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양의 술은 섬세하다. 미묘한 맛과 향의 차이, 그래서 마실 때도 코·입술·혓바닥 같은 섬세한 감각기관을 동원한다. 동양의 술은 투박하다. 술잔도 크고 두껍다. 거기에다 철철 넘치게 따른다. 홀짝거리며 마시면 안 된다. 단번에 목구멍으로 털어넣는다.》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그 술을 앞에 놓고 친구는 “대서양으로부터 불어오는 거친 바람을 온몸으로 맞고 선 스코틀랜드 동부의 이슬레(Islay) 섬, 그곳에서도 바닷물과 강물이 서로 만나는 갯벌 아주 깊은 바닥에서 채취한 맑은 물로 만든 위스키”라고 했다. 100여 년의 세월(1881년부터 생산)이 흐르는 사이에 지형이 변해 이제는 원료가 되는 물을 더 이상 구할 수 없게 됐고, 물 재고마저 바닥나는 10년 뒤에는 술 생산도 중단된다는 얘기였다.
다시 맛보기 힘들 그 귀한 몰트 위스키를 잔에 따르고는 가만히 향내를 맡았다. 색깔은 투명에 가까웠고 향은 있는 듯 없는 듯 은은했다. 잔을 천천히 입술로 가져갔다. 가능한 한 목구멍으로 넘기지 않고 입안에 아스라이 퍼지는 맛을 오래도록 음미했다. 혀끝에 와 닿는 촉감은 아주 부드러웠고 뒷맛도 산뜻했다.
바로 그때 친구는 “좋은 위스키와 유명한 위스키는 다르다. 유명한 것이라고 해서 다 최상의 위스키는 아니다”며 위스키 본고장 출신답게 위스키론(論)을 풀어놓았다. 조니워커나 시바스 리갈은 유명한 위스키이고, 브루이치라디치는 유명하지는 않지만 분명히 좋은 위스키라고 예를 들었다. 무슨 상품이든 유명해지기까지는 엄청난 마케팅비용이 투입돼야 하는데 위스키도 거기에서 예외가 되지 않으며, 소비자는 그런 유명세를 치르느라 비싼 값으로 술을 마시게 된다는 것이었다.
조니워커의 판매전략
위스키라고 하면 누구나 맨 먼저 떠올리는 조니워커는 스코틀랜드에 본사를 둔 유나이티드 디스틸러리(UD)에서 생산된다. UD는 이 밖에 올드파, 드와, 벨즈 등의 위스키류와 헤네시 코냑, 그리고 진과 보드카도 함께 만드는데, UD를 먹여 살리는 으뜸가는 효자는 세계 스카치위스키 시장 점유율 1위를 자랑하는 위스키다. 회사 전체 수익의 약 80%를 위스키로 벌어들인다. 그중에서도 소비자의 취향과 주머니 사정에 따라 골라 마실 수 있도록 블루, 골드, 블랙, 레드 등 가격대가 각기 다른 4종의 라벨을 시장에 내놓고 있는 조니워커가 절반을 차지한다.
조니워커는 1820년 스코틀랜드의 소도시 킬마녹에서 조니 워커라는 잡화상 주인이 설립한 술 회사. 세인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은 1908년, 긴 장화를 신은 영국신사가 힘차게 걷고 있는 디자인의 심벌마크가 등장하면서부터였다. ‘아직도 건재하다(Still going strong)’는 글이 찍혀 있는 이 심벌마크는 조니워커의 손자 알렉산더 워커가 톰 브라운이라는 친구에게 디자인을 의뢰해 얻은 것이었다.
이전에 무역업에 종사했던 브라운이 조니워커사의 경영에 깊이 관여하게 된 것은 우연한 계기에서 비롯됐다. 조니워커사가 홍수로 큰 피해를 당해 도산 위기에 빠지자 그는 무역업자 출신답게 해외시장 개척에서 해결책을 찾았고, 그 과정에 특이한 마케팅 전략을 구사했다.
이런 전통을 가진 조니워커는 지금도 나라별로 특화된 광고전략을 편다. 유럽대륙에서는 누구와도 함께 어울려 마시는 술이라는 이미지를 살리고, 검은색이 행운을 상징하는 미국에서는 검은 고양이와 피아노의 검은 건반을 광고에 등장시켜 고급스런 분위기를 강조하며, 태국에서는 젊은층을 대상으로 능동적이고 활동적인 특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접근한다. 조니워커는 2차 세계대전 중에도 광고를 계속한 유일한 술 회사였다.
그러나 지금의 조니워커사는 워커 가문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1940년대에 워커가의 대가 끊겼기 때문이다. 그 후 ‘양조장 연합’이란 뜻의 유나이티드 디스틸러리로 상호를 바꾸었고, 1987년에는 기네스 그룹의 일원이 됐다. 세계의 진기록 모음집인 ‘기네스북’을 출간하는 기네스 인터내셔널이 바로 그 모기업이다.
기네스 그룹은 UD를 인수하면서 미국 유수의 광고기획사인 오길비 앤 마더사의 앤소니 테넌트 회장을 전격 스카우트해 UD의 판매 및 유통 부문을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그 핵심은 미국 일본 호주 아프리카 등지에 각각 해외 판매거점을 확보, 현지 실정에 맞는 마케팅방법을 채택하고 그 책임자도 영국인이 아닌 현지인을 고용하는 것이었다. UD는 최근 한국, 일본 등 동남아시아 시장이 급격하게 성장하는 것을 중시, 이 지역에 대한 홍보와 판촉활동을 크게 강화했다. 한국은 그 덕분에 세계에서 다섯 번째 가는 스카치위스키 소비대국으로 부상했다.
오크통이 빚은 술맛
조니워커나 발렌타인, 시바스 리갈, 글렌피딕 등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스카치위스키 회사들은 뛰어난 마케팅전략 못지않게 질을 향상하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스카치위스키의 역사를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위스키란 말은 ‘생명의 물’이란 뜻의 켈트어 ‘위스케 베아타(uisge beatha)’에서 나왔다. 유럽대륙의 원주민이기도 한 켈트인들이 마지막까지 살았던 곳이 지금의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였다.
