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6월호

썰렁한 개그, 이상한 유머가 유행하는 이유

신세대 유머코드 지배자 3인이 말하는 요즘 개그

  • 하태원 scooop@donga.com

    입력2006-10-10 11: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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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멧돼지를 가지고 삼행시를 만들라고 한다면? 신세대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멧: 멧돼지야~ 돼: 돼지가 너보고 뚱뚱하데~ 지: 지느은~. 아기곰 푸우는 이행시로 어떻게 탄생할까? 푸: 푸우야 넌 커서 뭐가 될래? 우: 우루~사. 우동은? 우: 우―우~ 동: (선)동렬이도 없고, (이)종범이도 가고 (프로야구 해태 타이거즈의 김응룡 감독의 어투로 말해야 실감이 난다).

    아마도 외계인을 가지고 신세대가 짓는 삼행시를 들으면 나이가 지긋한 중년 세대는 화를 낼지도 모른다. 외: 외계인이 내려온다 계: 계속 내려온다 인: 인제 올라간다. 요즘 아이들 사이에 유행하는 삼행시다. 누가 시작했는지는 모른다. 정답도 없어서 아무렇게나 지으면 다 정답이 된다. 왜 재미있느냐고 물으면 그런 것 묻지 말라고 한다. 그냥 재미있지 않으냐는 것이다.

    방송가와 PC통신을 주름잡고 있는 이런 웃음은 N세대들에게는 더없이 유쾌하고 신바람나는 현상일지 몰라도 기성세대가 보면 이상하고 썰렁하다. 피카추는 피: 피카추가 침을 뱉는다 카: 카~ 추: 추~로 삼행시가 된다. 한때 ‘사오정 시리즈’로 한껏 사랑받던 ‘사오정’은 더욱 가관이다. 사: 어? 오: 어? 정: 어? (날아라 슈퍼보드란 프로그램에서 사오정은 가는귀가 먹은 캐릭터로 등장한다).

    이제 갓 서른을 넘겼지만 이 글을 쓰는 기자도 사실은 이런 신세대 유머에 친숙하지 않다. 남들이 웃을 때 웃지 못하는 것에 대한 자격지심일는 지 몰라도 후배들이 재미있다고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면 은근히 짜증스럽기도 하다. 과연 신세대의 ‘유머코드’는 무엇일까? 이런 의문을 품고 최고의 시트콤인 ‘순풍산부인과’의 PD, 이홍렬쇼 김혜수플러스유 등의 토크쇼 담당 작가, 그리고 ‘개그콘서트’의 ‘폭소탄’ 백재현씨를 만났다. 신세대를 사로잡고 있는 웃음의 비밀을 캐내기 위해서다.

    밤(夜)의 말(語)을 지배하는 사람



    작가 김일중씨(32)는 심야 방송시간을 4년여간 지배해온 사람이다. 91년 SBS 작가 공채 1기로 입사해 ‘코미디 전망대’ ‘웃으며 삽시다’ 등에서 코미디 작가로 활동하다가 96년 2월부터 ‘이홍렬쇼’의 작가를 맡은 뒤 단 한 주도 빠지지 않고 계속해서 심야 토크쇼 대본을 쓰고 있다. 현재도 ‘이홍렬쇼’는 물론 SBS의 ‘김혜수 플러스유’ ‘남희석―이휘재의 멋진 만남’의 작가로 맹활약하고 있다. 심야 연예인 토크쇼는 작가 김일중의 손을 거치지 않고는 방송되지 않는다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김일중씨는 자신이 토크쇼 작가로서 확고한 위치를 굳힐 수 있었던 것은 토크쇼에 작가가 왜 필요한지에 대한 확신을 가진 뒤라고 말한다. 토크쇼는 호스트가 질문하고 게스트가 답하는 단순한 형태로 운영되는 듯하지만 그 속에 아주 중요한 작가의 영역이 있음을 발견했다는 것. 김씨는 “최근 토크쇼는 호스트와 게스트의 순발력 있는 대화에서만 웃음을 찾는 것이 아니라 호스트와 게스트가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미리 완벽한 장치를 마련해 두는 경향이 강하다”며 “작가는 바로 토크쇼가 잘 굴러갈 수 있도록 출연자들에게 안전장치를 만들어주는 일을 한다”고 말한다. 즉 프로그램 중간에 차트를 만들어 활용한다거나 녹화가 끝난 뒤 화면 사이사이 재미있는 자막 등을 삽입해 웃음을 제공하는 일을 한다는 것.

