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편 38선 돌파와 평양 함락 ]
김 백일(당시 34세) 1군단장은 정일권 총참모장과 만주국 봉천군관학교 5기 동창생인데, 그의 원이름은 김찬규(金燦圭)다.만주군 대위를 하다 광복을 맞아 평양에 들어온 그는 김일성의 초청을 받았다. 이때 김일성이 ”나와 같이 인민군을 하자.미군놈들을 몰아내고 미군에게 붙어먹는 민족 반역자를 싹슬이해야 통일이 된다.이승만, 김구,김성수는 전부 나쁜 놈이다”라며 권총을 뽑아 김찬규를 위협 했다.
이렇게 3일을 시달린 그는 평양을 빠져 나와 38선을 넘었는데, 그날 우러러본 하늘이 너무 맑고 밝아서 ‘온 세상이 붉은 색(공산주의)으로 물든다 해도 나만은 희게 버티겠다‘는 뜻으로 이름을 ‘백일(白一)‘ 고쳤다.수도 환도식이 열린 다음날(9월30일) 에하 두개 사단(수도-3)을 38선에 도달시킨 그는 정일권 총참모장에게 전화를 걸어 쩌렁쩌렁하게 외쳤다.”38선에 도달했다.각하께서 북진명령만 내 리시면 당장에 38선을 걷어차고 밀고 올라가겠다!”
9월29일 환도식에서 이대통령은 맥아더에게 ”38선 돌파”를 설파했다. 이에 대해 맥아더는 ”우리 목표는 인민군 기본 전력의 섬멸이다. 38선 이북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군사상의 추적권은 승 자의 당연한 권리다”라고 박자를 맞췄다.그러나 ”이틀 여유를 달라. 10월1일 김일성에게 항복을 권유하겠다.김일성은 당연히 버틸 테니까, 그것을 빌미로 북진하도록 하겠다.이는 워싱턴과도 합 의한 사안이다”라고 설명했다.이때 이대통령이 한 대꾸가 걸작이다. ”알겠다. 그런데 사기충천한 현지 부대가 무슨 실수를 저질러도 양해해 주기 바란다.”
그리고 다음날(9월30일) 이대통령은 정일권 총참모장 이하 전 육본 참모를 집무실로 불렀다.이날다라 이대통령의 목소리는 매우 카랑카랑했다. ”정 총참모장! 우리 3사단과 수도사단이 38선에 도달했 는데 어째서 북진명령을 내리지 않는 것인가?38선 때문인가? 정 총참모장! 당신은 미국 쪽인가, 한국 쪽인가?” 정 총참모장이 엉거주춤하게 ”38선 때문”이라고 대답하자, 불 같은 성질의 이대통령이 목소리를 높였다.”38선이 어찌됐다는 게야? 철조망이라도 있다는게야? 장벽이라도 있다는 게야? 건너지 못할 골짜기라도 있다는 게야?”
정총참모장이 ‘찍‘소리도 못하자, 이대통령이 인사국장 황헌친(黃憲親) 대령을 향했다.”인사국장! 당신은 38선 넘어도 된다고 생각하는게야, 안된다고 생각하는 게야?”황대령이 명쾌히 대꾸했다. ”각하의 명령이면 언제든지 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다른 참모들도 똑같이 대답했다.이대통령은 마지막으로 정일권 총참모장을 돌아보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물었다.
“38선을 돌파하라”
정총참모장은 ”저희는 대한민국의 군인입니다.UN군과 지휘관 문제가 있습니다만 저희는 각하의 명령에 따라야 할 사명과 각오가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제서야 이대통령은 속 시원하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맥아더 장군에게 국군 지휘권을 맡기기는 했으나, 내가 자진해서 한 것입네다.따라서 되찾아올 때도 내 뜻대로 할 것입네다.지휘권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따질 일이 아닙네다.그러 한즉 대한민국 군인인 여러분은 대한민국 대통령의 명령만 충실히 지켜주면 되는 것입네다.”이어 붓을 듯 이 대통령은 일필휘지로 이렇게 썼다.‘大韓民國 國軍은 三八線을 넘어 卽時 北進하라.一九五O年 九月三十日 大統領 李承晩‘
이날 맥아더 원수는 김일성에게 무조건 항복하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 시각 정 총참모장은 강릉에 주둔해 있는 1군단으로 날아가 김백일군단장을 만났다.두 사람은 사적으로는 친구다.국군의 심정을 잘아는 정일권이 먼저 물었다.”아직도(38선을 돌파하지 않고) 대기중인가?...워커를 설득해야 해.그쪽은 그쪽대로 사정이 복잡해.”
김백일이 지도를 꺼내놓고 말했다.”인구리(양양군 현북면)에서 38선 너무 800m 북쪽에 기사문리가 있어.여기서 직사포탄이 심심찮게 날아오거든. 이렇게 하면 어떻까.기사문리에서 날아오는 적 포탄 때문에 아군의 희생이 적지 않다.그런데도 38선을 넘지 말라는 명령 때문에 총 한방 못 쏘고 당하고만 있다.장병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 38선을 넘어 직사포를 쏴대는 적진을 박살내야 한다. 38선 너머 1개 중대를 보내 까부수는 즉시 돌아온다.이렇게 보고해 보자고.”
