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6월호

“나는 궁금하다, 고로 탐구한다”

세계적인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

  • 글·김운찬 대구 효성가톨릭대학교 이탈리아어학과 교수

    입력2006-10-10 09: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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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번 호 세계 석학 시리즈는 ‘장미의 이름’ ‘푸코의 추’ 등의 소설로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움베르토 에코 교수를 소개한다. 이 글은 앞부분에서 이탈리아 볼로냐 대학에서 에코 교수의 지도로 기호학 박사과정(dottorato) 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대구 효성가톨릭대 김운찬 교수가 그의 학문과 사상을 전반적으로 통찰하고, 뒤에는 이탈리아의 시사주간지 ‘레스프레소(L’espresso)’에 실린 에코 교수의 최근 칼럼 두 편을 소개했다. 문화가 경쟁력의 척도가 된 21세기, 에코 교수의 독특한 학문세계는 독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클 것으로 기대한다. <편집자> 》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는 현대 이탈리아 학자 중에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로 꼽힌다. 해박한 지식과 장황할 정도로 방대한 이론체계, 기호학에서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관심사,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을 넘나드는 독특한 글쓰기, 다분히 예술가다운 직관과 예리한 비평 등으로 널리 알려진 그는 현재 70세 가까운 나이에도 대학교수이자 소설가, 여러 신문과 잡지의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유명세 덕분인지 다양한 성격의 국제학회와 강연, 각종 문화행사는 앞다투어 그를 초청하려고 노력한다.

    에코의 지식 세계를 개략적으로나마 더듬어보기는 결코 쉽지 않다. 무엇보다도 그가 남긴 방대한 분량의 글들이 체계적인 접근을 가로막는다. 지금까지 그가 편집하거나 저술한 책들은 50권이 넘으며, 그 외에 다양한 성격의 학술지와 잡지·신문에 실렸던 글들, 각종 학회와 세미나에서 발표한 논문과 보고서들, 강연 및 대학의 강의록, 인터뷰와 대담들은 아직 일목요연하게 정리조차 되지 않았을 정도다.

    두뇌 속 백과사전 탐험하기

    게다가 그런 글들의 형식과 성격 역시 다양하다. 이론적이고 학술적인 논문과 비평·시사평론·수필 등이 뒤섞여 있고, 소설까지 포함돼 있다. 따라서 그의 글은 아주 평범해 보이는 것도 복합적인 읽기를 요구한다. 그의 말대로 “책이란 다른 책들에 대해 말할 뿐”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듯이 다른 관련 텍스트와 주변적 지식들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에코의 두뇌 속에는 방대한 백과사전이 통째 들어 있는 듯하다. 그러한 그의 지적 우주를 전반적으로 탐험해본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지만, 어떠한 방식으로 접근하든 단순화의 위험은 남을 것이다.

    1932년 이탈리아 북부의 조그마한 도시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난 그는 토리노대학에서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미학 문제’에 대한 탁월한 논문으로 학위를 받은 후 이탈리아의 국영 방송사 RAI에서 잠시 근무하기도 했고, 피렌체 대학과 밀라노대학을 거쳐서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볼로냐대학의 기호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60년대 초 소위 ‘63그룹’의 결성과 함께 이탈리아의 문화예술계에 네오아방가르드(Neoava- nguardia)의 새로운 방향 모색과 논의가 이루어졌을 때에는 활발한 이론가로 참여하기도 했다.