    이를 위해 김일중씨는 섭외한 출연진을 사전에 만나 심층 인터뷰를 한다. 겉으로 드러난 화려한 면모는 물론 그 출연진의 눈짓 손짓 발짓 등 세세한 정보를 모두 입력한 뒤 출연자의 매력과 유머감각이 한껏 발휘될 수 있는 시나리오를 구성한다.

    ―요즘 토크쇼에 나오는 연예인들은 심각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것 같던데요.

    “과거 토크쇼가 고달픈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 어렵던 시절에 대한 회고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면 요즈음 토크쇼는 명랑한 분위기, 재치있는 대답 등 부담없고 유쾌한 이야기를 추구합니다. 이홍렬쇼가 대표적인 예인데 절대로 출연한 연예인의 과거사나 골치아픈 이야기를 묻지 않는 것이 철칙입니다.”

    ―그런 원칙을 세우게 된 배경이 있나요?

    “이홍렬쇼나 김혜수 플러스유는 심야에 방영되는 연예인 토크쇼입니다. 하루종일 생활에 찌들고 진지한 고민을 하던 사람들이 밤늦게 텔레비전 을 보면서 또다시 무거운 얘기를 듣고 싶겠어요? 들을 때 즐거우면 됐지 몇 번이고 곱씹으며 고민해야 하는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김씨는 심야토크쇼는 극단적으로 말하면 생산성 ‘0점’인 프로그램일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방송을 보는 사람들에게 잠자기 한 시간 전에 푹 쉬면서 ‘리프레시’할 수 있는 기회를 주면 소기의 성과를 거두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유머의 ‘버전 업’

    ―요즘 신세대의 유머코드는 어떤 것입니까?

    “젊은 사람들은 기발한 순발력에 열광하는 것 같습니다. 웃음거리를 준비해오는 사람보다는 선천적인 감각을 가진 연예인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개그맨 남희석이나 가수 주영훈, 탤런트 최화정 김원희 같은 사람들이 그런 기발한 순발력을 갖춘 사람들입니다.”

    ―4년간 토크쇼 작가를 독점하고 있습니다. 롱런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요즈음 웃음은 공감의 유머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의식이나 경험을 공유하는 사람들에게는 약간의 반전이나 풍자만으로도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홍렬쇼에서 좋은 반응을 얻은 ‘맞아맞아 베스트5’는 가장 대표적인 예입니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툭 꺼내주면 시청자들이 공감한다는 것입니다. 천재가 만든 웃음이 아니라 일반인도 만들어낼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웃음이라는 것이지요. 관객이 자지러지지는 않아도 무릎을 탁 치며 ‘맞아!’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더 건강하고 기억에도 오래 남는 유머지요.”

    유부남들의 성(性)에 대한 거침없는 대화를 무기로 색다른 웃음을 주고 있는 ‘유부클럽’도 공감의 웃음을 추구한다. 김씨는 이런 현상은 웃음과 안도감 그리고 공조의식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에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내가 느끼는 것을 저 사람도 느끼고 있구나 하고 확인하는 데서 오는 안도감이라는 것. 특히 연예인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면 저 사람들도 나와 같은 사람이구나 하는 공조의식을 느끼며 기뻐한다는 분석이다.

