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6월호

‘고려인의 나라’ 카자흐스탄이 떠오른다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자원부국

  • 최승호 주카자흐스탄 대사

    입력2006-10-13 11: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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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자흐스탄 최대의 도시, 재작년까지만해도 이 나라의 수도였던 ‘알마티’(Almaty)는 ‘사과의 할아버지-사과의 원조’라는 의미인 ‘알마아타’(Alma Ata)에서 유래하였다. 이 사과의 고장은 서울에서 비행기로 불과 6시간의 거리에 있다. 여기에서 다시 서쪽으로 6시간 정도 가면 파리나 프랑크푸르트에 도달한다. 말하자면 알마티는 서울과 구라파의 중간 지점에 있는 것이다.

    카자흐스탄의 지정학적 전략적 중요성은 국제적으로 널리 인정되고 있는데도 일반인들은 이 나라를 잘 모른다. 소련 해체에 따라 탄생한 신생독립국이며, 아직 대외경제 규모가 작고 관광 산업도 미미한 수준에 머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동과 서를 이었던 실크로드의 ‘천산 북로(초원로)’를 껴안고 있는 카자흐스탄은 발전잠재력이 매우 크다. 그만큼 중앙아시아 지역정세를 주도할 핵심국으로서 동양과 서양을 잇는 21세기 신실크로드를 구축해나갈 것이다. 또한 이 나라에 몸담고 있는 고려인들도 상당한 몫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카자흐스탄과 더욱 긴밀한 우호·친선협력관계를 쌓을 필요가 있다.

    광활한 국토, 풍부한 자원, 다민족 국가

    카자흐스탄을 아는 사람들은 이런 것을 연상한다. 인도 면적과 비슷한 광대한 국토, 다민족 국가, 동북쪽 알타이 산맥과 동남쪽 천산산맥의 만년설, 광활한 초원과 사막, 유목민이 살아온 땅, 서쪽의 카스피해와 철갑상어, 극히 낮은 인구밀도, 풍부한 지하자원, 죽어가는 아랄해, 세미팔라틴스크 핵실험장의 비극과 환경 재앙, 바이코누르 우주사업기지 등이다.

    카자흐스탄은 북쪽으로 러시아, 동북쪽으로 중국, 남쪽으로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서쪽으로는 카스피해에 둘러싸인 중앙아시아의 거대한내륙국이다. 국토면적이 272만㎢로 한국의 27배이다. 석유·천연가스를 포함하여 각종 지하자원이 많다. 흔히 “원소주기율표상의 거의 모든 원소가 상업적으로 채취될 수 있을 만큼 풍부하게 부존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인구가 적고 국토 대부분이 초원 내지 불모지다. 북부지방은 겨울에 영하 40。까지 떨어진다. 강우량도 넉넉하지 못하여 메마르다. 그러나 소위 ‘실크로드 천산 북로’로 불리는 지역에는 겨울의 풍부한 적설량과 만년설로부터 일년 내내 녹아 내리는 수자원을 가지고 있어 비옥한 목초지와 경작지가 있다. 그래서 이곳을 ‘실크로드 초원로’라고 부르며, 더 메마른 천산산맥 남쪽 루트를 ‘실크로드 오아시스로’라고 부른다.

    카자흐스탄은 130여 민족이 어울려 사는 대표적인 다민족국가다. 1991년 독립당시 1700만이던 인구가 지금은 1500만으로 줄었다. 인구유출 때문이다. 러시아계 160여만명, 게르만족 60만명, 우크라이나 33만명, 타타르 7만, 백러시아 6만, 유대인 1만 명등이 줄었다. 몽골, 중국 등지에서 카자흐족이 흘러들어왔으나 빠져나간 인구에 견주면 아주 적다. 그래서 1994년 시점에는 카자흐 45%, 러시아 36%, 우크라이나 5%, 게르만 4%이던 인구 구성이 지금은 카자흐 53%, 러시아 30%, 우크라이나 4%, 게르만 2.5%로 바뀌었다. 게르만족과 유대인의 경우, 독일 또는 이스라엘로 귀화한 숫자보다 이들의 감소 숫자가 적은데, 이는 독일인, 유대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계속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한민족, 흔히 ‘고려인’으로 부르는 우리 동포는 10만명 정도이다. 인구 규모로는 9번째로 전체 인구의 0.7%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이들의 강인한 생명력과 민족문화에 대한 끈질긴 애착, 그리고 한국의 국제적 위상 향상으로 이들의 존재는 선명하게 부각되고 있다.