그러나 이런 이유만으로 이곳이 자연스레 위스키의 본향으로 떠오른 것은 아니다. 증류주가 유럽대륙에 처음 등장한 것은 12세기로, 십자군원정대가 중동의 연금술사들에게서 비법을 전수받고 돌아온 뒤였기에 켈트인들의 술이 지금의 위스키였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런데도 이곳이 위스키의 원조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보리와 같은 추동작물이 재배되는 지역인데다, 무엇보다 질 좋은 피트(peat), 즉 이탄(泥炭)이 지천에 깔려 있어 맥아(몰트)를 건조하는 데 더없이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어서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의 시골 가정에선 맥아를 대개 응달이나 뜨뜻한 방바닥에서 말렸는데, 스코틀랜드에선 피트를 태우면서 그 불로 맥아를 직접 말려 피트의 연기가 맥아에 깊이 스며들도록 했다. 스카치위스키에 독특한 향이 밴 것은 이 때문이다. 이를 ‘스모키 플레이버(smokey flavor)’라고 하는데, 아일랜드에서는 피트를 사용하면서도 스코틀랜드인들과는 달리 간접 건조방식을 이용하기 때문에 아이리시 위스키에는 이런 훈향이 없다. 그래서 아이리시 위스키는 스카치위스키와 쉽게 구별된다.
피트로 말린 위스키에서 그런 향내가 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 ‘폭풍의 언덕’에 나오는, 자홍색 꽃을 피우는 히스(heath)라는 목본식물이 이 피트 위에서 자라다 죽고 자라다 죽고 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사이 히스의 향기가 그 속으로 녹아들었다가 그것이 타면서 다시 위스키에 스며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기의 스카치위스키는 지금의 것과는 아주 달랐다. 단지 톡 쏘는 향과 거친 맛을 지닌 평범한 알코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 18세기 초에 결정적인 전기를 맞이했다. 지방정부가 높은 주세를 부과하자 양조업자들은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몰래 술을 만들었는데, 그때 단속을 피하느라 낡은 오크통 속에 위스키를 담아 위장했다. 이것이 호박색을 띠며 독특한 향내와 부드러운 맛을 내는 오늘날의 위스키를 탄생시켰다. 오크통 속에서 우러난 여러 성분이 위스키와 어울리면서 그런 결과를 만든 것.
이런 까닭에 스카치위스키는 스코틀랜드산 오크통에서 숙성돼야 제 맛이 난다는 말이 생겨났다. 세계의 위스키 애호가들이 다른 브랜드를 제쳐놓고 스카치위스키를 탐하는 것도 이 지방에서 나오는 오크통의 독특한 재질 때문이다. 조니워커 블랙 라벨의 경우 오크통 안에서 최소한 12년간 보관된다. 발렌타인의 나이가 17년이냐, 25년이냐, 아니면 30년이냐를 따지고 그 연수가 올라감에 따라 가격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가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맛과 원가의 절묘한 타협
스코틀랜드에는 좋은 물이 많이 흐른다. 그 중에서도 숲이 울창한 협곡, 연어가 노니는 굽이쳐 흐르는 강, 그림 같은 어촌이 있는 하이랜드는 스카치위스키의 최대 생산지다. 이곳에서는 골짜기의 눈이 녹아 생긴 순수한 물로 위스키를 빚는데, 몇몇 양조장에서는 방문객들에게 제조과정을 직접 보여주기도 한다.
에든버러 북쪽의 스트라트스페이(Strathspey)는 몰트 위스키 양조산업의 중심지이며, 그 북쪽의 인버네스(Inverness)는 ‘댈러스 듀(Dallas Dhu)’라는 ‘몰트 위스키 트레일’의 출발점이다. 12세기 도미니크 수도사들이 사용했다는 샘물로 위스키를 빚는다는 시바스 리갈 양조장도 이 근처에 있다. 위스키 양조장이 하이랜드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아래의 로랜드와 섬 지역에도 산재해 있다. 브루이치라디치가 생산되는 이슬레, 스키예(Skye), 멀(Mull) 등이 그런 곳들이다.
위스키는 엿기름만으로 만드는 몰트 위스키와 곡류 등을 함께 섞어 만드는 그레인 위스키로 크게 나눌 수 있다. 후자는 발아시키지 않은 보리·호밀·옥수수·때로는 감자 전분을 기본 재료로 해서 소량의 엿기름을 거기에 섞어 당화(糖化)시키는 방법을 쓴다. 엿기름에는 강력한 당화효소가 있어 기술적으로는 문제가 없지만, 이 경우 향기가 떨어지는 단점이 있다. 그럼에도 그레인 위스키를 생산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생산원가가 몰트 위스키보다 훨씬 싸게 먹히기 때문.
생산원가와 맛, 이 이율배반적인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해 나온 것이 이른바 블렌드 위스키다. 양산된 그레인 위스키에 향기짙은 몰트 위스키를 혼합해 만드는 위스키가 그것이다. 조니워커, 시바스리갈, 발렌타인 등의 유명한 위스키는 모두 블렌드 위스키인데, 이들은 생산량이 충분하므로 세계시장을 상대로 마케팅 전략을 구사할 수 있는 것이다.
조니워커 블랙의 경우 40개 이상의 몰트 위스키를 섞어 만든다. 어떤 몰트 위스키를 얼마나 섞는지는 블렌딩 총책임자인 ‘마스터 블렌더’만 알고 있다. 이 비법은 위스키 영업의 핵심이기 때문에 코카콜라의 원액 성분처럼 절대로 공개되지 않으며, 마스터 블렌더 자손 대대로 전수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렇게 블렌딩 과정을 거친 위스키는 원액 상태로 오크통 속에 들어가 오랜 기간 숙성된다. 이 과정을 통해 위스키는 깊고 은은한 향취를 더해간다. 다양한 위스키가 모이는 ‘양조장 연합’일 수밖에 없는 블렌드 위스키의 최대 메이커, 조니워커사는 그래서 UD란 이름을 갖게 됐다.
