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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완수의 우리 문화 바로보기 ⑩

국보 미륵반가상이 선덕여왕 닮은 사연

  •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국보 미륵반가상이 선덕여왕 닮은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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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 숨쉬는 반가사유상 ]

모든 예술 분야가 다 그렇겠지만 특히 조형예술, 즉 미술 분야에 있어서 생동감(生動感)은 그것이 있거나 없는 데 따라 그 성공 여부가 결정지어진다. 그래서 예부터 그림을 그리거나 감상할 때 기준이 되는 6가지 법칙을 거론하면서 ‘기운(氣韻)이 살아 움직여야 한다(氣韻生動)’는 것을 첫째 항목으로 꼽아왔다. 이처럼 평면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그림에서도 생동감을 중요시하는데, 입체성을 두루 갖춘 조각에서는 새삼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특히 조각 중에서도 예배자의 공양을 받고 기도와 소원을 들어주는 일을 담당해야 할 신상(神像)조각은 이런 가치평가 기준이 거의 절대적인 것으로 떠오를 수밖에 없다. 실제로 우리는 과거에 수많은 인격(人格) 신상을 만들어낸 그리스와 로마 및 인도와 파키스탄, 중국과 우리나라 등지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체 조각상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그런데 예배 공양자들의 순수한 신앙심이 충만할 때 신성과 인간을 이상적으로 조합한, 생동감 넘치는 인격 신상이 탄생한다. 사람들은 이를 매개체로 삼아 현실의 고통과 불만을 승화시켜나가려 하기 때문이다. 결국 생동감 넘치는 신상조각이 만들어지려면 순수한 신앙심이 전 사회를 하나로 뭉치게 하여 떨끝만큼의 의심도 내지 않는 상황이 조성돼야만 한다.

그러나 이런 열정의 시기는 역사 속에서 그리 많지도 않고 또 있다 해도 길 수가 없다. 생동감 넘치는 인체 조각이 인류 미술사를 통틀어 많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 문화 유산에서도 그 많지 않은 유례 중에 첫 손가락을 꼽아야 할 대표적인 신상 조각이 있으니, 바로 이다.

이라는 별칭에서 알 수 있듯이 머리에는 원(圓)을 4등분한 크기의 호(弧) 셋을 정면과 양쪽 측면에 비스듬히 세워 붙여서 만든, 산(山)자 모양의 단순한 관이 씌워져 있다. 그런데 이 관은 깎은 머리처럼 표현된 머리칼과 그대로 이어져 있어서, 마치 머리칼 부위가 그대로 관의 아랫부분인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머리칼과 화관(花冠) 모두가 사실성을 상실하여 신비화됐기 때문이다.

이런 관 표현은 본래 미국 워싱턴 후리어 미술관 소장의 의 연화관(蓮花冠)이나 샌프란시스코 아시아 미술관 소장의 (도판 3)의 연화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연꽃잎 석 장을 각각 앞면과 좌우 옆면에 세우던 것을 양식화한 것이다. 연꽃잎 모양의 관틀을 고정시킬 관테가 있어야 화관이 이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데, 과 에서는 모두 화관의 테를 분명히 표현함으로써 사실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에서는 관테 표현을 생략한 채 바로 머리칼과 이어 놓았다. 그래서 얼핏 보면 깎은 머리에 산 자 모양의 승관(僧冠)을 눌러쓴 듯한 느낌을 준다. 이런 대담한 생략은 상반신으로 이어진다. 화관의 끈 치레를 완전히 배제하고 나서 양쪽 어깨에 걸쳤던 천의(天衣, 被巾이라고도 함)마저 벗겨냈다. 상반신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裸身)으로 대담하게 노출시킨 것이다.

그리고 목걸이 하나만 달랑 둘러놓았다. 아무 장식 없는 두 줄의 둥근 고리 모양이다. 속이 빈 금속제 고리인 듯 가벼운 느낌을 자아내는데, 늘어지거나 휘감기지 않고 목 둘레를 딱딱하게 외둘러 놓으니 벌거벗은 상체와 신묘한 대조를 보이면서 파격적인 장식효과가 드러난다.