    이와 맞물려 1962년에 출판된 저작 ‘열린 작품’은 단번에 그를 유명 인사로 부상시키는 계기가 됐다. 이 책은 이후에 형성될 그의 이론체계에서 주춧돌 구실을 하고 있는데, 특히 프랑스어로 번역 출판되면서 레비 스트로스, 라캉 등 구조주의 학자들과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작품의 내적 구조를 치밀하게 추적하는 구조주의자들에게 예술 형식의 ‘열림’이라는 개념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논쟁 과정에 에코가 발견한 이론적 해결책이 바로 기호학이었다. 두말 할 필요도 없이 그는 현재 세계 최고의 기호학자 중 한 명으로 꼽히고 있으며, 그의 이론은 현대 기호학계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의 기호학 이론은 1968년에 출간된 ‘부재의 구조’에서 움트기 시작하여 1971년 ‘내용의 형식’, 1973년 ‘기호’를 거쳐 1975년의 ‘일반 기호학 논고’에서 화려한 꽃을 피우게 된다. 거의 동시에 이탈리아어와 영어로 나온 ‘일반 기호학 논고’는 처음으로 일반 기호학의 이론적 토대를 설정한다는 원대한 계획 아래 집필됐으며, 그에 걸맞게 기호학의 발전에 하나의 중요한 계기를 부여했다. 물론 이후 기호학의 발전과정에 나름대로 한계를 드러내기는 했지만, 거기서 제시된 여러 개념과 이론적 토대는 아직도 많은 이가 연구대상으로 삼고 있다.

    기호학이란?

    ‘일반 기호학 논고’에서 에코는 기호란 “다른 무엇인가를 대신하는 모든 것”으로 규정한다. 그런데 기호가 대신하는 그 ‘다른 무엇’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따라서 그것은 거짓말을 하는 데에 사용될 수도 있다. 그런 맥락에서 에코는 일반 기호학의 한 이론적 가설로 ‘거짓말 이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의 기호 개념에 따르면 인간의 모든 문화현상은 기호로 간주될 수 있으며, 따라서 기호학적 분석의 대상이 된다. 에코 자신의 표현대로 ‘기호학적 제국주의’라 부를 수 있는 이처럼 방대한 학문을 하나의 일관성 있는 이론체계로 정립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모든 문화 현상을 연구한다는 기호학의 정의는 너무나도 광범위하고 포괄적이다. ‘인간의 사회생활 속에서 기호들의 삶을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소쉬르의 정의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것은 기호학이 도대체 무엇이며 그 구체적인 대상이 무엇인지, 그 방법론은 무엇인지 명확하게 정의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그러면 기호란 무엇인가. 모든 기호는 ‘표현’의 단면과 ‘내용’의 단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시각적이든 청각적이든 표현수단이 되는 물리적 실체와 그것이 구체적으로 가리키는 대상이 불가분의 관계로 결합돼 있는 것이다.

    기호학에서 말하는 기호의 두 가지 핵심적 기능은 의미화(signification)와 소통화(communication)이다. 즉 모든 기호(정확히 말하자면 표현 그 자체)는 고유의 내용(또는 의미)을 갖고 있으며, 그 내용이 누군가에게 전달될 때 소통화가 이루어진다.

    인간이 사용하는 대표적인 기호는 단연 언어다. 그 외에 맹인들의 점자(點字), 군인들의 신호, 교통표지판 등을 비롯하여 사진이나 그림·음악·무용, 심지어 우리의 일상적인 손짓이나 미소까지도 나름대로 의미를 표현하고 전달하는 기호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분명 모든 문화적 산물이 기호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호학의 대상은 기호’라는 단순한 정의 역시 ‘문화의 학문’이라는 정의와 마찬가지로 막연하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러한 기호 현상들의 다양성에 있다. 표현과 내용의 상호 결합, 의미화와 소통화라는 공통적 성격 이외에 분야별 고유의 기호가 생산되고 소비되는 방식들 및 그 조직화 과정은 무한할 정도로 다양하다. 가령 한 편의 노래가 구성되는 방식과 한 폭의 그림이 형상화되는 방식은 완전히 다르며, 각각의 구성 요소와 기본적인 단위도 서로 다르다. 따라서 그것들은 체계적이고 일관성 있는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기호의 추상적인 성격이나 기능에 대한 연구는 자칫하면 철학이나 논리학의 일부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 현대 기호학이 단순히 물질적 대상인 기호 그 자체에 대한 연구가 아니라, 기호를 통한 의미화 과정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아마도 당연할 귀결일 것이다. 어쨌든 기호학이 문화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면, 철학·예술·문학·언어학·자연과학 등 전통적 학문이 개별적으로 다루던 것들을 총체적으로 고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호학이 여러 학문 분과를 연결하는 대표적인 학제간 연구방식으로 꼽히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에코의 기호학 이론