위스키는 고급술이다. 영국인들도 자기네 술이지만 워낙 비싸서 마음대로 마시지 못한다. 그들의 대중주점인 펍(pub)에 들어가 보면 비교적 싼 술인 미국의 진 종류나 아니면 라거 비어보다 쓰면서 더 독한 영국식 생맥주 에일(ale)을 주로 마시는 것을 볼 수 있다. 값비싼 스카치위스키를 혓바닥으로 음미하기는커녕 곧장 목구멍에 탁 털어넣고는 “역시 비싼 술이 잘 넘어가. 목에 착 감겨서 내려가는 맛이라니” 하며 마셔대는 사람은 영락없이 한국사람이다.
이런 주법은 우리 성질이 급해서이기도 하고, 술을 홀짝홀짝 마시면 ‘사나이답지 못하다’고 생각해서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우리네 술이 대개 도수가 비교적 약한데다 맛과 향을 느껴가며 마시는 것이 아니어서 그런 습관이 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술을 목구멍으로 넘기는 순간 맛의 극치를 경험한다.
비싼 술을 마시는 서양사람들은 코와 혓바닥에서 쾌감을 느낀다고 할 수 있다. 반면 한국 사내들의 ‘술 성감대’는 입술도 혓바닥도 아닌 목구멍이다. 그래서 얼큰하게 한 잔 걸치면 자연스레 육자배기 한 가락이 구성지게 뽑혀나온다.
말이 나왔으니까 펍에 대해 한마디만 하고 넘어가자. 펍은 ‘퍼블릭 하우스’의 준말이다. 그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나이와 성별·직업에 관계없이 이용할 수 있는 공공의 공간이다. 그렇긴 해도 주고객은 샐러리맨들이다. 남녀가 함께라면 펍보다 분위기가 밝은 라운지 바로 간다.
펍에는 평범한 샐러리맨들이 하루 일과를 끝내고 가벼운 마음으로 찾아와 좋아하는 술을 한 잔 하든가, 아니면 친구들과 어울려 다트 놀이를 하다 간다. 문은 대개 정오에 열었다가 밤 11시쯤에 닫는다. 이곳에서 맥주를 마시려면 그냥 ‘비어’라고 해서는 못 알아듣고, ‘비터 에일(bitter ale)’이라고 해야 된다. 병맥주를 주문할 때는 ‘라거 비어’라고 해야 알아듣는다.
펍이 영국사회에 자리잡은 것은 엘리자베스 1세 치하였던 16세기 초. 왕실이 세수(稅收)를 늘리기 위해 귀족이나 특정단체에게 펍 운영권을 허가해주고는 펍이 아닌 곳에서는 술을 팔지 못하게 하면서부터였다. 술집이면서 대중의 집회소이고, 또한 역마차의 발착소 구실까지 했던 펍은 19세기 초, 산업혁명의 여파로 사회변혁이 가속화되자 직업알선소나 노동조합의 임시사무실로도 이용됐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때가 펍의 전성시대였다.
그러나 모든 것은 차면 넘치는 법. 펍이 대중화되고 그리하여 알코올 중독이 사회문제로 떠오르자 당국은 펍의 자격요건을 강화했고 이는 펍을 위축시켰다. 그렇지만 펍은 지금도 여전히 영국인들의 지친 마음을 어루만지며 사랑받고 있다.
스코틀랜드와 함께 위스키 대국인 아일랜드 사람들도 위스키보다는 맥주를 즐겨 마신다. 이들은 영국인들과는 달리 쌉쌀한 맛이 나는 ‘기네스’란 이름의 흑맥주를 선호한다. 가스등이 켜진, 300년쯤 된 고풍스런 바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기네스를 마시는 정겨운 모습은 이제 아일랜드가 아니고서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맥주하면 맨 먼저 독일의 뮌헨이 떠오른다. 60년대에 이곳에서 유학생활을 했던 전혜린이 “마로니에의 흰 꽃이 활짝 핀 나무 아래 테이블에 앉아서 마셨던 검붉은 마이복(Maibock)의 맛은 잊을 수가 없다. 모색(暮色)이 짙어가는 거리의 여기저기서 구운 소시지에 겨자를 발라먹으면서 쭉 들이켰던 금빛 맥주 한 컵, 그리고 겨울의 따스한 난로가에서 데운 맥주를 마시던 기억…”이라는 수필을 읽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널따란 공원, 백조가 한가로이 노니는 호수, 그리고 아름다운 중국식 탑이 있는, 뮌헨에서도 특히 유명한 ‘중국정원’을 찾았다가 어느 카페에서 한 건장한 여종업원이 한 손에 다섯 개씩, 모두 열 개의 머그를 들고 나르는 모습을 보고 한동안 얼이 빠진 적이 있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맥주를 마셔대면 저런 식으로 맥주를 나를까 하는 생각에 독일이야말로 진짜 ‘맥주대국’이구나 싶었다.
독일사람들은 정말 맥주를 사랑하는 것 같았다. 많이도 마셔댔다. 앉은자리에서 대개 2000cc짜리 세 개, 즉 6000cc는 거뜬하게 마셨다. 우리처럼 마시는 속도가 빠르지 않아서 그렇지, 마음먹고 마신다면 한도 끝도 없이 들어갈 것 같았다. 매년 10월 바이에른주의 주도인 뮌헨에서 열리는 ‘10월축제’를 우연히 목격한 어느 여행자는 “500만 명의 사람들이 마치 코끼리가 물을 들이키듯 순식간에 500만ℓ의 맥주를 들이켰다”며 혀를 내둘렀다.
술집이 늘어선 거리는 주말이면 새벽 2∼3시까지 흥청거렸지만 누구 한 사람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술을 즐기되 폭음하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았다. 그들은 대화를 부드럽게 이끄는 윤활유로 술을 활용할 뿐, 술에 원수진 사람처럼 마셔대지는 않는다.