    김씨는 10년 전 유머와 현재 유머가 갖는 차이점은 가공된 웃음이냐 가공되지 않은 웃음이냐라고 설명했다. 즉 ‘회장님 회장님’으로 대표되는 과거의 유머가 철저하게 분석되고 다듬어진 가공된 유머였다면 요즘은 있는 그대로 툭 던져 보이는 형식이라는 것. 과거에는 내가 갖지 못한 남의 능력을 보면서 즐거워했지만 이제는 자기와 동질성을 확인하며 웃는다는 말이다.

    이제는 우리나라 신세대의 웃음샘을 쥐락펴락하는 경지에 오른 김씨지만 그도 학창 시절에는 “참새시리즈 같은 것은 누가 만들지?” 하는 의문 을 가지며 코미디 작가를 동경했다. 김씨는 “코미디 작가는 남을 웃길 줄 아는 재주보다는 어떤 소재가 웃기는가를 판별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더더욱 중요하다”고 말한다.

    최근에 들어서는 인터넷이나 PC통신, 광고 등이 유머에 ‘모티브’를 제공하는 경우가 많아 유머의 1차 생산자로서 다소 부담을 덜었다. 단적인 예로 토크쇼의 사회자나 개그맨들의 경우 과거 같으면 “제가 재미난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며 시작했을 것을 요즈음은 “요즘 유행하는 △△ 이야기 아시지요?”라며 화두(話頭)를 던진다는 말이다. 어디서인지는 모르지만 생산된 원자재로 맛있게 밥을 지으면 되는 것이 요즈음 토크쇼의 호스트고 작가고 개그맨이라는 것.

    ―요즘 각광받는 개그를 유형화할 수 있을까요?

    “보는 이에 따라서는 말장난이라고도 하고 뛰어난 순발력이라고도 하지만 남희석류(類)처럼 말의 어감이나 단어에 함축된 의미(connotation) 를 기발하게 활용하는 개그가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받고 있습니다.”

    ―최근 유행하는 3행시나 5행시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을까요?

    “3행시나 5행시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 자체가 신세대 감각과는 동떨어진 것입니다.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의미가 있으면 안 된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지 모릅니다. ‘참치’로 2행시를 지어보라고 하면 ‘참:차아아암, 치:치이이’라고 하는 것이 신세대입니다. 권위주의적인 것을 부정하고 기존 생각을 일격에 뒤집는 것에 희열을 느끼는 것이지요.”

    김일중씨는 요즈음 유머는 누구나 참여해 변종을 만들어내면서 그 행위 자체에서 웃음을 느끼는 것이 두드러진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컴퓨터 로 치면 기존 프로그램에 조금씩 변화를 가해 만드는 ‘버전업’ 또는 ‘업그레이드’의 개념. 웃는 사람도 이해하기가 쉽다. 뿐만 아니라 “나는 이렇게 해석하는데 쟤는 저렇게 해석하네” 하며 신기해하고 즐거워한다. 결국 작가나 개그맨 등은 ‘오리지널리티’를 만들지 못하는 다수를 위해 버전업하고 확대 재생산을 할 수 있는 호환 가능한 ‘웃음의 틀’을 공급하면 된다. 그 이후에는 사람들이 알아서 지지고 볶으면서 즐거워한다.

    엄숙주의와 신세대 유머

    김일중씨 같은 작가가 유머를 생산하는 제조자라면 개그맨 백재현씨(30)는 최일선에서 웃음폭탄을 쏘아대는 ‘대포’다. 김일중씨는 백재현씨에 대해 “동일한 상황을 유머스럽게 표현하는 경우 가장 응용력이 높은 개그맨”이라고 치켜세운 뒤 시청자가 어떤 개그를 원하는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부처님 오신 날인 5월11일 오후 5시 KBS 별관 IBC홀에서 백재현씨를 만났다. 대학로 콘서트의 분위기를 개그적 요소로 승화시켰다는 평가와 함께 최고의 인기프로그램으로 떠오른 개그콘서트의 실질적인 리더이자 아이디어 뱅크인 그는 특유의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나타났다. KBS2 TV ‘슈퍼TV, 일요일은 즐거워’의 인기프로그램인 레슬링 체험 녹화를 막 마치고 오는 길이었다.

