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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구 없는 속도전 버릴 수 없는 ‘대박 신화’

벤처로 간 K과장, 인생 대차대조표

  • 이나리 byeme@donga.com

출구 없는 속도전 버릴 수 없는 ‘대박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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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벤처 행을 택한 대기업 과장들. ‘막차 탄다’는 심경으로 가족 반대까지 무릅썼다. 그러나 끝없는 격무, 무너지는 건강, 냉랭해져만 가는 집안 공기…. 체계 없는 조직은 의료보험증 하나 제때 챙겨주지 못한다. 그래도 날 선 눈빛, 희망을 찾는 사람들. “나를 바치마, 성공을 보여다오!” 》
서울 삼성동에 있는 인터넷 벤처기업 A사. 투자 설명회 자료 작성에 골몰하던 기획실장 김정한(가명·38) 씨의 눈에 모니터 아래편 한 구석의 전자시계가 들어왔다. 오전 2:26. 벌써 5시간 째 자세 한번 바꾸지 않고 PC 앞에 앉아 있었던 셈이다. 이틀째 집에 못 들어간 데다, 오전 10시엔 창투사 사람들과 미팅 약속까지 잡아 놓은 터. 쌓인 일 때문에 마음이 무겁지만 오늘은 단 몇 시간이라도 편하게 자고 싶다….

PC 전원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나던 그의 입에서 일순 짧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야구 방망이로 목을 얻어맞은 듯 극심한 통증. 고개가 전혀 돌아가질 않았다.

뻣뻣한 목을 가까스로 지탱하며 차를 몰았다. 자유로를 맹렬히 달려가는 차들이 문득 무섭게 느껴졌다. 검은 밤, 굳은 목, 돈가뭄에 시달리는 회사, 질주하는 사람들…. 웬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날 처음 그는, 대기업 과장 자리를 버리고 벤처 행을 택한 것이 진정 옳은 선택이었는지를 뼛속 깊이 회의했다.

서울 지하철 2호선 삼성역에서 강남역까지의 일직선 거리. 이른바 테헤란밸리에는 수많은 전직 ‘김과장’들이 있다. 벤처 엑서더스 열풍 속에 ‘막차 탄다’는 심경으로 새 세계에 뛰어든 사람들. 돈을 벌고 싶어, 조직이 갑갑해, 비전이 없어, 하고픈 일 한번 실컷 해보려 명함을 바꿔 든 그들은 지금 과연 행복한가. 혹 삶의 질이 낮아진 것은 아닌가, 아니면 예상대로 희망에 찬 하루하루인가.

여기 벤처로 간 대기업 과장 20명의 인생 대차대조표가 있다.



“내 인생에 찾아온 마지막 기회”

소프트뱅크 웹 인스티튜트 경영지원팀장 김일근(37) 씨. 삼성 그룹 모 계열사 과장이던 그는 지난 4월 현재의 직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상명하달식 조직에서 벗어나 내 가치만큼 기여하고 인정받고 싶어’ 선택한 새 회사가 그는 지금 적이 만족스럽다.

“대기업에 다닐 땐 부서 이동이 있을 때마다 ‘화분갈이 당한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내 포지션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회사 사정에 따라 강요당하는 거죠. 아이디어를 내도 반응이 너무 늦어 좋은 기회를 놓쳐버리기 일쑤였고, 무엇보다 결정권이 없어 성취감을 느끼기 힘들었습니다.”

대기업에서 벤처로 간 사람들이 내세우는 이직 이유는 대부분 김 팀장의 그것과 대동소이하다. 특히 한 직장에서 짧게는 7년, 길게는 십 수년 씩 ‘우물안 개구리’ 생활을 이어온 과장급 인사들에게 변화에 대한 욕구는 막연한 동경을 뛰어넘어 ‘이대로 주저앉을 순 없다’는 절박함으로 다가온다. 게다가 바야흐로 벤처 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의 시대 아닌가. 30대 중·후반에서 40대 초반, 하릴없이 반(半)생을 살아버렸다는 초조감에 잠 못 드는 밤이 많아진 이들에게 벤처맨으로의 변신은 ‘일생에 세 번 찾아온다’는 기회 중 놓쳐서는 안될 마지막 카드로 여겨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를 설명해주지 못하는 명함

변신을 결심한 ‘과장님’들에게 길은 두 가지다. 스스로 경영자가 되거나, 벤처 임원이 되는 것. 기술 쪽에 종사했던 사람들은 많은 경우 사장이 된다. 벤처의 꽃은 아무래도 기술이기 때문. 그러나 나홀로 창업에 나서는 이는 드물다. 자금 문제도 그렇고, 아무래도 혼자서는 여러모로 힘이 부치는 까닭이다. 그래서 신흥 벤처 중에는 경영진이 직원 대부분을 차지하는 회사들이 적지 않다. 사장, 부사장, 이사, 전무, 실장, 팀장…. 직위에 따라 겪는 고충은 조금씩 다르지만 한 물에서 ‘노는’ 만큼 비슷한 점이 더 많다.

