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6월호

“재미없는 인생, 인터넷으로 확 바꿨다”

  • 이나리 byeme@donga.com 신영미 drt@chollian.net

    입력2006-10-10 13: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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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야흐로 ‘디지털 세상’이다. 18세기 산업혁명에 비견되는 정보통신 혁명의 격변기. 경제 패러다임의 변화는 생활 곳곳에도 영향을 끼쳐 이제 컴퓨터, 인터넷 없이는 돈 벌기도, 사람 노릇하며 살기도 쉽지 않은 세상이 돼버렸다.

    20~30대에게 디지털 혁명은 희망이자 축복이다. 연공서열, 전관예우, 관리와 로비. ‘젊은 영웅’의 탄생을 허락지 않던 아날로그식 폐쇄장벽들이 빠른 속도로 무너져가고 있다. 그러나 중장년층은 어떤가. 사회 지도층으로, 경제활동의 중심 세력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야 할 나이에 이들은 일찍이 경험한 바 없는 혼란과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다.

    중장년 대상 인터넷 비즈니스 컨설팅 업체 ‘이-비전’의 장혜정 사장은 “40대 이후 사람들을 흔히 인터넷 블랙홀 세대라 부른다. 나이가 많다고 해서 디지털 사회 편입이 불가능한 것도 아닌데, 막연한 두려움과 배타성 때문에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을 겪고 있다”며 안타까워한다.

    디지털 경제의 핵심은 ‘변화를 긍정하는 것’이다. 세상이 변했음을, 내 직장과 가정이 변했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에서 혁신은 시작된다. 사실 정보통신 혁명의 핵으로 일컬어지는 인터넷은 지금까지 등장한 그 어떤 컴퓨팅 프로그램보다 쉽고 간편한 것이 특징이다. 컴퓨터를 켤 수만 있으면 마우스 클릭 한두 번, 타자 몇 자 치는 것으로 순식간에 ‘정보의 바다’로 다이빙해 들어갈 수 있다.

    문제는 언제, 어떻게 시작하느냐는 것. 물론 이에 대한 답도 이미 나와 있다. 지금 바로, 무작정 뛰어들어야 한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성공적인 변신을 이뤄낸 이들은 하나같이 ‘두려움 없이, 절실하게’ PC 앞으로 의자를 당겨 앉아 좋아하는 것, 꼭 필요한 분야부터 깊이 파고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 이른바 쟁이 기질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두려움없이, 절실하게

    끈기나 적극성보다 더 중요한 부분은 ‘손’만 디지털화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다 바꾸겠다’는 강렬한 의지다. 변화 속에서 살아남고 좀더 풍요로운 인생을 누리기 위해서는 이 길밖에 없다는 혜안과 추진력이 필요하다. 새로운 결심을 실천한 이들에게 더 달고 큰 과실이 기다리고 있다. 오랜 세월 갈고 닦아온 내공과 세상 경험에 디지털의 속도감이 성공적으로 결합하면 젊은이들로서는 쉬 다다를 수 없는 시너지가 창출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너무 거창한 계획을 세우면 도리어 방해가 된다. 몇 가지 ‘원칙’에만 충실하면 일주일 만에도 인터넷 세상의 능숙한 항해자가 될 수 있다.

    가장 먼저 할 일은 PC를 구입하는 것이다. 식구 몫의 다른 PC가 있다 할지라도 되도록 자기만의 기기를 마련하는 것이 좋다. 맘에 드는 학습서가 있으면 한 두 권 구입할 수 있겠지만 너무 책에만 의존하는 것은 좋지 않다. 난해한 책에 머리를 박고 있다 보면 컴퓨터가 더욱 멀고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 특히 특별한 목적이 없는 한 각 프로그램의 작동 원리며 활용법을 통째로 익히려 안달할 필요는 없다. 요즘 웬만한 프로그램은 화면에 떠오르는 설명만으로도 대강의 조작이 가능하니 컴퓨터 앞에 앉아 이리저리 뜯어보는 시간을 오래 갖는 것이 중요하다.

    전문가들은 ‘컴퓨터를 경외시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컴퓨터는 소모품이며 쉽게 고장나는 물건도 아니니 비싸다고 애지중지하기보다는 호기심을 갖고 구석구석 활용해보라는 뜻이다.