    기호학의 이러한 성격을 반영하듯 에코의 관심사는 실로 다방면에 걸쳐 있다. 초기의 철학과 미학의 여러 문제들에 대한 고찰에서 시작해 문학 및 아방가르드 예술이론, 대중매체의 문제, 건축기호학 및 만화기호학, 현대의 소비문화 등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서 에코는 나름대로 독특한 기호학적 ‘해석’을 가하고 있다. 기호학이라는 포괄적인 관점에서 볼 때 모든 문화적 산물은 끊임없이 흥미로운 의미의 그물들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그는 법률이나 정치·사회 제도 등도 기호학적으로 새롭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심지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이나 우주 역시 관점에 따라 상이한 방식으로 해석해야 할 대상이다.

    실제로 ‘해석’은 에코의 기호학 이론체계를 관통하는 핵심 용어다. 도식적으로 보자면 그것은 작품의 ‘열림’이라는 초기 개념에서 발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개념은 ‘열린 작품’에서 논쟁적으로 제시됐던 것이다. 현대 예술작품의 형식은 본질적으로 열린 구조이며, 따라서 수신자에 의한 다양한 해석을 허용하고 또한 그 해석에 의하여 구체적으로 실현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당시의 이러한 주장은 아직은 불분명하고 다분히 직관적인 개념이었다. 이후 그러한 주장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기 위한 방법론적 도구로서 활용한 것이 바로 기호학이었다. 그러니까 ‘열림’의 형식이라는 예술작품의 내재적 전략을 파헤치고 구명하는 과정에 그의 기호학 이론이 정립됐던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 그것은 ‘해석’의 이론으로 발전했다. 무엇보다도 열린 형식이 수신자에 의한 자유로운 해석의 가능성들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에코는 프랑스의 탁월한 기호학자 그레마스와 대비를 이룬다. 현대 기호학은 두 개의 커다란 흐름으로 발전해왔는데, 하나는 소쉬르에서 옐름슬레우를 거쳐 그레마스에 이르는 계열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의 철학자 퍼스의 이론을 이어받은 에코의 계열이다. 그레마스의 이론이 ‘의미의 생성 경로’를 치밀하고도 정교하게 추적하는 ‘생성 기호학’이라면, 에코의 이론은 수신자에 의한 텍스트의 해석에 관심을 기울이는 소위 ‘해석 기호학’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기호학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두 사람은 기호(또는 텍스트)의 생산과 소비라는 두 과정에 각각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셈이다. 그들의 이론은 서로 배타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서로 반영하며 상호보완적이다.

    그렇다면 에코에게 해석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의 기호 또는 작품은 표현과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내용을 객관적으로 명백하게 설정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에코에 따르면 ‘작가의 의도’와 ‘작품의 의도’, 그리고 ‘독자의 의도’는 종종 서로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작가의 의도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다른 방식으로 코드화할 수 있으며, 따라서 실제 작품은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다른 의미로 충만해질 수도 있다. 또한 그 작품의 총체적인 의미 그물이 모든 수신자에게 동일하게 전달된다고는 장담할 수 없다.

    이런 현상은 단지 예술 작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우리는 각자의 의도를 충분하게 전달하지 못하거나 상대방의 말을 오해하기도 한다. 극단적인 경우 우리의 의사소통 과정은 오해의 연속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이것은 기호의 본질적 특성인 ‘모호성’ 때문인데, 그로 인하여 고도로 복합적인 기호인 예술작품 또는 텍스트는 ‘열려’ 있을 수밖에 없다.

    바로 여기에서 수신자에 의한 해석이 중요성을 갖는다. 당연히 해석이란 수신자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 에코에 의하면 “텍스트란 원래 게으른 장치”이며 그 자체로는 말이 없다. 그러한 텍스트는 수신자의 능동적인 ‘해석적 협력’에 의해서만 생명력을 얻으며, 비로소 구체적으로 실현되고 고유의 의미를 드러낸다.

    그렇다고 해석이 무한하게 열려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구약의 어느 한 곳에 근친상간의 이야기가 나왔다고 해서 성서 전체를 에로물로 해석하는 것은 분명 잘못이리라. 그것은 해석이 아니라 수신자가 텍스트에 가하는 일종의 폭력이다.