    백씨는 개그콘서트의 성공비결에 대해 “신세대 입맛에 맞는 새로운 패턴의 개그를 순발력 있게 보여준 것이 주효한 것 같다”고 말했다. 공포영화를 패러디한 ‘스크림’ 코너의 경우 ‘영어를 쓰면 죽는다’는 나름의 규칙을 정한다. 그리고 한 사람이 “그 팬티, 엄마한테 같다 줘” (펜티엄과 동음)라고 말하면 죽는 것이다.

    ‘△△하면 죽는다’는 규칙만 있으면 얼마든지 여러 가지 방식으로 게임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스포츠 스타의 이름을 말하면 죽는다는 규칙이 있으면 “어이 김서장, 훈제 족발 먹으러 갈까”(서장훈) 하면 죽는다. 연예인 이름을 말하지 말라는 규칙 앞에선 “이번에 내친 김에 수원까지 가보자”(김혜수와 비슷한 발음)로 죽는다.

    어찌 보면 일종의 ‘언어유희’다. 요즘 기준으로 하면 가장 야한 농담은 ‘야하지롱’이고 가장 야한 노래는 ‘야한가요’다. 이런 방식으로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 개그에 도전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개그콘서트 인터넷 홈페이지의 시청자 참여 코너인 ‘도전! 나도 개그작가’에는 5000여 건의 글이 올라와 자기 나름의 유머를 선뵈고 있다.

    백재현씨는 “과거에 유행하던 콩트 중심 개그는 사라진 지 오래”라며 “이제는 유형 싸움”이라고 자신있게 말한다. 그런 면에서 개그콘서트는 ‘시튜에이션 개그’라는 새로운 유형을 만들어내 성공한 케이스라는 것. 단적인 예를 들자면 껌을 씹는 장면으로 웃음을 창출할 경우 과거에는 껌을 우스꽝스럽게 씹어 폭소를 자아냈다면 요즘은 껌을 씹다가 발생하는 상황을 통해 자연스러운 웃음을 유도한다는 것이다.

    백재현씨는 요즘 ‘썰렁한 개그’ ‘이상한 유머’가 각광받는 이유에 대해서 골치아픈 분석을 시도하는 것 자체가 우리 사회의 지나친 ‘엄숙주의’ 라고 말했다. 3행시를 듣고, 지어내며 웃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 자체를 받아들이면 그만이지 그것이 가진 사회적인 의미를 분석하고 기호학적 문제점을 들춰내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라는 것. 굳이 말하자면 일상생활이 톱니바퀴 물리듯 빈틈없이 돌아가다 보니 일탈해보고 싶은 현대인의 심리가 말로 발현된다는 것이 백재현의 분석이다.

    ―개그 콘서트가 추구하는 웃음은 어떤 것입니까?

    “개그콘서트는 건전한 웃음을 주고 교육적인 내용을 담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동물들이 나와 한풀이를 하는 코너에서 지렁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왜 암수가 한몸으로 태어나 화장실에 갈 때 불편한 거야라고. 우리 프로그램을 보는 학생들은 은연중에 환형동물은 자웅동체 라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역사는 꼬인다’ 같은 코너도 기초적인 역사 지식이 없으면 웃을 수 없는 내용이 많습니다. 가령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이 그 내용을 이해 못 하면 형이나 언니에게 물어보면서 고개를 끄덕일 것 아니겠습니까?”

    ―과거의 개그와 현재의 개그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

    “물론 많은 변화가 있지만 근본은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어찌 보면 과거에 다 사용하던 개그지만 현재 상황에 적합한 유형으로 바꿔 놓은 것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최근 네티즌 공모 유머에서 1위 한 내용은 ‘어떤 사람이 화살을 쏴, 사람 머리 위의 사과를 맞히고는 아이앰 윌리암 텔 이라고 했다. 다음 사람도 역시 화살을 쏜 뒤 아이앰 로빈후드라고 말했다. 하지만 세 번째 사람은 사과가 아닌 사람을 맞혔다. 그 사람 왈, 아이앰 쏘리’란 것이었습니다. 이는 과거에 유행하던 학교와 핵교의 차이를 묻는 것과 근본은 다르지 않습니다. 학교는 다니는 것이고 핵교는 댕기는 것이라던 것 말입니다.”

