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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미륵반가상이 선덕여왕 닮은 사연

  •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국보 미륵반가상이 선덕여왕 닮은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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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왕손 마동에게 미륵선화인 선화공주를 탈취당한 신라인들의 실망과 분노는 아마 극에 달했을 것이다. 자신의 나라 왕실에 하강한 미륵보살을 백제 왕손의 계략에 말려 자신들의 손으로 넘겨주고 말았으니 말이다. 아마 선화공주의 부정한 행실을 소문만 듣고 침소봉대하여 귀양보내자고 앞장서서 주장하던 사람들은 바로 진지왕을 내몰았던 반진골 보수세력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결과 백제 왕손이 신라의 미륵선화를 유인하여 백제 왕비로 삼음으로써 신라에 하강한 미륵을 백제에 빼앗기는 엄청난 ‘재앙’을 맞게 된 것이다. 이에 보수세력은 민심을 잃어 설 자리를 놓치고 만다. 진골세력이 보수세력을 제압하는 전화위복의 계기로 이 사건을 처리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신라사회에서는 하루 빨리 미륵선화의 공식 출현을 간절하게 소망하였을 것이다. 그런 민심을 파악한 진평왕은 맏딸인 덕만 공주를 미륵선화로 결정 공포하면서, 하강한 미륵보살의 모습을 반가사유상으로 조성하여 민심의 구심점으로 삼고자 했을 것이다. 당연히 그 용모는 새로 미륵선화가 되어 장차 대통을 이어갈 덕만공주의 모습이 범본이 되어야 했다. 그래서 은 선덕여왕의 20세 전후 모습이라 추정하는 것이다.

국력과 민심을 결집하여 혼연일체된 순수한 신앙심이 없고서는 이런 신상 조각을 만들어낼 수 없다는 전제 아래 이런 추측이 가능하다. 사실 이런 국민적 결집력은 국가간에 격앙된 적대감이 부추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최고 수준의 완벽한 신상을 조성해낸다는 것이 단지 사회적 열망이나 국왕의 의욕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를 이루어낼 수 있는 문화 역량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신라는 삼국 중 가장 문화가 낙후했던 후발국가였다. 선덕여왕 시기에도 아직 문화적 성숙도가 미흡한 상태였을 터이니, 최고 수준의 미륵반가상을 조성해낼 역량이 부족했으리라는 추측이 제기될 만하다.



하지만 이런 추측은 진흥왕의 영토 확장에 따른 고구려와 백제 문화의 대거 유입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설득력을 잃게 될 것이다. 영토의 편입은 생활 문화 전반의 편입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신라의 한강 유역 장악은 백제의 옛 수도권 문화 뿐 아니라 한반도 심장부 문화의 흡수를 의미하는 것이니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따라서 진흥왕 이후 신라 수도권 문화의 급성장은 마치 미륵신앙이 백제를 앞지를 만큼 급신장한 것만큼이나 초고속으로 진행됐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 김유신과 미륵반가상 ]

이런 사실을 증명하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들이 있다. 그 첫째가 경주 서남쪽 월성군 건천면 송선리 단석산(斷石山)에 있는 국보 제199호 이다. 김유신(金庾信, 595∼673년)이 15세(609년) 나이에 용화랑(龍華郞)이 돼 수련하였다는 곳에 조성돼 있는 마애불상군이다.

이 불상군 중에는 미륵반가상(높이 110cm)이 있다. 바로 삼산관(三山冠)을 쓰고 있는 모습으로 이 가지고 있는 양식적 기본 틀을 모두 갖추고 있다.

상체는 벌거벗었는데 천의 한 가닥이 둥근 목걸이처럼 가슴 근처에 걸려 있다. 배꼽 아래로 둘러 입은 치마는 반가한 오른쪽 무릎을 따라 오른쪽 폭이 들려 올라가서 무릎 밑에 깔렸다가 다시 나오며 무릎 받침 옷주름 층을 만들고 있다. 이는 무릎 받침 옷주름 층의 선구를 이루는 것이다. 족대를 밟고 내리 디딘 왼발 아래에는 넓은 연꽃 좌대가 새겨져 있고 삼산관을 쓴 머리 둘레에는 두원광이 단순한 동그라미로 새겨져 있다.