서양사람들은 안주를 잘 먹지 않는 편이지만 아주 안 먹는 것은 아니다. 독일에선 소시지와 아이스바인(독일식 돼지족발)이 안주로 자주 올랐다. 독일은 겨울이 길다 보니 육류를 오래 보관할 필요가 있어 소시지와 같은 훈제요리가 발달했는데, 이게 훌륭한 맥주 안주가 된다. 기름을 쫙 뺀 데다 짭짤하게 간도 돼 있어 내 입에도 잘 맞았다. 거기에 양배추를 노란 겨자소스에 버무려 만든 독일식 김치를 더하니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뮌헨의 맥주집 호프브로이의 홀을 가득 채운 3000여 명의 손님이 소시지를 앞에 놓고 커다란 피처를 비워대는 모습을 보니 영화 ‘황태자의 첫사랑’에서 “마시자, 마시자” 하면서 주인공이 불렀던 ‘축배의 노래’는 독일에서가 아니면 나올 수 없는 장면이라 생각됐다. 이를 증명하듯 그 영화의 무대가 된 하이델베르크대학의 한 벽면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교황에게는 술이 있으나 여자가 없고, 술탄(오스만투르크제국의 황제)에게는 여자는 있으나 술이 없네. 그러니 술과 여자를 모두 가진 우리 인생이 훨씬 즐거울 수밖에.’
맥주냐, 말 오줌이냐
기후조건상 포도 재배가 불가능한 알프스 이북지방에선 와인보다는 보리·홉 등의 곡물로 빚는 맥주가 대종을 이룬다. 19세기 이래 정부가 맥주 제조권을 장악하고 법령으로 맥주의 순도와 원료를 규제하는 등 맥주의 품질 향상에 노력하면서 각 지방마다 독특한 맛의 맥주를 생산하는 독일은 말할 것도 없고, 네덜란드에선 1864년 하이네켄이란 사람이 1592년에 설립된 암스테르담의 하이스태크 양조장을 인수, 쓰지만 부드러운 맛을 내는 하이네켄을 만들고 있으며, 덴마크에선 1801년 야곱센이 설립한 칼스버그사에서 텁텁한 맛의 칼스버그를 내놓고 있다.
맥주의 본향은 체코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자유를 그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보헤미안들이 오늘의 맥주를 있게 한 주인공인데다, 세계 최대의 맥주회사인 미국의 안호이저 부시사가 체코의 유명한 ‘부드바르’ 브랜드를 미국식으로 고쳐 ‘버드와이저’란 제품을 내놓았을 정도니 말이다.
맥주는 와인과 마찬가지로 중세시대에는 수도원에서만 제조됐다. 그들은 양조권을 독점해 경제권을 장악했고 그리하여 유럽사회를 지배했다. 교회의 우월적 지위를 실질적으로 지탱한 것은 거대한 영지와 양조 독점권 같은 경제력이었다.
그렇다고 당시 최고의 두뇌집단이었던 수도원이 포도와 보리의 품종 개량과 양조기술의 발전에 기여한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특히 12∼13세기에 홉의 첨가법을 개발해 지금의 맥주를 있게 한 공로는 칭찬받아 마땅하다. 체코의 맥주가 탄생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보헤미아왕국의 웬체슬라브왕이 교황에게 맥주산업을 일으켜야 한다며 일반인들도 양조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진언한 끝에 허락을 받아냈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체코는 맥주산업의 선두주자가 될 수 있었다.
보헤미아 맥주는 밀, 보리, 귀리에다 홉·주니퍼(서양향나무)·감귤 등을 넣어 향과 맛을 낸 것인데, 경도가 아주 낮은 물을 사용하는 까닭에 맛이 담백하고 홉의 향도 짙다. 특히 프라하에서 서쪽으로 70km 정도 떨어진 필젠(Plzen)에서 생산되는 필제너(Plzener) 맥주는 ‘담백맥주(필젠타입 맥주라고도 함)’란 용어를 만들어 냈을 만큼 맛이 담백하다.
필제너는 맛이 뛰어날 뿐 아니라 건강에 좋다는 임상실험 결과도 나와 있어 의사가 환자에게 치료 차원에서 권하기도 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공장을 구경하겠다며 찾아오는 사람이 늘어나자 회사측은 공장 옆에 레스토랑을 만들어 놓고 이른 아침부터 관광객들을 맞는다. 현지에서 생맥주 맛을 본 맥주 애호가들은 한 술 더 떠서 “맥주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성지순례 하는 마음으로 평생에 한 번은 필젠을 찾아야 한다”며 필제너 칭찬에 열을 올린다.
체코를 한동안 지배했던 옛 소련이 필제너의 소문을 모를 리 없었고, 마침내 ‘그 정도는 문제없다’며 맥주공장까지 차렸다. 필젠 현지에 전문가를 파견하고 시설도 그에 못지않게 꾸몄다. 공들여 만든 시제품이 나오자마자 우선 필젠으로 보내 평가를 청했다. 그때 필제너는 이렇게 답했다. “댁의 말(馬)은 아주 건강합니다.” 소련이 만든 맥주를 말 오줌이라고 비아냥거린 것이다.
기후로 나눠지는 술 문화권
러시아에선 부드러운 맥주보다는 독한 보드카가 제격이다. 러시아 대평원을 배경으로 한 영화 ‘닥터 지바고’에서 주인공들이 얼어붙은 몸을 녹이기 위해 아주 자연스럽게 술을 한 잔씩 하는데, 그게 바로 러시아를 대표하는 보드카다. 시베리아의 혹독한 추위를 이기려면 독한 술을 찾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술은 민속성에 연유한다기보다는 기후에 좌우된다고 할 수 있다.
더운 지방에선 몸을 따뜻하게 만드는 술은 가능한 한 마시지 않으려 하고, 설령 마시게 되더라도 도수가 낮은 술을 가볍게 마신다. 반면 추운 곳에서는 추위를 잊기 위해서라도 술을 마셔야 하는데, 그럴 경우 독한 술이 더 경제적이다. 또한 기후에 따라 자라는 작물이 다르니 빚는 술의 종류도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런 차이가 세계를 몇 개의 술 문화권으로 나눈다. 알프스 남쪽의 지중해 연안은 와인 문화권,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폴란드 핀란드 등은 보드카 문화권,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캐나다 등은 위스키 문화권, 체코 독일 네덜란드 덴마크 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 같은 중부 유럽은 맥주 문화권, 몽골과 중앙아시아는 아이락(馬乳酒) 문화권, 중국은 바이지우(白酒) 문화권, 일본은 청주 문화권, 동남아시아는 무(無)알코올 문화권, 중동과 이슬람지역은 금주(禁酒) 문화권, 남아메리카는 치차(옥수수술) 문화권, 미국은 모든 술을 다 즐길 수 있는 ‘옴니 문화권’으로 분류할 수 있다.