북진 개시!
정일권이 즉시 찬성해 워커에게 전화를 걸었다.워커는 ”그렇다면 함포나 공군기로 때리자”고 대꾸했다.정일권은 얼른 ”적 포대는 동굴로 돼 있다.보병이 아니고는 곤란하다”라고 둘러쳤다.워커 사령관은 ”그러면 내일(10월1일) 작전을 개시하되 작전이 끝나면 즉시 부대로 복귀시키라”고 한 후, 제너럴 정 다른 의도는 없겠지요?”라고 물었다.”물론입니다.” 미군들은 이대통령의 북진명령을 모 를 터이니 시치미를 뗄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두 사람이 주문진의 3사단 사령부로 가자 이종찬 준장이 ”23연대장 김종순(金淙舜) 대령이 한 시간이 멀다 하고 돌파명령을 재촉한다.잠시 후 두 사람은 인구리의 23연대를 찾았다.연대장 김 대령은 ”병사들이 38선 팻말을 걷어차고 밟아 뭉개고 있다.군화가 다 닳을 지경이다.38선이 뭐냐며 총질을 해대는 병사도 있다.이러다간 큰 사고가 날 수도 있다”며 자랑 반 위협 반의 보고를 했 다.이때 김대령 앞으로 ”수도사단 1연대가 38선에 도달했다”는 무전이 날아왔다.
그 즉시 김대령은 ‘총참모장 각하. 수도사단 1연대가 먼저 38선을 돌파하면 저는 연대원 앞에서 배를 갈라야 합니다.맥아더의 명령이라해서 선봉을 빼앗겼다는 원망을 듣고 싶지 않습니다.그리고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하더니 그 즉시 무전병을 불러 예하 대대를 호출했다.”금강산, 금강산.여기는 백두산이다.대대장 바궈라!”잠시 후 김대령은 ”여기 총참모장 각하가 와 계시니 지금 어디에 있는지 직접 보고 드려라!”하고 말했다.이어 그는 정 총참모장에게 수화기를 건네며 ”3대대장 허형순(許亨淳)소령입니다.직접보고를 받으시지요”고 말했다.
수화기를 타고 오는 허소령의 목소리는 아주 당당했다.”저희는 38선 북쪽 12km인 양양 뒷산에 있습니다.병력은 1개 중대입니다.” 정총참모장은 속으로 ‘잘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자중하라.”는 말로 통화를 끝냈다.이때가 10월1일 오전 11시30분부로 38선을 돌파해, 북진을 개시하라”고 명령했다.그러자 김백일 군단장이 김종순 대령에게, ”23연대는 현위치에서 38선을 걷어차고 북진을 개시하 라.제3사단장을 대신하여 제1군단장 김백일!”이라고 소리쳤다.
이로써 3사단은 최초로 38선을 돌파한 부대가 되었다.1950년 12월 3사단은 국군으로서는 가장 북쪽인 혜산진까지 진격한 예하 26연대를 수도사단으로 보내고 수도사단에 속해 있던 18연대(일명 백골부 대)를 배속받는다.1962년 정우주 사단장(준장) 때 3사단은 ‘ 부대 별칭‘ 공모를 했는데, 부대원들은 압도적인 다수로 18연대의 별명인 ‘백골‘을 추천했다.이에 따라 3사단은 ‘백골사단‘이 되고, 18연대 는 진짜 백골이라 하여 ‘진(眞)백골‘, 서북청년단 출신이 절대 다수였던 18연대 1대대는 ‘진진백골‘ 부대가 되었다.
인구리와 기사문리 사이에는 동해로 흘러드는 광정천이라는 조그만 하천이 있다. 이 하천 위에는 다리가 걸려있는데, 이날 3사단이 38선을 걷어차고 북진을 개시했다고 하여 이 다리는 ‘돌파교‘가 되 었다. 돌파교 근처에는 38선 휴게소가 만들어졌고, 이곳에서 그리 멀지않은 동해안에 하조대 해수욕장이 있다.이날 수도사단도 창촌리에서 38선 휴게소가 만들어졌고,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동 해안에 하조대 해수욕장이 있다.이날 수도사단도 창촌리에서 38선을 돌파해 북진에 들어갔다.그 후 국방부는 이날을 기려 국군의 날을 10월1일로 정했다.
북진 명령을 내린 정 총참모장은 미군이 호되게 항의해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도 아무 말이 없더니, 10월2일 도쿄의 극동군사령부겸 UN군 사령부에서 ”UN군은 10월3일 0시부로 38선 이북의 북한지역에서의 작전을 연장한다”는 일반명령 제2호를 발표했다. 그리고 닷새 후 UN은 찬성 47, 반대 5, 기권 8로 UN군의 북진을 승인했다. 이로써 국군 1군단의 단독 북진은 추인받게 되었 다.