    카자흐 민족의 생성과 역사

    현재의 카자흐스탄 지역은 8세기부터 터키인이 정주하기 시작하였으며, 13세기부터는 몽골인이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카자흐’는 유랑자라는 의미고 ‘스탄’은 땅 혹은 나라라는 의미다. 결국 역사적으로 유목민 나라였던 것이다.

    15세기 중엽 몽고 발흥과 더불어 이지역 북쪽 시르다리아강 유역에 살던 카자흐 민족은 천산(天山)산맥 북부지역(지금의 카자흐스탄과 중국 신장성의 경계)으로 이동하여 지금의 카자흐스탄 중앙 초원지대로 진출하였다. 18세기 후반 제정러시아가 진출하기 시작하였으며, 1860년대에 전 카자흐스탄 지역이 러시아경제에 편입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시베리아철도 부설(1891~1904년)이후 더욱 두드러졌다. 1916년 대러시아 반란, 1917년 반소 폭동이 있었으나 1918년 소련은 이 지역을 무력으로 완전히 장악하고 소비에트정부를 세웠다.

    1925년 카자흐스탄자치공화국으로 개칭했다가, 1936년12월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으로 편입했다. 1991년 구소련 해체과정에 국명을 카자흐스탄공화국으로 변경하고 91년 12월16일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우랄-알타이어 계통인 카자흐말을 국어로 규정하고 러시아말을 공용하기로 헌법상 규정하였다.

    독립 직후 서방세계의 관심은 카자흐스탄 영내에 배치된 SS-18미사일에 장착된 핵탄두 1400여기와 전략폭격기 TY-95MC 40대에 비치된 240기의 핵미사일 해체문제였다.

    카자흐스탄은 독립과 동시에 미국, 러시아, 중국 다음으로 세계4위의 핵무기 보유국이 됐던 것이다. 그후 미국의 대규모 경제원조와 기술 지원, 그리고 러시아, 영국의 안전보장, 중국 및 프랑스의 불가침 보장 등을 기초로 카자흐스탄은 핵무기 폐기와 이전에 동의하고 이를 실행하였다.

    그러나 핵무기급 핵물질이 카자흐스탄 영토에서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현재 가동 중단 상태지만 카스피해 연안 도시 악타우에 세워진 군사 목적 플루토늄 생산 원자로에는 이미 생성된 많은 양의 플루토늄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원자로 해체 문제와 플루토늄 처리 문제는 국제적 현안이다.

    세미팔라틴스크(Semipalatinsk)는 구소련 시절 세계 최대의 핵실험장이었다. 이 지역에서 1949년 최초의 핵실험 이후 총459회 핵실험이 있었고, 이중 113회는 대기중에서 실시되었다. 이로 인한 인근 주민들의 참상과 환경 재앙은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사실이다. 피해자를 지원하고 피폭 지역을 복구하기 위한 국제사회의 인도적 관심과 지원이 계속되고 있으나 결코 충분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카자흐스탄 중남부에 위치한 바이코누르(Baykonur) 로케트 발사기지는 아직도 러시아의 우주계획이 실행되고 있는 현장이다. 우주정거장 ‘미르’호도 1986년 여기에서 올라갔으며, 공급품과 교대 우주인도 계속 이 곳에서 보내졌다. 지난 4월 초에도 미르호 수리 및 과학실험 등을 위하여 우주인 2명이 소유즈 로켓을 타고 ‘미르’우주정거장 28번째 승무원으로 이 기지에서 날아갔다. 이는 소련 해체 후 기능 정지 위기에 놓였던 ‘미르’를 민간자본 참여로 자본주의적 생명연장술을 시술한 것이었다. 그 결과 미르호 수명은 2~3년 연장되었고, 그 동안 우주촬영, 기타상업용 실험이 추진될 예정이다.