    1990년에 나온 ‘해석의 한계’는 ‘열림’과 ‘해석’에 대한 이러한 오해의 여지를 불식시키고자 한다. 물론 명확하고도 객관적인 해석 기준을 설정하기는 불가능하지만, 텍스트 자체의 복합적인 전략과 지침에 따른 해석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어쨌든 에코의 후기 작업은 이러한 해석과정의 모델을 설정하고 그 메커니즘을 밝히는 데에 집중돼 있다.

    니체의 초인과 만화의 슈퍼맨

    여기에서 텍스트란 단지 언어로 쓰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일반 기호학 논고’에서 밝히고 있듯이 기호학은 모든 문화현상을 대상으로 한다. 문화란 본질적으로 다양한 형태의 텍스트를 생산하고, 또 그것들을 통해 소통되고 보존되며 다음 세대에 전달된다. 더 광범위한 의미에서 텍스트는 음악·미술·영화·패션·음식·건축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생산된다.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 의미화의 산물이며 사람들 사이의 소통적 상호작용의 매개체다.

    기호학 고유의 이러한 성격을 반영하듯 에코는 문화의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흥미로운 관찰들을 제시한다. ‘열린 작품’에서 현대의 대중적 예술에 대하여 논쟁적인 주장들을 펼친 것을 시작으로 그는 ‘종말론자들과 통합주의자들’(1964), ‘대중의 슈퍼맨’(1976), ‘제국의 주변에서’(1977), ‘7년 동안의 욕망’(1983), ‘거울에 대하여’(1985) 등에서 현대 문화의 특징적 양상들을 독특한 관점에서 고찰하고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만능 문화평론가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60년대부터 이미 TV나 영화·만화·스포츠·광고·정치 등은 에코의 흥미를 자극하는 주요 원천이었다. 요즈음에는 어느 정도 보편적인 현상이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그런 대중문화는 대학 교수나 학자들의 진지한 관심거리가 아니었다. 따라서 아마도 당연한 귀결이겠지만 ‘열린 작품’에 대한 반응은 거의 즉각적이었다. 한편으로는 학문의 통속화라는 비난이 있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테마와 방법론을 제시했다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어쨌든 그의 독특한 문화읽기가 찬성과 반대의 차원을 넘어 다양한 논쟁의 장을 마련한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에코는 전통적인 아카데미즘의 벽을 허물었다. 분명 그것은 소위 고급 문화와 저급 문화라는 그릇된 구별과 편견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아울러 학문이나 이론이 현실세계와 괴리되어 있지 않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아니, 오히려 이론이 현실의 다양한 실천적 형식들에 의해 세워지고 수정 또는 보완돼야 한다는 점을 부각시키는 것이었다.

    대부분 신문이나 잡지에 실렸던 그의 글들은 동시대의 생생한 문화현상을 분석함으로써 시사평론의 성격을 강하게 드러내는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그의 이러한 글들이 이론적이고 학문적인 성격의 저술들과 아예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분명 그는 기호학자의 눈으로 주변 세상을 바라보고 있으며, 모든 문화적 산물을 동등하게 진지한 눈으로 다룬다.

    예를 들면 그에게 있어 니체의 슈퍼맨(超人)은 만화의 슈퍼맨이나 타잔과 동일한 맥락에서 고찰된다. 니체에 의해 철학적으로 상정된 초월적이고 이상적인 인간상은 좀더 대중적인 모습으로 형상화한 슈퍼맨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에코가 단지 학문적 이론이나 가설을 뒷받침하기 위한 자료로 대중문화를 끌어들인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대중문화의 분석을 통해 자신의 이론을 정교하게 다듬고 체계화했다. 그것은 기호학이 본질적으로 문화의 학문이라는 사실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기호학자 에코 = 탐정?

    특히 기호의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과정에 그는 종종 추리소설 기법을 인용한다. 추리소설의 열광적인 애독자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그는 셜록 홈스의 작가 코넌 도일과 크리스티의 작품들을 기호학적으로 분석하기도 했다.