뚜렷한 두 줄의 목걸이 표현과는 대조적으로 위 팔찌 한 쌍은 보일 듯 말 듯 외줄고리로 희미하게 표현하여 장식성을 최소화하고 있다. 그것이 나신의 아름다움을 더욱 신비롭게 한다.

원래 인도에서 비롯된 미륵보살의 목걸이와 팔찌는 복잡한 구조의 화려한 구슬꿰미였다. 이것이 중국을 거치면서 차츰 단순해져서 심엽형(心葉形, 하트 모양)의 넓은 판으로 바뀌었다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는 (제9회 도판 4-1)에서 보인 것처럼 방변원심형(方邊圓心形) 장식의 세련된 표현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다가 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단순해질 수 없을 만큼 극단적인 생략을 보여주는데, 양식화의 극치 현상이라 하겠다.

목걸이의 강렬하고 상징적인 장식성을 의식한 듯, 목에 3줄의 음각선을 그은 삼도(三道, 불보살의 목에 나 있는 3줄의 주름선)는 그 양쪽 끝이 적당한 곳에 이르러 자연스럽게 소멸돼 사실성을 드러낸다.

사실성을 드러내는 것은 삼도 뿐만이 아니다. 한창 물오른 듯 팽팽한 얼굴에서도 마치 부끄러워 홍조(紅潮)가 피어 오르는 순간처럼 온기가 배어나며, 입은 무슨 말을 할 듯 입술을 움직이기 직전의 모습을 하고 있다.

팽팽하게 피어난 큰 얼굴과 굵고 건장한 목에 비해 상체는 가냘프다. 이는 미처 육신이 다 자라지 않은 소년이나 소녀의 몸매임을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어깨에서 팔뚝으로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흐름이나 가슴과 허리를 잇는 유연한 곡선이 너무나 천연덕스러워 팽팽한 살갗 밑으로 피가 흐르고 맥박이 뛰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하물며 반가한 오른쪽 무릎 위에 오른쪽 팔꿈치를 날렵하게 굽혀 대고, 손가락 마디마디를 편한 대로 굽혀서 턱을 살짝 바치고 있는데 이르러서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반가한 오른쪽 발은 왼쪽 무릎 위에 올려져 있는데, 무슨 내밀한 열락(悅樂)이 있는지 엄지발가락이 팽팽하게 곤두서 있고 발바닥이 한껏 긴장해 있다. 그 발목 근처에 포개 놓은 왼손 손가락 끝에 힘이 들어가 있는 것도 같은 감흥의 표출 현상이다.

[ 신상과 신앙인의 내밀한 교감 ]

손과 발에서 보인 이런 사실적인 순간동작의 표출은 선정(煽情)에 가까운 관능미(官能美)의 구현이라 할 수 있으니 곧 거기서 강렬한 생동감을 감지하게 된다. 이런 발랄한 생동감은 신상 조각에 생명력을 불어넣음으로써 신앙인들과 신상이 직접 교감할 수 있는 활력소로 작용한다. 그 결과 신상이 민심을 결집시키는 위력을 발휘하였던 것이다. 이 도 이런 맥락에서 생동감 넘치는 조각 기법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

지금은 사라져 없어졌지만 머리 뒤에 붙어 있었을 광배(光背)는 두원광(頭圓光) 형태로 매우 단순했으리라 생각한다. 그 기본 형태는 후리어 미술관 소장 (도판 4)이나 (도판 5)의 두원광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웃통은 벌거벗었지만 배꼽 아래로는 치마를 입고 있다. 넓은 허리띠가 치마 말기처럼 치마 뒤폭을 가지런히 묶고 나왔으나, 양쪽 치마폭이 양 허리 뒤쪽에서 위로 비져나와 허리띠를 덮으며 앞으로 돌아나오는 옷차림으로 겉멋을 자랑하고 있다.

