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다 김(48). 5월 한달 내내 대한민국을 ‘부적절하게’ 뒤흔들어 놓은 미모의 여성 로비스트다. 애초에 ‘린다 김 스캔들’은 문민정부 시절 백두사업 등 방위력 증강사업 사업자 선정과정에 그녀가 군·정·관계 고위인사들에게 뇌물을 건냈는지 의혹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곧이어 이양호 전 국방장관과 주고받은 일련의 연서(戀書)가 공개되면서 세간의 관심은 이 전장관 등 고위 인사들과 린다 김 사이에 과연 ‘부적절한 관계’가 있었느냐의 여부로 급격하게 돌아섰다. 그동안 모든 언론은 린다 김을 ‘잡기 위해’ 밤낮 없이 그녀의 논현동 집 앞에 진을 치고 보냈다.
사실 ‘신동아’는 이번 사건이 본격화하기 훨씬 전인 3월부터 한국군 방위력 증강사업과 관련해 린다 김을 추적해오고 있었다. 그동안 여러 차례 인터뷰 요청과 탐문이 계속되던 중에 이번 사건이 터졌고, 린다 김은 결국 6월호 마감이 임박한 5월15일 저녁 시사월간지로는 처음으로 본지와의 인터뷰에 응했다. 린다 김은 “나는 ‘신동아’의 애독자이고, ‘신동아’라면 내 얘기를 가감없이 전달해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인터뷰에 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15일 오후 3시 반경 ‘신동아’ 취재진은 논현동 린다 김의 자택 대문 앞에 진을 친 기자들을 ‘극적으로’ 따돌리고, 그녀가 국내 변호사 선임문제로 변호사 사무실을 방문하는 데까지 동행했다. 인터뷰는 본사 출판사진부장의 자택에서 이뤄졌다. 얼굴이 널리 알려진 린다 김의 사정상 공개된 장소에서의 인터뷰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인터뷰는 저녁 6시부터 밤 12시까지 단 1분의 휴식도 없이 6시간 동안 꼬박 진행됐다. 인터뷰 도중에 “저녁식사부터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취재진의 제의에 린다 김은 “나도 프로고 당신들도 프로다. 프로라면 일부터 끝내야 하지 않겠느냐”며 거절했다. ‘신동아’는 여성으로서 치명적일 수 있는 ‘부적절한 관계’ 부분이 포함돼 있는 이번 사건의 성격상 남녀 기자가 한 팀을 이뤄 인터뷰를 하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남녀 두 기자는 무기도입 과정의 로비에 얽힌 내막, 린다 김의 개인적인 성장사 등 서로 관점을 달리해서 린다 김에 접근했다. 이 인터뷰의 1, 2부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 1부 백두사업 로비의 진실 ]
린다 김은 인터뷰가 시작되기 전 “담배를 피워도 되겠냐”며 양해를 구했다. 방석을 깔고 앉은 그는 담배를 하나 꺼내 들며 취재진의 ‘공격’을 맞을 채비를 마쳤다. 실내엔 긴장감이 맴돌았다. 거리에서 린다 김을 차에 태우고 기자들의 추격을 따돌릴 때의 긴장과 흥분 때문인지 다들 약간 들뜬 표정이었다. 인터뷰 장소의 제공자인 사진기자가 찬물을 내왔다.
―요즘 건강은 어떻습니까?
“내가 원래 저혈압이예요. 잘 먹지도 않고 신경을 많이 쓰다 보니 혈압이 더 내려간 것 같아요.”
린다 김에 대한 세간의 관심사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백두·금강사업을 비롯한 국방부의 무기도입사업이 그녀의 ‘부당한 로비’에 영향을 받았는지 여부. 98년 10월 군검찰과 검찰의 대대적인 수사 이후 김씨가 관여한 무기관련사업들은 하나같이 의혹의 대상이 됐다. 미국 영주권자인 그녀는 98년 수사 당시 미국에 머무르고 있었다. 검찰은 그녀를 기소중지 처리했다. 그녀가 한국을 다시 찾은 것은 지난 3월. 검찰은 4월28일 그녀를 군사기밀보호법위반 및 뇌물공여 혐의로 불구속기소했다.