    가정에서건 직장에서건, 누군가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했다면 주변의 ‘컴도사’들은 내심 긴장을 한다. 질문 공세를 퍼부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 묻는 사람도 같은 질문을 두세 번 반복하기란 민망스러운 노릇. 또 “이렇게 쉬운 것도 모르냐”는 핀잔을 들을까 봐 입조심을 하게 된다. 그러나 컴퓨터는 학습 대상이 아니다. ‘기계’일 뿐이다. 책을 뒤지는 것보다는 직접 묻는 것이 백번 빠른 길. 부끄러워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묻는다. 정 미안하면 다른 식으로 보상을 하면 된다.

    일단 컴퓨터를 켤 줄 알게 되면 무조건 인터넷부터 들어가 본다. 이런 세상이 있었나 싶게 많은 정보, 새로운 화면들이 눈과 머리를 즐겁게 한다. 여기에 타자 실력과 마우스 다루는 법까지 알고 있으면 금상첨화.

    타자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틀리지만 하루 1~2시간씩 일주일만 연습하면 채팅하고 전자우편 주고받는 것쯤은 무리 없이 해낼 수 있다.

    컴퓨터를 늘 켜놓는 것도 중요한 일. 전기세 많이 나올까 겁내기보다는 ‘비싼 컴퓨터를 샀으니 본전을 뽑아야겠다’는 마음을 갖는다. 켜고 끄는 것이 귀찮아 컴퓨터를 멀리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정진홍 교수는 “인터넷엔 유치한 것들이 많다. 별것 아니다 싶어 바로 손을 놓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별것 아니다 싶은 것’을 가지고 열심히 놀다 보면 또 다른 세계가 보인다”고 말한다. 이성의 눈보다는 감성의 흐름에 자신을 맡기라고 조언한다. 디지털은 느낌이요 감성이기 때문이다. 채팅이나 동호회를 통해 사이버 친구를 사귀고, 자녀들과 컴퓨터 앞에 앉는 시간을 자주 가지는 것도 인터넷에 한 발 가까이 다가서는 지름길이다.

    [ 인생 시련기에 눈뜬 인터넷 신천지 ] 위성복, 조흥은행장

    지 지난해 7월, 국내 최초로 독자시스템을 갖추고 인터넷 뱅킹 서비스를 시작한 조흥은행. 조흥은행의 발빠른 변신은 사이버 금융에 대한 위성복(62) 행장의 확고한 의지와 비전 제시에 힘입은 바 크다.

    위 행장은 금융권에서도 디지털 마인드가 가장 앞서가는 CEO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을지로 조흥은행 본점의 위행장 집무실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두 대의 최신형 PC. 한 대는 전자결제·전자우편 등 회사 업무 및 개인 용도로 쓰이는 것, 또 한 대는 시시각각 변하는 국제금융 동향을 실시간 중계하는 모니터 구실을 한다. 그중 개인용 PC에는 청소년들에게나 어울릴 법한 ‘튀는’ 디자인의 헤드폰이 연결돼 있다. 다이얼 패드(인터넷 무료 전화)를 이용하기 위해서다.

    “원래 새 물건에 대한 호기심이 많아요. 휴대전화도, 전자수첩도 또래 중에선 상당히 일찍 사용한 축에 속하지요. 94년엔 전자수첩에 야담류 유머를 한 50개쯤 입력해 놓고 수시로 꺼내 활용(?)하곤 했어요. 일정 관리며 약속 체크도 그걸로 했습니다.”

    96년 상무이사 시절 출장차 비행기를 탔다 외국인이 노트북 컴퓨터를 꺼내놓고 열심히 작업하는 모습을 보았다. ‘야, 좋다! 나도 저렇게 한번 해봐야지.’ 다음 출장길, 그의 손에는 어김없이 노트북 컴퓨터가 들려 있었다.

    97년 런던 출장 때에는 영국의 전자화폐회사 몬덱스가 런던 근교 스윈돈에서 몬덱스카드(전자화폐)를 시험 운행중이란 소식을 접했다.

    “인터넷 사용이 보편화되면 전자화폐 운영 노하우가 대단한 부가가치를 갖게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은행도 확 바뀌어야겠구나, 금융 이야말로 인터넷 열풍의 최전선·정중앙에 위치한 산업이라는 확신이 섰습니다.”

