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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연구|엄익준 전국정원차장의 삶과 죽음

‘음지’에서 살다가 ‘양지’에 묻힌 ‘진짜 정보맨’

  • 김당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음지’에서 살다가 ‘양지’에 묻힌 ‘진짜 정보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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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언론에 처음 등장한 것은 대북 지원업무를 맡고부터다. 그래서 흔히 ‘대북 전략통’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가 그때부터 언론에 ‘노출’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평가받는 측면이 크다. 그는 원래 국내 보안정보 및 기획 분야에서 실력을 인정받았다. 5공화국 시절 김용갑 기조실장(현 한나라당 의원)은 특히 그의 기획 능력을 높이 사 그를 기조실에 붙잡아 놓고 일을 맡겼다.

어쨌든 그는 역사적인 남북 기본합의서를 이끌어낸 남북 고위급회담 지원(90∼92년) 업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공로로 92년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그러다 나중에 문제가 된 이른바 ‘훈령조작’ 사건에 연루되어 이름이 거론되기도 했다. 이 사건은 92년 9월 평양에서 열린 8차 고위급회담 때에 당시 대표단의 일원이었던 임동원 통일원차관-이동복 국무총리(안기부장) 특보의 갈등(강온 대립)이 야기한 측면이 있다. 당시 그는 평양에 체류중인 고위급회담 우리측 대표단에 대해 본국의 훈령(전문) 업무를 지원하는 서울 상황실장을 맡고 있었다. 따라서 임동원 전 외교안보수석이 국정원장으로 임명되자 엄익준 차장과의 과거 악연과 앙금 때문에 갈등이 불거지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흔히 사람들이 갖고 있는 고정관념 중 하나는 대북 관계업무에서 국정원 사람들은 매파(강경파)라는 인식이다. 그러나 그런 것만은 아니다. 국정원의 경우 부서에 따라 대북 접근방식에 차이(강온)가 있고, 또 국정원의 대북 전략도 국방부·통일부·외교통상부 등 관련 부처에 비해 사안에 따라 강경할 수도 온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94년 6월 북한 핵 위기 때만 해도 그랬다.

94년 북한 핵 문제를 둘러싼 북·미 갈등으로 당시 한반도에는 마치 전쟁이라도 터질 듯 일촉즉발의 전운(戰雲)이 감돌았다. 걸프전 ‘종군기자’와 외신기자들이 대거 몰려오는 와중에 여론은 대북 강경론이 지배했다. 그런데 94년 6월 당시 국회 정보위원회 비공개회의에서 김덕 안기부장은 ‘핵문제 관련 대북제재 추진 동향’을 보고하며 미묘한 발언을 했다. 김부장은 “현재 북한이 김정일의 총괄지휘 아래 핵개발에 힘쓰고 있다”고 전제하고 “비록 조잡한 형태지만 핵무기를 개발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회의가 끝난 뒤 신상우 정보위원장은 이런 내용을 언론에 공개했다.

당시 상황이 민감했던지라 “핵무기가 개발됐을 것”이란 안기부장의 말이 어떤 파문을 불러올지는 뻔한 일이었다. 정보위 회의에 배석했던 엄익준 대북 전략국장은 황급히 기자실을 찾아가 “핵무기를 이미 개발한 것이 아니라 ‘개발 직전단계’를 잘못 말한 것”이라며 앞서 안기부장의 발언을 정정했다. 그의 무마로 언론 보도는 가까스로 ‘개발 직전단계’로 나갔으나 국내 강경 여론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개발 완료단계’로 나갔더라면 강경(대북 제재) 여론과 파문은 더 거세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 대북제재는 북한의 거센 반발과 미국의 북한 핵 개발기지에 대한 선제공격 등 전쟁으로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정상회담 실무접촉의 ‘선수 겸 코치’

다행히 카터 전 대통령의 정상회담 중재로 한반도의 전쟁 분위기는 대화 국면으로 일대 전환했다. 남북한 정상이 만나기로 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한반도를 덮고 있던 불안감은 한 순간에 걷혔다. 대북 제재를 주장하던 국내외의 강경론은 봄눈 녹듯 사라졌다. 북에 대한 경계의 목소리나 심지어 김영삼 대통령의 평양행을 반대하는 일부 극우언론의 주장이 나오기도 했지만 대세는 북한과의 대화였다. 정부의 관련 부처들은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사상 최초의 정상회담을 준비하느라 정신을 못 차릴 만큼 바빠졌다. 주무기관은 청와대와 통일원 그리고 안기부였다.