경북축선을 따라 서울로 올라오던 미 1군단이 10월5일 대전 충남도청에서 북진을 위한 사단장 회의를 열었다.미 1군단에 배속된 백선엽 국군 1사단장도 이 회의에 참석했는데,그가 받아든 명령서의 내용은 이러했다. ‘미 1기병사단이 미 1군단의 주공으로 경의국도를 따라 평양으로 진격한다.영연방 27여단은 군단 에비로 미 1기병사단의 뒤를 따른다.한국군 1사단은 경의축선의 좌측인 개성-해 주-안악으로 진격하며 작적을 소탕한다.‘
1894년청일전쟁 때 섭지초(葉志超)가 이끄는 청나라군이 평양성에 포진하고 한성 진격을 준비했다.그러자 일본군은 3사단과 5사단으로 1군을 편성하고 야마가타 아리모토를 사령관에 임명해 평양 진격 을 명령했다. 이때 야마가타는 ”대단한 난전(難戰)에 처하더라도 적에게 사로잡히지 말고 깨끗이 죽음을 선택해 일본 남아의 기상을 보여라!”고 연설했다.이 연설은 그 후 일본군의 ‘항복 거절‘ 전통 을 세우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일본군의 평양 공격 선봉대는 5사단이었다.5사단은 평양 우측으로 접근해 평양성 현무문을 점령함으로써 전투는 싱겁게 끝나고, 섭지초는 백기를 들고 항복했다.백사단장의 고향은 이러한 전투가 벌 어진 평양이다. 그는 미 1군단의 진격로가 청일전쟁 때 일본군이 진격한 것과 흡사하다고 판단하고, 즉시 밀번 1군단장에 면담을 요청해 국군 1사단도 평양으로 진격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밀번 1군단장은 가만히 듣고 있더니 ”한국군에는 차량이 많은가. 미군사단은 수백대의 차량을 갖고 있다.기동력과 화력이 우세한 미군사단을 앞세워 신속히 진군해야 한다”고 설명했다.백사단장 은”내 고향은 평양이고, 나는 청일전쟁사를 잘 알고 있다.비록 차량은 적지만 한국은 산이 험해 오히려 도보 진격이 빠를 수도 있다. 국군 1사단을 신계-수안을 거쳐 평양으로 진격하게 해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강청했다.물그러미 바라보던 밀번 군단장은 ”그러면 국군 1사단과 미 24사단의 진격로를 교체한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미 1군단의 진격로가 확정됐는데 뜻밖의 사태가 벌어졌다.서울을 점령하고 있던 미 10군단 예하 미 육군 7사단이 부산으로 내려가고,미 해병 1사단은 인천으로 이동한 것이다.맥아더 원수가 미10군단을 빼내 다시 원산으로 상륙시키는 작전을 계획했기 때문이었다.그런데 인천으로 보내고 육군 7사단은 경부선을 타고 부산항으로 집결케 한 것이다.
당시 한강 다리는 모두 파괴돼 고무 보트로 연결한 배다리 두 개뿐이었다. 그런데 한쪽에서는 미 10군단이 한강 남쪽으로 넘어오고, 다른쪽에서는 미 1군단이 한강 북쪽으로 넘어가니 자연 시간이 지체 되었다. 이 무렵부터 필리핀 부대를 선두로 나머지 12개국(미국군과 영국군 부대는 벌써 와 있었다) 부대가 차레로 한국에 도착하기 시작했다.‘오고 가고, 오고 가고‘승전의 기쁨은 잠시이고, 혼란스 러운 가운데 대규모 부대이동이 시작되었다.
맥아더의 이러한 조치는 10군단 지휘권을 8군 사령관인 워커 중장에게 주지 않겠다는 것이었다.서울로 총반격을 펴 북상할 때만 해도 워커사령관은 10군단이 당연히 자기 통제하에 들어올 거라고 믿고 있었다. 이 일로 인해 성격이 급한 워커는 맥아더를 맹비난했다.
물론 맥아더의 카리스마 때문에 면전이 아닌 자기 부하들 앞에서... 이 바람에 알몬드 10군단장도 워커를 싫어하기 시작했다.도쿄에 있는 맥아더원수는 워커에게 모든 것을 맡겨 한국전 승리의 공이 워커에게 몽땅 돌아가는 것을 꺼려 이른바 ‘분할 지배(divided and rule)‘를 한 것은 아닐까?
불꽃 튀는 북진 경쟁
10월6일 6-7-8사단으로 구성된 국군 2군단이 38선을 넘어 평강-철원-김화를 점령했다.국군에서도 공다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10월18일 밤 임부택 대령의 6사단 7연대는 강원도-함경남도와 붙어 있는 평안남도 양덕군 양덕읍을 점령했다.그런데 거의 동시에 황해도 신평군쪽에서 고근홍(高根弘) 대령이 이끄는 8사단 10연대가 들어왔다.그 즉시 두 연대장은 서로 ”양덕을 선점했다”며 말다툼에 들 어갔다.동해안에서는 수도사단과 3사단이 경쟁하듯, 중부전선에서는 6사단과 8사단이 경쟁하기 시작한 것이다.