    98년 8월 행장으로 취임한 그는 전자 결제를 시작하는 등 곧바로 은행 체질 개선 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같은해 11월, 부실 책임론에 밀려 돌연 상임고문으로 물러앉으면서 3개월간의 짧은 행장 생활을 마감했다. 지난해 4월 행장으로 재선임되기까지의 5개월은 적지 않게 고통스런 나날이었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생활이 느슨해졌지요. 소일거리를 찾다 인터넷에 눈을 돌렸습니다. 그 동안 필요성을 절감하면서도 바쁜 일과를 핑계로 차일피일 미뤄온 일이었어요. 하루 2~3시간씩 웹 서핑을 즐기고 각종 PC 활용 기능도 익혔습니다.”

    “인터넷 모르면 승진도 없다”

    우선 재미있다 싶은 것부터 손대기 시작했다. 유머나 ‘여자 옷 벗기는’ 사이트도 들어가 봤다. 금융 관련 정보들을 샅샅이 훑으며 ‘무(無)경계, 무한 증식의 신천지’ 인터넷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이때의 경험은 행장 복귀 후 그가 e-금융부를 설치하는 등 조흥은행에 인터넷뱅킹 드라이브 를 거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요즘 위행장의 생활은 인터넷으로 시작해 인터넷으로 끝난다. 하루 20여 통의 전자우편을 주고받는데, 그중에는 직원들이 보낸 것들도 4~5통씩 끼어 있다. 물론 일일이 답장을 해준다. 계좌 조회나 이체 서비스도 인터넷 뱅킹을 이용한다. 조흥은행은 홈페이지 방문 고객 중 특정회차 고객에게 상품권을 주는 이벤트를 벌이고 있는데, 우연히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자신이 당첨되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다.

    위행장은 “조흥은행에 나보다 혁신적인 직원은 없다”고 호언장담한다.

    “고색창연한 본점 건물 벽에 ‘www.ch b.co.kr’이란 도메인 주소를 커다랗게 써 붙인 것도 제 아이디어였습니다. 컴퓨터를 사는 직원이 있으면 그 값의 반은 회사에서 지불합니다. 디지털 마인드가 없는 사람은 결코 지점장이 될 수 없다는 말도 했어요. 제 자신도 책이나 인터넷, 직원들에게 끊임없이 배우며 앞서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니까요.”

    위행장은 머지 않은 시점에 점포 없이 사이버상에서 운영되는 가상은행이 세계 금융의 중심이 되리라 내다봤다. 그래서 조흥은행의 새 로고 ‘CHB’에 담겨 있는 속뜻도 ‘사이버·휴먼 뱅크(Cyber·H uman Bank)’다. 때가 되면 e-금융부를 별도의 가상은행으로 독립시킨다는 복안이다.

    “한 기업의 경영진이 디지털 마인드를 갖고 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조직과 각 구성원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자신은 변하지 않으면서 직원들에게만 컴퓨터 도사가 되라, 인터넷 사업으로 돈을 벌어오라고 다그치는 것은 옳지 않을 뿐 아니라 실효성도 없어요. 이왕 할 거라면 단순히 PC 다루는 법만 배우기보다 생각 자체를 디지털화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기능은 ‘대리’가 가능하지만 비전은 누구도 대신 제시해주지 않으니까요.”

    “흔히 20, 30대가 인터넷 시장을 좌우한다고들 합니다만, 경험 많고 영업력 있는 40, 50대가 움직인다면 상황은 크게 달라질 겁니다. 두고 보십시오.”

    인터넷은 결코 젊은 세대만의 전유물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전순주(45) 사장. 그는 40대 중반에 인터넷 세상에 뛰어든 벤처 사업가다. 지난해 2월 인터넷 홈페이지 제작 대행사 ‘인터넷 비즈니스 뱅크(http://www.ibb.co.kr)’를 설립, 사업 기반을 착실히 다져가고 있다. 홈페이지 제작 ·관리는 물론 웹 호스팅, 광고 대행 업무도 한다.

    고객사 직원들은 전사장을 ‘컴도사’라 부르지만 그 역시 몇 년 전만 해도 서류 작성용 워드 프로세서나 겨우 두드리던 ‘컴맹’이었다. 그러던 것이 십 수년간 몸담던 회사를 그만두게 되면서 그의 인생에도 새로운 전기가 찾아왔다.