    미르호에는 아직도 27개국에서 제작한 11.5톤의 과학·기술장비가 탑재되어 있으며, 지금까지 1만6000회의 과학실험이 진행됐다. 바이코누르 기지는 이제는 러시아가 카자흐스탄으로부터 빌려쓰는 형식으로 이용하고 있다. 최근 러시아의 기지임차료 지불연체 및 수차례의 로켓 발사 실패로 안전과 환경측면에서 양국간 갈등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이 나라에는 현장 경험이 풍부한 원자력·우주과학분야 과학자·기술자들이 많고 상업적인 인센티브만 제공된다면 활용 가능한 기술도 발굴할 수 있을 것이다.

    나자르바예프 대통령과 카자흐스탄 공화국

    1989년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임명한 콜빈(Kolbin) 공산당 제1서기가 반소 소요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자 당시 총리 나자르바예프가 공산당 제1서기로 임명되었다. 91년12월 대통령에 당선된 그는 작년 1월 재선되었다. 그의 임기는 2006년1월까지다. 1991년12월 러시아, 벨로루시, 우크라이나 3개 슬라브계 공화국 정상이 소비에트연방 종식을 선언하고 ‘슬라브연합(Slavic Union)’을 창설하자, 나자르바예프대통령은 이에 대응하여 중앙아시아 회교5개국 정상회담을 주도하고 이들을 설득하여, 11개의 공화국으로 구성된 독립국가연합(CIS)을 출범시키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그는 구소련 해체 시점에 슬라브 계통 연합과 터키·이슬람계인 터키연합이 대결구도로 치닫는 위험한 상황을 방지했다. 또한 유럽 대 아시아 축의 대결구도가 벌어지는 상황도 막았다. 21세기 목전에서 일어났던 공산주의 진영 몰락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그가 이루어낸 정치외교적 성과는 세계 역사가 기억해야 할 20세기의 위대한 업적이다.

    그는 계속 활발한 정상외교를 펼치고 있으며, 중앙아시아 지역안보협력 구축에 각별히 노력하고 있다. 아시아신뢰구축회의(CICA)를 제창하여 주도하고 있으며, 중국과 러시아를 포괄하는 ‘상하이 5국 체제’를 이끌고, 4월 말에는 도빈스클럽과 공동으로 ‘유라시아 경제정상회의(Eu rasia Economic Summit 2000)’를 알마티에서 개최하였다. 그는 소탈한 성격, 유연한 사고, 개방과 민족화합, 민주주의와 시장질서를 추구하는 탁월한 정치지도자이다. 만능 스포츠맨이어서 CIS지도자 중 유일하게 골프도 치며 스키 실력도 선수급이다.

    또 나자르바예프대통령은 90년(11.23 ~11.30)년과 95년(5.15~18) 두차례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다. 카자흐스탄에 거주하는 고려인 사회에 대해서도 호의와 친밀감을 가지고 있다.

    카자흐스탄은 내륙과 카스피해에 풍부한 석유·가스 자원이 있다. 기타 다량의 철 및 비철금속과 농축산물을 대량 수출할 수 있는 광활한 땅도 있다. 특히 한반도 면적의 2배 정도 되는 카스피해에는 현재 400억 배럴의 석유매장이 확인되고 있으며, 많게는 2000억 배럴까지도 추정되고 있다.

