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6월호

해체되는 공동체, 사라지는 한국어

조선족 민족교육의 현장을 가다

  • 김당 dangk@donga.com

    입력2006-10-10 11: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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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조선족은 이제까지 남·북한 사이에서 교량 구실을 해왔듯이, 앞으로도 남북 통일에 적잖이 기여할 수 있는 ‘민족 자산’이다. 위기에 처한 민족 자산을 보호하고 존중하는 것은 당연한 책무다.》
    중국 길림성(吉林省) 통화(通化)지구 매하구(梅河口)시에 거주하는 이명철씨(58)는 최근 혼인을 앞둔 외동딸(24)과 난생 처음으로 크게 다투었다. 사실 이씨는 딸이 좋은 대학을 마치고 천진(天津)의 국제무역회사에 취직하기까지 단 한 번도 딸에게 큰 소리를 낸 적이 없었다. 딸 또한 학업에서부터 취업까지 한번도 아버지의 기대에 어긋난 적이 없었다. 그러던 딸이 최근 동족(조선족)이 아닌 이민족(한족)과 혼인하겠다 는 ‘폭탄선언’을 한 것이다.

    한족(漢族)에 대한 어떤 편견도 없지만 막상 한족 사위를 얻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이씨는 절대 혼인을 허락할 수 없다고 윽박지르는 한편으로 어르고 달래도 보았다. 그러나 “한족학교를 다녔는데 어떻게 조선족과 결혼하기를 바라느냐”고 항변하는 딸을 설득할 명분이 이씨한테는 없었다. 그것은 이씨가 자초한 결과였다. 알고 보니 사위자리는 딸이 고중(高中: 한국의 고교에 해당) 때부터 사귀어온 남자친구였다. 아버지 욕심에 딸을 조선족학교에 보내지 않고 더 여건이 좋은 한족 학교에 보낸 것이 화근이라면 화근이었다.

    100년이 넘는 조선족의 이주 역사에서 조선족이 동화(同化)되지 않고 중국 소수민족 구성원으로서 ‘조선족 공동체’와 ‘조선족 정체성’을 형성해 온 것은 부락 단위로 모여 사는 수전(水田) 농업(쌀농사)의 전통 속에서 조선어라는 민족언어와 민족교육 및 문화의 동질성을 유지해온 덕분이다. 사실 10여 년 전만 해도 조선족 공동체에서 조선어를 모르거나, 한족 학교를 다니거나, 이민족과 혼인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 ‘흔치 않던 일’이 이제는 ‘흔한 일’이 되었다. 문제는 조선족 사회에서 이런 일들을 앞으로는 더 자주 보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곧 100년 넘게 유지되어온 조선족 민족교육이 뿌리째 흔들리고 그 토대 위의 조선족 공동체가 붕괴되는 것을 의미한다.

    뿌리째 흔들리는 조선족 민족교육

    중국 길림성 남서쪽에 위치한 통화지구는 인근 요령성(遼寧省)과 성계(省界)가 맞닿아 있다. 지구 내에는 통화(通化)시말고도 북쪽의 매하구 시와 남쪽의 북한 땅 만포(滿浦)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집안(集安)시 같은 몇몇 소도시와 여러 현(縣)이 있다. 만주 벌판을 호령하던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혼과 일제 때 간도로 이주한 한(韓: 조선)민족의 뿌리가 면면히 이어져오는 지역이다. 하지만 앞으로 이곳에서 민족혼과 그 뿌리를 찾기는 점점 어려워질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이 나오고 있다. 조선족 민족교육이 무너져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매하구시 민족사무위원회 조선족 관할 조(趙)주임(한족)에 따르면 매하구시에는 현재 시내의 실험(實驗)소학 1개교를 포함해 조선족소학교 24개가 산재한다. 학생 수가 600여 명인 실험소학교는 길림성 내에서도 알아주는 학교다. 조선족인 김(金)교장에 따르면 이 실험소학은 길림성 내에서 연길(延吉) 소학교를 제외하고는 두 번째로 학생 수가 많은 학교다. 1949년 중국 해방 1년 전인 48년에 조선족 학생 60명으로 출발한 이 학교의 교사(校舍)는 95년 정부 지원으로 신축한 것이다. 컴퓨터실에는 조선족 소학교로는 드물게 컴퓨터도 70대나 있다. 특징은 상당수 농촌지역 학생들이 스쿨버스(1대)로 통학한다는 점이다. 통학거리는 버스로 반 시간 이내로 제한돼 있다. 졸업생은 100% 이 지역에서 명문학교로 꼽히는 매하구시 제11중으로 진학한다.

    그러나 실험소학을 제외한 나머지 23개 학교의 경우 다른 농촌지역 학교들과 마찬가지로 학생 수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전체 학생을 통틀어도 한두 학급이 될까말까한 미니학교들이 속출하고 있다. 학생 수의 감소는 그만큼 폐교하거나 통폐합하는 학교가 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서의 조주임은 “시(市)정부는 농촌지역에 산재한 소학교를 시내로 통합해 기숙학교로 운영해나갈 계획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기숙학교가 문제 해결 방법은 아니다. 생활 형편이 어려운 농촌 가정에서는 아이들을 기숙사에 보내려면 부담이 크기 때문에 집 부근의 한족학교에 보내게 된다.