    롯데그룹 자재관리과에 근무하던 전사장은 IMF 관리체제가 한창이던 지난 98년, 과감히 회사를 뛰쳐나왔다. 입사 초부터 ‘직장 생활 10년을 채운 후에는 내 사업을 시작하겠다’는 포부를 품고 있던 그였다. 그러나 사업가로 변신하기가 말처럼 쉬운 일도 아니고, 무엇보다 가족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섣부른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하물며 당시는 구조조정의 한파 속에 대부분의 직장인이 좌불안석이던 상황이 아니었던가.

    그런 위기의 순간에 전사장은 동료들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생각을 정리해갔다. 어차피 50세가 넘으면 명예퇴직이든 뭐든 직장을 그만둬야 하는데, 그럴 바엔 차라리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새 일에 도전해보겠다는 판단이었다. ‘위기는 곧 기회’라는 격언이 그를 고무시켰다.

    “사표 낼 결심을 한 후 어떤 사업을 할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몇몇 친구들이 ‘정보 찾는 데는 인터넷이 최고’란 말을 해주더군요. 하다못해 설렁탕 장사를 하더라도 정보는 많을수록 좋다는 생각에 인터넷에 접근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정보의 바다’라는 인터넷에는 쓸모 있는 정보가 별로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각종 사업 관련 자료만 올려놓아도 이보다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 인터넷 붐이 일기 시작하던 때였습니다. 직장 동료나 친구들, 심지어 모 회사 전산실장으로 근무하는 친구마저 인터넷 사업은 꿈도 꾸지 말라고 하더군요. ‘나이가 너무 많은데다 아는 것도 별로 없지 않으냐’는 거였어요. 하긴 학생들 중심의 동호회 활동 정도가 겨우 주목을 받던 시기였으니….”

    하지만 전 사장은 바로 그런 이유들 때문에 ‘지금 내가 도전할 최고의 사업 분야는 인터넷’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됐다. 사표를 낸 후 곧바로 용산전자상가로 달려가 최신 기종 PC를 구입했다. 이어 부천대학 정보검색사 과정에도 등록했다. 98년 7월의 일이었다.

    위기를 희망으로 바꿔준 컴퓨터 공부

    수강생 대부분이 20대였다. 첫날 강의실에 들어가니 그를 교수로 착각해 인사할 정도였다. 30여 명 중 최고령. 젊은 친구들에 뒤지지 않기 위해 3시간의 수업이 끝나면 녹초가 될 정도로 강의에 집중했고 집에 돌아와서도 하루 12시간이 넘게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그야말로 고시 공부하듯 밥 먹는 시간 빼고는 컴퓨터에 매달렸다.

    그 결과 오히려 다른 학생들이 그에게 모르는 부분을 물어올 정도로 실력이 쑥쑥 향상되었다. 지난해 초에는 다시 포스데이터에서 운영하는 웹마스터 양성 과정까지 끝마쳤다.

    전사장이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99년 5월. 당시만 해도 업체들의 인터넷 환경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 사업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노트북 등 각종 장비를 일일이 들고 다녀야만 했다. 영업은 쉽지 않았고 한때는 직원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지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전사장은 우직하게 ‘고가, 고품질’ 전략을 밀고 나갔다. 창업 1년 남짓이 지난 지금 그는 골프교육 사이트(www.gol f21.co.kr), 놀이동산 소개 및 쿠폰 제공 사이트(www.parknews.co.kr) 등을 운영하는 탄탄한 인터넷 벤처 기업가로 번듯하게 자리잡았다.

    “얼마 전 6살 난 조카가 인터넷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사이트를 찾아 들어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영어는커녕 한글조차 모르는 어린아이도 하는 일인데, 다 큰 어른들이 왜 못 합니까. 더욱이 중·장년층은 젊은 세대보다 실물경제 경험이 많고 다방면에 축적된 지식도 훨씬 풍부합니다. 열린 마음만 갖고 있다면 사이버상에서도 얼마든지 주도권을 획득할 수 있을 겁니다.”

