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언론들은 한국의 4·13총선이 시작되기 전부터 줄곧 총선시민연대의 낙선운동을 집중 보도해왔다. 선거가 끝난 후 선거결과 분석 보도에서도 단연 총선시민연대가 초점이었다.
일본에는 한국과 같은 지역주의는 없지만 특정정당을 지지하지 않는 ‘무당파’가 늘어나고 있어 한-일 양국의 정치상황은 유사한 점이 많다.소선거구와 비례대표제를 바탕으로 한 선거제도 역시 비슷하다.
이런 점에서 한국 국민들이 스스로 낙선운동에 발벗고 나섰다는 것이 일본인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진 것. 지금껏 일본에 비해 ‘뒤떨어진 나라’로만 생각하던 한국이 정치개혁을 위해 폭발적인 에너지를 발휘했다는 것을 알고 ‘괸 물’과 같던 일본정치를 반성하기 시작했다.
요미우리신문은 선거직후인 4월15일자에서 “정치쇄신을 요구하는 여론을 대변한 운동으로 일약 유명해진 것이 시민단체 연합체인 총선시민연대”라면서 총선시민연대의 낙선운동 대상자 86명 중 59명이 떨어졌으며 서울·수도권에서만 20명중 19명이 낙선한 사실을 지적했다.
아사히신문도 같은 날 사설에서 “한국정치를 밑바닥부터 뒤흔든 것은 시민의 적극적인 선거참가와 후보자 개인정보 공개”였다고 평가했다. 또 “군사독재정치를 끝낸 민주화선언으로부터 13년이 지난 지금, 한국정치는 또다시 새롭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그 왕성한 활력이 놀랍고 부럽다”고 했다.
아사히신문은 한발 더 나아가 4월19일자에서 ‘한국의 NGO 파워’라는 제목의 특집기사를 통해 문민정부 출범 이후 사회 각분야에서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는 시민운동을 소개하고 일본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 언론이 낙선운동을 초기부터 대대적으로 보도하자 한국의 낙선운동을 배우자는 움직임도 활발해졌다.
일본에서 낙선운동의 불을 지핀 ‘시민연대·물결21’의 사쿠라이 대표는 3월8일부터 3박4일간 서울을 방문했다. 그는 총선시민연대를 찾아가 500개 단체가 결집하게 된 배경과 낙선운동의 구체적인 방법 등을 듣는 한편 대학교수 출판인 금융관련인사 등을 두루 만나면서 낙선운동의 열기를 취재했으며 한국 방문기간에 배우고 느낀 것을 3월20일자 ‘노비’에 ‘2000년 총선거시민연대로부터 배우자-평화와 민주사회를 지향하며’라는 제목으로 자세히 소개했다.
직접 한국 방문해 배우기도
그는 “처음 한국의 낙선운동 소식을 들었을 때 ‘바로 이것이다’라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말한다. 낙선운동은 일본인은 전혀 생각지 못했던 너무나 새로운 발상이었다는 것. 그리곤 곧바로 ‘한국을 방문하기로’ 결심한다. 더 늦기 전에 한국에서 배워 이번 중의원 선거 때부터 운동을 시작하기로 한 것.
“한국에 가보니 너무나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습니다. 민주화를 향한 타오르는 정열을 누구에게서나 느낄 수 있었죠. 어서 그 에너지를 받아와 일본에도 전하자는 생각에 발길이 바빠졌습니다.”
엄밀히 따지자면 낙선운동은 그에게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그는 30년 전 보험회사 사원이던 시절 당시 차기총리후보였던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에 반대하는 비판집회를 혼자서연 경력이 있다.
“돈의 힘으로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은시민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다. 금권정치를 대표하는 인물을 총리로 뽑아서는 안된다”며 시민들에게 호소하다가 다나카 지지자들로부터 돌팔매질까지 받았다. 1984년에는 아예 다나카 전총리의 지역구인 니가타(新潟) 3구로 주소를 옮기고 각 선거집회를 찾아다니면서 본격적으로 반대운동을 벌였다.
다나카 전총리는 후에 록히드사건으로 유죄판결을 받는 등 ‘부패정치인의 대명사’로 떠올랐지만 사쿠라이 대표가 낙선운동을 벌이던 1984년에는 오히려 더 많은 표를 얻으며 당선됐다.
그런 전력과 열정 때문인지 사쿠라이 대표는 총선시민연대를 방문했을 때 “획기적인 시민운동”이라며 10만원을 성금으로 내놓고 성공을 기원했었다.
그 외에도 일본 지방의회 의원과 환경단체 회원 등 10여명이 총선연대를 방문해 연대와 지지를 표명했으며 한국 총선연대 회원 4명이 도쿄(東京)에서 열린 낙선운동 토론회에 초청인사로 참가하기도 했다.