    각각 한국의 중·고교에 해당하는 초중(初中)과 고중(高中)으로 가면 소학보다는 사정이 낫지만 한족중학교에 비교하면 교학·시설 면에서 차이가 크다. 통화시의 경우 조선족학교는 소학교와 초중·고중을 합쳐 21개다. 이 가운데 시내에 있는 조선족 고중은 1개교인데 다른 6개 한족 고중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시설이 나쁘다. 통화시 조선족학교 문(文)교장은 “한족학교에는 다들 있는 컴퓨터를 우리는 돈을 빌리고 학생 돈 걷어서 들여놓았다”고 말했다. 중국 정부가 표방하는 소수민족 우대정책에도 ‘보이지 않는 차별’이 있다는 것이다.

    조선족 소학교의 역피라미드 구조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이란 이를테면 한족학교에는 컴퓨터 교육을 위한 지방정부의 교육예산이 계획대로 배정되는데 조선족학교에는 예산은 잡혀 있지만 배정은 더디게 함으로써 결국 ‘목마른 놈이 우물 파게 하는’ 식이다. 물론 이와 같은 눈에 보이지 않은 차별은 개발 도상에 있는 중국 경제의 전반적인 투자 우선순위와 관련이 있다. 교육은 기업처럼 ‘생산단위’가 아니기 때문에 투자 우선순위에서 밀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교원들이 천직(天職)인 교사직을 버리고 돈을 벌기 위해 학교를 떠나는 것을 나무랄 수 없는 세태다. 한 조선족 학교 여선생이 “서울에 간 적이 있다”고 해 ‘순진하게’도 “교원 연수를 다녀왔냐”고 물으니 이 여교사는 “왜요? 교원 공작(工作)을 하다가 돈 벌러 산업연수생으로 서울에 갔는데 공장에서 건강이 나빠져 다시 돌아와 복직했어요”라고 대답한다.

    아무래도 소도시에 비해 현(縣) 지역으로 가면 사태는 더 심각하다. 휘남조중(朝中: 조선족 중학교) 최영철 교장에 따르면 휘남현(輝南縣) 관내 16개 소학교 학생 수는 연 20%씩이나 감소하고 있다. 조양진(朝陽鎭)은 통화지구 휘남현의 현 소재지로 한국으로 치면 읍 단위에 해당하는 소도시다. 조선족 인구는 1만6800명 정도. 그러나 읍내에서 유일한 조선족소학교에는 교원과 학생만 있을 뿐 교사(校舍)가 없다. 이 학교 학생들은 현재 인근 한족소학교에 세 들어 있다. 그 사유는 이렇다.

    몇 해 전에 이 지역을 휩쓴 홍수로 학교 건물이 물에 잠겨 붕괴될 위험에 처하자 읍내 조선족 유지들을 중심으로 뜻을 모아 빚을 내서라도 교사를 신축하기로 했다. 문제는 돈이었다. 그런데 우연찮게 재미 한인교회들의 연합선교단체인 만나선교회(회장 이학권 목사·252쪽 관련 기사 참조)와 연(緣)이 닿아 이 단체의 지원으로 현재 교사를 신축하고 있다. 그러느라 학생들이 한족학교에 세 들어 있는 것이다.

    번듯한 한족학교 한 켠의 낡은 교실에서 곁방살이를 하는 조선족 학생들은 겉보기에도 초라했다. 활기 넘치는 한족 학생들에 견주어 아이들도 기운이 빠져 있는 듯 보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저학년의 경우 한 학년의 학생 수가 10명도 안 되는 것이었다. 고학년의 경우 학생 수가 20명이 넘었지만 1∼2학년은 7∼8명에 불과했다. 그러니 1학년에서 6학년까지를 모두 모아도 한두 학급을 채우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저학년으로 내려갈수록 학생 수가 적어지는 조선족 소학교의 역(逆)피라미드형 구조는 조선족이 집단 거주하는 이른바 조선족 작거(作居) 지구가 산재한 동북(東北) 3성(省), 즉 길림·요령(遼寧)·흑룡강(黑龍江)성의 다른 학교도 마찬가지다.

    최근 재외동포재단(이사장 김봉규)이 공개한 중국 현지 실태조사 결과를 보아도 사정은 비슷하다. 중국과 러시아 국경지역에 위치한 시골 마을인 흑룡강성(黑龍江省) 목단강(牧丹江)지구 동녕현(東寧縣) 삼차구진을 중심으로 조사한 것인데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기차를 타면 이곳을 거쳐 흑룡강성 성도(省都)인 하얼빈(哈爾濱)으로 이어진다. 안중근(安重根)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 전 이곳 동녕현에서 군사훈련을 했다는 얘기가 전해오고 있다. 또 여기서 멀지 않은 목단강 해림(海林)시에는 김좌진 장군이 세운 고령자(高嶺子) 소학교가 지금도 남아 있다. 만주 일대가 다 그렇듯이 이곳 또한 통화지구와 마찬가지로 19세기 말∼20세기 초 항일 독립운동의 현장이다.