두 연대가 다툰 것은 유재훙 2단장이 ”양덕을 먼저 점령한 부대에게 도로 사용 우선권을 준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도로를 먼저 사용하게 되면 그만큼 북진 속도가 빨라진다.당시 두 사단은 정일권 총 참모장에게서 비밀리에 양덕을 거쳐 평양쪽으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도로 사용 우선권을 놓고 다툴 수박에 없었다. 이미 10월10일 26연대가 서로 원산을 선점했다고 다툰 적이 있었다.
10월7일 미 1기병사단 수색대가 38선을 넘고 11일에는 미 1군단 예하 국군 1사단이 38선을 넘었다.하지만 미 1군단의 진격은 동부나 중부전선에 비해 현저히 늦었다.퇴각하는 인민군이 도로 곳곳에 지뢰를 매설해 놓았기 때문이다.
11일밤 더딘 진격속도를 고민하는 백선엽 1사단장이 밀번 1군단장을찾아가 전차 지원을 요청하자, 밀번 군단장은 30여 분을 생각하더니 전차 1개 중대(10대)를 보내주었다.이때부터 백 사단장은 공 병과 보병, 전차, 포병이 한 덩어리가 돼 진격하는 이른바 ‘패튼 전법‘을구사했다.2차 세게대전 때 유럽 전장에서 패튼 3군 사령관은 이러한 제병과 합동작전으로 쾌속 진군했다.
전차가 배속되자 국군 1사단 병사들의 사기가 크게 높아졌다.병사들은 ”우리는 전진한다”면서 ”전진, 전진!”이라는 구호가 굳어져 1사단은 ‘전진부대‘란 별명을 갖게 되었다.전진부대는 먼저 전차로 돌파하고, 이 돌파선을 중심으로 멈춰서서 좌우 면을 포위 공격한 다음 다시 전차를 돌진시키는 ‘분진협격(分進浹擊)‘전술을 구사했다. 이따금 공병대가 지뢰를 제거하기 위해 부대를 세울 뿐 전진 사단은 쾌속으로 진군했다.
이렇게 되자 미 1기병사단 우측에 있는 5기병연대와 국군 1사단 선봉대인 12연대 가속도 경쟁을 하는 모양이 되었다.국군 1사단은 파죽지세로 신계-수안-율리를 거쳐 10월 17일 평안남도 중화군에 집 입했다. 이때부터 국군 1사단은 잔적 소탕은 아예 포기하고 평양 선착에 몰두했다.10월18일 밤 평양 외곽 15km지점인 지동리에 도착한 백사단장은 15연대(연대장 조재미 중령)로 하여금 서북쪽으로 우회해 대동강을 건너 평양을 협격하라고 지시했다.
남은 이는 11연대장 김동빈 대령과 12연대장 김점곤 대령이었다.그때까지 주공은 김점곤 대령이 이끄는 12연대였다.육사 1기 동기인 두 사람은 경쟁 심리가 작동해 서로 주공을 차지해야 한다며 신 경전을 펼쳤다. 이때 사단장이 위엄을 놓치면 작전은 뒤죽박죽이 돼버린다.백사단장은 눈을 딱 감고 ”12연대는 구공으로 전차와 협동해 오늘밤 안에 대동교를 향해 진격하고, 11연대는 미림 비행장과 평양비행장을 거쳐 능라도 상류인 주암산 및에서 대동강을 도하하라”고 지시했다.
10월19일 날이 밝자 ‘모스키토‘라 불리는 정찰기가 나타나 국군 1사단과 미 1기병사단 상공을 오가며 쌍방의 위치를 알려주었다.미 1기병사단도 중화를 통과하고 있었다.지동리부터 평양까지는 허허 벌판인데 문제는 지뢰였다.국군 1사단 12연대가 지뢰를 하나하나 제거하며 미 1기병사단과 합류하기로 한 대동교 입구의 선교리 로터리에 도착한 것은 오전 11시쯤이었다.그 순간 ”꽝”하는 폭음과 함 께 대동교가 무너져 내렸다.
개전 첫날 국군 1사단은 임진강 철교 폭파에 실패했는데 인민군은 정확한 시기에 대동교를 폭파한 것이다.그러는 사이 국군 1사단에 배속된 미군 전차병들이 ”Welcome 1st Cav.Division-from 1st ROK Division Park‘(환영! 미 제1기병사단-한국군 1사단 백선엽)라는 피켓을 만들었다.
40분이 지나자 미 1기병사단 선두와 함께 밀번 1군단장, 게이 1기병사단장 그리고 트루먼 미 대통령의 특사인 로 소장이 도착했다.이로써 국군이 미군보다 먼저 평양에 도착한 것이 확인되었다.어느 틈엔가외신 종군기자들이 나타나 플래시를 터뜨렸다.한`미 장병들은 얼사 안고 춤을 추었다.