    카스피해 연안5국 중에서도 카자흐스탄의 해안선이 가장 길며(1730km) 석유 부존량도 많다. 카자흐는 현재 하루 60만 배럴 정도의 석유를 생산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러시아를 거치지 않는 서방 직결 송유관이 없어 안정적인 석유 수출에 제약을 받고 있다. 송유관 부설 문제를 둘러싸고 미국과 러시아가 대립하고 있는 현장이 바로 카자흐스탄이다.

    카스피해 분할 문제는 연안 5국이 안고 있는 매우 어려운 과제다. 연안 유전을 다수 보유하고 있는 카자흐스탄과 아제르바이잔은 카스피해 분할을 강하게 주장하여왔고, 이에 반해 러시아, 이란, 투르크메니스탄은 이를 거부해 왔다.

    러시아는 당초 카스피해가 ‘대륙내의 저수지’이기 때문에 유엔해양법 협약이 적용될 수 없고 연안5국간 합의에 기초하여 동등하게 이용하여야 한다고 주장해 왔으나 최근 이를 다소 바꾸고 있다. 러시아로서도 석유개발이 당장 시급한 과제기 때문에 잠정적이라고는 하나 일단 카자흐스탄과 해양경계에 합의하였다.

    카자흐스탄과 아제르바이잔은 카스피해를 ‘바다’로 간주, 영해와 배타적 경제수역(EEZ)을 가진다고 주장하는 반면 이란은 해양분할에 반대하면서 연안5국이 20%씩 동등하게 권리를 행사하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카자흐스탄 경제는 독립 직후 몇 년간 시장경제 체제로 바뀌는 와중에 다른 CIS 국가와 마찬가지로 혼란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96년부터 GDP성장률, 무역수지, 농·공업생산지수, 인플레이션, 환율 등의 경제지표상, 이미 거시경제 안정화 초기 단계에 진입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은 1996년 출판된 자신의 저서 ‘21세기 문턱에서’를 통해 재미있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소련 해체과정을 겪으면서 유사시에 대비하여 화폐명칭 및 도안을 채택하고, 인쇄준비 등 독자 화폐발행에 대비하면서도 1993년 8월 모스크바에서 옐친 대통령과 루블화 블록에 남겠다는 합의서에 서명하고 국내 비준절차까지 마쳤다는 것이다. 카자흐스탄은 아직 경제 자립과 독자 화폐 도입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통령은 이상적인 계획경제란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있을 수 없으며, 1989~91년에는 더욱 그러했던 시기라고 말했다. 또한 과거 소련계획경제 하에서 분야별 산업만을 모자이크 조각같이 가지고 있던 개별공화국들이 루블화 블록에서 빠질 경우 경제적 소외와 엄청난 시련을 겪으리라고 본 것이다. 그래서 그는 10월 중순 러시아 체르노미르딘 총리에게 루블화 블록을 유지하겠다는 재다짐까지 받았다. 그러나 러시아는 일방적으로 카자흐를 블록에서 빼버렸다. 결국 11월12일 카자흐스탄은 독자 화폐, ‘텡게’화를 도입하였다. 이로부터 겨우 5년 반의 시간이 흐른 99년4월, 카자흐스탄은 변동환율제를 채택하고 텡게화 태환을 허용했다. 작년 여름 이후 지금까지 텡게화는 안정을 유지하고 있으니, 짧은 기간에 이 나라가 이룬 것은 기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카자흐도 아시아 금융위기와 러시아 금융위기 여파로 98년 GDP 성장률 마이너스 1.9%, 산업생산 마이너스 3.5%라는 대단히 어려운 국면을 맞았으나, 이제 최악 국면을 벗어나 성장 궤도에 진입하였다. 작년 1.7%의 GDP 성장에 이어 금년1/4분기에도 성장세가 계속되고 있어 연간 3∼4%의 성장이 예상된다.

    한국, 제2의 투자국

    한국은 92년 1월 카자흐스탄과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그 이후 양국은 정치·경제·문화·예술·스포츠 분야에서 활발하게 교류했다. 특히 카자흐스탄 고위급 인사 방한이 많았으며, 경제·문화·예술계 인사 상호방문과 교류도 많았다. 서울, 부산, 대구 등 지자체와 자매결연도 했다.