    이 지역의 조선족 민족교육 실태조사에 따르면 삼차구진에는 모두 5개의 조선족 소학교가 있다. 삼차구소학교와 장정·하북·동방홍·오성소학교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 소학교들 모두가 학생 부족으로 폐교 위기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삼차구소학교는 지금 학생 수가 323명으로 줄어들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600∼700명에 달하던 학교였다. 다른 학교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학생 수를 보면 장정소학교 17명, 하북 79명, 오성 90명, 동방홍 48명 등이다.

    쓰러져가는 민족교육을 보다 못한 삼차구진 주민들은 지난해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주민들은 5개로 흩어진 조선족소학교 학생을 모두 모아 통합 소학교를 만들고, 최신 교사와 학습 기자재를 구비해 경쟁력 있는 소학교로 키우자는 데 합의했다. 4층짜리 교사를 짓는 데 필요한 돈은 인민폐 260만 위안(元·약 3억4000만원) 정도. 시골에서 이런 큰돈을 모으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삼차구 주민들은 지난해 10월부터 눈물겨운 모금운동을 시작했다. 월급이 500∼1000위안에 불과한 공무원들도 직위에 따라 자기 월급보다 많은 돈을 냈다. 주민들은 한 사람당 60위안씩을 내기로 하고, 한 톨의 쌀이라도 더 팔아 모금운동에 참여했다. 아이들도 코 묻은 용돈을 털었고, 주변 한족들도 힘을 보탰다. 여기에다 촌(村) 예산과 현(縣)정부의 지원, 성(省) 교육예산의 지원 등을 합쳐 주민들이 모은 돈은 130만 위안. 시골에서 이 정도의 돈을 모은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문제는 올 8월이면 기존 학교를 모두 폐교하고 신축교사로 들어가야 하는데 예산 부족으로 공사 진척이 느리다는 점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재관(高在觀) 삼차구진 진장(鎭長)과 김동철(金東哲) 목단강시 교육위 주임은 지난해 11월 북경(北京)의 국무원 민족사무위원회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지만 “조선족에게만 특혜를 줄 수는 없다”는 답변을 들어야 했다. 삼차구 주민들은 올 봄 다시 한 번 허리띠를 졸라매고, 2차 모금운동에 들어갔다.

    같은 지역의 한족학교는 학생 수가 그대로 유지되는 데 비해, 유독 조선족 소학교만이 학생수가 줄어드는 원인은 무엇일까. 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면 원인은 크게 세 가지다. 하나는 농촌에 거주하는 조선족들이 도시나 해외로 떠나기 때문이고, 또 다른 원인은 조선족들의 출생률이 낮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 번째 이유로는 개혁개방 이후 팽배해진 중국 사회의 배금주의 풍토와 조선족 사회의 상대적인 소득 격차를 꼽을 수 있다.

    실태 파악을 위해 휘남현 및 매하구시 지방정부와 민족사무위원회 관계자들의 협조로 관내 몇몇 학교를 둘러보고 나서 소학교와 초중 및 고중 교장 7명을 조양진 휘남빈관(輝南賓館) 회의실에 초청해 조선족 민족교육의 실태와 대책에 대해 들어보았다. 교육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일부 옮기면 다음과 같다(중국 정부 소수민족 정책에 비판적인 일부 교장의 발언 등을 고려해 이들을 익명으로 처리했다).

    이농현상과 낮은 출생률이 근본 원인

    “한족과 조선족 사이의 문화수준 차이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교육제도의 측면에서 그 원인을 보면, 우선 조선족 학생은 한족보다 유치원부터 고중 과정까지 1개 과목(조선어문)을 더 수업해야 한다. 이를 시간으로 따지면 한족보다 1년을 더 배우는 셈이다. 교원 자질 문제도 있다. 자질이 우수한 대학 졸업자(조선족)들이 수입이 높은 일본과 한국 등 해외나 본토의 임해(臨海) 지역으로 진출해 교원 수준이 저하돼 있다. 중국 공산당과 정부의 민족정책에도 문제가 있다. 한족에 비해 보이지 않는 차별이 있다. 그래서 조선족들 가운데 아이를 한족학교에 보내는 가정이 늘고 있다.”(이교장·매하구시)

    “주은래(朱恩來) 총리 시절에 중국 공산당에서 조선족 어문은 북조선(북한) 어문을 따르라는 지시를 했다. 그래서 조선족 어문은 평양말과 비슷하고 서울말과 차이가 크다. 조선족 소학·중학교의 조선어문 교원 합격자는 평양어 중심의 어문을 수학했고 영어를 모르기 때문에 외래어가 많은 서울말을 잘 모른다. 거기다 교원 대우가 전반적으로 저하되어 있기 때문에 조선어 교원을 확보하기가 곤란하다. 그래서 조선어를 배운 한족 교원들이 조선족학교에 들어와 있다. 특히 영어나 컴퓨터 과목의 조선족 교원이 부족하다.”(문교장·통화시)