    컴퓨터 공부를 시작한 후 전 사장은 흰 와이셔츠와 넥타이를 던져 버렸다. 방배동 회사 사무실말고 서초동에 자그마한 개인작업실을 얻어놓고 밤새 인터넷과 씨름하며 새 사업을 구상한다. 빛의 속도로 변화하는 인터넷의 속성상 안주란 곧 퇴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머지 않아 정보 활용 능력이 빈부를 결정짓는 새로운 시대가 올 것입니다. 주저하다 뒤처지는 일이 없도록 지금부터라도 시작해야죠. 하나도 늦지 않았습니다. 늦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때가 가장 적절한 시점입니다.”

    [ “PC 켤 줄도 몰랐지만 이제는 생활의 일부분” ] 이충열, 삼우공간건축 부사장

    전 자우편함 열기로 매일 아침을 시작하고 인터넷을 통해 그날의 주요 뉴스를 챙기는 삼우공간건축 이충열(58) 부사장. 환갑을 코앞에 둔 나이지만 사이버 세상에서 만큼은 20대 청년 못지않은 젊음을 자랑한다. 마우스며 키보드를 조작하는 솜씨도 능숙하기 그지없다.

    인터넷 초기 화면이 뜨면 습관처럼 클릭하는 것이 ‘즐겨찾기’에 심어놓은 자신의 홈페이지 주소. ‘건축사 이충열의 홈페이지’란 글씨가 떠오르고, 이어 그의 약력과 가족 사진이 화면을 서서히 채워 넣는다.

    96년 전무이사로 정년 퇴임하기까지 이 부사장의 직장은 금강개발이었다. 97년부터 지금의 회사에 몸담게 됐지만 그때까지도 컴퓨터 활용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젊은 시절은 컴퓨터가 채 보급되기 전이었고, PC 사용이 보편화될 무렵엔 간부급 사원이 돼 손수 문서 작성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컴퓨터를 켤 줄조차 몰랐던 이씨가 마음을 고쳐먹은 건 98년 중순. 신문마다 인터넷을 주제 삼은 기사가 자주 실리는데다, 우체국을 거치지 않고도 몇 초 안에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다니 그것 참 신통하다 싶었다.

    “거래 업체에서 보내오는 자료 중엔 종종 CD롬이라는 것이 끼어 있었어요. 혼자서는 도무지 열어볼 수가 없었지요. 몇몇 교수들에게 자료를 요청하면 굳이 전자우편으로 보내주겠다며 이-메일 주소를 물어 당황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죠. 결국 컴퓨터를 배워보자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학원 다니기는 아무래도 쑥스러워 젊은 직원들을 귀찮게 하기 시작했다. 아주 기본적인 것, 그러니까 컴퓨터를 켜고 끄는 것부터 시작했다. 이어 문서 작성을 위한 워드 프로세싱을 배웠고, 마침내 인터넷 세상에도 발을 들여놓게 됐다.

    물론 낯선 컴퓨터 용어들을 익히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인터넷 표기어들도 처음에는 너무 생소해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이 탓인지 묻고 돌아서면 금방 또 잊어버려 같은 질문을 여러 번 하자니 직원들에게 낯이 서질 않았다.

    직접 홈페이지도 만들어

    하지만 배우면 배울수록 컴퓨터 속 세상은 즐겁고 신기했다. 특히 인터넷이 그러했는데, 생전 다시 가볼 수 없으리라 여겼던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을 맘 내키는 대로 들락거리는 것은 물론, 소장품 사진을 내려 받아 파일 속에 저장해 두고 원할 때면 언제든 꺼내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 그렇게 뿌듯할 수 없었다. 출근해 신문부터 보던 습관이 인터넷 검색으로 바뀌었다. 지난 연말에는 크리스마스 카드며 연하장도 전자카드로 보냈고, 인터넷을 통해 책도 여러 권 사보았다.

    인터넷은 업무에도 큰 도움을 준다. 건교부와 노동부·감사원 등에서 발표한 건축 관련 최신 정보를 신속히 받아볼 수 있어 정보력이 훨씬 커졌다. 대학원에 다니는 아들과 인터넷을 주제로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며 부자간의 거리도 한 뼘은 더 가까워졌다. 생활에 엄청난 변화가 생긴 것이다.

