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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풍언과 LA의 DJ 인맥

  • 하태원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조풍언과 LA의 DJ 인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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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씨는 “명색이 사장이라지만 내가 받은 월급명세서를 보면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 것”이라며 “부와 명예를 생각하기보다는 그동안 쌓은 경험을 토대로 조국에 봉사한다는 자부심으로 일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노씨는 이어 “임기가 시작하자마자 공단에 구조조정의 회오리가 몰아쳐 내 손으로 200명 이상 감원하는 등 악역을 맡았다”며 “결과적으로는 80억원 이상 적자를 보던 조직을 20억원 흑자를 내는 조직으로 변모시켰다”고 말했다.

국영기업인 한국냉동의 심기섭 사장은 1998년 4월에 한국냉동 부사장으로 부임했다가 작년 3월 사장이 됐다. 1985년부터 1993년까지 워싱턴의 인권문제연구소 본부에서 상근하며 대변인과 사무총장을 역임한 경력이 힘이 됐다. 심사장 자신은 “인권문제연구소에서 일하는 동안 내 청춘을 바치며 정말 성심껏 일했다”며 이것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심씨는 “1993년 3월 연구소를 해체하는 게 좋겠다는 김대통령의 뜻에 따라 인권문제연구소를 탈퇴한 뒤 고기도매상으로 변신, 사업 노하우를 쌓았다”며 “나를 불러 달라고 손들고 나선 적은 없다”고 강조했다.

한국인권문제연구소 오리건 지회장 등을 지낸 장남진씨는 1998년 농어촌진흥공사 감사를 지낸 뒤 현재는 농업기반공사 감사로 활동중이며,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 인권문제연구소 출신의 정모씨도 현 정부에서 청와대 경호실장 특보로 전격 임명됐지만 얼마 전에 해임됐다.

인권문제연구소의 한 관계자는 “한인회장이나 인권문제연구소장을 지낸 사람 중 상당수가 한국에 진출했고, 이들은 대체로 그 자리에서 일했다는 것에 대해 ‘영광스럽다’는 반응을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또 “김영삼정권 때와 비교해보면 대통령과의 인연이나 실세의 지원으로 정부기관에 무혈 입성하는 사람은 오히려 적을 것”이라며 “미국에 살면 미국 사람들과 경쟁해 현지에서 자리를 잡는 것이 옳다는 게 김대통령의 철학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LA 동포사회를 배경으로 한국에 진출한 이들은 ‘민들레회’라는 친목모임을 조직, 매달 한 차례씩 정기모임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에서 출판사를 운영하다가 1996년 총선 때 인천 부평갑에서 출마, 낙선한 뒤 1999년 3월 남해화학 감사로 임명된 송선근(宋善根)씨가 회장인 이 모임의 이름은 “마차바퀴가 지나가도 쓰러지지 않을 만큼 강인한 민들레처럼 고통과 어려움을 참고 이겨내자”는 뜻에서 붙인 것.



송씨는 기자가 여러 차례 통화를 시도했으나 결국 전화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다. 이들 민들레회 회원들의 사무실 중 몇 곳에는 김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과 함께 대통령 친필 휘호가 잘 보이는 곳에 놓여 있었다.

‘비운의 실세’ 황제선씨

김대통령이 어려웠던 시절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고도 한국사회에 성공적으로 진출하지 못한 동포도 물론 많다. 그중 대표적인 사람이 황제선씨. 동포사회에서 “동부에 박지원이 있다면 서부에는 황제선이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김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하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하지만 현재 황씨는 심장수술을 받은 뒤 하루 세 번 약을 먹지 않으면 몸을 지탱하기 어려울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 상황. 전남 영암 출신인 황씨는 “김대통령이 92년 대통령선거에서 패한 뒤 어려운 사정인데도 수술에 보태쓰라고 큰돈을 보내주신 은혜를 잊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황씨는 금액을 밝히기를 꺼렸지만, 김대통령은 당시 2만5000달러(약 3000만원)를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1960년대 초 미국에 유학간 뒤 시민권을 얻은 황씨와 김대통령의 인연은 김대통령의 도쿄(東京) 납치사건 직후인 1974년에 시작됐다. 당시 미국에 있던 황씨는 이중삼중의 삼엄한 감시를 뚫고 동교동에 가택연금돼 있던 김대통령을 만나 “조국이 민주화될 때까지 미력이나마 최선을 다해 돕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 이후 황씨는 진주형무소에 투옥된 김대통령에게 사식(私食)을 넣기도 하고, 우리나라의 자기앞수표에 해당하는 ‘머니 오더’ 사업으로 번 돈을 꾸준히 지원자금으로 보냈다.

1982년부터 김대통령 후원회장직을 맡아온 황씨는 그해 12월24일 김대통령 후원을 위한 사조직인 ‘1·7회’를 만들기도 했다. 1·7회는 김대통령의 생일 다음 날, 워싱턴에서 첫 모임을 가졌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이 모임에는 민주당 김경재 의원을 비롯, 인권문제연구소장을 지낸 최병구씨, 국회의원을 지낸 이돈만(李敦萬)씨, 이북 출신의 이정(李正)씨, 송선근 남해화학 감사 등 10여명이 참가했다. 12대 총선 때는 김대통령과 함께 귀국하다 공항에서 경찰에게 구타당하기도 했다.