    “예전에는 조선족 교육수준이 한족보다 우월했다. 지난 60년대 주은래 총리는 ‘56개 민족 가운데 조선족 문화수준이 최고’라고 말했다. 지금은 뒤떨어졌다. 그 원인은 우선 교원 대우 저하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조선어문 교원은 찾기가 어렵다. 연변대 조선족 졸업생들은 교원보다는 연해(沿海) 지구 한국기업을 선호한다. 영어 교원도 없다. 개혁개방 이후 영어가 중요해졌지만 조선족의 경우 중국어와 조선어 2개를 배워야 해 한족들에 비해 영어 배우기가 어렵다. 우리 학교 영어 교원 8명 가운데 1명만 조선족이고 나머지는 한족 교원이다.”(김교장·유화현)

    “우리 학교 대학 진학률은 75%가 넘는다. 진학률이 높아야 학부모들이 아이들을 조선족학교에 보내지, 낮으면 한족학교로 보낼 것이다. 예전에 도 제2중이 진학률이 낮자 학부모들이 학생들을 한족학교인 5중으로 옮겼다. 그러다 보니 한족학교 우수생 중에는 조선족이 많다. 그러나 한족학교에서는 조선어문 과목을 안 가르치기 때문에 이 아이들은 조선어를 잘 모른다. 우리 학교도 앞으로 수년내 어려움에 봉착할 것이다. 이번 학기 3월 초 고중 3학년 학생 가운데 21명이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중 절반은 학업 저하로 대학 진학이 불가능해진 탓이고 나머지 절반은 가계가 곤란해 대학에 진학할 형편이 안 되기 때문에 그만둔 것이다.”(방교장·매하구시)

    “대학 졸업자들이 외국기업을 선호하는 현상은 중국에서도 논란거리다. 조선족도 돈벌이만 찾지 말고 연구·문화기관에 많이 진출해야 한다. 또 우리 조선족 학생들은 대학 진학률은 높지만 실력이나 성취도는 낮게 평가받고 있다. 실제 능력이 떨어지면 졸업해도 출로가 없다. 우리 민족도 대학 진학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직업·전문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림교장·통화시)

    “재외동포의 지위는 모국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한국과 조선(북한)이 경제 면에서 발전하면 중국 내 조선족의 지위도 높아진다. 한국이 발전했기에 조선족도 경제와 기타 방면에서 지위가 높아지는 것이다. 따라서 현실적인 방안 중 하나는 한국의 사립학교들과 자매결연을 하는 것이다. 또 민족 발전을 위해서는 교육·문화의 발전이 중요하다. 그중에서 민족언어가 중심이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조선어문 출판물 수요가 적고 교재 비용이 높아 민족 출판물의 제한이 크다. 따라서 한국에서 ‘조선족학교 도서 보내기 운동’을 전개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된다.” (최교장·휘남현)

    교육 관계자들도 인정하고 있지만 조선족 동포 가운데 젊은 사람들이 대도시로 나가는 것은 이미 막을 수 없는 추세가 되어버렸다. 현재의 중국 조선족 공동체는 지난 70년대 산업화와 함께 불어닥친 급격한 이농현상으로 아이 울음소리를 들을 수 없던 한국의 농촌을 시공간(時空間) 을 거슬러 그대로 옮겨다 놓은 느낌이다. 북경과 상해(上海) 천진(天津) 대련(大連) 청도(靑島) 등 대도시에는 고향을 떠나온 조선족 남녀가 넘친다. 그중에서 대학을 나오고 능력 있는 인재들은 한국의 대기업이나 무역회사 등에서 일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대부분 가라오케나 술집·식당·사우나·안마소 등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다.

    황유복 교수(黃有福·북경 중앙민족대학 민족학과·256쪽 관련 기사 참조)는 오래 전부터 조선족 이민사와 민족교육 문제를 연구해온 대표적 권위자다. 황교수에 따르면 현재의 조선족 민족교육의 위기는 80년대 개혁개방 이후 특히 92년 한·중 수교 이후 경험한 미증유의 사회 변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황교수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문화혁명 이전까지 대학교육과 직업 분배(정부의 직장 배정)를 통해 대도시로 진출한 조선족 인구는 35%나 된다. 황교수의 얘기를 들어보자.

    “조선족은 56개 민족이 사는 다민족 사회인 중국에서 문화·교육·예술·위생·생활의 질에서 가장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발전해왔다. 특히 남다른 교육열을 가진 조선족 사회는 교육을 통한 발전으로 35% 정도의 인구가 문혁 전까지 농촌에서 도시로 진출했다. 대학을 졸업하면 직업 분배를 통해 대부분 도시에 취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도시 진출은 서서히 이뤄졌기 때문에 이들은 농촌 전통사회의 모델을 그대로 유지해왔다. 즉 이들은 농촌에서 전통 가정의 문화교육을 받고 자기민족의 언어와 문화를 익히며 고중까지 졸업한 상태에서 도시로 진출했고, 또 이미 도시에 진출한 조선족 남녀끼리 만나 가정을 이루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농촌에 있는 부모들과 유대관계를 유지하면서 민족문화를 발전시켜왔다.