    “배움에는 끝이 없다고, 이것저것 하다보니 홈페이지를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마침 정부에서 ‘100만인 홈페이지 갖기 운동’이란 걸 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온라인 신문에 게재된 인터넷 주소로 들어가 시키는 대로 해봤지요.”

    홈페이지 만들기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회사 장비를 이용해 가족사진도 스캔 받아 올렸다. 꼭 누구에게 보여주겠다거나 대단한 정보를 담겠다는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젊은이들의 전유물이라는 인터넷에 자신의 힘으로 가족의 보금자리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기쁘고 자랑스러웠다. 아직은 미흡하지만 앞으로는 이 홈페이지가 명실공히 ‘건축가 이충열’의 사이버 홈이 될 수 있도록 다양한 꾸밈을 시도해 볼 생각이다.

    “친구들에게 다른 건 몰라도 전자우편 정도는 주고받으며 살자고 권해요. 똑같은 21세기에 살면서 인터넷이 주는 즐거움과 편리함을 향유할 수 없다면 너무 억울하잖아요. 뭐 꼭 이걸로 돈을 벌거나 지위를 높여보겠다는 게 아니라, 노년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하는 도구로 활용해보자는 거지요. 혼자 보고 느끼기 아까운 것이 정말 많거든요.”

    “40, 50대면 젊은 거지요. 저는 68세에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했으니까요.” 올해 73세인 고려대 독문과 박찬기 명예교수. 박 교수가 컴퓨터를 배우겠다고 결심한 것은 68세 되던 해인 95년, 30여 년간 몸담았던 고려대에서 정년 퇴임한 지도 5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막내아들이 미국 스탠퍼드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했습니다. 컴퓨터 잘 만지는 아들을 뒀으니 그거나 배워볼까 싶었는데, 아들이 그러더 군요. 그냥 혼자 하면 된다고요.”

    무조건 ‘하면 된다’는 아들의 말에 은근히 자존심이 상하고 좀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초보자를 위한 학습서도 많이 나와 있다니 나라고 못 할 것 없겠다’는 생각에 서점부터 찾았다. 하지만 막상 내용을 살펴보면 표지에 써놓은 ‘왕초보’, ‘가장 쉬운’이란 단어가 무색할 정도로 복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국내에는 진짜 초보들이 볼 만한 책이 없다고 결론지은 박 교수는 외국 책들을 뒤적이며 PC를 손에 익히기 시작했다.

    아들 말처럼 책만으로도 어느 정도의 조작 방법은 쉽게 익힐 수 있었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들어가자니 아무래도 책만으로는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도 박 교수는 ‘내 몸에 맞는 학습서’를 찾아 이 책, 저 책 기웃거리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덕분에 PC활용 능력은 일취월장했다.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자 학자 특유의 오기가 발동했다. 초보자용 컴퓨터 학습서를 직접 써보겠다는 생각을 품게 된 것이다.

    “사실 제가 컴퓨터에 능통해 책 쓰기를 시작한 건 아니었습니다. 모르는 게 훨씬 더 많지요. 다만, 자동차 운전자가 운전만 할 줄 알면 됐지 자동차 만드는 법까지 알 필요는 없지 않은가, 뭐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죠. 컴퓨터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컴퓨터를 잘 활용하기 위해 그 복잡한 전자적 시스템까지 다 이해할 필요는 없겠지요.”

    98년 12월, ‘세계에서 가장 쉬운 컴퓨터 입문서’라는 부제를 단 책 (사이언스 북스)가 나왔다. ‘아날로그 세대’들도 혼자서 쉽게 컴퓨터를 배울 수 있도록 짜인 것이 특징.

    “이 책은 저와 같은 구세대들도 혼자서 쉽게 컴퓨터를 배울 수 있도록 제가 직접 컴퓨터를 배우면서 겪었던 시행착오를 정리하고 일본과 미국의 입문서도 참고해가며 썼습니다. 컴퓨터 전문가가 아닌, 초보자의 눈높이에서 꼭 배워야 할 것들만 추려 쉽게 풀어쓴 거죠.”

    실제로 이 책을 들여다보면 컴퓨터를 켜는 법부터 끄는 법까지, 그야말로 ‘진짜 초보자’를 위한 배려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지난해에는 강남구청과 서초구청에서 컴퓨터 무료 강좌를 열기도 했다. 실제로 컴퓨터를 처음 배우는 사람들은 어떤 점들을 궁금해하는지 더 잘 알고 싶어서였다.