또 북쪽 바위 절벽 맨 위쪽 왼편, 즉 동쪽에 반가좌로 앉아 있는 이 미륵보살을 향해 2불 1보살이 서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각기 왼손을 들어 미륵보살을 가리키며 무엇을 인정하거나 누구를 인도해가는 듯한 태도다. 맨 오른쪽 불입상 높이가 105cm이고, 그 다음 보살입상 높이가 102cm이며, 그 다음 불입상 높이가 116cm인데, 모두 낮은 돋을 새김으로 파서 만들었다.

9회에서 살펴보았듯이 아마 ‘법화경’ 권1 서품에서 말한 대로 연등불은 석가모니불을 수기(授記; 장차 부처님이 되리라는 예언)하고, 석가모니불은 미륵을 수기하며 문수보살은 이 사실을 인증하는 내용을 표현함으로써 미륵의 하생을 기정 사실화하는 장면인 듯하다. 따라서 미륵반가상 바로 오른쪽에 서 있는 가장 큰 불입상은 석가모니불로 보아야 하고, 그 다음은 문수보살, 또 그 다음은 연등불로 보아야 마땅하겠다.

이 이 정확하게 언제 조성되었는지는 분명히 알 수 없으나 김유신이 수련하던 시기를 전후해서 만들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화랑이 출현하는 진흥왕 37년(576)부터 김유신이 이곳에서 수련하던 시기인 진평왕 31년(609) 사이에 조성되었다고 해야 한다.

만약 김유신 수련 시절에 조성된 것이라면 여기에 조성된 미륵반가상 역시 미륵선화인 덕만공주, 즉 선덕여왕을 상징하였을 것이다. 이 시기 김유신이 용화랑이었다면 덕만공주를 화주(花主)로 삼고 있었을 터이니 말이다.

또 하나의 예는 경주시 충효동 송화산 김유신묘 재실인 금산재(金山齋)에 전래해 오다 1930년 경주박물관으로 옮겨놓은, 현존 높이 125cm의 이다. 머리와 두 팔이 잘려나갔으나 반가자세를 한 몸통은 거의 온전하게 남아 있다. 상반신이 나신이고 쌍가락지 형태의 둥근 목걸이를 하고 있어 과 동일 양식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머리칼이 어깨를 덮은 흔적이 있고, 장식띠가 옆구리 허리띠로부터 길게 내려와 있으며, 연화족대를 밟고 있는 왼쪽 정강이를 따라 표현된 옷주름선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 등은 양식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어 보다는 앞서고 보다는 뒤의 양식이라 해야 하겠다.

반가한 오른쪽 무릎 밑을 받쳐주는 무릎 받침 옷자락 표현이 분명치 않고, 반가한 오른쪽 발의 발바닥이 왼쪽 무릎 너머로 넘겨 붙은 것이나, 옷주름 표현에서 입체성이 결여된 점 등도 이 반가상 조성이 아직 습작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준다. 그런데 이런 습작품이 있다는 것은 곧 최고 걸작품의 출현을 예고하는 것이므로, 의 존재는 의 신라 제작설을 증명하는 부동의 증거라 하겠다.

[ 김술종이 조성한 북지리 미륵반가상 ]

다음은 이다. 허리 이상 상반신 거의 전부가 잘려나간 반가상이다. 그런데도 현재 남아 있는 부분의 높이가 160cm나 되는 것을 보면 세계 최대 규모의 반가사유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남은 부분을 근거로 복원하여 높이를 계산하면 250cm나 된다고 한다. 가히 장육(丈六) 미륵반가상이라 할 만한 규모다.

그런데 이 미륵반가상은 과 거의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 닮았다. 다만 하나는 재질이 화강암이고 하나는 금동이라는 차이와, 하나는 높이가 250cm나 되고 하나는 높이가 93.5cm로 크기가 다를 뿐이다.

그래서 선뜻 선후 구별이 안 되는데, ‘삼국유사’ 권2 효소왕대(孝昭王代) 죽지랑(竹旨郞)조에 다음과 같은 얘기가 있어 그 선후 문제를 가늠하게 해준다.

“처음 술종(述宗)공이 삭주(朔州, 현재 춘천) 도독사(都督使)가 되어 장차 다스릴 곳으로 가려는데 그때는 삼국이 전쟁을 치르고 있었으므로 기병(騎兵) 3000으로 호송하게 되었다. 일행이 죽지령(竹旨嶺, 지금 죽령)에 이르니 한 거사가 있어 그 고갯길을 잘 다스렸다. 공이 보고 탄복하여 크게 칭찬하자 거사도 역시 공의 위세가 심히 빛나는 것을 좋아하여 서로 마음에 새겨 두었다.