    그러나 개혁개방 이후, 특히 한·중 수교 이후 조선족 사회는 ‘농업민족에서 산업민족으로’의 변화 혹은 ‘농업민족에서 비농업민족으로’의 발전 이라는 미증유의 사회 변화를 경험하면서 농촌이 급격히 붕괴되고 농촌의 부모와 도시의 자식들을 잇는 유대관계도 깨져버렸다. 19세기 말부터 조선족 이민들과 그 후손들이 살아온 농촌이 붕괴했다는 것은 조선족이 원래 갖고 있던 ‘민족의 문화영토’를 상실하고 대도시로 흘러들어가 흩어져버리는 과정을 의미한다. 한반도에서는 남한이든 북한이든 단일민족 사회지만 중국은 56개 민족 13억에 육박하는 인구가 거주하는 다민족 국가다(이 가운데 한족을 제외한 소수민족은 1억 명이 채 안 되는 9000여 만명으로 추산된다). 그런 사회에서 200만명도 안 되는 조선족들이 농촌 공동체에서 도시로 흩어지는 것은 바다에 뿌려진 모래알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로 인해 가장 먼저 무너지는 것이 바로 그동안 조선족이 누려온 교육에서의 우위다. 예전에는 조선족공동체마다 조선족 소학교와 초중·고중 까지 있어서 대학 진학 전까지 민족언어와 문화를 배웠지만 이제는 학생이 없어 학교 문을 닫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흑룡강성을 대상으로 한 황교수의 실태조사에 따르면, 조선족소학교는 90년 382개에서 97년 현재 51개로 80%나 감소했다. 또 중학교는 90년 77개교에서 역시 15개교만 남고 다 폐교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해서 부모를 따라 도시로 진출한 아이들의 교육환경이 더 좋은 것도 아니다. 만주지역의 큰 도시에는 조선족학교들이 그대로 있지만 그 수용 비율은 10% 정도밖에 안 된다. 그러면 나머지 90%는 한족학교에 갈 수밖에 없고 이들은 자연히 중국화라는 동화과정을 겪게 된다. 황교수에 따르면, 북경의 경우 90년에 7000명쯤이던 조선족 인구가 현재는 5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농촌에서 상경한 이들의 자녀들은 대부분 농촌의 민족학교를 다니다 대도시의 한족학교를 다니는 급격한 변화(동화)를 겪게 된다.

    민족교육을 무너뜨리고 동화를 부추기는 둘째 원인으로 황교수는 한·중 수교 이후 급격히 늘어난 조선족과 한국민의 교섭(교류)을 꼽는다. 중국의 개혁개방 물결을 타고 가장 으뜸가는 교육·문화 수준 그리고 삶의 질을 누려온 조선족에게 한·중 수교와 교섭은 좀더 새로운 환경을 창조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조선족들은 한국과 교섭하며 큰돈을 얻는 대신에 종래의 가치관을 잃어야 했다.

    특히 자본주의 병폐인 한탕주의와 물질 만능주의는 조선족 사회를 병들게 했다. 농촌에서 1년 동안 뼈 빠지게 일해 번 소득이 한국에 가서 일해 번 수입의 10분의 1도 안 될 때, 한국에 와본 당사자건 그것을 부러워하는 주위 사람들이건 일이 손에 안 잡히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 이다. 물론 상당수 조선족은 한국에서 번 돈으로 식당이나 가게를 차리거나 사업체를 벌이기도 하지만 흥청망청 탕진하는 사례도 허다하다.

    한·중 수교 이후 관광·사업차 중국을 방문하는 한국인이 크게 늘어나는 것에 비례해 대도시에서 한국인을 상대하는 업종에 종사하는 조선족의 숫자도 늘어났다. 대학 졸업장이나 변변한 자격증 없이 대도시로 진출한 젊은이들이 갈 데는 대부분 유흥업소다. 한국 경제가 IMF(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체제에 들어가기 이전만 해도, 북경 유흥업소의 80% 이상을 조선족이 운영했다고 한다(IMF 체제 이후에는 상당수 유흥업소의 운영권이 한족에게 넘어갔다). 북경에서만도 퇴폐 유흥업소에서 몸을 파는 조선족 처녀는 7000명이 넘고, 전국적으로는 수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조선족 농촌총각들 장가들기는 ‘기적’

    한국이나 중국이나 특별한 기술 없이 몸으로 돈 벌기는 아무래도 여자가 유리하다. 또 ‘코리안 드림’을 품고 몰려온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가 사회 문제가 되는 가운데 조선족 남자보다는 여자들이 한국에 오기가 쉬운 것이 사실이다. 이들이 합법적으로 가장 쉽게 선택할 수 있는 한국행 티켓은 위장이건 진짜건 한국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었다. 90년대 초반에는 한국에서도 장가 못 드는 농촌 노총각 문제가 사회 문제가 되어 연변 조선족 처녀를 신부감으로 ‘수입’하는 것이 자연스레 논의되었다.