    컴퓨터를 가까이 하게 된 뒤 박교수의 생활은 큰 변화를 겪었다. 지금도 대학원생들을 지도하고 있는만큼 원고를 써야 할 때가 제법 많은데, 컴퓨터를 활용하면 작업이 수월할 뿐 아니라 시간 절약 효과도 커 매우 만족스럽다. 무엇이든 컴퓨터에 기억시켜 놓으면 언제든 꺼내볼 수 있다는 것도 즐거운 일. 1년 전부터는 아예 컴퓨터 게임 ‘프리첼’에 빠져 지낸다. 빌 게이츠라는 컴퓨터 천재가 매일 한다기에 호기심으로 시작한 것이, 이제는 하루이틀만 손을 놓으면 ‘금단현상’이 나타날 정도로 빠뜨릴 수 없는 일과가 돼버렸다.

    게임 즐기며 PC학습서도 집필

    박교수는 “고희를 넘어선 나이지만 컴퓨터를 배우고 즐기는 데엔 별 무리가 없습니다. 컴퓨터, 그리고 인터넷은 마치 신발이나 모자처럼 인간이 필요해서 만들어진 생활 도구일 뿐입니다. 어렵다고만 생각지 말고 무엇이든 자신에게 꼭 필요하고 좋아하는 기능부터 조금씩 익혀 나가면 머지 않아 PC를 전화기나 TV처럼 다룰 수 있을 겁니다.”

    매일 새벽 2시 30분이면 일어나는 박교수는 뒷산에 올라 운동을 한 뒤 바로 논현동 개인 사무실로 향한다. 초등학생용 PC 교재를 집필중이며, 어떤 기종의 컴퓨터에라도 적용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의 기본 안내서도 쓰고 싶다. 70세가 넘은 나이에 찾아낸 새 인생의 동반자, 컴퓨터. 그로 인해 박교수의 노년은 즐겁고 활기차다.

    [ 시와 인터넷의 만남 주도하는 주부 컴도사 ] 김한순, 주부시인

    주부 김한순(45) 씨에게 컴퓨터는 남편만큼 가깝고 소중한 존재다.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면 우선 PC부터 켜는 것이 오랜 습관이다. 전날 밤 들어온 전자우편은 없는지 확인한 후에야 아침식사 준비를 시작한다. 남편과 아이들이 집을 나서면 또 곧바로 모니터 쪽으로 다가앉는다. 이렇게 PC 앞에서 보내는 시간이 하루 15시간. 40대 중반의 주부로선 흔치 않은 일임에 분명하다.

    주부라고는 하지만 김씨는 91년 ‘월간 문학공간’을 통해 등단한 시인이다. 또 시 전문 사이트 ‘문학의 즐거움(www.poet. or.kr)’을 운영하고 있는 인터넷 사업가이기도 하다. ‘문학의 즐거움’에는 현재 140여 명의 시인이 참여하고 있다. 구상, 유안진, 정호승 씨 등 유명 시인들의 수상작이나 출간 시집, 약력, 사진 등을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각각의 홈페이지를 통해 전자우편을 주고받을 수도 있다.

    “시인들 중에는 생래적으로 컴퓨터를 싫어하고 거부하는 분이 많아요. 그렇지 않더라도 홈페이지까지 갖추기란 쉬운 일이 아니죠. 시인들이 네티즌과 좀더 쉽게 만나고 교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이 사이트를 개설하게 됐습니다.”

    사이트가 문을 연 것은 지난해 1월. 오픈 준비에만 1년 가까운 시간이 필요했다. 웹 프로그래밍과 홈페이지 제작도 직접 하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손이 달려 전문 회사에 맡겼다. 그러나 사이트 운영은 직접 한다. 자연히 하루의 반 이상을 PC 앞에 앉아 보낼 수밖에 없다. 새로 회원으로 가입한 시인들의 프로필, 주요 작품 등을 입력하고 컴퓨터를 사용하지 못하는 시인들의 홈페이지에 새 작품을 올려준다. 전업주부로 선 분명 힘에 부치는 업무량이 아닐 수 없다. 김씨 자신도 “완벽한 주부가 되겠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시어머님께도 처음엔 ‘돈 벌리는 일도 아닌데 너무 하는 것 아니냐’는 걱정을 듣곤 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뜻깊은 일 한다’시며 집안 대소사가 있을 때도 조금씩 편의를 봐주시곤 합니다.”