    카자흐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한국은 93~99년 외국인 총투자(82억불)의 19.9%를 차지하여, 미국(29.3%) 다음 제2의 투자국이 되었다.(3위는 13.5%인 영국, 4위는 5.6%인 터키)

    삼성물산이 95년부터 시작한 이 나라 국영구리광업공사 대리경영(위탁경영)은 파산상태에 있었던 국가기업을 1년 만에 정상화시킨 모범사례로 꼽히고 있다. 외국에서는 이 사례를 주목하고 있는데 오히려 한국에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삼성은 당초 카자흐 내의 동광 12군데, 제련소 2군데로 시작하였다가 안정적인 전력 확보를 위해 추가로 발전소 3개와 발전용 채탄을 위한 탄광 2군데를 인수하였다. 현재 총5만8000명 고용에 연간매출액은 거의 10억불을 바라보고 있다. 삼성은 95년부터 지금까지 3억불 이상을 투자하였으며, 향후 안정적인 경영권 확보를 위해 회사 지분 40%를 인수하였다. 기술 혁신, 경영 쇄신을 통해 95년 당시 연간 13만톤에 불과하던 구리 생산 실적이 현재 36만톤으로 늘었으며 지금도 계속 증가 추세다.

    바야흐로 국영구리광업공사는 원가절감 및 수직·수평계열화로 국제경쟁력을 갖춘 회사로 탈바꿈하였다. 생산되는 99.99%의 고순도 구리는 대부분 유럽으로 수출해 EU제국 구리 수입 수요의 20%를 공급하고 있으며, 카자흐 총수출의 11%를 벌어들이고 있다.

    직접 고용에 따른 부양인구는 약 20만 명에 달하한다. 또 광산도시에는 회사가 직영하는 문화시설, 광업박물관, 의료시설이 들어서 있어 삼성의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사업 하나로 삼성은 이 나라 지도층의 신뢰를 얻었다. 현재 삼성은 ‘외국투자협의회’의 멤버로서 세계적인 금융, 석유 메이저, 에너지, 회계법무분야 2개 회원사들과 나란히 카자흐스탄 국가경제시책 자문에 응하고 있다. 회사사장인 김 블라디미르와 수석부사장 윤 루슬란은 모두 고려인들로, 삼성이 육성한 전문경영인이다.

    그 다음으로 LG전자가 연산 30만대 규모의 TV조립라인을 근간으로 오디오, 비데오, 세탁기를 현지에서 조립생산하고 있으며, 생산품의 절반 가량을 수출하고 있다. 알마티 LG제품은 현지인들에게 가전분야의 최고급 브랜드로 자리잡고 있다. LG는 앞으로 생산품목을 컴퓨터 모니터, 냉장고, 진공청소기 등으로 확대하여 중앙아시아 5개국의 주공급기지로 육성하고, 러시아를 포함한 CIS지역에 공급하는 전략적 우회기지로 키워가기 위해 투자를 확대할 계획이다.

    그밖에 삼성전자, 대우자동차 등의 대기업 주재사무소와 신동아(茶제조공장, 중형 슈퍼마켓 운영 등), USKO(건설업, 보일러 제조, 가구제조, 창고업 등), 그라프로(봉제업) 등이 활동하고 있으며 건설, 제조, 유통, 항공·운송, 유흥업 등 다양한 분야에 소규모 투자가 이루어져 있다.

    또한 5월중 알마티시에 1880개의 가게를 가지는 4800만 달러 규모 대형 유통단지 건설 프로젝트가 한국업체 주도하에 착공될 예정이다. 이는 포스코개발주식회사가 공사를 맡게 된다. 이 유통단지는 동대문시장을 벤치마킹해, 시장 주변에 많게는 100개 정도의생산공장까지 유치하며, 장거리 버스운송업까지 함께 운영해 중앙아시아의 물류거점으로 키워 나간다는 구상이다. 이 유통단지는 한국 동대문·남대문시장과 연계해 한국과의 교역증진에도 중요한 몫을 할 것으로 기대돼 상점분양에 대해 이미 국내외의 관심이 크다.