    한 통계에 따르면, 위장결혼이건 합법결혼이건 한국으로 시집온 조선족 여자의 수는 ▲93년 1463명 ▲94년 1995명 ▲95년 7693명으로 늘다가 ▲96년부터는 1만명을 넘어섰다. 현재 한국인과 결혼한 조선족 여자는 7만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그런데 한 조사에 따르면 결혼 적령기인 20∼30세 조선족 여성은 20만명으로 추계되고 있다. 그 가운데 7만명이 한국으로 ‘시집’왔다는 것은 중국에서 아들딸 낳아 조선족 공동체를 유지해야 할 조선족 여성 3명 중 1명이 한국에 와 있다는 말이다. 또 중국에 남아 있는 조선족 여성의 상당수는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대도시의 유흥업소에서 일하거나 한국인 현지처로 생활하고 있다.

    이런 형편에 돈벌이도 시원찮고 ‘별볼 일 없는’ 조선족 농촌 총각이 장가드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조선족 인구(46만명) 대다수가 농촌에 거주하는 흑룡강성의 경우, 30세가 넘어도 장가를 못든 노총각의 수가 20∼30명씩 되는 조선족 부락(村)이 적지 않아 성(省) 전체의 30세 이상 노총각 수는 1만여 명이나 된다. 처녀가 애를 배도 할 말이 있다지만 도무지 여자 구경을 못 하는 노총각들이 ‘뽕’을 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민족교육과 공동체의 위기를 부채질하는 중요한 요인인 조선족의 출생률 저하는 이런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이로 인해 중국 조선족 인구는 5년 전부터 급강하하고 있다. 그 원인은 물론 조선족 젊은이들이 고향을 등지고 한국이나 대도시로 떠나 가임(可妊) 연령 인구가 줄어드는 것이 그 첫째이고, 둘째는 조선족 동포들 사이에도 자녀를 적게 낳는 풍조가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는 지난 30년 동안 계획생육(計劃生育: 가족계획)을 강력히 시행해왔다. 그 덕분에 지난 10년간 중국의 출산율은 2% 이하를 유지해 왔다. 이는 중국 인구가 더 이상 급증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중국 정부의 개혁개방 정책과 인민들의 경제 중시 풍조의 영향으로, 중국 서남 지방 등 일부를 제외하고는 정부에서 아이를 둘씩 낳으라고 장려해도 하나 이상은 안 낳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문제는 조선족 사회의 경우 이런 경향이 더 짙다는 점이다.

    산아제한을 강제하는 중국에서는 정부가 마을마다 1년에 낳을 수 있는 아이의 수를 지정해준다. 예를 들어 한족 마을에서는 금년에 50명을 낳으라고 하면 거의 60~70명을 낳고 있는데, 조선족 마을에서는 정책적으로 50명을 낳으라고 하는데도 한 명도 낳지 못한다. 농촌에는 아이를 낳을 여자들이 없기 때문이다. 일부 학자들은 조선족 인구가 이대로 갈 경우 10여년 후에는 그 절반으로 줄어들 것으로 보고 있다.

    조선족 입시교육의 병폐도 한몫

    민족교육의 위기를 초래한 데는 한국과 비슷하게 대학입시 위주의 교육을 하는 조선족 교육의 병폐도 한몫하고 있다. 대개의 조선족 학부모들 은 자기 자식이 직업학교를 선택하면 자기 낯이 깎이는 것으로 간주한다. 조선족 부모들은 자기 자식이 학업에 취미가 없고 소질이 없어 대학에 갈 수 없는데도 대학에 못 가면 시골에서 농사를 짓더라도 일단 고중에 가서 대학시험에 응시해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족에 비해 특별한 기술이 없는 조선족 젊은이들은 중국에서 취직하기가 그만큼 어려워지는 것이다. 황유복 교수의 지적이다.

    “중국에서 가장 큰 조선족 노무시장인 심양(瀋陽)시 서탑 노력시장을 조사한 적이 있다. 구직을 위해 거기 나온 중국인 젊은이들은 대개 한 번 나오면 거의 반나절 만에 취직이 된다. 하다못해 주방장 자격이나 운전면허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선족 청년들에게 어떤 기술이 있냐고 물어보면 기껏해야 고중 졸업장밖에는 가진 것이 없다. 여자들은 특별한 기술이 없어도 도시에 나오면 취직이 되지만 남자들은 여러 번 노무시장에 나와도 취직이 어렵다. 결국 시골에 눌러앉은 청년들은 또래 여자들이 없기 때문에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술만 퍼마시거나 노름에 빠지게 된다. 도시로 흘러 들어온 청년들은 깡패조직을 만들어 대부분 조선족이 운영하는 유흥업소를 장악하기 위해 각축을 벌이고 있다. 동족에 기생하는 짓이며 그 과정에 피해를 보는 한국인도 상당수 있다.”

    개혁개방 초기만 해도 조선족은 중국의 56개 민족 중에 소득수준이 최상위에 속했다. 개혁개방 초기에는 식료품이나 김치장사로 성공하는 사례가 많았다. 현재도 연변의 김치 전문 생산업체인 코리아식품공사에서 생산하는 조선족김치는 북경·상해 등 대도시뿐만 아니라 일본에까지 수출하는 인기 품목이다. 일부 성공한 사업가들은 산업자본으로 변신하기도 했다. 그러나 근래 조선족 소득수준은 최하위다.