    남편도 훌륭한 조력자다. 시인들에게 약간의 홈페이지 제작비를 받고는 있지만 워낙 소액이어서 사이트 운영에는 큰 도움을 받지 못하는 것이 사실. 간혹 남편 월급을 헐어 쓸 때도 없지 않은데 그때마다 씩 웃을 뿐 별 불평이 없다.

    김씨가 컴퓨터에 본격적으로 손을 대기 시작한 건 등단 무렵인 36세 때였다. 시를 쓰기 위해 큰 맘 먹고 PC를 구입한 것. 무릇 시는 흰 원고지에 만년필로 물 흐르듯 써 내려가야 한다고 믿는 이가 적지 않겠지만, 어쩐지 김씨는 또박또박 자판을 두드려 정성껏 쓴 시에 갖가지 장식을 달아 출력해 보는 일이 퍽 즐겁고 재미있었다.

    PC를 워드 프로세서로만 사용하다 보니 다른 기능은 뭐가 있는지 조금씩 궁금해졌다. 처음에는 잘못 만져 아예 망가뜨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쉬 접근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래서는 타자기보다 별반 나을 게 없겠다, 많은 돈 들여 산만큼 최대한 활용할 방법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용기를 내 마우스를 이쪽저쪽으로 옮겨 봤죠. 결국 두 번이나 고장을 내 애프터서비스를 받아야 했지만 덕분에 컴퓨터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져 버렸 습니다.”

    그 얼마 후에는 PC통신이라는 것에 관심이 쏠렸다. 천리안, 하이텔 같은 통신 서비스가 막 시작되던 시점이었다. 역시 무작정 통신에 들어가 보았다. 3주쯤 좌충우돌을 벌이고 나니, PC통신 또한 만만해 보였다.

    “PC 두 번은 망가뜨려야 정복”

    그러다 유니텔에만 유독 시 관련 서비스가 없음을 발견하게 됐다. 대뜸 유니텔에 전화를 걸었다. 왜 시 관련 사이트가 없느냐고 묻는 김씨에게 직원은 “관심이 있으면 서비스 기획안을 만들어 가져와 보라”고 말했다.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PC통신의 시 사이트를 면밀히 분석한 뒤 거기 새 아이디어를 덧붙여 기획안을 만들었다. 결과는 합격. 이로써 김씨는 유니텔에 ‘시와 시인들’이란 사이트를 운영하게 됐다. 지금 운영중인 인터넷 사이트는 단순정보제공에 그치기 쉬운 PC통신의 맹점을 극복하고, 시인들 각자가 자신의 ‘홈’에 원하는 글을 올릴 수 있게 하기 위해 마련한 사이버 커뮤니티다. 좀더 많은 시인의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 김씨는 각종 동인 모임에서 설명회를 갖는 등 부지런히 움직였고 그 결과 처음 100명으로 시작했던 사이트엔 현재 140여 명의 시인이 가입해 있다. 외국 거주 시인들의 참여도 두드러진다. 시·공간을 뛰어넘는 인터넷의 위력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전 컴퓨터를 ‘문화적 장난감’이라고 생각해요. 장난감 갖고 노는 법을 익히듯 재미있게 배워 제 값어치만큼 써먹는 거죠. 만지는 것 자체를 두려워해선 평생 컴퓨터와 친해질 수 없습니다. 망가져도 좋다, 그런 생각으로 적극적으로 접근해야죠. 하다못해 가계부 정리만 PC로 할 수 있어도 생활이 얼마나 편리해지는데요. 특히 단조로운 일상에 묻혀 삶의 폭이 좁아지기 쉬운 주부들에게 컴퓨터는 세상을 향해 열린 큰 창과 같은 역할을 할 것입니다.”

    김씨는 일단 배우기로 작정했다면 주부 자신의 컴퓨터를 갖는 일도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남편이나 아이들 컴퓨터를 빌려 쓴다면 망가뜨리 지나 않을까 겁부터 먹게 돼 제대로 손을 댈 수 없다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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