보드카의 어근인 ‘보다(voda)’는 러시아어로 물이라는 뜻이다. 보드카가 러시아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모스크바 공국 말기인 16세기이고, 지금의 제조법이 완성된 것은 1794년 상트 페테르부르크 대학의 루이스 교수가 러시아에 흔한 자작나무 숯으로 불순물을 없애는 방법을 개발하면서부터였는데, 그리하여 보드카는 무색무취의 증류주가 됐다. ‘크리스털 클리어’라고 하는 이 제조법은 러시아혁명을 거치면서 외부 세계에 알려졌다. 보드카는 보리를 주원료로 만드는데, 알코올농도가 85%가 될 때까지 농축했다가 마실 때는 물을 타서 40% 정도로 낮춘다.
러시아 다음으로 보드카를 많이 생산하는 나라는 폴란드. 비브로바, 지트니아, 주비로프 등 종류도 다양하다. 알코올 도수가 무려 90도인 스비리두스도 나온다. 이들은 반드시 건배를 하고 술을 마시는데, 이때는 ‘건강을 위해’라거나 ‘가족을 위해’라고 외친다. 그리고는 다음 건배 때까지 잔에 손대지 않고 음식을 들거나 노래를 부른다.
스칸디나비아 지역에도 보드카가 있다. 물론 그 제조방법은 러시아로부터 배웠다. 스웨덴에서는 자기네 보드카를 ‘스납스(snaps)’라고, 핀란드에선 ‘코스텐코르바(kostenkorva)’라고 부른다. 보드카답게 독하긴 해도 맛은 좀 달다. 원료로는 감자가 사용된다. 이들은 이를 식전주(食前酒)로 조금씩 마실 뿐 러시아인들처럼 시도 때도 없이 마시지는 않는다.
지금 미국에선 이 독한 보드카가 인기를 누리고 있다. 러시아에서보다 더 많이 팔린다. 세계적인 보드카 브랜드인 압솔루트와 스미르노프도 미국에서 나왔다. 독주라는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미국이야말로 독주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인들은 안주 없이, 아니 맥주를 안주 삼아 독한 술을 마신다. 우리가 만들어 낸 것으로 알고 있는 폭탄주는 미국에서 건너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미국에서는 아무 데서나 술을 살 수도, 마실 수도 없다. 경기장 안으로 술을 들고 들어갈 수가 없으며, 세븐 일레븐 같은 편의점에서도 술을 팔지 않는다. 술을 파는 레스토랑도 흔하지 않다. 술을 마실 때도 서로 잔을 권하거나 ‘2차’를 가자고 꼬드기는 사람이 드물다. 이는 독주에 대한 견제장치일지도 모른다.
데킬라의 황홀경
대표적인 독주로는 멕시코 사막에서 자라는 용설란 줄기를 재료로 해서 만드는 멕시코의 국민주 데킬라를 들 수 있다. 40도쯤의 독한 술인 데킬라는 톡 쏘는 맛 때문이라도 입안에 오래 지체하지 말고 목구멍으로 가볍게 털어 넣어야 한다. 냄새가 없고 맛은 산뜻하다. 데킬라는 그 자체로도 즐겨 마시지만 이것을 베이스로 한 칵테일, 즉 마가리타가 더 인기 있다.
마가리타는 데킬라에 ‘큐라소’라는 오렌지즙과 레몬주스를 섞은 것인데 잔 모양이 퍽 특이하다. 아주 넓게 생긴 잔의 가장자리를 레몬으로 적시고 소금을 두텁게 발라 내놓는다. 마시는 사람은 잔을 돌려가며 소금을 핥으면서 마신다.
소금의 짠맛, 그리고 레몬의 신맛이 데킬라의 톡 쏘는 맛과 어울려 빚어내는 황홀한 경지는 오직 몸으로 느껴질 뿐, 말로는 다 설명할 수는 없다. 만약 그때 감미롭고 경쾌한, 그러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애틋한 곡조를 흥얼대는 마리아치(멕시코의 떠돌이 악사)라도 곁에 있다면 ‘별유천지 비인간…’의 탄성이 절로 나올 것이다. 마야·아즈텍 등의 찬란한 고대문명을 간직하고도 오랫동안 외세의 지배를 받아야 했던 멕시코인들은 이렇듯 데킬라와 마리아치를 통해 위안을 얻었다.
멕시코 동쪽의 카리브해는 럼의 고향이다. 럼은 사탕수수를 이용해 만든 증류주로서 알코올농도는 위스키에 가깝다. 유럽인들은 자기네 찻잔에, 또 커피잔에 설탕을 넣어 먹기 위해 아프리카 흑인들을 대거 이곳으로 끌고와 사탕수수밭을 일구게 했는데, 이제는 이 사탕수수가 럼의 재료가 되어 오히려 이들의 애환을 달래준다. 럼의 최대 산지는 레게음악의 진원지이기도 한 자메이카와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 등의 작품을 쓰며 말년을 보낸 쿠바다. 최고급 브랜드인 바카르디, 아바나 클럽 등도 쿠바에서 나왔다.
럼은 칵테일 베이스로도 유명하다. 사탕수수라는 천연 당분에서 추출된 것이라 다른 재료들과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카리브의 경관 또한 칵테일 마시기를 부추긴다. 007시리즈 영화에 자주 나오는 장면처럼, 티없이 파란 하늘과 넘실대는 파도, 야자수, 여기에 아름다운 여인까지 곁에 있다면 누구나 밋밋한 병술보다는 미묘한 색상을 자아내며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만드는 칵테일을 찾을 테니까.
영화 ‘칵테일’에서 주인공 톰 크루즈는 나비 넥타이도 매지 않았고, 셰이커를 흔들지도 않는다. 술병을 이리저리 던지면서 폼만 열심히 잡을 뿐이다. 실제 바텐더의 모습과는 다르다. 그렇지만 어느 여자 손님이 그를 유혹하기 위해 칵테일 ‘오르가슴’을 주문하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남들 앞에서 큰 소리로 말하기 껄끄러운 단어인 ‘오르가슴’을 대놓고 이름으로 삼을 만큼 칵테일은 도전적인 술이다.