    사실 앞서의 길림성 통화지구 및 흑룡강성 삼차구진의 사례는 중국 내 200만 조선족 동포들이 겪고 있는 총체적 위기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조선족 사회가 겪고 있는 위기는 정체성의 위기에서부터 조선족 사회의 해체 위기, 민족교육과 민족언어·문화의 상실 위기, 민족경제의 위기 등이 겹쳐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위기와 관련 현재 조선족 지성인 사회에서는 ‘우리 힘으로 이 문제를 풀어보자’는 것이 가장 큰 현안으로 부각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 힘’은 중국 정부나 한국의 지원이 아닌 ‘조선족의 힘’을 지칭한다.

    북경 중앙민족대학 한국문화연구소와 북경 한국어학교는 이런 인식에서 94년부터 해마다 조선족 관련 학술회의를 공동 개최해오고 있다. 동북 3성과 전국 대도시 교육 관계자와 학자 그리고 조선족 민족지도자들이 대거 참여해온 이 세미나가 그 동안 다룬 주제는 조선족 문제의 핵심을 담고 있다. 역대 학술회의 주제를 열거하면 ▲도시 거주 조선족 청소년들의 민족언어 상실과 그 대책(94∼95년 12월) ▲현시기 조선족의 문제점과 그 출로(97년 1월) ▲조선족 사회의 문제점과 우리의 대책(97년 12월) ▲조선족 경제의 문제점과 우리의 대책(98년 12월) 등이다.

    그리고 올 1월 15∼16일 중국 북경중앙민족대학 회의실에서 열린 제6차 학술회의 주제는 ‘조선족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한 민족교육’이었다. 총체적 위기에 처해 있는 조선족의 활로를 모색하기 위한 이 세미나에는 연변 조선족자치주뿐 아니라 흑룡강성·길림성·요령성 등 동북 3성의 조선족 지도자들이 대거 모였다.

    특히 조선족 출신으로 인민해방군 최고위 계급인 상장에까지 오른 중국 소수민족의 영웅 조남기(趙南起·74) 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政協) 전국위원회 부주석은 올해도 참석해 민족교육 문제에 깊은 관심을 표했다. 최근 62년 만에 고향인 한국을 방문해 화제가 된 조남기 부주석은 건강이 좋지 않아 한번 격려서한을 보낸 때를 제외하곤 해마다 참석했다.

    이번 세미나에서도 각 지역 조선족이 처한 현황이 적나라하게 소개됐다. 예를 들어 흑룡강성의 경우 성 전체에 조선족 인구는 46만명에 불과하지만, 그나마 3분의 1이 한국으로 가버렸다는 것이다. 또 3분의 1은 도시로 빠져나갔다. 시골에는 노인들만 남아 고향을 지키고 있다고 했다. 조선족 사회가 공중 분해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그러나 이번 학술회의에서는 인구이동에 의한 전통 조선족 사회의 해체현상에 대해서 이견(異見)이 제기돼 관심을 끌었다. 대체로 그 동안은 젊은 남녀들이 고향을 떠나 도시로 유입되는 현상에 대해 조선족 사회의 기반 붕괴로 보는 시각이 강했다. 2년 전에 펴낸 ‘21세기 조선족 방략연구’라는 책에서는 조선족 학자들은 연변 조선족자치구와 같은 민족의 지리적 기반을 상실해서는 안 된다며 민족의 터전을 지키자고 호소했다.

    한 지역에서 소수민족의 비율이 일정 정도(30%) 이하로 떨어지면 자치주의 지위를 잃게 된다. 연변 조선족자치주는 이 비율의 경계선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이와 같은 주장은 상당한 호소력을 지녀왔다. 그러나 이번 회의에서는 조선족들이 농촌을 떠나 대도시로 이동하는 것은 사회발전의 과정이라는 견해가 제시돼, 많은 학자들의 공감을 얻었다. 이날 공감을 얻은 우철희(요령성 조선족경제문화 교류협회 상무부회장)씨 논문의 요점은 이런 것이다.

    “재래의 중국 조선족 분포는 난민들이 배를 채우기 위한 우리 민족의 역사가 남겨 놓은 분포였다. 오늘 시장경제의 대변혁 시기에 우리는 역사적인 분포구조를 개변(改變)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우리 민족의 생존과 발전에 직결되는 문제다. 시장경제와 더불어 나타나는 인구 유동은 그 어떤 힘으로도 막을 수 없다. 우리 민족의 이농현상은 역사의 필연적 순리이기 때문에 그것을 막으려는 시도 자체가 무의미하며 불가능하다. 연변에서는 연변조선족 인구의 감소를 아주 큰 문제로 보는데 사실 이는 발전·진보라고 봐야 한다. 200만 중국 조선족 중 80만명이 연변(자치주)에 살고 있는데 가령 10만명이 심양으로, 10만명이 대련으로, 20만명이 북경으로, 또 다른 20만명이 기타 연해도시와 남방도시로 진출한다면 우리 조선족은 더 빨리 발전할 것이다. 우리 민족도 세계 각지에 분산돼 살고 있는 유대인들처럼 대분산(大分散) 소집거(小集居)의 인구 분포구조를 새롭게 형성해야 한다.”