치마 뒷자락은 에서처럼 세로 주름을 겹겹이 접어 내리긴 했으나 주름 간격의 변화는 훨씬 다양해졌다. 중앙을 크게 접고 좌우 주름도 일정치 않게 처리하면서 주름 끝이 치마폭의 굴곡에 따라 부드럽게 변화해 나가도록 한 것이다.

장구통 모양의 등의자도 훨씬 세련되게 다듬었다. 상판 깔개는 엉덩이 생김새에 따라 가운데가 높고 좌우가 낮게 말안장처럼 굴곡지게 만들었다. 의자 덮개 천은 바닥까지 덮어내렸는데, 천자락 끝이 물결치듯 깔리면서 대좌 하단을 마무리짓게 하였다.

양쪽 옆구리 허리띠에서 걸려 내려온 장식띠는 극단적인 생략 기법이다. 에서는 장식띠가 자리 밑으로 들어갔다 다시 나오는 복잡한 표현을 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다만 엽전 모양 고리에서 앞뒤로 들어가 서로 꼬고 나온 두 가닥의 장식띠가 모두 엉덩이 아래 자리 속으로 들어가 깔리고 만 형태다.

앞면의 치마는 반가한 오른쪽 무릎을 따라 오른편 치맛자락이 들어올려진 상태다. 이는 에서처럼 치맛자락이 무릎 속으로 들어갔다 다시 나오면서 물결층과 날개깃층으로 이층의 무릎 받침 층을 만드는 사실성을 보이는 것과는 다르다. 이것을 뛰어넘어 무릎 아래에서 옷자락이 딸려오다 바람결에 나부낀 듯 비스듬한 경사면을 만들어 놓고 그 아래로 딸려 올라온 치마의 끝 부분을 흘러내려 마무리지은 형태다. 얼핏보면 무리없는 사실적 표현인 듯하다. 그러나 실상 이런 옷주름은 무릎 밑에 방석을 받쳐주지 않는 한 나올 수 없는 가상적 표현이다. 그러니 양식화 현상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상에서는 그런 양식화 현상이 다른 부위의 생동감 넘치는 사실성과 신묘한 조화를 이루면서, 사실로 착각하게 하는 이상한 친화력이 발휘되고 있다.

왼쪽 무릎을 덮고 오른쪽으로 진행해간 치맛자락은 가장 긴 끝이 앞면 중앙부 의자 밑부분까지 내려와 연꽃잎 모양의 입체조각으로 물결치듯 둥글게 마무리지었다. 그 위로는 엉덩이 밑에서 빠져 나온 치마 뒷자락이 덮어 내리면서 자유분방한 옷자락을 만들어 놓고 있다.

옷자락이 복잡한 듯 보이나, 세가닥의 옷주름이 수키와 골처럼 접히고 그 사이로 두 가닥이 암키와 골처럼 접히는 단순한 구조일 뿐이다. 다만 옷주름에 중심선을 세워 팽만감을 불어넣고 바람결에 나부끼듯 옷자락을 흔들어 놓았기 때문에 복잡하고 어지럽게 느껴질 뿐이다.

이것도 양식화의 절정에 이르러 극도로 단순화한 상체의 함축적 생략에 대응하여 조화를 이루려는, 계산된 복잡성이라고 보아야 한다.

왼쪽 다리는 연화족대를 딛고 있는데 정강이를 따라 무릎 밑으로 나 있는 옷주름은 다만 좌우에서 두세 줄이 나오다 사라져서 사실적인 입체감을 더해준다. 왼발이 딛고 있는 연화족대 앞부분은 나중에 보수한 것이라 한다.

[ 진골은 진흥왕의 혈손 ]

위에서 살펴본 대로 은 미륵반가상 양식이 인도와 중국을 거치면서 끊임없이 양식 진전을 이루어온 결과 절정에 이른 단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이런 완벽한 미륵반가상이 만들어지려면 이를 뒷받침해줄 만한 사회 여건이 성숙돼 있어야 한다.