    한─카자흐 간의 무역량은 수교 첫해인 92년 1000만달러 규모에서 95년 1억2600만달러, 96년 2억3000만달러, 97년 1억7500만달러, 98년 1억3500만달러로 1억∼2억 달러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다만 99년도는 환율자유화에 따른 카자흐 화폐의 평가절하로 우리의 수출규모가 대폭 줄었으나, 금년부터 카자흐스탄의 경제가 회복되고 있어 무역규모도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물론 장밋빛 전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 넓은 국토에 견주어 인구가 적어 국가 기간 인프라를 구축하고 이를 유지·보수하는데 드는 사회적 비용이 높다. 도로망, 통신망, 전력망, 에너지망을 구축하더라도 인구가 적어 단위당 이용 비용이 높다. 산업화에 따라 농촌지역 인구가 도시로 이동하겠지만,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리고 국제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인력 양성에도 시간이 걸릴 것이다. 다만 이 나라는 비교적 교육을 잘 받은 양질의 저임 노동력이 많고 서구제국의 언어를 쉽게 익힐 수 있으며, 동서양과 연계하기 좋기 때문에 다른 개발도상국보다는 유리한 위치에 있다.

    민족혼을 간직하고 있는 고려인

    카자흐스탄에 고려인이 정착하게 된 것은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 때문이다. 구한말 굶주림을 피하거나 항일독립운동을 위해 연해주 등 극동지역으로 이주했던 한인들은 1937년 가을 강제로 기차에 태워져 카자흐스탄 각지의 황무지에 내던져졌다. 이들이 처음 기착한 ‘우슈토베’지역에는 당시 한인들의 고통을 기억하고 달래기 위한 큰 기념비가 시내 공원에 세워져 있다. 또한 풀뿌리로 연명하며 땅굴을 파고 고통스럽게 살았던 당시 생존 현장도 일부 보존되어 있다.

    강제 이주 초기 몇년간 대단히 많은 고려인들이 기아와 질병으로 숨져갔다. 나머지 생존자들이 생명이나마 이을 수 있었던 것은 한민족의 강인한 정신과 또한 유목민으로서 외부인을 배척하지 않고 도와준 카자흐인들의 인간적인 애정 때문이다.

    이들 이주민 대열에는 만주와 연해주를 일대로 항일 무장투쟁을 벌였던 많은 독립투사가 섞여 있었다. 스탈린은 민족정신이 강한 이들을 주변 지역보다 더욱 황량했던 카자흐스탄 이곳 저곳에 흩어놓았다. 그러나 이들은 꺾이지 않고 강제 이주당한 그 이듬해에 벌써 ‘원동사범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시작했다. 또 연해주에서 해오던 한글신문을 계속 발행하고, 극단을 만들어 민족혼과 정신을 이어 나갔다. 근면한 정신으로 유목사회이던 카자흐에 농업을 보급해 토착 카자흐인들의 신뢰를 얻고 중앙아시아 땅에 뿌리를 내렸다.

    홍범도장군 묘소가 이 곳에 있으며 임시정부 초대 총리를 지낸 이동휘선생, 재무국장 최재형, 황운정, 유격대장 민긍호, 민족교육 및 독립투사 계봉우의 자녀 또는 손자들이 이 나라에 살고 있다. 여기에 북한독재체제에 항거하여 망명한 사람들과 사할린 등지로부터 이주해 온 사람들까지 10만여 명이 고려인 사회를 형성하고 있다.