두 번째는 시중에 ‘부적절한 관계’라는 유행어를 낳은 린다 김과 그녀를 둘러싼 남자들의 스캔들 의혹이다. 마치 때를 기다리던 하이에나의 습격처럼 그녀의 기소 직후 세상을 덮친 이 스캔들은 ‘린다 김 사건’의 본질을 순식간에 뒤바꿀 만큼 위력적인 것이었다.
많은 남자들이 이 ‘핑크빛’ 무대에 등장했지만 가장 화려한 조명을 받은 사람은 단연 이양호 전국방부장관이었다. 사랑의 감정을 담은 편지 공개로 시작된 이전장관과 린다 김의 스캔들은 이전장관이 일부 언론을 통해 “두 차례 관계를 가졌다”고 시인하는 데서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린다 김은 이를 강력히 부인하고 나섰다. 한마디로 자신은 결코 ‘몸 로비’를 한 적이 없다는 것. 진실은 무엇일까.
―백두·금강사업엔 언제부터 뛰어들었습니까.
“이게 언제부터 백두·금강입니까. 아주 오래된 사업입니다. 로랠사(현 록히드 마틴사의 전신. 금강사업의 사업자로 선정)가 이 사업에 처음 뛰어든 게 쌍8년도였어요. 그런데 한국에선 일이 진행이 안 됩니다. 장관들이 뒤에 말이 나올까봐 자기 재임기간 중 결재를 안 하는 겁니다. 거기다 개각이 너무 잦으니 뭘 제대로 해볼 수도 없지요.
일 좀 할 만하면 장관이 바뀌어요. 그러다 보니 처음의 ROC(성능요구서)대로라면 당시로선 기가 막힌 신형이었는데 10년이 지나면서 구형이 돼 버려요. 백두도 그래서 문제가 된 겁니다. 88년 만든 ROC를 10년 뒤 사업을 진행하면서 그대로 적용합니다. 지금 586으로 가는데 과거 286을 가지고 얘기하는 거나 마찬가지지요. 그러니 말썽이 생기지요. 내가 ‘이걸로 안됩니다. 바꿔야 합니다’고 얘기해줘도 안 듣습니다.”
자주국방과 미국
린다 김의 얘기를 들으려면 먼저 백두·금강사업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그것을 알지 않고선 그녀의 스캔들에 대해 그 누구도 함부로 말할 수 없다. 그녀는 국제 무기중개업계에서 한국인 여성으로선 드물게 거물급 로비스트로 통하고 있다.
백두사업(관련기사 116페이지 참조)은 통신정보를 감청하는 정찰기를 도입하는 사업이다. 총 2439억원의 예산이 투입되는 이 사업이 시작된 것은 6공 후반기인 91년 6월. ‘백두’라는 명칭은 휴전선에서 백두산에 이르는 북한 전역의 통신정보를 정찰기로 감청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됐다.
95년 1월에야 도입방식이 결정됐는데 그 골자는 항공기와 탑재 장비를 패키지로 구입한다는 것. 사업자 선정작업에 들어간 것은 그해 11월. 린다 김과 이양호 당시 국방부장관이 만나는 횟수가 부쩍 는 것은 이듬해 초부터였다. 그해 6월 국방부는 린다 김이 로비스트로 나선 미국 레이시온사의 호커 800XP와 E시스템사의 원격조정 감시체계(RCSS)를 각각 백두사업의 기종과 감청장비로 선정했다.
백두사업이 감청정보수집에 관한 사업이라면 금강사업은 영상정보수집를 위한 사업이다. 대략 휴전선 일대에서 금강산에 이르는 지역을 촬영하는 것이 목표이므로 금강사업이라는 암호로 불렸다. 백두사업과 더불어 91년부터 추진됐으며 96년 3월 공개입찰에서 미국의 로랠사가 2억7000만 달러를 제시, 사업자로 선정됐다. 린다 김은 로랠사의 로비스트로도 활약했다.