    추리소설에서 탐정이 수행하는 작업은 우리가 기호를 해석하는 과정과 비교될 수 있다. 가령 우리는 어떤 기호 앞에 직면했을 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한 추론, 즉 퍼스가 말하는 ‘추정법(abduction)’의 단계를 거치게 된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것은 탐정의 추리와 다르지 않으며, 동시에 그 소설을 읽는 독자의 머리 속에서 이뤄지는 과정이다. 탐정이 사건의 흔적들을 추적하여 범인을 찾는다면 독자는 텍스트상의 기호들을 다각도로 추론, 즉 해석함으로써 그 내용에 도달한다.

    이처럼 에코는 대중문화 현상을 분석해 오히려 기호학의 쟁점이 되는 가설과 모델들을 세우곤 했다. 그러면서 때로는 대중문화 뒤에 숨어 있는 상업주의와 이데올로기를 폭로했다. 예컨대 19세기 중엽 프랑스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으젠 쉬(E. Sue)의 신문 연재소설 ‘파리의 신비’를 분석하면서,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사회주의적 이데올로기와 연결되어 빚어지는 드라마를 보여 주었다. 또한 이언 플레밍의 007시리즈 소설에 대한 분석에서는 서사구조 뒤에 냉전시대의 경직된 이데올로기가 교묘하게 감추어져 있음을 폭로했다.

    그렇지만 롤랑 바르트의 경우처럼 에코의 이론에서는 이데올로기 문제가 핵심 모티프를 이루지는 않는다. 다만 기호학적 메커니즘의 추적과정에 나타난 문제 중 하나로 다루고 있을 뿐이다. 분명 기호는 거짓말을 하는 데 이용될 수 있으며, 따라서 어떠한 형태로든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이렇게 에코의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은 해석이론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문화란 본질적으로 소비자 대중을 전제로 하며, 그들에 의해 고유의 생명력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중문화의 생산자와 소비자는 공존 관계에 있다. 아니, 때로는 소비자의 욕구가 특정한 문화적 생산 방향을 결정하기도 한다. 영화 ‘카사블랑카’에 대한 분석에서 에코는 관객들의 기대가 오히려 작품의 플롯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바꾸어 말하면 대중문화에 있어 성공적인 작품일수록 수신자 또는 관객의 감추어진 욕망(또는 좌절된 욕망)에 적절하게 부응한다는 것이다. 타잔이나 람보와 같은 슈퍼맨은 바로 그러한 산물로 탄생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수신자는 대중적 작품의 은밀한 공모자로 기능하고 있다.

    에코의 관심이 단지 대중문화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철학이나 미학의 문제는 말할 것도 없고, 단테나 제임스 조이스 같은 소위 대가의 작품에 대한 분석은 그의 풍부한 지적 역량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심지어 1950년대 유럽 문화계에 유행을 불러일으켰던 선(禪) 사상을 날카롭게 관찰하기도 했다. 물론 선 사상의 영향으로 탄생한 예술 작품들에 대한 분석에 국한된 것이었지만, 가령 선의 본질과 비트겐슈타인의 사상 비교는 놀랄 만한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다.

    에코의 소설들

    이러한 기호학적 관심은 그의 소설에서도 드러난다. 1980년에 출판된 ‘장미의 이름’은 전세계 지식인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면서 에코의 또 다른 역량을 보여주었다. 뒤이어 나온 ‘푸코의 진자’(1988), ‘전날의 섬’(1994) 역시 그의 풍부한 상상력과 방대한 지식세계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계기가 됐다. 아울러 이 작품들은 기호학의 소설화라는 평가와 함께 그의 기호학적 관심이 일관성 있게 전개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장미의 이름’과 ‘푸코의 진자’는 추리소설적인 이야기 전개와 함께 독자들에게 책읽기의 즐거움을 불러일으킨다. 그렇지만 우선 방대한 분량에다 박식함과 현학성, 복합적인 사건의 연루, 겹겹이 중첩된 전개방식 등으로 인하여 웬만큼 교양과 학식을 갖춘 사람들에게도 난해한 소설로 유명하다.

    특히 ‘장미의 이름’은 영화화되어 우리 나라에도 널리 소개된 그의 대표적 소설이다. 추리소설을 한번 써보지 않겠느냐는 출판사 친구의 권유를 받고 쓴 이 작품은 중세의 어느 수도원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제목부터 중세라는 시대적 배경과 관련하여 논쟁들이 제기됐고, 결국 에코 자신이 그에 대한 ‘주해’를 쓰기도 했다.