    삼행시만 해도 옛날부터 있던 것을 다른 형식으로 유형화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백재현씨는 어린 시절 가장 재미있게 보았던 개그를 소개해줬다. 어느 레스토랑에서 과일 안주를 받아든 손님이 벌컥 화를 낸다. 내가 언제 과일을 시켰어요. 마른 안주를 시켰지. 그러자 레스토랑 주인은 드라이어를 가지고 와 열심히 과일을 말리며 이렇게 말한다. 왜 이렇게 안 마르지?

    백씨는 “이런 옛날 코미디를 원용한 것이 최근 ‘사바나의 아침’에서 선뵌 개그예요. 사바나에서 신호등을 기다리던 원시인은 빨간 신호가 바뀌지 않아 애를 태웁니다. 이를 보다못한 동료 원시인이 해결책을 제시하지요. ‘도끼를 가지고 와 위협해 봐. 파랗게 질릴 거야.’ 어때요, 우습지 않으세요.”

    ‘순풍산부인과’는 ‘개그콘서트’ 같은 코미디 프로그램이나 ‘이홍렬쇼’ 같은 토크쇼는 아니다. 하지만 어쩌면 앞에 언급한 프로그램보다 훨씬 강하고 질기게 시청자들의 웃음샘을 자극하는 프로그램인지 모른다. 98년 3월 첫 방송을 시작한 SBS의 시트콤 순풍산부인과는 그야말로 순풍에 돛단 듯 순항을 거듭하고 있다.

    급기야 ‘순풍’은 지난 1월 실시한 전국 시청률 조사에서 1주일 내내 같은 시간대에 방송되는 ‘KBS 뉴스9’와 ‘MBC 뉴스데스크’의 시청률을 ‘넉넉한’ 차이로 앞서는 등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다. 평균 30%대의 시청률을 자랑하는 ‘순풍’은 이미 4대 통신에 순풍동호회를 탄생시키는 등 500회를 지난 시점에도 좀처럼 열기가 식을 줄 모르고 지속되고 있다. 어디 그뿐이랴. 미국 동포사회에서도 순풍을 모르면 대화가 안 될 정도다.

    하지만 김병욱(39) PD는 그야말로 날마다 지독한 산고(産苦)를 겪으며 나오는 프로그램이 바로 순풍산부인과라고 주장한다. 그도 그럴 것이 순풍제작진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오후 1시부터 새벽별 볼 때까지 내용을 정하고 대사를 가다듬는 회의를 계속하고 주말에는 오전11시부터 밤새 촬영하는 강행군을 2년 넘게 해오고 있는 것. 결국 김병욱 PD를 비롯한 제작진이 교대로 쓰러져 병원신세를 지기도 했다.

    5월8일 낮 12시. 그날 새벽 4시까지 촬영했다는 김병욱 PD가 졸린 눈을 비비며 약속장소에 나타났다.

    ―순풍도 웃음을 전한다는 면에서는 개그 프로그램이나 토크쇼와 유사하지 않습니까?

    “순풍산부인과가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주는 프로그램인 것은 맞지만 일반적인 코미디 프로그램이나 토크쇼와는 다른 형태의 웃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개그콘서트나 토크쇼는 출연자의 순발력이나 재치에 의존해 웃음을 주는 ‘스탠딩 개그’ 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지만 시트콤은 잘 짜인 각본이 웃음을 준다는 면에서 차이가 큽니다. 남을 웃기려면 철저한 준비가 필요한 것입니다.”

    ―순풍에서는 개개 출연자의 즉흥연기 같은 것을 인정하지 않나요?