우리는 제9회에서 이를 집중적으로 다루어 보았다. 신라 선덕여왕이 최초의 여왕이 된 것은 그가 하생한 미륵보살인 미륵선화로 지목되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도 밝혔다. 그렇다면 이 은 바로 선덕여왕이 미륵선화로 지목되는 것과 관련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앞서 말한 대로 선덕여왕(580년 경∼647년)은 백정반이라는 이름을 가진 진평왕과 마야부인으로 일컬어지던 김씨 왕비 사이에 맏딸로 태어난다. 따라서 그는 석가모니불과 같은 인물이 되어야만 하였다. 일찍이 그의 증조부인 진흥왕(534∼576년)과 증조모인 진흥왕비 박씨 사도(思道)부인(534년 경∼614년)은 모두 만년에 출가하여 각각 흥륜사와 영흥사에서 승려 생활을 할 정도로 불교에 심취했기에 그들 자신이 석가족과 같은 특수 혈통을 타고난 종족이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그래서 다른 왕족들과 구별짓기 위해 그들의 혈통을 타고난 후손들을 진골(眞骨)이라 부르게 되었던 듯하다. 진흥왕 이후 그의 혈통을 타고난 왕들의 왕호(王號)를 보면 진지왕(眞智王, 554년 경∼579년), 진평왕(眞平王, 565년 경∼632년)이라 하여 계속 진(眞)자를 붙이고 있는 데서도 짐작이 가능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이런 왕호가 돌아간 뒤에 올린 시호(諡號)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측 정사(正史)인 ‘북제서(北齊書)’ ‘수서(隋書)’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에서는 한결같이 신라왕 김진흥이니 신라왕 김진평이니 하여 이름으로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재위시에 부르던 왕호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더욱이 고구려나 백제의 왕을 지칭할 때는 고구려왕 고아무개, 백제왕 여(餘)아무개라 하여 그 이름을 지칭하고 있는데 유독 신라왕에게만 시호를 썼을 리 없다. 즉 신라 왕호는 사후에 올린 시호가 아니라 생전에 부르던 왕의 칭호였으리라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759년) 선생도 일찍이 ‘진흥이비고(眞興二碑考)’에서 진흥왕 순수비에 진흥대왕이라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고, 이것이 시호가 아니라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신라왕의 시호는 중엽부터 생긴 것이고 초기에는 모두 고유한 말로써 일컬었으니, 그런 까닭으로 거서간(居西干)이라 일컬은 것이 하나, 차차웅(次次雄)이라 한 것이 하나, 이사금(尼師今)이라 한 것이 열여섯, 마립간(麻立干)이라 한 것이 넷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거하면 ‘지증(智證) 마립간 15년에 왕이 돌아가니 시호를 지증이라 하였다’고 하므로 신라의 시호를 쓰는 법이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던 듯 말하고 있다. 이로부터 왕이 돌아간 후에는 반드시 그 시호를 쓰게 되었으니, 그런 까닭으로 진흥왕본기(眞興王本紀)에서도 역시 35년조에 ‘왕이 돌아가시매, 시호를 진흥이라 하였다’고 씌어 있다.

그러나 이 비석은 진흥왕이 스스로 만들어 세운 것이거늘 그 제목에 엄연히 진흥대왕이라 일컫고 있으며, 또한 북한산비에도 역시 진흥이라는 두 글자가 있다. 이로 보면 법흥(法興)이니 진흥(眞興)이니 하는 것은 장사 지낸 뒤에 올린 시호가 아니라 곧 살아 있을 때의 칭호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 까닭으로 ‘북제서’에서는 ‘무성제(武成帝) 하청(河淸) 4년에 조서를 내려서 신라 국왕 김진흥으로 사지절동이교위(使持節東夷校尉)로 삼았다’고 하였고, ‘수서’에서는 ‘개황(開皇) 14년에 신라왕 김진평(金眞平)이 사신을 보내 축하하였다’고 하였으며, ‘당서’에서는 ‘정관(貞觀) 6년에 진평왕이 돌아가자 그 딸 선덕(善德)을 세워서 왕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에 의거하여 보면 진흥이니 진평이니 하는 것들은 분명히 시호가 아니다.