    두 번째 소설 ‘푸코의 진자’는 분량이나 내용 면에서 훨씬 더 방대하고 복합적인 구성을 보인다. 특히 서구 역사의 이면에서 형성된 연금술·카발라·성당 기사단·프리메이슨 등 일종의 신비주의적이고 비교(秘敎)적인 사상과 사건들이 소위 공식적 역사와 중첩되어 나타나고, 또한 거기에서 인용된 복잡한 용어들 때문에 일반 독자들은 접근하기 어렵다. 급기야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해설사전’이 나올 정도였다. 그런데도 이 작품은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엄청난 판매 부수를 자랑하면서 전세계 지성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었다.

    에코의 소설들은 기호학 이론과 연결시켜 볼 때 흥미로운 점들을 시사한다. ‘장미의 이름’이 기호에 대한 적절한 해석(바꾸어 말해 정확한 추론)과 미흡한 해석 사이에서 빚어진 사건을 소설화했다면, ‘푸코의 진자’는 단순하고 평범한 기호를 지나치게 과잉 해석함으로써 벌어진 사건을 보여준다. 또한 ‘전날의 섬’은 남태평양에서 난파한 배에 혼자 살아남은 조난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주인공은 ‘타자’의 결핍, 즉 소통적 상호작용의 부재 상태에서도 글쓰기를 통하여 생존의 의미를 찾는다. 여기에서 언어 기호는 소통과 해석의 차원을 넘어서며 인간의 존재 그 자체와 직결된다.

    물론 에코의 소설을 꼭 기호학의 관점에서 해석할 필요는 없다. 그것 역시 하나의 텍스트로서 다양한 해석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소설적으로 형상화한 여러 가지 내용이 그의 기호학 이론과 잘 맞아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에코 자신의 말에 의하면 기호학에서 학문적으로 이론화할 수 없는 것들을 소설화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에코의 동료 교수이자 역시 뛰어난 기호학자인 팝브리(P. Fabbri)의 지적은 자못 예리하다. 즉 에코의 기호학은 이론적인 글보다는 오히려 소설에서 더 탁월하고도 극명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찰은 에코가 기호학을 지나치게 철학적 사변의 대상으로 만든다는 비난과도 연결돼 있다. 실제로 그의 이론적 저술들은 아리스토텔레스·칸트·토마스 아퀴나스 등 여러 탁월한 철학자의 관찰들을 논의 배경으로 삼은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러한 지적은 있을지라도 그의 기호학이 남긴 업적은 크다. 특히 퍼스의 이론을 이어받은 ‘무한한 기호작용’과 ‘해석소’ 개념을 비롯하여 ‘백과사전’ ‘시나리오’ ‘모델 독자’ ‘가능 세계’ 등의 개념은 기호학 분야에 새로운 가능성들을 열어주면서 지금도 끊임없는 탐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러한 성과는 아마도 에코의 부단한 노력과 탐구 정신에서 나온 것이리라. 일흔 가까운 나이에 그는 지금도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볼로냐대학의 기호학 강의 외에도 각종 학회와 세미나·강연을 위해 여러 나라를 방문하고, 신문이나 잡지 등에 끊임없이 그의 글이 실리고 있다. 얼마 전에 그를 만났을 때 혹시 한국을 한 번 방문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더니 앞으로 2년 동안의 스케줄이 짜여 있다고 장난스레 대답할 정도였다.

    세계적인 학자라는 칭송을 듣고 있지만 그에게서 권위적인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텁수룩한 수염에 약간 살이 찐 모습은 소탈한 아저씨 같은 느낌을 주며, 강의 중간 쉬는 시간에는 밖으로 나와 학생들과 담배를 피우며 유쾌하게 떠드는 것이 천진난만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한 에코에게서 아직 진행중인 이론과 지식체계가 앞으로 어떠한 방향으로 전개될지 지켜볼 만하다.