엄익준 대북 전략국장은 94년 7월1∼2일 판문점 통일각·평화의 집에서 진행한 남북 정상회담 실무절차 협의를 위한 대표 접촉(실무회담)에 ‘차출’되었다. 그러는 바람에 딸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한 것이다(정상회담 자체가 카터의 중재로 우리측의 사전준비 없이 느닷없이 결정된 데다 일정까지 촉박해 여러 달 전에 잡아 놓은 결혼식과 겹치게 된 것이다). 그보다 앞서 부총리급 예비접촉이 정상회담 의제 등을 포괄적으로 결정하는 ‘얼굴마담’ 회담이라면 실무회담은 정상회담 대표단 구성과 규모, 회담형식, 체류일정, 선발대 파견, 왕래절차, 편의보장, 신변안전보장 문제 등을 구체적으로 협의하는 ‘전문가회담’이다. 따라서 회담도 비공개로 진행되었다.

실무회담 북한측 대표로는 백남준 정무원 책임참사와 최승철·최성익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 부장이 나섰고, 우리측은 윤여준·구본태·엄익준 3인이 대표로 나섰다. 우리측은 안기부에 대한 북한측의 거부감을 피하려고 당시 윤여준 안기부장특보는 ‘국무총리 특별보좌관’, 엄익준 대북 전략국장은 ‘국무총리 보좌관’이라는 ‘모자’를 쓰고 나갔다. 통일원에서는 구본태 통일정책실장이 나왔다.

당시 안기부는 3명의 안기부장특별보좌관(정무직) 제도를 운영하고 있었다. 안기부장 1특보는 대북, 2특보는 법률, 3특보는 언론 및 공보 보좌역이었다. 그런데 청와대가 대북 업무를 보좌하는 제1특보 대신 안기부장의 언론 및 공보 창구역인 제3특보(윤여준)를 ‘대표선수’로 선발하는 바람에 대북 전문가인 엄익준 전략국장을 ‘선수’로 기용해 협상전략을 ‘코치’하게 한 것이다. 말하자면 실무회담의 ‘선수 겸 코치’였다.

마지막까지 국가를 위해 헌신한 그의 극적인 죽음이 아니더라도 국정원 안에서 그의 거취는 국정원맨들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다. 한 번도 하기 어려운, 그래서 모든 직업공무원들의 꽃인 차관(차장)을 두 번이나 역임한 것은 국정원 역사상 그가 처음이다. 국정원 출신으로 차장까지 오른 인물은 김근수·황창평·정형근·오정소 등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그러나 국정원 직원들은 졸병(7급 공채)부터 출발하지 않은 정형근씨(현 한나라당 의원)는 내부 출신 차장으로 치지 않는다. 공채 출신 차장 1호는 김근수(金瑾洙·66) 현 상주시장이다. 김 시장은 61년 중앙정보부에 들어가 안기부 1·2국장을 거쳐 85년 1차장을 끝으로 옷을 벗었다.

또 엄익준 차장은 유일하게 안기부(국정원)의 핵심부서인 1·2국장(현 대공정책실장)을 거치지 않고 차장으로 승진한 ‘행운아’다(앞서의 김근수·황창평·정형근·오정소씨는 모두 재임중 1·2국장을 거치거나 1국장 혹은 2국장을 거쳐 차장이 되었다). 그것은 그가 호남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국내정보를 수집(2국장) 판단(1국장)하는 ‘중책’은 호남 출신에게는 ‘금단의 자리’였다. 그 자리에 호남 출신이 앉으면 핵심 정보가 야당으로 샐 수 있다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그러나 그는 역설적으로 호남 출신이기 때문에 두 번이나 차장에 오르는 행운을 맛보았다.

첫번째 행운은 김기섭 전 운영차장의 ‘불운’ 덕분에 찾아왔다. 97년 3월 권영해 안기부장은 김기섭 운영차장의 사퇴로 공석이 된 국정원 인사를 단행하면서 운영차장 자리를 없애고 3차장(대북 담당) 자리를 신설했다. 당시 김씨는 김영삼 대통령의 아들 현철씨에 대한 비난 여론이 들끓는 가운데 그에게 내부 정보를 제공하고 이권에 개입한 혐의로 물러났다. 운영차장이라는 직제부터가 위인설관(爲人設官)이었다. 문민정부 초기 안기부 인사와 예산을 담당하는 기조실장으로 들어간 김씨가 나중에 직급을 ‘차장’으로 올려 놓고 앉은 자리가 바로 운영차장이었다.