    “철저히 배제하고 있습니다. 순간순간 웃길 수도 있지만 절정의 순간을 위해 그것을 참는 것이 시트콤입니다. 그래서 ‘애드립’을 허용하지 않고 개그맨은 가급적 시트콤에 활용하지 않습니다. 일례로 스탠딩 개그의 달인인 이홍렬씨가 5월 초 순풍산부인과에 출연했지만 드라마에는 잘 적응하지 못하더군요. 대사에 복선이 들어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개개인의 순발력이나 애드립이 필요하지 않으니 답답해하더라고요.”

    더 벌어진 세대간 웃음공감대

    96년부터 MBC에서 PD로 활동하다가 SBS로 둥지를 옮긴 김 PD는 이후 ‘좋은 친구들’ ‘LA아리랑’ 등 시트콤을 전문적으로 하고 있다. 시트콤 전문PD를 표방한 김 PD는 순풍 제작 초기 출연진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중견연기자들이 지금까지 닦아온 자신의 연기스타일을 고집하는 데 비해 김PD는 시트콤에 맞는 연기를 주문하면서 연기자들의 몸짓까지 하나하나 교정하려고 했기 때문. 김PD는 당시만 해도 시트콤이란 장르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시기였기 때문에 그와 같은 마찰은 불가피했다고 말한다.

    ―오랜 세월 사람들을 웃겨왔는데 웃기는 작업이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우리나라는 웃음에 대한 냉소주의가 상당히 강합니다. 흔히 ‘썰렁하다’고 말하듯 누가 웃긴다는 것에 대해서도 반감을 가진 경우가 많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외국에서는 일상사를 이야기해도 쉽게 웃어주는 경우가 많지만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아요. ‘너 한번 웃겨봐’ 한 뒤 팔짱을 끼고 바라보는 식이지요.”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코미디 장르가 널리 사랑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기는 하지만 요즘 우리나라의 코미디를 보면 점점 처절해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요. 서세원쇼의 토크박스는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기 위한 몸부림이 어디까지 왔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아주 극단적이고 독한 경험이 아니면 시청자들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경우가 자주 발견됩니다. 오죽하면 출연자들이 이제는 어지간한 얘기를 해서는 주목받지 못할 것이라며 출연을 꺼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겠 습니까? 가벼운 생활 주변의 유머를 듣고 즐기는 분위기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과장된 몸짓에 광대짓을 하는 유머를 보면 당시에는 깔깔대고 웃을지 몰라도 시간이 흐르고 나면 왠지 씁쓸한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이는 건전한 웃음이 아니지요.”

    과장연기에 자극받은 시청자는 더 큰 자극과 과장을 원하게 되고 그걸 따르다보면 유머는 어느덧 서글퍼진다는 것이 김 PD의 확고한 지론. 그는 바보짓과 과장연기는 시트콤을 망치는 지름길이라는 확신으로 무장한 채 ‘순풍’의 촬영에 들어가면 철저한 계산과 치밀한 복선을 깔아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제공한다.

    ―시청자들은 웃음을 수동적으로 공급받는 존재인가요?

    “과거에는 TV를 통해 공급되는 유머가 주류를 이루었지만 이제는 오히려 PC 통신이 더 큰 위력을 발휘하는 것 같습니다. 저도 통신에 자주 들어가 요즘 애들이 무엇을 보고 어떤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워하는지 유심히 살핍니다. 요즘 유머의 경향은 어떤 유머가 어떤 경로로 보급 되는지 모른다는 것이지요. 요즘 뜬다는 3행시, 5행시도 누가 어떻게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부지불식간에 청소년들을 사로잡고 있지 않습니까?”

    ―최근 유머의 경향은 어떻습니까?

    “원래 ‘코미디 패션’은 유행주기가 짧았지만 요즘은 더 심하다는 느낌입니다. 보름에 한 번꼴로 주기가 바뀌는 바람에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또한 웃음의 공감대도 한결 줄어드는 느낌입니다. 예를 들어 80년대 유행했던 ‘참새시리즈’는 아버지와 아들이 다같이 즐기던 것입니다. 하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게 무슨 유머냐’며 화를 내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결국 요즈음 유머는 집단 한정적이고 세대간 공감의 폭도 좁은 것 같습니다.”