    다 보스(Davos)에서 열린 ‘세계경제 포럼’에 대해서는 지난주에 지안루이지 멜레가(Gianluigi Melega)가 이미 이야기했는데, 아마도 그는 모든 회의와 토론에 참여했던 모양이다(많은 토론이 동시에 진행되었는데도 말이다). 그에 비해서 나는 이 포럼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나는 몇몇 원탁 모임에 몰두해 있었기 때문인데, 그것들은 모두 윤리적·사회적 성격의 모임이었고, 따라서 나는 거물급 인사들과의 만남과 충돌 사이에 빠져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토론 속에서, 그리고 외부에서 항의하는 사람들의 논쟁 속에서 모든 사람이 세계화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그 세계화가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모든 분야에서 전지구적인 교환의 그물이 존재하기 시작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 생각에는 사실로 나타난 세계화와 가치로 보는 세계화를 구별하는 것이 유용하리라고 생각한다. 사실로 나타난 세계화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몇몇 형태의 세계화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는 의미다. 반면 가치로 보는 세계화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그러한 사실과 미래의 계획이 좋은지 또는 나쁜지 물어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가치로 보는 세계화가 나쁜 것이라면, 기존 사실에 대한 방대한 비교작업을 시작함으로써 그것을 수정·반대하거나 또는 그 방향을 바꿀 수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갈릴레이 시대 이후 과학은 세계화 과정에 따라 발전했으며, 그 때문에 세계의 모든 과학자들은 점진적으로 동일한 언어로 정보를 교환하게 됐다(그것은 학문적 라틴어 또는 수학적 언어인데, 세계는 바로 그 문자들로 쓰였다). 최근 들어 항공운송 시스템의 세계화는 여행을 좀더 안전하게 만들었고, 덕분에 예전에 비해서 비행기 추락사고는 한결 줄어들었다.

    지구의 절반을 오염시킨 샐러드

    인터넷은 바로 세계화 과정의 일부분을 이룬다(비록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변태 성욕까지 세계화하고 있지만). 가령 어느 고립된 아프리카 병원의 의사는 어려운 문제에 대해 온라인으로 호소할 수 있으며, 전자우편을 통해 세계의 대규모 병원들로부터 충고나 구체적인 도움까지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런 유형의 세계화는 본질적으로 긍정적이라고 말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렇다면 언어적 및 문화적 세계화는 긍정적인가? 아니다. 그것은 지구의 불행이 될 것이다. 지구적 접촉들의 측면에서 보면 다양한 문화의 정체성을 보존하려고 싸울 필요가 있다.

    언어와 문화의 세계화는 멈출 수 없는 사실인가? 부분적으로 그렇다. 하지만 모든 예상과는 반대로 인터넷의 여러 가능성 중 하나가 부각되고 있는데, 인터넷은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를 알게 해준다는 점이 그것이다. 물론 현재 우리는 영어를 잡종의 언어로 세계화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수많은 언어 및 수많은 세계관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사용되기도 한다.

    경제의 세계화. 그것은 다보스의 고안인가, 아니면 시애틀의 고안인가. 내 기억으로는 몇 해 전 벱페 그릴로(Beppe Gri llo)는, 샐러드 잎사귀 서너 개를 평온하게 먹고 있던 순진한 환경론자들에게, 그 샐러드는 바로 홍콩에서 온 것이며 화물선과 비행기·컨테이너를 이용하여 그의 고향 제노바까지 오는 과정에서 이미 지구의 절반을 오염시켰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나는 또 다른 사실도 기억하는데, 세계 여러 기구의 설득과 비난 덕분에 몇몇 회사는 이제 비용을 줄이기 위하여 연소자 노동력을 착취하는 나라에 신발이나 양말의 생산을 의뢰하지 않게 됐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지금으로서는 별것 아니지만, 하나의 길을 열어주고 있다. 그런 사실을 상기하고 추상적인 문제가 아닌 구체적인 문제들에 개입하는 것, 그것은 형이상학이 아니라 바로 정치학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가 다보스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이러한 원칙에는 동의하고 있었다. 하지만 잘 알다시피 어떤 사람이 미사에 참석한다고 해서 그 다음날 곧바로 착한 그리스도교인으로 행동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 해커의 미덕 ]

    최근 인터넷에서 일어난 지구적 사건들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잘 알다시피 기술이 고도화할수록 더욱 더 범죄의 대상이 된다. 조종실에 압력 조절장치도 없는 프로펠러 비행기 안에서는 납치범을 처리하기가 쉬웠다. 창문을 열고 범인을 아래로 내던지면 그만이었다. 반면 대륙간 제트 비행기에서는 위협용 가짜 권총을 가진 미치광이도 모든 사람을 죽일 수 있다.