국군사단의 평양선착
이 시각 서북쪽으로 우회한 1사단 15연대가 수심이 낮은 곳을 택해 대동강을 건너 김일성대학을 접수하고, 이어 평양 중심부(당시는 일본식으로 ‘本평양‘으로 불렀다)에 도착했다.12연대에 평양 선착을 내준 11연대는 수심이 얕아 ‘도섭장(渡涉場)이라 불리는 지점을 택해 대동강을 건넜다.이러한 지점 선정은 백사단장이 평양 곳곳을 잘 알았기 때문에 가능했다.하지만 미군은 공병부대가 부교를 설 치한 다음에야 강을 건넜다.
국군1사단과 미 1기병사단이 평양 시내로 막 들어갈 때쯤 평양 서쪽에서 일단의 부대가 몰려왔다.그 바람에 크게 긴장했는데, 뜻밖에도 7사단 8연대(연대장 김용주 대령)로 밝혀졌다.백사단장이 김 대령을 찾아 ”왜 남의 작전 구역에 무단으로 침입했느냐”고 야단치자,김대령은 ”유재흥 군단장과 신상철 사단장의 명령을 받고 진로를 바꿔 평양으로 진격했다‘고 대꾸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정일권 총참모장에게 어떻게 해서라도 국군 부대를 먼저 평양에 선착시키라고 지시했다.그래서 정 총참모장은 국군 부대로만 편성된 2군단에 평양 공격을 명령했던 것이다. 평안남도 양덕에서 6사단 7연대와 8사단 10연대가 우격다짐을 하게된 것도 그래서였다.그러나 두 사단이 싸움을 벌임에 따라 6사단과 8사단은 북쪽으로 진로를 바꾸게 하고 대신 7사단에 평양 진격임무를 내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날 백선엽 사단장은 아주 중요한 일을 간과하고 말았다.10월20일 포스터 중령이 이끄는 미 2사단 소속 장교들이 평양에 들어와 공공건물을 샅샅이 뒤져 발견한 모든 문서를 도쿄에 있는 미극 동군 본부로 보냈다.이 문서 중에는 인민군 최고사령부가 4사단장 이 권무소장 앞으로 보낸 ‘선제타격‘ 계획도 들어있었다. 이로써 미군은 6·25가 인민군의 남침으로 시작되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 거를 확보했다.그러나 당시 한국군은 문서 수집의 중요성을 간과했다.
10월21일 이승만 대통령은 평양시민대회를 열고 국군 1사단을 표창했다.같은 날 도쿄에서 날아온 맥아더 원수도 평양 돌입 선봉대인 미 1기병사단 5연대 F중대를 사열했다.사열 도중 맥아더는 갑자기 ”96일 전 포항으로 상륙할 때 있었던 병사가 있으면 앞으로 나오라”고 명령했다.그러자 200명의 병사 중에서 단 5명이 앞으로 나왔는데, 그중 3명은 부상병이었다.
맥 아더 원수가 10군단장 알몬드 소장과 7함대 사령관 스트러블 제독에게 강원도 원산 상륙작전을 명한 것은 10월1일이었다. 이에 따라 스트러블제독은 제7연합기동함대를 편성해 청진 이남의 모든 북한 해안을 봉쇄했다. 하지만 병력 이동과 장비를 싣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려 맥아더는 10월15일로 잡은 원산상륙 D데이를 20일로 연기했다. 맥아더의 구상은 원산상륙이 이뤄지면 10군단을 평양으로 진격시켜 8군과 함께 평양을 함락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뜻밖의 암초가 등장했다.인천에서 호되게 얻어맞은 인민군이 급히 30여 명의 소련 기술자를 불러들어 원산 앞바다에 기뢰를 부설했던것.때문에 원산 앞바다로 접근하던 미 해군 함정 3척이 대파되었다.
기뢰를 제거하는 것을 소해(掃海)작전이라고 한다.그리하여 10일부터 사상 최대의 소해작전이 시작되었다.이 작전에는 미 해군 소해정 10척, 일본 해상보안청 소해정 21척, 한국 소해정 1척 등 모두 32척이 투입되었다. 원산 앞바다 소해 작전에 일본 해상보안청이 참여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
오쿠보 타게오 일본 해상 보안청 장관에게 소해작전 참여를 요청한 이는 미극동해군 참모부장 바크 소장이 었다.이에 대해 요시다 총리는 ”소해작전에 참여하되 비밀로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그래 서 다무라 대령을 지휘관으로 제1-2-3-10대 소속 소해정 21척이 원산으로 이동했다.이중 제1대는 이미 UN군의 인천상륙작전에 협력한 적이 있고, 제2대는 군산 소해작전을 지원한 바 있었다.