    고려인들은 어디를 가나 유전인자에 새겨 있기라도 한듯 높은 교육열로 자녀들을 가르쳤고 근면한 노동으로 소수민족으로는 드물게 고위관리와 지도층 인사를 많이 배출했다. 2세, 3세로 내려오면서 한국말을 이해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크게 줄었다. 그러나 긴 세월동안, 그것도 공산체제 온갖 부정적인 반한선전책동하에서, 제대로 된 한복, 악기 하나 갖추지 못하고서도 우리의 고전연극을 공연하고, 합창단을 만들어 민족문화를 이어온 이들을 보면 감동적이고 자랑스럽다. 이들의 삶의 기록과 생존 현장을 보면 우리의 민족성과 민족문화는 바로 주변의 강대국 사이에서 형성된 ‘생존 양태’임을 확신하게 된다.

    오늘날 고려인들 사이에 한국말 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다. 한국기업들이 고려인로부터 도움을 받기도 하고 고려인도 한국기업 지원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아직 많은 고려인이 카자흐국민들과 마찬가지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들 고려인들은 모두가 일제와 냉전기에 걸친 역사적 단절 속에서도 민족 혼을 지녀왔고 카자흐민족의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왔다. 이들은 한국과 카자흐스탄 우호친선관계를 발전시키는데 교량 구실을 할 수 있다. 이들이 신뢰받는 카자흐의 국민으로, 존경받는 민족그룹으로 성장할 수 있게 우리 정부와 국민들이 지원해야 할 것이다.

    1992년1월 카자흐스탄과의 공식외교관계 수립 이전에 이미 한·카자흐간 교육협력양해각서가 체결되었다. 이에 따라 1991년 8월22일 알마티 한국교육원이 설립되었다. 현재 한국교육원은 총 면적 6065㎡, 연건평 4565㎡에 강의실 16개, 550석 규모 극장, 컴퓨터실, 멀티미디어실, 어학실, 시청각실, 기숙사(40~60명 수용), 도서실(장서 1만2000 여권), 고려인 및 카자흐스탄 역사연구실, 언어. 문화 연구실, 무용실(216㎡), 식당(54명 수용 규모)을 갖추었다.

    알마티 한국교육원은 단순한 한국어 교습뿐만 아니라 문화, 예술, 컴퓨터 및 여타 기능교육에 이르기까지 복합적인 교육문화와 직업교육을 하는 종합교육센터다. 지방의 25개 지역센터에 한글학교용 교과서, 참고도서 등 각종 학습자료 및 시청각 기자재를 지원해서 교육 환경 개선을 꾀하고 있다. 현재 한국인선생 8명과 현지인 선생 7명이 550여명의 한국어 수강생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한국어 수강생에게 우선적으로 컴퓨터 강좌, 영어 강좌, 미용강좌등을 수강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

    카자흐스탄은 현재 전국 199개 학교에서 6300여명이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 11개 대학 362명이 제1외국어로, 15개 대학 292명이 제2외국어로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다. 많은 수의 슈꼴라와 일반학교에서 한국어를 정규교과 과목과 특별활동 과목으로 지도하고 있다. 한국어 수강자는 94년 1400여명, 96년 4700여명, 98년 5800여명, 작년에 6200여명으로 계속 증가하고 있으며 교사와 교수요원을 확보하지 못해 수요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도 한국어 수강 희망자가 늘어날 것으로 예측되는 만큼 한국어교사 양성 문제는 시급한 현안이다.

    한·카자흐스탄 친선병원

    우리 정부가 120만 달러 상당을 지원하여 설립한 알마티 한·카자흐스탄 친선병원이 지난 2월 개원하였다. 여기에는 정부 파견 한국인 의사 3명(외과, 내과, 한방과)이 카자흐 의사들과 함께 현지인들에게 의료시술을 하고 있다.

    특히 한방을 통해 한의학의 우수성을 널리 소개하고 있다. 카자흐 의료인들의 교육, 훈련에도 이 병원이 크게 활용될 것이다.

