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蔣介石 연금한 西安사변 주역 張學良장군 회고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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蔣介石 연금한 西安사변 주역 張學良장군 회고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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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毛澤東, 문화혁명 안했으면 대만통일 실현
  • ● 부친 張作霖, 살인 후 조선으로 도주
  • ● 宋美齡 권유로 기독교에 귀의
  • ● 29세때 동북군 사령관으로 중국 3분의 1 장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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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 나와 관계된 모든 것을 기독교적 역사관으로 말하겠다. 너희들의 큰어머니(장장군의 부인 자오이디·趙一荻 여사를 지칭)는 내 인생관에 중국의 민간신앙인 삼교구류(三敎九流)의 요소가 많다고 비난하나 어쨌든 기독교적으로 말하려고 노력할 참이다.

먼저 가장 중요한 문제부터 얘기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중국과 대만은 아직 통일이 되지 않고 있는데 일찍이 대만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기회는 있었다. 1966년 일어난 문화대혁명 직전이 아마 그때가 아니었던가 싶다. 당시 중국은 1958년부터 2년 동안에 실시한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이 2선으로 물러나고 류사오치(劉少奇)와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마오의 퇴진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정국을 아주 성공적으로 이끌고 있었다. 반면 대만은 상황이 좋지 않았다. 진짜 형편이 없었다. 그러나 이때 공산당은 문화대혁명을 일으켰다. 무려 10년을 이어간 문화대혁명을 자네들이 잘 알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이 10년은 대만이 숨을 돌릴 수 있는 그야말로 절호의 기회였다.

하늘이 대만을 버리지 않았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기 직전에는 미국과의 관계도 개선의 조짐이 있었다. 닉슨 대통령은 대만 대신 중국을 선택하려는 내부적 결단을 구체화하려는 움직임을 시도하고자 했다. 하지만 곧 이어 발생한 문화대혁명은 류사오치와 저우언라이를 주자파로 매도해, 이런 미국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때 만약 그런 상황이 전개되지 않았다면 단언컨대 현재의 대만은 없다고 해도 좋다. 하늘은 대만을 버리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문화대혁명을 발동시켜 중국 대륙을 그토록 혼란으로 몰아넣었을까? 또 왜 류사오치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저우언라이를 곤혹스럽게 만들었을까? 답은 이미 나왔으나, 더욱 다행인 것은 그들이 이에 대한 과오를 인정하고 고치려 노력했다는 사실에 있다. 만약 앞으로 30년, 40년 후에도 중국이 이처럼 노력을 기울인다면 대륙의 미래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대만을 수복하는 길은 현재처럼 상당히 어려울 것이다.

그때 나는 마음이 아주 심란했다. (50년 동안 연금상태인) 나의 처지에 대한 신세가 한스러워서가 아니었다. 대만의 정국이 나의 마음을 우울하게 만든 것이다.

어떤 국면이었는지 얘기해 보겠다. 당시 장제스 총통은 여전히 건재해 있었으나 연로했던 만큼 두 명의 가능성 높은 후계자가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국민당 정부의 2인자인 천청(陳誠) 부총통과 첫째 아들인 장징궈(蔣經國) 행정원(내각에 해당) 부원장이었다. 이중 천부총통은 야심이 정말 대단했다. 언제나 자신이 장총통의 뒤를 이어 총통이 되겠다는 속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마음이 초조해지면 장총통에게 빨리 자리를 물려달라고 강요하기까지 했다. “총통께서 이미 연로하셨으니 이제 그만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것이 그가 늘 입에 달고 다니던 말이었다.

그런 상황이 자주 있다보니 장징궈는 나에게 비밀을 지켜달라면서 “만약 어느날 부친이 돌아가시면 나는 미국으로 가겠다”고 말하곤 했다. 천부총통의 야심으로 미뤄볼 때 아마 부친이 갑자기 사망할 경우 자신에게 자리가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하는 것 같았다.

陳誠 부총통의 죽음

아,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사람의 일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마도 하늘의 뜻이 아닌가 싶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이때(1965년) 묘하게도 천부총통이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버린 것이다.

그의 죽음으로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만약 천청 부총통이 건재한 상황에서 장총통이 먼저 세상을 떠났으면 그가 후계자가 됐을 가능성이 높고 대만은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국민당은 즉각 옌자간(嚴家) 행정원장을 후임으로 선출했다. 옌자간은 인간성이 호방하고 온건해 천부총통처럼 야심을 가진 인물이 아니었다. 당연히 후임 행정원장의 자리는 부원장인 장징궈의 몫이 됐다.

천부총통이 사망한 후 장제스 총통도 몇 년 동안 노환으로 앓아 누웠다. 그가 수년 동안 앓아 누웠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행정원장으로 경험을 쌓은 아들 장징궈에게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는지에 대한 교육을 행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는 얘기다. 결국 장징궈는 이 동안 당·정·군을 어떻게 관리하는지를 확실히 배웠다. 하늘이 그에게 수년 동안 국가를 관리하고 실력을 연마할 기회를 준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물론 장총통과 천부총통의 죽음이 순서가 바뀌었다면 이런 국면은 그리 쉽사리 오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내심 아들 장징궈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그에게 국방부장(국방부장관)과 경제위원회 주임 등의 직책을 맡기고 교육시킨 장총통의 의중은 결국 성공했다.

이후 십수년 동안 장징궈 총통은 선친과 비교해서 결코 뒤지지 않는 나름대로의 업적을 남겼다. 그가 선친의 단점을 모두 다 간파했을 뿐 아니라, 이를 고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대만을 통치하는 데 적합한 자신만의 노하우가 있었던 것이다. 이뿐만 아니다. 그는 자기 혼자 모든 것을 독단적으로 처리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그 자신이 상당한 권력을 위임한 능력 있는 참모들이 많았다. 예컨대 쑨윈쉬안(孫雲璇) 행정원장 같은 인물이 그랬다.

사람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가 쉽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럴 수는 없다. 대만 총통이 되고자 했던 천청 부총통을 예로 들 수 있다. 그가 얼마나 많은 계략을 가지고 자신의 비원을 실현시키고자 했는지 아는 사람들은 다 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비원을 실현시키지 못했다.

이런 유사한 예는 대륙에도 있다. 장칭(江靑)이 대표적이다. 그는 얼마나 많은 전략과 지략으로 대륙을 휘둘렀는가. 그러나 결국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증명되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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