    조선족들의 이농을 막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모여드는 대도시 지역에 조선족 사회를 새롭게 구축하고, 그들의 민족교육 여건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바람직한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즉 북경이나 천진 상해 청도 대련 등지에 조선족 커뮤니티(공동체)를 만들고, 그들이 민족의 뿌리를 잃지 않도록 조선족학교를 세우는 것이 사회 변화에 적응하는 올바른 방향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농현상으로 조선족 농촌이 비어 가는 반면에 연해지구, 즉 청도 연태 위해 대련 등지에는 한국기업의 대중국 진출과 더불어 새로운 조선족 집거지구가 형성되고 있다.

    언어와 기술교육의 확대라는 두 축

    조선족의 민족교육과 관련, 중국의 조선족 사회에서는 몇 년 새 크게 두 가지 새로운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 두 시도는 모두 중앙민족대학 황유복 교수가 주도하고 있다.

    하나는 언어교육 기관을 확대하는 것이다. 대도시로 나온 조선족 자녀들이 대부분 현지 한족학교를 다니기 때문에 조선어(한글)를 잊어버리는 것을 막기 위해 주말 한글학교가 북경과 심양(瀋陽) 장춘(長春) 하얼빈(哈爾濱) 목단강(牧丹江) 길림(吉林) 단동(丹東) 석가장(石家莊) 위해(威海) 해남도(海南島) 내몽고(內蒙古) 등지에 세워졌다. 이 주말 한글학교들은 교육비를 스스로 부담해야 하기 때문에 교재와 학습 기자재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북경 한글학교 설립자이자 교장인 황유복 교수는 “한국에서 쓰고 남은 교재나 책을 보내주면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며 이 운동에 대한 지원을 호소하고 있다.

    또 하나의 시도는 ‘기술교육’이다. 역시 새로운 이 민족교육 운동을 주도하는 황교수는 “조선족이 중국사회에서 정당한 대우를 받는 길은 기술계통의 전문가가 되는 것”이라며 “북경 등 대도시에 기술학교를 세워, 도시에서 제대로 직업을 갖지 못한 젊은이들에게 기술교육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황교수는 이를 위해 북경 오도구(五道口) 지역에 학교 부지를 마련했고, 최근 한국에서 일부 독지가들이 황교수의 운동에 동참해 경제적 지원의 뜻을 밝혔다. 벤처를 지향하는 이 기술전문대학이 설립되면 조선족은 물론 중국 내 소수민족에게 현실성 있는 기술교육과 외국어교육 등이 이루어져, 도시에서 떠도는 젊은이들의 재활교육에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 조선족 문제는 우리 민족의 문제

    중국 내 조선족 문제는 긴 역사의 안목에서 보면 우리 민족의 문제이기도 하다. 다만 현실적으로 이들이 중국 국적을 가진 엄연한 중국인이라는 점에서 접근에 신중성과 전략을 요한다. 그러나 92년 한·중 수교 이후 우리 정부는 조선족 문제에 대한 장기 전략을 마련하지 못했다. 단기적으로는 경제적 지원과 각종 교류가 이루어졌지만, 결과적으로는 한국인과 조선족 사이에 깊은 갈등과 불신의 골이 패고 말았다. 이와 같은 잘못된 관계를 청산하고 건설적인 관계를 정립하기 위해서는 중국 조선족 문제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과, 미래를 향한 장기 전략이 마련돼야 한다.

    특히 중국의 조선족은 이제까지 남·북한 사이에서 교량 노릇을 해왔듯이, 앞으로도 남북 통일에 적잖이 기여할 수 있는 ‘민족 자산’이다. 위기에 처한 민족 자산을 보호하고 존중하는 것은 당연한 책무다. 이를테면 길림성 통화지구의 중학교와 흑룡강성 동녕현 삼차구진의 소학교 학생들이 한국의 어느 중학교나 초등학교와 자매결연을 해, 학생과 교사들이 양쪽을 오가며 활발히 교류한다면 그것이 바로 ‘우호적이고 건설적인 관계’를 쌓는 기초가 될 것이다. 북경 한글학교를 포함한 11개 한글학교에 대한 지원도 마찬가지다.

    현재 미국의 1000여 개 주말 한글학교를 포함해 전세계에 퍼져 있는 재외국민·동포 대상의 2500개 한글학교에 지원하는 정부 예산은 연간 100억원 규모다. 여기에는 무료로 제공하는 한국어 교재 등이 포함돼 있다. 그런데 재외동포 지원법에서도 제외된 중국동포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운영하는 한글학교에 대해서는 정부 예산이 단 한푼도 배정되지 않고 있는 제도상의 맹점은 개선되어야 마땅하다. 이러한 제도상의 허점과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재외 민족교육의 수요공급 원리에도 어긋날 뿐 아니라 경제 정의에도 반하는 것이다. 모국에서의 이러한 세심한 배려와 조선족 사회에서의 ‘코리안 드림’을 깨려는 자구노력이 결합될 때 비로소 한국인과 조선족의 진정한 동반자적 관계가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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