    이 곳을 찾는 환자들은 우수한 한국인 의사들의 의료시술에 감사하고 한국산 의료 기자재와 장비에 찬사를 보내고 있다. 이 곳에 있는 외국 대사관의 공관원들도 자주 찾고 있으며, 한국정부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 병원은 현재 한국인 의사가 원장을 맡아 운영하고 있으며, 3년 후에는 모든 시설물과 장비를 카자흐 측에 넘기도록 되어 있다.

    카자흐스탄은 우리나라와 유럽의 중간 지점에 있다. 흔히 중앙아시아(CentralAsi a) 또는 유라시아(Eurasia)라고 부른다. 지리적으로는 그렇지만 정치·경제적으로는 아시아보다는 유럽쪽과 더 가깝다. 우선 카자흐스탄은 유럽안보회의(OSCE) 회원국으로, 유럽과 정치·외교적 연계가 강하다.

    그리고 경제도 유럽과 관계가 깊다. 이는 카자흐스탄 동쪽, 아시아 쪽에 위치한 알마티에 취항하고 있는 항공 교통량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카자흐항공 이외에 독일 루프트한자가 주5편, KLM이 주4편, 터키항공 주4편, 브리티시항공 주3편 등 유럽 국적기들이 쉴새없이 승객을 나르고 있는데 반해 한국이나 일본에서 오는 국적기는 단 한편도 없다. 아시아나가 주1회 서울-알마티를 운항하다가 금년 호주에서 열리는 하계올림픽 특수를 기대하면서 비행기를 일단 그쪽으로 돌렸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카자흐항공만이 주1회 서울-알마티를 연결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이 곳에서는 ‘중앙아시아’보다는 ‘유라시아’라는 용어가 친근하게 사용되는 것 같다. 그러나 이들은 아시아의 중요성을 주목하고 있으며, 유럽과의 길목에서 두 대륙을 잇는 가교 구실을 기대하면서 아시아인 내방을 환영하고 있다.

    특히 한반도가 통일되거나 북한과 교통이 트일 경우, 중앙아시아와의 연계는 비약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거대한 나라, 새로 태어나 기지개를 켜고 용틀임을 하고 있는 이 나라에 대해 장기적 안목에서 미리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88올림픽과 고려인들의 눈물

    1989년 동구에서 공산정권이 줄줄이 무너졌고, 한국은 이들과 외교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필자가 1990년 체코에 부임하여 대사관을 개설하고 근무하면서 체코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물어본 질문이 88올림픽 후 한국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변했느냐는 것이다. 이 질문은 작년 9월 카자흐스탄에 부임한 이래 고려인들을 포함하여 이 곳 사람들에게 유심히 물어보는 것 중 하나다. 절대다수의 대답은 대체로 이러하다.

    ―88올림픽 이전에는 한국을 대단히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지독히 가난하고, 깡패 같은 군사독재 체제 아래서 국민들이 고통받고 있으며, 사실상 미제국주의 식민지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북한도 별반 호감이 가지 않는다. 한국도 북한과 오십보 백보아니겠는가. 좌우지간 코리아라면 남쪽이든 북쪽이든 그저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 TV에 비친 88올림픽 현장과 시민생활의 모습은 환상적이고 문자 그대로 새로운 세상인 것 같았다.

    ―공산체제가 얼마나 엉터리이며 국민들을 기만해왔는가를 생생하게 깨닫게되었으며, 이는 매우 충격이었다.

    필자는 88올림픽이 공산체제 붕괴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고려인 100명에게 물어보면 90명쯤은 감동과 기쁨으로 눈물을 흘렸다고 대답하고 있다. 특히 88올림픽 당시 중장년층이던 고려인 중에 TV에 비친 한국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대답하지 않은 사람을 아직 보지 못했다. 이러한 반응은 체제 문제에 관한 충격 때문이라기 보다는 민족 감정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감동적이며, 이러한 정서를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을 우리가 어찌 끌어안지 않을 수 있겠는가.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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