10월17일 원산 앞바다에서 제 2대 소속 소해정 1척이 기뢰와 접촉해 침몰하며 1명이 죽고 18명이 부상을 입었다.그러자 제2대 지휘관인 노세쇼고 중령이 ”미군의 작전명령에 반대한다”며 제2대 소속 소해정 3척을 이끌고 일본으로 돌아가, 곧바로 책임을 지겠다면 사표를 던졌다.
이 사건은 1978년까지 일본에서는 비밀에 부쳐졌다.맥아더가 초안을 잡아준 일본 헌법(일명 평화헌법)은 ‘일본군은 해외 출동은 물론이고 외국군과의 공동 작전을 하지 못한다‘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었 다.따라서 일본 해상보안청 부대의 한국전 참여는 일본 헌법 위반이 아닐 수 없다.
10월19일 미 해병1사단을 태운 상륙함정들이 원산 앞바다에 도착했다. 그러나 소해작전이 끝나지 않아 이 함정들은 12시간 동안은 북쪽으로, 나머지 12시간 동안은 다시 남쪽으로 왔다갔다 했다. 이 시 간 보내기가 얼마나 지루했던지 미 해병 대 병사들은 ”우리가 요요작전을 하러 왔다”고 자조했다. 요요는 실에 묶인 공을 던지면, 그 공이 실의 탈력성 때문에 되돌아오는 놀이 기구다.
맥아더의 오판
그러나 10월10일 이미 국군 3사단과 수도사단은 원산을 점령했고, 19일에는 미 1군단이 평양을 점령해버렸다. 요요작전 1주일 만인 10월26일 미 해병1사단은 아주 안전하게 원산 해안에 행정상륙했다. 더웃기는 것은 미 육군 7사단이었다.7사단을 태운 상륙함정들은 북한 앞바다에 기뢰가 부설돼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부산앞바다에 10일 동안 떠 있었다.그리고 함경남도 이원 앞바다로 올라가 29일 7 사단 병력을 행정상륙시켰다.
평양이 8군에 점령되자 맥아더는 작전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맥아더는10월17일 미 육군 7사단은 압록강 상류인 혜산진(지금은 양강도 헤산)으로 진격케 하고 미 해병 1사단은 장진호가 있는 함경남 도 장진군 쪽으로 진격케 하는 명령을 내렸다.이로써 UN군의 전체 통솔이 매우 이상해졌다.서부 전역에서는 미 8군이, 동부전역에서는 미 10군단이 독자 작전권을 갖고 진격하는 가운데, 10월1일 38선 돌파 이후 국군은 정일권 총참모장의 명령에 따라진격하는 구도가 돼버린 것이다.
이것은 UN군으로 매우 큰 실수였다.정말로 맥아더 원수가 한국전을 총지휘하고 싶었다면 그는 도쿄가 아닌 한국으로 옮겨와서 지휘했어야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도쿄는 한국에서 너무 멀어, 전쟁 상황을 피부로 느낄 수 없다.원 거리에서 UN군 각 부대를 분할함으로써 자신의 지휘권을 공고히 한 맥아더의 행동은, 임진왜란 때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연상시킨다.
당시 도요토미는 도쿄 근처에 있는 하카다에 머물며, 조선으로 출병한일본군을 원격 조정했다.조선으로 출병한 일1본군은 한양성을 함락한 뒤 2개군으로 재편됐다.그묘 1개군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끌고 평양으로 진격했고, 또 하나의 군은 가토 기요마사가 이끌고 두만강 중류인 함경(북)도 회령까지 진격해 선조의 두 아들을 생포했다.도요토미는 이렇게 두 장수를 경쟁시킴으로써 자기의 권위를 확인했는데,그 틈을 뚫고 명나라군이 참전해 왜군을 밀어붙였다.358년 전의 역사 교훈을 맥아더는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UN군이 38선을넘어섰을 때부터 서방 언론은 베이징을 주목했다.국군이 38선을 넘은 1950년 10월1일은 중국 공산당이 중국 대륙 전체를 석권한 지 꼭 1주년이 되는 날이었다.이날 중국 외상 저우언 라이는 ”중국 인민은 이웃 나라가 제국주의 국가로부터 침략받는 경우 이를 묵과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10월3일 밤 저우언라이는 다시 파니카 베이징 주재 인도 대사를 불러 ”만일 미군이 38선 을 넘어 북한으로 들어온다면 중공도 개입할 것이다”고 말하고 이를 미국에 전달케 했다.
무제한 북진 명령
9월27일 미국 통합참모본부는 맥아더 원수에게 ‘귀하의 작전목표는 북한군을 격멸하는데 있음.이 목표를 달성하기 이해 38선 북쪽 지역에서의 군사작전을 인가함.단 소련이나 중공이 대부대를 북한 에 투입했거나 군사적으로 위협을 표한 사실이 없을 때로 한정함.만주와 소련영토에 대해서는 일체 군사작전을 금지함.소련군이 개입해올 경우 수세를 취해 사태를 악화시키지 말 것.중공군이 개 입해올 경우에는 상황이 허락하는 한 전투를 계속할 것‘이라는 훈령을 내린 바 있었다.(9·27 훈령).