―백두·금강사업에 도입되는 무기로 미국 비행기와 장비가 결정된 데 대해 자주국방화에 역행하는 일이라는 비판이 있는데요.
“그런 말들을 하지요. 왜 꼭 미국 것을 선택해야 하냐고. 그렇지만 비행기만 띄우면 자주국방이 됩니까. 그 위에 떠 있는 인공위성과 연결돼야지. 기본적으로 한국군의 작전 개념은 한·미연합작전이에요. 미군이 쓰는 무기와 연계가 가능해야 합니다. 그게 현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자주국방은 이제 시작단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중요한 정보나 시스템은 미국이 안 주고 있어요. 왜 값이 더 비싼 미국 것을 사냐고 묻는데 참 답답합니다. 눈앞의 가격만 놓고 판단할 문제가 아니거든요. 나중에 무기 시스템 호환에 문제가 생겨 빚어질 손실액을 생각해야죠. 한국의 현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당시 모 특수정보부대는 백두사업 추진을 반대했죠.
“그 부대장으로 온 P장군은 기무사 대령 출신으로 비행기의 ‘비’자도 모르는 사람이에요. 난 그런 사람이 별을 달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무기구매에 대해 전혀 판단할 수 없는 사람이 부대장으로 부임해온 겁니다. 그 사람이 국방부에 백두사업에 대해 좋지 않게 보고했어요. 그래서 백두사업이 몇 차례 감사 받은 것 아닙니까. 내가 관련 회의까지 참석해 설명을 해줬어요. 그런데도 안되더라구요. 경쟁자들의 투서도 영향을 끼쳤지요.”
―군 안팎에서 백두사업 자체에 대한 비판여론이 강하지 않습니까.
“내가 돈 벌려면 장비 값을 올리면 돼요. 맘만 먹으면 무슨 짓을 못하겠어요. 기종 선택과 가격 결정, 다 잘 됐어요. 그리고 사람들이 잘 몰라 그러는데 미국정부가 보증하는 해외판매방식(FMS)이기 때문에 그렇게 논란이 될 일이 아니에요.”
린다 김은 자신이 로비해 성사시켰던 사업이라 그런지 백두사업에 대한 비판에 대해선 무척 민감한 반응을 나타냈다. 김씨는 “백두, 금강(사업자 선정이)이 끝나면 사고가 날 것을 직감했다”고 말했다. 비행기(기종 선정)와 시스템(장비 운용) 선정작업을 동시에 진행해야 하는데 따로따로 해왔기 때문에 사업진행 과정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사업자 선정과정에 경쟁자가 너무 많았던 점도 뒷날 잡음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던 요인이었다. 실제로 린다 김은 사업자 선정이 끝난 후 경쟁업자와 소송에 휘말리기도 했다.
“소장 내용은 내가 불법적인 방법으로 로비를 해 결과적으로 자신이 입찰을 받지 못했으므로 손해배상을 받아야 하겠다는 것이었어요. 미국 판사는 ‘빨간 셔츠와 노란 셔츠가 있다고 치자. 디자인은 똑같은데 고객이 노란색이 좋아서 그걸 구입했다고 빨간 셔츠 파는 사람이 노란 셔츠 판매자를 고소할 수 있느냐. 부당한 요구다’며 소송을 기각했어요. 꼭 소송을 할 생각이라면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해야지 왜 저한테 하는지 모르겠어요.”
―경쟁에서 탈락한 업체들쪽에선 린다 김 이부당한 방법으로 로비를 했다고 비난합니다.
“어찌 보면 여성이 갖는 이점 때문이기도 하겠죠. 그렇지만 그런 얘기하는 사람들, 참 답답합니다. 내가 남자라면요,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할 겁니다. 만나야 할 사람이 안 만나주면 차를 가로막아서라도 만나야죠. 모 수석비서관이 안 만나줄 때 밖에서 5시간이나 기다렸다가 만난 일이 있습니다. 그렇게 성의를 보이면 미안해서라도 ‘들어와서 차라도 한 잔 하라’고 말하게 돼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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