    ―시리즈물이 유행하다 보니 그전 유머를 모르면 공감할 수 없는 경우도 많은 것 같습니다.

    “‘만득이 시리즈’가 대표적인 경우지요. 만득이 시리즈가 처음 생길 때부터 웃음을 나눈 사람들에게는 계속되는 시리즈가 배꼽 잡을 정도로 재미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도대체 만득이가 누군데?’라는 질문부터 해야 하니 재미가 없지요. 일종의 부분적인 집단의식이지요.”

    ―순풍산부인과도 처음부터 본 사람은 재미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남들이 웃을 때 ‘저 사람이 왜 저렇게 웃나’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측면이 있지 않습니까?

    “시트콤은 매일 방영되는 한 편이 자기 완결성을 갖는 형태입니다. 하지만 연속되는 드라마이다 보니 극중 등장인물들의 말투나 행동·성격 등은 계속되는 것이지요. 시청자들이 즐거워하는 것은 아마 등장인물들의 독특한 성격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드럽게 웃긴다

    김병욱 PD는 순풍산부인과를 ‘캐릭터’시트콤이라고 설명했다. 그동안 국내에서 만든 시트콤이 엎치락뒤치락하는 소동위주의 스토리 전개 방식인 데 비해 순풍은 등장인물 하나하나의 심리가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동력이라는 의미에서다. 그는 현실에 뿌리박지 못한 캐릭터는 생명력이 없다는 신념을 가지고 이웃집 아저씨 같고 이웃집 아줌마나 오빠 같은 캐릭터를 만들어 냈다.

    다혈질에 조금은 권위적인 원장 오지명, 비굴하고 쪼잔한 인간의 전형 박영규, 귀여운 무식함의 결정체 선우용녀, 힘세고 잔머리 잘 굴리는 미달이 등 누구하나 빠지지 않는 막강 캐릭터다. 하지만 이런 캐릭터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고 방송을 거듭하면서 시청자들의 기호에 따라 성격을 계속 변화시켜 왔다. 선우용녀가 대표적인 경우로 처음에는 깔끔하고 대가 센 여자로 나왔지만 말투나 캐릭터가 어울리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판단, 푼수기가 넘치면서 귀여운 바보의 이미지로 재포장했다는 것.

    ―순풍산부인과가 추구하는 웃음은 어떤 것입니까?

    “순풍의 모토는 사회상이 반영된 자연스러운 유머를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유행하는 유머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바로 우리 옆집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를 소재로 삼기 때문이지요. 코미디는 현실을 과장하는 경우가 많지만 순풍은 가장 현실적인 이야기를 웃음의 소재로 삼습니다.”

    김병욱 PD는 순풍이 추구하는 웃음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 두 가지를 들었다.

    사례1) 박영규는 우연히 고급 승용차 안에서 산통(産痛)을 호소하는 만삭의 여인을 순풍산부인과로 데려간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여인은 국내 굴지의 과자업체 회장의 며느리. 회장은 영규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면서 어떤 일을 하느냐고 물었고 당시 ‘백수’였던 영규는 사실대로 밝힌다. 그러자 그 회장은 ‘당신같이 착한 시민이 직업이 없어서 되겠느냐’며 부하직원을 통해 일자리를 알아보겠다는 말을 한다. 영규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전화통에만 붙어 전화를 기다리지만 사흘이 지나도 감감 무소식. 참다못한 영규는 회사로 전화를 시도하지만 회장님 목소리를 듣기는 하늘에 별따기였다. 결국 천신만고 끝에 통화를 했고 그 회장은 다시 ‘알아보겠다’는 말을 했지만 미온적인 반응. 김병욱 PD는 이번에야 백수를 면하나 보다 하며 기대했던 영규의 막판 절규를 통해 메시지를 전한다. 순풍식 처절한 복수극이다.