그러나 미국은 UN에서 ‘통한(統韓)결의안‘이 채택되는 등 유리한 분위기가 조성되자 중국의 경고를 무시했다.오히려 중공군이 참전할 경우 현지 사령관인 맥아더 원수가 취할 수 있는 재량권의 폭을 넓 혀주었다.10월15일 이러한 문제를 분명히 하기 위해 트루먼 미 대통령은 괌섬 동쪽의 웨이크섬으로 날아와 맥아더 원수와 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에서 트루먼이 ‘중국이나 소련이 참전할 가능성‘을 묻자 맥아더는 이렇게 대답했다.
”만주에는 약 30만 명의 중공군이 있는데 그 가운데 압록강 연변에 배치된 것은 10만~12만5000명이다.따라서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더라도 그 병력은 고작 5만~6만일 것이다.중공군은 공군이 없지만 우리는 한국에 기지를 둔 공군이 있다.압록강을 건넌 중공군은 평양에 내려오기도 전에 전부 궤멸될 것이다.”
이 회담후 맥아더는 UN군의 북진 한계선을 없애버렸다.10월2일 그가 내린 작전명령 2호에서는 중국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서해안의 평북 정주에서 동해안의 함남 흥남까지(이른바 청천강)만 진격하도 록했다.그런데 10월17일 작전명령 4호를 내려 평북 선천에서 함국 학성군(지금은 김책군)까지 진격하도록 했다(맥아더 라인).
그런데 10월24일 맥아더 원수는 다시 ”모든 작전 제한선을 없애고 국군과 UN군은 모든 지상부대를 투입해 신속히 한·만 국경선까지 밀고 올라가라”고 지시했다.반공주의자인 맥아더는 중공을 사탄으로 보고 자신에 차서 이런 명령을 내린 것이다.그런데 맥아더의 카리스마에 눌려 있던 미 통합참모본부는 ”우리는 귀하가 그러한 명령을 내린데는 틀림없이 어떤 정당한 사유가 있으리라고 생각한다.하 지만 그러한 조치는 우리도 다소 관심이 있으니 우리에게도 통보해 주기 바랍니다”라는 아주 공손한 질문 형태의 조치로 이를 추인했다.
이로써 미통합참모본부가 내린 9`27 훈령은 휴짓조각이 되었다.그러자 참전한 미군들 사이에서는 ”12월24일 이전에 전쟁을 끝내고 크리스마스는 고국에서 맞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퍼져갔다.이러한 무제한 북진 명령의 선봉에 선 것은 임부택 대령이 이끈는 국군 6사단 7연대였다.
10월18일 평남 양덕을 점령하고 성천을 거쳐 평양으로 향하던 6사단은 미 1군단이 평양을 점령하자 방향을 바꿔 평남 순천-개천을 거쳐 평북 희천(지금은 자강도 희천군)으로 진격했다.
10월24일 김종오 6사단장은 임부대 7연대장에게 ”조속한 시일 내에 국경도시 초산을 점령하라”고 명령했다.이때부터 7연대는 인민군에게서 노획한 차량을 타고 초고속으로 진격했다.진격 속도가 너 무 빨라 당시 평북(지금은 자강도) 강계 쪽으로 후퇴하던 인민군 부대를 앞지르기도 했다.
초산에서는 오일용(吳日龍)이 이끄는 인민군 8사단이 패잔병으로 부대를 꾸려 일시 저항을 시도했으나 상대가 되지 않았다.10월26일 드디어 7연대는 한·만국경지역인 초산군을 점령했다.초산읍에서 압록강까지는 6km였다.임대령은 1대대장 김용배(金龍培) 소령에게 ”국경까지 진출하라”고 명령했다.
1대대가 30여 분을 더 진격하자 인민군 패잔병들이 고지에서 사격을 가해 왔지만 일거에 제압되었다.그 직후 중토동 마을 고개에 올라선 1대대원들은 수풍댐 때문에 거대한 호수가 된 압록강을 발견했 다. ”야! 압록강이다” 병사들이 어울려 고함치는 소리가 무전기를 타고 임부택 대령에게 전달되었다.
마침내 압록강
잠시 후 1대대 1중대 수색소대가 신도장이라는 마을 앞 강변으로 달려가 태극기를 꽂았다. 이때가 정확히 1950년 10월16일 오후 2시15분이었다.병사들은 목이 터져라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압록 강변에 도달한 7연대 1대대 1중대장은 이대용(李大鎔) 대위였다.압록강변 수색에 나선 이대위는 만주 통천구로 이어진 뗏목다리 위로 인민군이 도주하는 것을 발견하고 57mm 대전차포를 쏴 뗏목다리 를 끊어버렸다.