안기부 직원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우선 위인설관이 없어졌고 그 대신 대북 기능 강화라는 순기능을 가져왔다. 또 운영차장을 없애는 대신에 3차장제를 신설함으로써 안기부 차관급 6개직이 그대로 유지되어 내부 인사적체 우려도 피해 갔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인사(人事)에서는 차관급 보직에서 외부 인사(人士)를 줄이고 내부 인사를 승진 발령함으로써 외부 인사 기용에 불만이던 직원들의 사기를 높였다.

북풍 수사가 몰고온 뜻밖의 불운

지금은 특보관제가 없어졌지만 당시는 그때그때 임무를 바꿔가면서 안기부장을 보좌하는 참모조직인 1·2·3특보관을 두고 있었다. 특보는 계선 조직인 실무조직을 거느리는 1·2차장 자리와는 비교할 수 없지만 차관급 대우를 받았다. 특보제는 안기부에서 실·국장(1급)을 거친 간부들의 경험과 전문성을 사장(은퇴)시키지 않고 안기부장을 보좌하는 데 쓰게 하자는 취지에서 도입되었다. 그런데 취지와는 달리 당시 6명의 차관급 중에 1명만 내부 출신이었다. 즉 당시 박일룡 1(국내)·이병기 2(해외)·김기섭 운영차장과 조만후 1(법률)·남정판 2(공보)·엄익준 3(대북)특보 중에서 내부 출신은 엄익준 3특보뿐이었다.

그런데 97년 3월 차관급 인사에서 권영해 부장은 엄익준 3특보를 신설한 대북 담당 3차장으로, 이청신 3실장(대공수사실장)을 1특보로, 그리고 남영식 8실장(대북공작실장)을 3특보에 각각 승진 기용했다. 이로써 안기부 차관급 6명 가운데 3명(엄익준 차장, 이청신·남영식 특보)이 안기부에서 잔뼈가 굵은 공채 출신으로 채워졌다. 그중에서도 직원들에게는 엄차장이 단연 주목 대상이었다. 앞서 말했지만 계선에서 벗어나 있는 참모조직인 특보와는 달리 차장은 실무조직(실·국)을 관장하는 명실상부한 차관인데, 엄차장은 그중에서도 유일하게 내부 출신이자 호남 출신이었다.

유일한 내부 공채 출신이자 호남 출신 차장. 업무 능력을 떠나 이런 ‘희소성’ 때문에라도 엄차장은 정권 교체 후 새 안기부의 국내 담당 차장 1순위로 떠올랐다. 실제로 당시 김대중 당선자로부터 과도기(정권 인수기)의 안기부를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던 천용택 의원(정보위 간사)은 엄익준 차장과 교감을 갖고 그를 국민의 정부 안기부의 국내 담당 차장으로 점찍어 놓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불운’이 찾아왔다. 구안기부 수뇌부가 대선 기간 북풍 공작에 개입한 혐의가 드러나고 이종찬 안기부장(초대 국정원장) 체제가 들어서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특히 재미동포 윤홍준 기자회견(DJ 대북 연계 혐의 비방) 등에 안기부 조직이 개입한 사실이 드러나고, 안기부 수뇌부가 태스크 포스까지 구성해 조직적으로 특정후보 낙선활동을 펼쳤음을 입증하는 내부 문건(오익제 편지사건 관련 기본 대응계획)까지 드러남으로써 50년 만의 정권교체에 걸맞게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논리가 우세했다.

관련 문건 등에 따르면 권영해 부장, 박일룡 차장, 이청신 1·남영식 3특보, 임광수 101(기획판단)·임경묵 102(수집)·고성진 103(수사)실장, 공보관실의 부부서장급 단장과 처장들이 참여한 태스크 포스가 구성돼 ‘오익제 북풍’을 실무적으로 주도한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그는 국내 정치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대북 담당 3차장이었고 더구나 호남 출신이어서 ‘태스크 포스’ 구성 멤버에서도 제외됐다. 하지만 ‘물갈이’ 명분에 밀려 98년 3월 간부 전원이 옷을 벗게 되었다. 따라서 정통 정보맨인 그의 퇴진은 호남 출신이라는 지역 배경 때문에 의외로 받아들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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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당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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