    “나 일반시민인데 그 집 과자 맛이 왜 그래. 다시는 그 과자 안 사먹을 거야.”

    사례2) 표인봉의 반항. 여성적이고 소극적인 표간호사로 등장하는 인봉은 오지명이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해 반항을 결심한다. 인봉이 선택한 저항은 과감하기(?) 이를 데 없다. 지명이 설교할 때 지명이 보지 못하는 테이블 아래에서 다리를 약간 꼬고 나서 다른 간호사들에게 마치 엄청난 저항을 한 것처럼 허풍을 떤다. 술자리에서 지명이 술을 단숨에 들이키라고 하면 거의 원샷을 한 뒤 술을 조금 남기는 것이 인봉의 저항방식이다. 술잔을 두 손으로 받으라는 호통을 들으면 두 손을 내민 뒤 한 손을 모호하게 뒤로 걸치고는 나는 한 손으로 받았다고 큰 소리친다.

    김병욱 PD는 일상생활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상식적으로 풀어가면서 소시민들이 가진 웃음샘을 과격하지 않은 방식으로 자극하는 것이 순풍의 웃음비결이라고 설명했다.

    전국 백일장에서 두 번이나 장원을 했고 학창시절 좋아하는 여학생에게 익명의 편지를 보낼 때마다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할 정도로 글재주가 뛰어나다고 자부하는 김PD. 그는 “울음과 웃음은 종이 한 장 차”라며 “내게는 너무도 슬픈 사연이 다른 사람에게는 즐겁고 웃음나는 일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상식과 관습의 벽을 허물어라

    그러면서 들려준 것이 미달이의 짝사랑 이야기. 미달이는 혜교 남자친구에게 관심을 갖는다. 미달이는 혜교 남자친구의 관심을 끌기 위해 혜교방에 들어갔는데 그 순간 혜교가 방귀를 뀐 것. 혜교는 창피한 나머지 미달이에게 ‘혐의’를 뒤집어씌운다.

    미달이는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혜교의 남자친구는 들은 척 만 척. 밤새 눈물을 흘린 미달이는 며칠이 지난 뒤 우연히 길에서 혜교 남자친구와 마주친다. 미달이는 그 당시 방귀사건에 대해 설명하면서 억울하다고 호소하지만 혜교의 남자친구는 건성이다. 짝사랑하는 남자가 사라진 뒤 미달이는 땅바닥에 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김 PD는 이 내용도 누구나 한번은 겪었을 만한 일상사를 재미있게 극화한 것이라고 말한다. 미달이로서는 한없이 억울하고 슬픈 이야기지만 TV를 보는 시청자들은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며 빙그레 웃을 수 있는 소재라는 것.

    김 PD는 “일반인의 심리 기저에 있는, 일종의 잠들어 있는 웃음을 일깨우는 작업을 하는 것이 순풍산부인과를 시작하면서 세운 목표”라며 “이런 웃음의 코드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속적인 웃음일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신세대 유머코드를 알아보기 위해 만난 3명의 ‘유머전문가’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386세대였다. 이들은 유머에 대해서는 자타가 인정하는 최고수 답게 최근 유머의 경향에 대해 나름의 분석을 내놓았다.

    작가 김일중씨는 ‘버전업 할 수 있는 동조의 미학’이라고 풀이했고 개그맨 백재현씨는 ‘어떤 상황을 절묘하게 유형화시키는 것’이 요즘 개그라는 것. 하지만 순풍의 김병욱 PD는 ‘옆집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친근한 캐릭터들이 만들어 내는 잔잔한 웃음’이 요즘 사랑받고 있는 유머이며 앞으로도 사랑받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웃음박사들도 앞으로의 유머경향에 대한 질문에는 “요즘아이들의 웃음코드는 그 변화가 너무 빠르고 무쌍하다”며 “확실한 것은 그들을 웃기기 위해서는 기존 관습과 상식의 벽을 두들겨 깨야 한다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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