일본 곳곳에서 싹트고 있는 낙선운동은 일본 국민의 정치의식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된 것.
사쿠라이 대표는 “일본 유권자들은 지금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윗사람(정치리더)들의 말만 따라왔다. 정치에 대해 비판의식이 전혀 없고 잘못된 것을 고치려는 움직임도 없었다. 너무나 무책임한 사회였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일본은 유권자 개개인이 주인의식을 갖고 정치에 자기 목소리를 반영하기보다는 정치는 훌륭하고 강한 리더에게 맡기자는 ‘엘리트 민주주의’가 강하게 지배해왔다. 이는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 표현을 인정하지 않는 ‘무라(村)의식(일종의 단체의식)’과 무관하지 않다. 모두 획일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돌출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사고방식이 권리의식을 희박하게 했다는 것.
일본 지식인 사회에서는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아시아 국민들은 물론 일본 국민들까지 고생하게 만든 것은 일본 국민들이 주인의식을 갖지 못한 채 일부 정치리더에게 국가의 운명을 내맡겼기 때문이라는 점을 오래 전부터 지적해왔다. 게다가 최근 정치에 대한 일본 국민의 무력감이 더욱 심화되고 있어 과거와 같은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경계론도 서서히 제기되고 있다.
일본 유권자, 이대로는 안된다
이와 함께 배금주의도 일본인들의 정치적 무관심을 부추기는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다나카정권 이후 일본에는 배금주의가 만연하기 시작, 먹고 사는데 지장만 없으면 정치는 아무래도 좋다는 무관심이 조장되기 시작했다는 것. 또 거품경제 붕괴 이후에는 경제적 무력감이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함께 상승작용을 했다. ‘정치란 누가 해도 똑같은 것’이라는 의식이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정치학자 마스조에 요이치(舛添要一·52·마스조에정치경제연구소장)가 지난해 도쿄도지사 선거에 출마했을 때의 경험담이다. 현 지사인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과 함께 옥외 선거연설을 하고 있는데 지나가는 한 여성이 “무슨 일인데 마스조에씨와 이시하라씨가 나와서 연설을 하느냐”고 묻더라는 것. 지지자들이 도지사 선거유세라며 한표를 부탁했더니 오히려 그 여성은 전혀 몰랐다며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마스조에소장은 “한국인은 누구나 정치에 대한 관심이 높고 모였다 하면 정치 얘기를 하는 ‘정치동물’인 반면 일본인은 정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대신 돈만 생각하는 ‘경제동물’이라는 점이 양국민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말했다.
이와 같은 정치적 무기력과 불신은 아사히신문이 1998년말 미국 일본 영국의 유권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의식조사 결과에서 잘 드러난다.
예를 들면 ‘선거 때 당신의 한 표가 정치를 움직이는 힘이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미국과 영국 유권자들은 각각 63%와 56%가 ‘그렇다’고 응답했으나 일본은 불과 40%의 유권자가 ‘그렇다’고 응답했다.
또 ‘자기 고장에서 뽑힌 국회의원을 신뢰하느냐’는 질문에는 미국이나 영국은 20%와 29%가 ‘신뢰하지 않는다’고 대답한 반면 일본은 43%가 ‘신뢰하지 않는다’고 응답해 극도의 정치불신을 드러냈다. ‘부정을 행하는 정치가가 많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도 미국 유권자의 30%, 영국 유권자의 32%가 그렇다고 응답한 반면 일본은 75%가 그렇다고 응답했다.
이와 같은 무관심과 불신으로 인해 투표율도 계속 떨어지고 있다.
1996년 10월에 치른 중의원선거에서 투표율은 사상 최저인 59.56%를 기록했다. 최근 중의원선거 투표율은 ▲80년 6월 74.57% ▲83년 12월 67.94% ▲86년 7월 71.40% ▲90년 2월 73.31% ▲93년 7월 67.26% 등으로 전반적으로는 조금씩 낮아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지만 50%대로 떨어진 것은 지난번 중의원선거가 처음이다. 특히 연령이 낮을수록 투표율이 급격히 떨어져 앞으로도 정치적 무관심은 더욱 심화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불신 현상에 대해 사쿠라이 대표는 비관하지 않는다.
“낙선운동을 시작할 때만 해도 정치를 포기한 사람이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시민들의 전화를 받아보고 정치에 대한 분노나 개혁의지가 대단하다는 것을 알았지요. 지금까지는 그 분노나 에너지를 분출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을 뿐이지요. 이런 운동을 반복하다보면 유권자들의 주권의식이 강해져 정치를 엄격하게 감시하게 되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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