태종(太宗) 무열왕(武烈王) 이후에 비로소 시법(諡法)이 있게 되었으니, 그런 까닭으로 ‘당서’의 기록에 김무열(金武烈)이라 부르지 않고 김춘추(金春秋)라 하였다. 이로써 가히 알 만한 일이다. 그러니 이 비석에서 진흥이라 한 것은 역시 살아 있을 때의 칭호라고 해야 할 것이다.”

[ 특수 혈통 진골과 미륵선화 사상 ]

그런데 진흥왕은 신라의 국토를 최대한으로 확장하여 동북쪽으로 함경남도 이원 마운령과 함흥 황초령에 이르고, 서북쪽으로 서울 북한산에 이르며, 서남쪽으로는 경남 창녕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장악하였다. 신라 건국 이래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것이다.

그런 그가 자신의 공적을 바탕으로 절대 왕권을 수립하기 위해 그 자손들을 진골이라 부르며 그들만이 왕위에 나갈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는 것에 대해 감히 누가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는가. 다시 말해 신라는 시조 이래로 화백(和白)제도에 의해 귀족들이 모여 국왕을 선출해왔는데 진흥왕은 이 제도를 무시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자신은 석가족과 같이 특수 혈통을 타고난 진골(眞骨)이라는 사실을 표방하기 시작했던 듯하다. 그래서 자신의 왕호를 진흥(眞興), 즉 진골을 일으킨 임금으로 지었던 것이다. 이 진골의 출현을 합리화하고 그 지지기반을 마련하려는 작업이 미륵선화의 선택과 용화낭도(龍華郎徒)의 양성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삼국사기’ 진흥왕 37년(576) 조에서 그 해 봄에 미륵선화 즉 원화(原花)를 선발하였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대군주 진흥왕이 돌아가자 보수적인 구 왕족들의 반발이 매우 거셌던 듯하다. 진지왕(眞智王, 554∼579년)이 겨우 재위 4년 만에 정치가 어지럽고 행실이 음란하다는 누명을 쓰고 쫓겨나 시해당하는 사실이 이를 보여준다.

그런데 이 당시에 진흥왕비인 사도부인 박씨(534∼614년)가 비구니로 아직 영흥사에 건재해 있었으므로 보수세력의 저항은 곧 한계에 부딪혀, 동륜(銅輪, 550년 경∼572년)태자의 장자인 왕태손(王太孫) 백정반(白淨飯, 565년 경∼632년)이 왕위에 나가는 것으로 타협을 보게 되는 듯하다.

이렇게 진골 귀족이 위기에 몰리게 되자 진흥왕비나 그 손자인 진평왕은 진골의 신족(神族) 관념을 강화하기 위해 진골 중에서 미륵선화가 출현할 것을 기대하게 된다. 마침 진평왕에게서 선덕여왕(580년 경∼647년)과 김춘추(604∼661년)의 모친인 천명부인(天明夫人, 582년 경∼?), 백제 무왕의 왕비인 선화공주(善花公主, 584년 경∼?) 등 세 공주가 내리 태어나니, 이들 중에서 미륵선화를 간택하게 되었을 것이다. 막내인 선화공주가 미륵선화로 간택되었던 듯하나 백제 왕손 마동에게 유인돼 무왕비가 되었다는 사실은 9회에서 밝힌 바 있다.

그러자 진평왕과 진흥왕비 등 진골 집단에서는 서둘러 첫째 공주인 덕만(德曼)을 미륵선화로 결정하여 국선(國仙), 즉 화랑들의 구심점이 되게 하여 미륵보살의 출현을 기정 사실화해 나가는 듯하다. 무왕의 즉위가 진평왕 22년(600) 경신(庚申)이므로 이 해를 전후한 시기에 이런 일이 결행되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니 선덕여왕이 20세 내외가 되었을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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