공이 삭주의 임소에 부임하여 한 달이 지났는데 꿈에 거사가 방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부인도 같은 꿈을 꾸었다 하므로 놀라움이 더욱 심하여 다음날 사람을 시켜 거사의 안부를 물어오게 하였다. 심부름꾼이 가서 묻자 사람들이 말하기를 거사가 죽은 지 며칠 됐다고 한다. 심부름꾼이 돌아와 그 죽음을 알리는데 바로 꿈꾼 날이었다.

공이 이르기를 ‘아마 거사가 우리 집에 태어날 모양이구나’하고 다시 군사들을 보내 죽지령 위 북쪽 봉우리에 장사 지내게 하고 돌미륵 하나를 만들어 무덤 앞에 안치하였다. 꿈꾸던 날로부터 부인에게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으니 그로 인해 이름을 죽지(竹旨)라 하였다. 자라서 벼슬에 나가 유신(庾信)공과 함께 하며 그 부원수가 되어 삼국을 통일하고 진덕·태종·문무·신문 4대에 걸쳐 재상을 지내며 나라를 안정시켰다.”

즉 이 미륵석상을 삭주 도독사 김술종이 조성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삼국유사’ 권 1 진덕왕(眞德王)조에 보면 이런 기록이 있다.

“진덕왕 시대에 알천(閼川)공, 임종(林宗)공, 술종(述宗)공, 무림(武林)공(자장의 부친), 염장(廉長)공, 유신(庾信)공이 남산 우지암(于知巖)에 모여서 국사를 의논했다.”

김술종은 진덕여왕 때 화백회의를 주도하던 6인의 원로 대신 중 3번째에 해당하는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6번째인 김유신보다 지위나 나이가 훨씬 위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진덕여왕(647∼654년) 원년(647)에 김유신의 나이가 53세였는데 김유신이 말석에 끼었다면 세번째인 김술종은 김유신보다 적어도 10세 이상의 나이 차가 있을 듯하다.

그런데 김술종이 미륵석상을 만들고 낳은 아들인 김죽지가 장군이 되어 진덕여왕 3년(649)에 태장군 김유신의 부장(副將)으로 도살성에서 백제군을 대파하는 전공을 세우고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때 김죽지의 나이가 40세 정도는 되었을 터이니 김죽지가 태어난 것은 진평왕 32년(610) 경이 될 것이다.

이 해에 김술종이 삭주 도독이 됐다면 나이가 30세 정도는 되어야 하므로 김술종이 태어난 시기는 진평왕 2년(580) 경이라 해야 할 것이다. 김유신보다 15세 정도 연상인 셈이다. 이렇게 보면 진덕여왕 때 화백회의에서 김술종과 김유신이 3번째와 6번째가 될 만한 나이 차이다.

또 김죽지가 마지막 전공을 세우는 기록이 문무왕 10년(670) 백제 부흥군으로부터 7개의 성을 빼앗는 것이니, 610년 생이라면 환갑쯤 되었을 터라 그의 출생연도에 대한 추정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김죽지는 신문왕(681∼691년) 때까지 재상을 지내고 효소왕(692∼701년) 때까지 살아 있었다 하니 80세 이상 장수하였던 모양이다.

어떻든 김죽지가 태어난 해가 진평왕 32년(610) 경이라면 이 의 조성연대도 바로 그 해 어름이어야 하니, 의 조성연대 역시 거의 밝혀진 것이나 다름없다 하겠다.

은 1965년 11월26일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物野面) 북지리(北枝里) 구산동(龜山洞)에서 신라 오악(五岳) 조사단이 발견했다. 이후 1966년 6월에 경북대학교가 이 지역에 대한 발굴 조사를 담당하여 원 위치를 확인하고 을 경북대학교 박물관으로 옮겨 소장하고 있다. 이 상과 의 선후 문제는 선뜻 결정짓기 어려우나, 거의 동시에 조성된 것이 틀림없다.