이렇듯 칵테일은 이름도 제각각이다. 맨해튼, 싱가포르 슬링, 뉴욕, 로스트 레일, 마가리타, 핑크 레이디, 위스키 샤워, 스크루 드라이버, 키스 오브 파이어 등 우리 귀에도 익은 것들에서 보듯 칵테일 이름 짓기에는 어떤 원칙도 없다. 자신의 취향에 맞춰 레시피(recipe)를 만들고 적당한 이름을 골라 붙이면 되니까.
그래서일까. 세상에는 1만 가지나 되는 칵테일이 있다고 한다. 그러니 아무리 베테랑 바텐더라도 레시피는 고사하고 그 이름을 모두 외우는 것도 무리다. 그렇지만 바텐더는 자신이 만드는 레시피만은 그 유래를 알고 있을 것이므로 이름에 얽힌 에피소드를 들으며 칵테일을 즐긴다면 아름다운 추억을 남길 수 있으리라.
칵테일이란 위스키 브랜디 진 럼 보드카 데킬라 등의 알코올음료를 베이스로, 다른 술이나 탄산음료·향료·시럽·과일즙 등의 부재료를 섞어 만든 혼합주를 일컫는다. 여러 가지 술을 섞어 마셨다가 다음날 아침 고통을 당해본 사람이라면 ‘혼합’이란 말에 진저리를 칠 수도 있겠지만, 칵테일은 섞음으로써 최고의 맛과 최상의 느낌에 이르게 하는 것이므로 그저 이 술 저 술을 아무렇게나 뒤섞어 마시는 것과는 다르다. 여러 종류를 섞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맛·향기·색 세 가지 요소가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휘젓기(stir)보다는 흔드는(shake) 방법을 택한다. 그래야 부드러운 맛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불빛이 희미한 실내에서 바텐더가 손님을 상대로 손을 높이 세워 셰이커를 흔들어대는 칵테일 쇼를 보는 것만으로도 칵테일 바를 찾은 발걸음에 대한 보상은 충분하다. 바텐더는 맛과 향기, 유연한 몸놀림으로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켜 우리의 미감을 자연스레 한 단계 끌어올려 주는 ‘섞음(mixology)의 예술가’인 것이다.
“최초의 인간이 포도나무를 심고 있었다. 그때 악마가 양 사자 돼지 원숭이를 끌고 그곳으로 왔다. 그리고는 모두 죽여 그 피를 밑거름이 되게 나무 아래로 흘려넣었다. 그 후 나무는 자라 포도를 맺었고, 이것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포도주를 처음 마시기 시작할 때는 양처럼 온순하고, 조금 더 마시면 사자처럼 난폭하고 사나워진다. 그보다 좀더 마시면 돼지처럼 추하고 더러워진다. 아주 많이 마시면 원숭이처럼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르며 허둥댄다. 술은 악마가 인간에게 내린 선물이다.”
유대인의 성전 ‘탈무드’에 나오는 술의 기원에 관한 대목이다. 과음에 대한 경고 같기도 하고, 포도주가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됐음을 말해주는 일화라고도 볼 수 있다.
인류 문명이 처음 시작됐다고 하는 기원전 3000년경에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이미 포도주를 마셨다. 이보다 얼마쯤 후대에 쓰인 함무라비 법전에는 맥주에 관한 기록도 있다. 그러므로 인류의 문명사는 술과 함께 시작됐다고 해도 무리가 아닌 것이다. 사람은 곡물과 과일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으니 그것들이 풍부한 곳에서 술과 문명이 태어난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술과 혁명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문명이 태어났고 포도주와 맥주가 처음으로 만들어졌으며, 10세기경에는 증류주를 발명해 ‘알코올’이란 생소한 용어를 세계 각지에 퍼뜨린 서아시아 땅에서는 지금 술을 맛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슬람 경전인 ‘코란’이 금주를 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알코올이 들어 있지 않은 맥주는 더러 구할 수 있지만, 그것도 반드시 지정된 술집 안에서만 마셔야 한다는 조건이 달려 있어 사람들이 모이는 공개된 장소나 집안, 호텔 방 같은 곳에서는 마실 수 없다.
이라크를 여행하던 어느 날, 더위 탓인지 갑자기 차가운 맥주 생각이 간절했다. 서방국가들로부터 경제제재를 받고 있어 먹을 것도 부족한 나라에 설마 맥주가 있으랴 생각했지만, 헛걸음하는 셈치고 가게에 들어갔더니 놀랍게도 맥주를 팔고 있었다. 하도 오랜만에 보는 것이라 반가운 마음에 얼른 집어들었다. 그런데 셈을 치르고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주인이 갑자기 무어라고 하면서 문을 가로막는 게 아닌가. 영문을 몰라 안내인에게 상황을 설명해 달라고 하자 “여기에서 마셔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나는 ‘유능한’ 안내인 덕분에 호텔 방으로 맥주를 가져가 마셨다. 그리고는 약속대로 다음날 아침에 빈 병을 가게주인에게 돌려줬다.
외국인들이 주로 묵는 고급호텔에선 알코올이 든 술을 팔기도 한다. 관광산업 진흥과 외화벌이 차원에서인 것 같았다. 그러나 이슬람혁명을 추진하고 있는 이란에서는 이것마저 금지하고 있었다. 혁명 이전에 미국식으로 붙여진 호텔 이름까지 모두 이슬람 이름으로 바꿨을 정도이니 술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석유 수출로 흥청거렸던 혁명 이전의 샤 왕정 시대엔 최고급 위스키와 와인을 세계 어느 부자나라 부럽지 않게 마셨던 경험이 있는지라 아직도 그 맛을 잊지 못하는 이란사람들은 외국인인 나를 보자 “위스키 있나요? 값은 후하게 쳐줄 테니 내게 파시오”라며 접근했다. 내가 “미안하지만 없다”고 하면 입맛만 다시다 돌아서곤 했는데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나도 안타까웠다.
