)을 심어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렇다고 인근국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역사교과서를 만들어도 괜찮은 것인가? 상식적인 차원에서 봐도 이는 이치에 어긋난다. ‘모임’의 주장은 소수 우익들이 가지는 자국 사회에 대한 지나친 노파심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과 같은 국경의 문턱이 낮아진 시대에는 오히려 다양한 가치관이 요구되는데, ‘모임’과 같은 폐쇄적인 사고는 무리라는 생각이 든다. 선진국 반열에 올라온 나라는 청소년 범죄와 경제적 불황 등 지금 일본이 겪고 있는 것과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 정치권처럼 내셔널리즘을 고양시키는 나라는 없다. 일본이 이러한 문제에 부딪힌 것은 어디까지나 전후 일본정치의 중심 역할을 해온 자민당 정치의 결과다. 따라서 역사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한 최종적인 책임은 일본정부에 있다.
나는 묻고 싶다. “아직도 일본 정치인들은 일본 국내의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서 국내의 우익과 손잡고 인근국과의 우호관계를 해치는 내셔널리즘을 고양시키는 해묵은 방법을 사용하는가?”라고. 이대로 간다면 장래의 일본은 아시아에 대해 배타적 사고를 가진 젊은이가 늘고, 과거처럼 국제사회에서 고립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