이대용대위는 그 후 준장으로 전역해 베트남 주재 한국 공사가 된다.주월공사시절 한국군과 미군이 월남에서 철수하고 베트남이 공산화되었다(1975년). 이때 이대용 공사는 마지막까지 사이공에 남 아있다가 월맹군에 붙잡혀, 감옥살이를 하다 1979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7연대 본대가 압록강에 도달했다.그러자 김종오 6사단장이 임대령에게 ”압록강물을 수통에 담아 이승만 대통령께 보내라”고 지시했다. 압록강 물을 수통에 떠온 것도 이대용 대위가 이끄는 1 중대였다.이때 누군가 수통에 압록강 물을 채우는 국군 병사의 모습을 촬영했다.
그러는 사이 미 10군단 예하 미 해병1사단은 장전호에 접근했고, 미 육군 7사단은 압록강 상류인 혜산진에 도착해 사단에 부여된 작전을 거의 완수해 놓았다.국군 3사단은 함북 길주를 지나 함수-백암-보 천보를 거쳐 백두산으로 진격하고 있었다.국군 수도사단은 청진을 장악한 후 나진-무산을 지나 회령-온성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전선에는 인민군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어쩌다 발견되는 인민군들도 잠시 저항하다 황급히 도주했다.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김일성은 모든 인민군들에게 평북 강계로 모이라는 지시 를 내려놓고 있었다.인민군들을 강계를 향해 황급히 모여드는데 국군과 UN군은 강계를 무시하고 국경선으로 진격하는 데만 진력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전선에서 중공군 포로가 잡히기 시작했다.하루가 다르게 날씨가 추워지는데 전선 분위기는 전과 다르게 긴장감이 느껴졌다.이러한 전선분위기를 도쿄에 있는 맥아더 원수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승전보에 빠져 중국의 계속되는 경고를 ‘공갈포‘로 무시하고 있었다.
다시 맥아더 이야기로 돌아가자.중공군 참전으로 인한 UN군의 패배는 맥아더 원수의 해임으로 이어진다(1951년 4월9일). 1차 세계대전에서는 최고의 전투영웅이었고 2차 세계대전에서는 일본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낸 연합군 총사령관, 그리고 6·25 전쟁에서는 기상천외한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종신 원수의 해임은 엄청난 파문을 몰고 왔다.
맥아더는 종신 원수이기 때문에 전역을 신청하지 않는 한 원수계급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하지만 명예를 존중하는 그는 해임 즉시 전역을 신청했다.그해 4월19일 그는 미국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장문의 고별연설을 발표했는데 말미에 이런 대복이 들어 있었다.
”전세계 국가 중에서 유일하게 한국이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공산주의에 대항해 싸우고 있다.한국인들이 보여준 대단한 용기와 불굴의 투지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그들은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자고 한다.그들이 내게 던진 마지막 말은‘(미국은) 태평양을 포기 하지 말라‘였다.(중략)
나는 20세기가 시작하기 직전에 꿈과 희망을 갖고 군에 입대했다. (줄약)그 후로 세상이 여러 번 바뀌면서 그 꿈과 희망은 사라졌지만,어린 시절 즐겨 부르던 군가 후렴만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노병은죽지 않는다.다만 사라질 뿐‘이다(Old soldier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 나는 이 군가처럼 나의 군 생활을 마치고 사라지려고 한다.신이 주신 의무를 끝까지 다하려고 한 노 병으로서...”
그 후 노병은 미국 무기회사인 레밍턴사 회장을 지내다 1964년 세상을 떠났는데,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한국을 찾지 않았다. 이러한 맥아더를 존경한 사람이 삼성그룹 창업자인 이병철(李秉喆)회장이었 다.
이회장은 맥아더가 타계한 후 ‘그의 덕분에 이렇게 나라가 부강해졌으니 맥아더 부인을 한국에 한 번 모시자‘고 생각하고 이동복(李東馥) 삼성항공 사장과 함께 진 맥아더 여사를 만났다.이 회장의 초 청 제의를 받은 맥아더 여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전역 후 장군과 나는 아시아를 방문하기 위해 일본 공항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게 되었다.그런데 그 많은 일본인들이 장군을 알아보지 못했다.장군이 일본 발전에 끼친 영향이 얼마나 컸는가?그런 데도 장군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자 장군은 매우 섭섭하셨는지, ‘우리는 두 번 다시 아시아를 찾지 말자(We shall never return to Asia)‘고 말했다.그리고 그 말대로 장군은 두 번 다시 아시아를 찾지 않았다.
장군은 자신이 한 말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우리는(we) 두 번 다시 아시아에 가지 않겠다‘는 말을 바꿔 놓지 않고 타계했다. 그런데 내가 어찌 장군이 한 말을 어길 수 있겠는가. 나를 초청해주는 것은 고맙지만 나는 장군의 말을 지키고 싶다.”
아시아는 맥아더에게 영광과 좌절을 동시에 안겨준 곳이다.그러한 아시아에 대해 맥아더는 초연하게 대처하려고 했다.그러한 남편을 따라 진 맥아더 여사도 끝내 한국을 찾지 않고 지난 1월22일 타계했 다. 자신의 신념에 투철하려고 했던 맥아더에 어울리는 삶을 산 부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