유럽이나 미국을 여행하다 부닥치는 어려움 중의 하나는 레스토랑에서 웨이터가 다가와 식사를 주문 받을 생각은 하지 않고 “무얼 마시겠습니까” 하며 생글생글 웃으며 물어오는 순간이다. 곤혹스런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우리 같으면 공짜로 나오는 맹물을 꽤 비싼 돈을 주고 마셔야 하느냐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설령 돈이 있어 와인의 세계로 들어가 보고 싶어도 와인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으니 망설이게 된다는 것이다.
‘세계화 시대’에 남의 문화를 알고 존중해주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리고 이것은 모두가 노력해야 될 일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누구나 모든 것을 척척 해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세세한 지식을 익히려 하기보다는 남을 이해하려는 자세를 갖는 것이 더 바람직하리라. 사실 와인의 세계는 너무나 깊고 오묘하기에 평소 그 세계에 빠져 사는 사람들도 헤매기가 일쑤인데, 비(非)와인 문화권 출신이 좀 모른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와인은 ‘느림의 술’
와인에는 와인 문화권의 종교와 역사·식생활 등 그쪽 사람들의 삶 전체가 녹아 있다. 유대인들이 이집트를 떠나오면서 그곳에 두고 온 고급 와인을 못내 아쉬워했다는 구약의 기록을 비롯해 예수가 “빵은 내 살이요, 포도주는 내 피니라”라고 했다는 신약의 ‘최후의 만찬’ 대목, 주신(酒神) 디오니소스에 관한 그리스 신화, 중세 수도원의 포도원 역사, 보르도와 부르고뉴가 프랑스 최고의 와인 산지라는 사실, 유럽 각지의 포도주 축제, 16∼17세기에 유리병과 코르크 마개를 사용하면서 와인이 대중화됐다는 얘기, 코냑 샴페인 브랜디는 모두 와인의 변형이라는 상식, 빈 교외의 그린찡 마을에서 10월이 되면 가게 앞에 생솔가지를 걸어두고 ‘호이리게(햇포도주)’가 들어왔음을 알리는 풍습, 육류에는 적포도주가, 생선요리에는 백포도주가 어울린다는 서양식사 매너론 등 와인에 관한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진다.
다만 와인은 음식과 함께 마신다는 것과 ‘느림의 술’이라는 것쯤은 기억해 두는 게 좋다. 이것을 모르고는 와인을 제대로 즐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적포도주는 육류와 곁들여 마시는 게 좋다는 사실에서 와인은 음식과의 조화를 중시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코스에 따라 와인을 달리함으로써 먼저 먹은 음식의 뒷맛을 깨끗이 가시게 하고 새로 나온 음식의 맛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것이다. 포도를 재배하고 그것을 와인으로 만드는 과정에도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만, 음식과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라도 포도주는 아주 천천히 맛을 음미하며 마셔야 한다.
와인을 굳이 느림의 술이라고 강조하는 것이 이런 실용적인 고려 때문만은 아니다. 진짜 이유는 포도가 자라는 땅에 있다. 와인은 물 대신 마시는 술이라 할 수 있다. 와인이 생산되는 지역은 대개 물이 좋지 않거나 귀한 편이다. 포도는 그런 척박한 땅 속 깊이 뿌리를 박고 물을 끌어올려 열매를 맺는데, 인간은 그렇게 자란 포도로 술을 담그는 것이다.
와인은 오직 포도의 즙만으로 만든다. 다른 술에는 물이 들어가지만 와인은 물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귀하기도 하거니와 질도 그리 좋지 않은 물을 왜 쓰겠는가. 1kg의 포도는 750mℓ짜리 와인 한 병이 된다. 지중해 연안의 와인 문화권 사람들은 포도나무가 만든 ‘물’을 이렇게 와인이란 형태로 섭취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가 식사할 때 물을 마시는 것처럼 와인을 마신다. 그러니 그들이 1년에 마시는 와인 양이 어느 정도이겠으며, 알코올 섭취량은 또 얼마나 되겠는가. 그런데도 이 지역에선 취해서 비틀거리는 사람을 보기 어렵다. 한꺼번에 ‘집중적’으로 마시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천천히 ‘분산’해서 마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와인은 느림의 술이다.
와인은 최후의 만찬에서 보듯이 종교와 깊은 인연을 맺어왔다. 중세시대 수도원 운동의 중심지였던 프랑스의 부르고뉴(영어로는 ‘버건디’) 지방은 수도사들의 노력으로 좋은 포도주를 생산했는데, 이제는 이런 전통에 기업적·예술적 노력이 보태져 세계의 고급 와인 시장을 석권하고 있다. 프랑스의 와인산업은 첨단산업만이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산업도 하기에 따라 고부가가치산업이 될 수 있음을 실증하고 있다.
물론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많은 시간과 노력, 무엇보다 엄격함이 요구된다. 포도주가 물을 대신할 목적으로 태어난 것이어서 그런지 와인 맛은 포도가 자란 토양과 깊은 관련이 있다. 같은 포도밭이라도 그 위치에 따라 포도주 맛이 다르다. 따라서 토양을 면밀하게 관찰하고 포도가 자라는 토양을 최적 상태로 유지하려면 엄청난 노력을 투입해야 한다.
고급 와인의 종주국인 프랑스는 와인을 태워서 만든 브랜디, 그중에서도 최고로 치는 코냑의 고향이기도 하다. 코냑은 와인을 증류하여 알코올 도수를 높인 것이므로 뜨거운 술이다. 그래서인지 코냑을 마시는 자세는 와인을 마실 때보다 우아해야 한다. 술잔은 아침 이슬을 머금고 막 피어나는 장미꽃 같아야 하고, 술을 따를 때는 마음을 가다듬고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술잔의 3분의 1 정도만 채워야 한다. 잔을 받은 사람도 한 손으로 가볍게 잔을 감싸고 체온으로 술을 데워야 한다.
금방 마셔도 안 된다. 먼저 원을 그리며 잔을 흔들고는 코끝으로 향을 맡는다. 그런 다음 다시 잔을 보듬고 향긋한 내음을 살짝 음미해야 한다. 마실 때도 혓바닥을 살짝 적신다는 기분으로 마셔야 한다. 그러면 입안에 향기가 가득해지고 기분도 상쾌해진다. 코냑은 이렇게 모든 감각기관을 동원해 마시는 술이다.