김술종이 진골 귀족으로 30대 젊은 나이에 삭주 도독이 되어 3000 기병을 이끌고 죽령을 넘어 춘천으로 부임해가게 된 것은, 그때 수(隋)의 중국 통일(589년)로 국제 정세가 급박하게 변화하여 삼국의 쟁패가 예측할 수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말려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남북조의 대립과 분열이 지속될 때는 그 영향이 우리에게 끼칠 틈이 없으므로 삼국은 자체의 힘겨루기만으로 문제를 해결하게 되니, 진평왕 초년 경에는 진흥왕이 확장해 놓은 영토를 지키기가 여간 힘겹지 않았다. 고구려와 백제가 연합하여 실지를 회복하기 위해 적극 공세를 펼쳐왔기 때문이다.

드디어 고구려는 수와 대결함에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영양왕 9년(598) 즉 진평왕 20년에 왕이 말갈군사 1만을 친히 이끌고 요서를 선제 공격함으로써 수나라와 전단(戰端)을 열어 놓는다.

이에 진평왕은 때를 놓치지 않고 그 26년(604) 남천주(南川州, 현재 이천)를 폐지하고 북한산주(北漢山州, 현재 서울)를 다시 설치하여 고구려에 적극 공세를 취한다. 진흥왕 29년(568)에 북진정책을 포기하는 유화적 몸짓으로 북한산주를 폐지하고 남천주로 옮겨왔던 것인데, 이제 38년만에 다시 북진정책을 표방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호전적인 수양제(605∼616년)가 들어서자 진평왕은 그 30년(608)에 수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있던 원광(圓光)법사에게 부탁하여 고구려를 정벌해달라는 걸사표(乞師表)를 지어 보낸다. 때마침 수양제는 바로 전 해에 돌궐 가한(可汗) 계민(啓民)의 장막에 이르렀다가 고구려 사신이 와 있는 것을 보고 고구려 정벌을 결심하고 있던 터라 이를 흔쾌히 허락한다.

이 소식을 접한 고구려는 2월에 신라를 응징하기 위해 대군을 일으켜 춘천의 우명산성(牛鳴山城)을 함락한다. 이에 진평왕이 김술종을 삭주도독으로 삼아 춘천으로 급파하여 고구려를 물리치게 하였던 모양이다.

벌써 진평왕 33년(611) 2월에는 수양제가 고구려 정벌의 조서를 천하에 포고한 상태였다. 그러니 김술종이 이 어름에 삭주 지방을 회복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왕실 측근의 진골 귀족으로 패기만만한 30대 초반의 국경 수비대 사령관직에 있던 김술종이 자신의 아들이 미륵하생시에 태어나 통일이라는 대업을 이룩하고 미륵세계를 이루는데 대공을 세워주기를 간절히 기원하여 만든 미륵보살상이라면 그 정성과 규모가 어떠했을지 대강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태어날 자식이 미륵보살이 되기를 기원했을 수도 있다.

죽령에서 멀지 않은 봉화 물야계곡 죽지리 구산동에 세계 최대 규모의 걸작 미륵반가상이 조성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단단한 화강암 재료로 총높이가 250cm나 되는 거대한 석상을 조성하였는데도 이 가지고 있는 세련된 조각 기법이 거의 그대로 재현돼 있다. 돌로 된 옷자락이 산들바람을 맞아 살랑살랑 나부끼는 느낌이 들 정도다.

일본 경도(京都)에서 가장 오래된 절이라는 광륭사(廣隆寺)에는 과 쌍둥이처럼 닮은, 높이 83.3cm(2자7치6푼)의 이 있다.

누가 보아도 쌍둥이라고 얼른 알아볼 수 있는 이 미륵반가상은 최근 일본학자의 연구 결과 신라에서 진평왕 45년(623)에 만들어 보낸 것으로 밝혀졌다. ‘일본서기(日本書紀)’ 권22 추고(推古) 천황 31년 7월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는 것을 토대로 밝혀낸 사실이다.

“31년 가을 7월에 신라가 대사(大使)로 내말(奈末) 지세이(智洗爾)를 보내고 임나는 달솔 내말지(奈末智)를 보내 함께 왔다. 불상 1구와 금탑 사리를 보내고 또 대관정번(大觀頂幡) 1구와 소번(小幡) 12가닥도 보냈다. 곧 불상은 갈야(葛野) 진사(秦寺)에 모시고 나머지 사리와 금탑 및 관정번은 모두 사천왕사(四天王寺)에 들여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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