    문제는 오히려 기술 발전의 가속화다. 라이트 형제가 최초의 비행을 시도한 이후 수십 년이 지난 다음에야 블레리오, 폰 리히토펜, 바라카, 린드버그, 발보 등이 비행수단의 점진적인 완성에 적응할 수 있었다. 지금 내가 운전하는 자동차는, 예전에 내가 면허증을 딸 때 탔던 낡은 구식 자동차는 꿈조차 꿀 수 없던 장치를 갖추고 있다. 만약 그 당시 지금의 내 자동차로 운전을 시작했다면, 나는 벌써 어느 구석에 처박혔을 것이다. 다행히도 나는 나의 자동차들과 함께 성장했고, 조금씩 그 역량에 적응할 수 있었다.

    기술발전에 적응하기

    하지만 컴퓨터의 경우에는 내가 기계장치와 프로그램의 모든 가능성을 때맞추어 배우기도 전에 벌써 새로운 기계와 더욱 복잡한 프로그램이 시장에 나온다. 심지어 아마도 나에게는 충분할 나의 낡은 컴퓨터로 그냥 밀고나가야 할지 결정조차 할 수 없다. 나에게 꼭 필요한 몇 가지 개선된 기능들이 벌써 새로운 컴퓨터에서 돌아가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속도는 무엇보다도 상업적 요구에 기인한다(산업은 우리가 그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지라도, 낡은 것을 파괴하고 새로운 것을 구입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것은 어느 연구자가 더욱 강력한 프로세서를 개발하는 것을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에서도 기인한다. 휴대전화와 녹음기, 그리고 모든 종류의 디지털 장치에서도 동일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만약 자동차가 두 달에 한 번씩 효율성을 개선한다면, 우리 몸의 반사기능으로는 때맞추어 거기에 적응하지 못할 것이다. 다행히도 자동차는 너무 비싸고 고속도로도 지금 그대로다. 그런데 컴퓨터는 더욱더 값이 낮아지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고속도로에는 제한속도가 없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이전의 컴퓨터로 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을 미처 이해하기도 전에 새로운 컴퓨터가 나온다. 이러한 드라마는 단지 일반 사용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FBI 요원, 은행, 심지어 미 국방성까지 포함하여 정보 통신의 흐름을 통제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도 해당된다.

    자기 컴퓨터의 새로운 가능성들을 이해하기 위하여 하루 24시간을 할애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해커, 그는 일종의 은둔자다. 하루의 일과를 온통 (전자적) 명상에만 할애하는 사막의 은둔자다. 여러분은 클린턴 대통령의 메시지 안에 침입했던 자의 얼굴을 보았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 그런 모습이다. 뚱뚱하고 당황해하고, 오로지 컴퓨터 화면 앞에서만 성장하여 제대로 발육하지 못한 모습이다.

    그들은 억제할 수 없는 리듬으로 발전하는 기술 혁신의 유일한 총체적 전문가가 됨으로써 컴퓨터와 통신망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해할 시간은 갖고 있지만, 새로운 철학을 형성하고 긍정적인 적용방법들을 연구할 시간은 없다. 그래서 자신들의 비인간적 역량이 허용하는, 유일하게 즉각적인 행위, 즉 전세계 시스템의 항로 이탈·방해·무력화에만 몰두하게 된다.

    그러한 과정에 그들 중 상당수는 자신이 ‘시애틀 정신’에 따라 행동한다고 믿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시스템의 훌륭한 협조자가 되고 만다. 왜냐하면 그들을 무력화하기 위해서는 기술을 최대한 신속하게 더욱 더 혁신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의 악마적 순환고리로, 그 안에서 저항자는 자신이 파괴한다고 믿는 것을 오히려 강화한다.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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