프랑스가 내게 와인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또 어떻게 마셔야 하는지를 가르쳐줬다면, 그리스는 와인을 마시는 사람들의 심리를 깨우쳐줬다.
그리스로 가는 길에 그리스를 지독하게 사랑했던 영국 시인 바이런의 시를 떠올렸다. “철철 넘치게 사모스의 포도주를 잔에 채워라/우리의 처녀들은 나무 그늘에서 춤춘다/보라, 그 예쁜 검은 눈동자의 빛을….”
그런 기억에 이끌려 에게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사모스 섬으로 달려갔다. 어느 노천 술집에 앉아 우선 적포도주를 시켜 메마른 입술, 아니 메마른 가슴을 적시고는 안주로 나온, 껍데기가 벗겨져 발그레한 살을 그대로 드러낸 새우를 곁들여 오후 한때를 보냈다. 술집 앞으로 펼쳐진, 파도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잔잔한 에게 바다는 시인 호머가 일찍이 말했던 대로 여전히 포도주빛을 띠고 있었고, 저만치 나는 물새는 문득 자유가 무엇을 뜻하는지 깨우쳐주는 듯했다.
자유, 민주주의…. 이런 것들을 떠올리다 만약 그리스에 포도주가 없었다면 과연 저런 자유, 저런 민주주의가 가능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다음날 에게 바다를 가로질러 아테네로 향했다. 낮에는 아크로폴리스와 아고라를 헤매다가, 밤에는 그 아래, 환락가로 유명한 플라카 지구로 갔다. 낮에 찾지 못했던 해답을 아테네인들이 휴식을 취하는 그곳에서 혹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저녁식사도 해결할 겸 그곳 술집을 찾았다. 소란스러운 곳은 피했다. 그리스인들은 떠들썩하고 활기 넘치는 것을 좋아하지만, 말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시끄러운 곳은 싫어한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양의 투박한 주법
테이블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서로 아는 체했지만 술부터 시키지는 않았다. 오히려 대화에 더 열을 올렸다. 약속시간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지 좌석에는 이가 빠져 있다. 잠시 후 테이블로 와인이 배달됐다. 그런데도 누구 한 사람 나서서 잔에 따르지 않는다. 우리 같으면 “자, 술이 왔으니 목부터 축여야지” 하면서 잔을 돌리려 할 텐데, 그들은 여전히 이야기에만 열중한다. 술은 이야기를 이끄는 데 소용되는 소도구 같아 보인다.
와인은 대화를 이끌고, 대화는 서로의 생각을 교환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대화한다는 것은 참여한다는 것을 뜻하므로 대화를 통해 고대 그리스인들은 민주주의를 꽃피울 수 있었다. 그러므로 와인은 그리스 땅에 민주주의를 태어나게 한 밑거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에는 ‘레치나’라고 하는 특별한 와인이 있다. 값은 싼 편이나 송진 향이 강해 풍미가 있다. 예부터 그리스인들은 레치나의 짜릿하고 상쾌한 맛을 좋아했다. 레치나는 오직 그리스 땅에서만 생산된다. 외제 와인을 모방해내는 데 천재라는 캘리포니아 와인업자들도 레치나 맛은 흉내내지 못했다.
서양의 술은 이처럼 섬세하다. 미묘한 맛과 향으로 고급 여부가 결정된다. 그러니 마시는 방법도 함께 섬세해질 수밖에 없다. 이에 비해 동양의 술은 투박하다. 술잔도 그렇게 생겼고, 잔에 담기는 술의 양도 많다. 그것도 아주 철철 넘치게 따른다. 마실 때도 코와 입술, 혓바닥 같은 섬세한 감각기관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대롱 구조의 목구멍을 주로 이용한다.
또한 아무리 비싸고 독한 술이라도 마실 때 홀짝거려서는 안 된다. 그건 주법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술을 마시면서도 ‘건강을 위하여’ 또는 ‘가족을 위하여’라고 부르짖지 않는다. ‘깐베이(乾杯)’, 즉 ‘잔을 비우자!’ 한마디로 끝낸다. 홀짝거리지 말라는 것이다. 은(殷)나라 시대에도 고급스런 청동 제기에 술을 담아 제사를 올렸을 만큼 오랜 술의 역사를 자랑하는 중국인들은 술이 앞에 있으면 언제나 ‘칭(請)’을 외친다. 그때 그 술을 받아 마시지 않으면 자기를 무시한다며 몹시 기분 나빠한다.
디지털 시대의 술
이에 비해 같은 동양인인데도 일본인들은 좀 까다롭고 섬세하다. 다른 나라 술이 흉내낼 수 없는 누룩곰팡이를 이용해 좋은 물로 빚는다며 자기네 술, 즉 ‘마사무네(正宗, 청주)’에 대한 긍지도 대단하다. 그들은 청주를 차게 해서도 들고 데워서도 마신다.
차게 한 것을 ‘레이슈(冷酒)’, 데워서 마시는 것을 ‘온슈(溫酒)’라고 하는데, 처음부터 차게 혹은 따뜻하게 마실 목적에 따라 제조된다. 정말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떨떠름한 맛이 나는 레이슈를 찾고, 아마추어는 단맛이 나는 온슈를 찾는다고 한다. 레이슈는 양념을 하지 않은 음식을 대할 때처럼 담백한 맛이 난다.
술은 땅과 기후와 깊은 연관을 갖고 있으므로 술을 알면 그 나라와 그 민족, 나아가 그들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다. 술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다리 역할도 하지만,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간의 다리가 되기도 한다. 술을 제대로 알고 마시기만 한다면 말이다.
지금은 세계화 시대, 그리고 디지털 시대다. 국가나 조직이 아니라 개인이 사회의 주인이 되는 그런 시대다. 술은 바로 이런 개인과 개인을 이어주는 끈이 되어 준다. 자기 세계에만 빠지다 보면 자칫 멀어질 수도 있는 개인간의 거리를 술이 좁혀줄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이 시대에 술이 갖는 참 의미라 할 것이다.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