물론 황씨가 국내 정계 진출 노력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황씨는 “김대통령이 평민당 총재 시절이던 1988년 후원회 몫으로 배정됐던 전국구 10번 자리에 공천헌금 15억여원을 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동료인 정모씨에게 양보했다”고 말했다.

황씨는 서경원(徐敬元) 의원 방북사건으로 1989년에 실시된 함평·영광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도 공천이 유력시됐지만, 당시 영호남 화합이 중요하다는 대통령의 의견을 받아들여 영남 출신의 이모씨에게 공천을 양보했다고 말했다.

97년 대선 당시 DJ의 아킬레스건인 ‘북풍’을 차단하는 데에 한몫을 하기도 했던 황제선씨에게 현 정부 출범 후 또 한 차례 기회가 찾아왔다. 산업자원부와 강원도 등이 공동출자해 폐광촌에 건설하기로 한 강원랜드 카지노의 관리 책임자로 그가 거명된 것. 현 정권에 기여한 공로도 있고, 유학생 시절 라스베이거스 카지노에서 딜러로 일했던 경험과 능수능란한 사업수단 등이 고려됐다고 한다.

하지만 황씨의 국내 진출은 끝내 좌절됐다. 황씨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다는 LA의 모 인사는 “황회장이 유력했던 건 사실이지만 대통령이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 정실인사를 할 경우 여론이 악화될 수 있다는 참모진의 건의가 받아들여진 것 같다”고 말했다.

황씨도 ‘강원랜드 소문’이 있었던 사실을 인정하면서 “국내에 들어와 봉사하라는 제의를 받은 뒤 의욕이 생긴 것은 사실이지만, 간호사 출신인 아내가 ‘당신은 강원도까지 가서 일할 수 있는 건강 상태가 아니다’며 적극 만류해 고사했다”고 말했다.

4·13 총선을 한 달 남짓 앞둔 미국 LA교민 사회는 겉으로는 조용한 가운데도 부산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크고 작은 선거에서 김대중 대통령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던 미주 인사들 중 몇몇은 암암리에 국내에 들어와 민주당의 선거 전략 짜기에 골몰하고 있다는 소문이다.

100년 맞는 미주이민

실제로 여론조사 분야의 권위자인 선우동훈(본명 선우영·鮮于煐) 캘리포니아주립대학 명예교수와 김대통령 망명 시절 치과 주치의였던 강대인씨는 민주당 선거전략팀에서 활약하고 있고, 이밖에도 20여명의 재미동포가 이번 총선에서 지지 후보를 돕기 위해 속속 서울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있다고 한다.

한인회의 한 관계자는 “선거철이면 한국에서 도와달라는 요청이 많이 온다”며 “교민들의 경우 한국에 나가 직접 활동하는 경우와 이 곳에서 후원회를 조직해 지지 후보를 돕는 두 유형이 있다”고 말했다.

200만명을 헤아리는 미주 한인들은 대체로 세 유형으로 분류된다. 한국 정치나 미국 정치에 무관심한 채 가정과 직업, 교회 등 개인적인 일에만 치중하는 사람들이 첫째 유형이고, 2세를 미국 사회의 주인공으로 우기 위해 자녀교육에 열과 성을 다하는 사람들이 둘째다(이들은 대체로 미국 정치에 관심을 갖고 있다). 마지막으로 몸은 미국 땅에 있어도 관심은 여전히 한국의 정치나 사회상에 두면서 언젠가 한국으로 금의환향할 꿈을 꾸는 사람들이 있다.

앞의 두 부류가 약 80%, 셋째 유형은 20% 이하라는 게 현지 교민들의 대체적인 의견이다. 그리고 그 20%는 또 다시 햇볕정책에 반대하는 보수파들과 민주화운동 경력에 개혁적인 성향 등등 다양한 이념적 편차를 보인다.

한인사회는 서로에게 무관심한 ‘모래알 집단’이었다. 전문지식을 갖추고 미국 주류사회에 웬만큼 편입된 사람들은 모국의 민주화를 위해 일한 사람들을 백안시하고 있었고, 나름대로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싸웠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그들대로 미국 사회에 성공적으로 정착해 부와 명예를 쌓은 사람들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는 듯했다. 이런 상황에 LA 지역에만 갖가지 한인단체가 300여개에 달한다고 하지만 교민들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떠나 성원을 보내는 단체는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망명 시절 대통령을 도왔던 인권문제연구소나 후원회 사람 몇몇이 현 정부 출범 이후 한국의 공직에 진출하고 있는 점에 대해서는 그들과 동고동락했던 교민들조차도 그리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지 않고 있었다. 생업조차 뿌리치고 한국으로 달려가 선거판에 매달리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더욱 냉소적이었다.

조풍언씨와 그를 둘러싼 소문을 찾아 1주일간 LA 구석구석을 찾아다녔지만 꼭꼭 숨어버린 그의 진실은 좀처럼 세상 밖으로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3월14일 오후 조풍언씨가 경영하는 가든스위트 호텔 부근에서 한국 노인들의 장기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기자가 지나가는 말로 “조풍언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셨느냐”고 묻자 한 노인이 반문했다.

“조풍언? 그거 뭣에다 쓰는 물건이여?”

신동아 2000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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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태원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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