대기업 문을 나서는 순간, 이들이 가장 먼저 겪는 당혹감의 진원지는 어디일까. 바로 ‘명함’이다.

대기업에 다니던 시절, 누군가를 처음 만나면 그들은 명함을 내밀었다. ‘△△그룹 △△전자 과장’. 다른 설명이 필요 없었다. 그가 제법 머리 좋고 성실하며 조직생활에 무리 없이 적응할 만큼의 소양을 갖춘 ‘평균 이상의 인간’임을, 그것이 설령 사실이 아닐지라도 그 한 장의 종이는 충분히 웅변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물론 벤처맨이 된 지금도 그들은 첫 대면 때 명함을 내민다. ‘○○테크놀로지 팀장’. 그런데 명함은 더 이상 그를 설명해 주지 않는다. 이제 그가 명함을 설명해야 할 차례다. 6000개나 되는 벤처기업에 족히 10만 명은 될 임원 중 이름 없는 한 사람. 각오했던 일이고 조직의 힘을 제 것인 양 허세 부리는 이들을 비웃어왔지만, 역시 뒷덜미 어딘가가 조금 시려 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유명 소프트웨어 개발업체 부장 박모(36)씨. 이직 전 재벌그룹 주력사의 자재과장이던 그는 업무 차 한 기업을 찾을 때마다 자꾸 ‘본전’ 생각이 난다.

“제법 규모 있는 회사라곤 하지만 예전에는 어떻게 납품 길을 한번 뚫어볼까 하도 달라붙어 내심 귀찮아하던 곳이었어요. 그런데 이젠 상황이 역전됐죠. 부서 책임자는커녕 대리랑 통화하기도 힘들고, 애써 약속 잡아 찾아가면 이제 겨우 1~2년차인 사원이 나와 ‘과장님께 여쭤보겠다’는 말만 되풀이해요. 속으로 그러지요. ‘나도 왕년에 과장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부장이야!’”

어쩌면 ‘명함’의 무게에 더 민감한 것은 가족들인지도 모른다. 음성인식 전문업체 B사는 최근 외국계 기업에 근무하는 엔지니어 한 명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특급 호텔에서 사장이 직접 주재하는 만찬을 베풀었다. 주빈은 바로 스카우트 대상의 부인. “불안해서 싫다”며 이직을 반대하는 부인 때문에 영입 작업이 무산될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중앙일간지 기자 박모(33) 씨는 고민 끝에 벤처 행을 결심했으나 예비 장인이 “이름도 모르는 회사 직원에게 딸을 줄 수는 없다”고 고집해 곤란을 겪은 경우다. 결국 박씨는 기자 신분으로 결혼식을 올린 뒤 곧바로 사표를 내는 ‘편법’을 사용했다.

실제로 대기업 사원 중에는 벤처 행을 원하지만 아내나 부모의 반대 때문에 주저앉고 마는 사례가 적지 않다. 이제 서서히 안정을 찾을 나이, 아이들은 쑥쑥 커 가는데 무슨 모험을 한단 말인가.

경찰 출신인 해커스랩 이정남(48) 사장은 “창업을 준비하며 주변 사람들의 진면목을 알게 됐다”고 말한다. “경찰 그만뒀다니 전화 받는 목소리부터 달라지는 친구들이 있었어요. 친척들도 마찬가지고. 아, 이래서 어려워져봐야 진짜 내 편을 알 수 있는 거구나, 실감했지요.”

통닭 사들고 옛 직장을 찾는 이유

‘이직 스트레스’라는 말이 있다. 새 직장에 적응하는 일이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리라. 그런데 그 직장이 벤처일 때는 좀 다른 단어를 쓰는 편이 나을 성싶다. 아예 ‘동화(同化)’라는 표현은 어떨까.

“벤처는 새 사람에게 ‘적응기’라는 것 자체를 허용치 않습니다. 그럴만한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어요. 입사했으면 작은 것이라도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야죠. 일당백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는데 배부르게 앞 뒤 재며 몸 만들 시간이 어딨습니까.”

라스21 홍보이사 우광식(39)씨 말이다.

하지만 10년 가까이 꽉 짜인 조직 속에서 살아온 사람이 단번에 생경하기만 한 ‘벤처 정서’에 익숙해지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인터넷 커뮤니티 업체 기획실장 김모(36)씨. 대부분 20대 초·중반인 직원들은 사장보다도 나이가 더 많은 그를 상당히 어려워한다.

“이거 안되겠다 싶어 친근하게 군답시고 어린 여직원에게 농을 걸었죠. 작은 실수를 했기에 ‘뽀뽀 한번 해주면 그냥 넘어가마’했더니 정말로 달려드는 거예요. 도리어 제가 혼비백산해 뒤로 물러섰습니다. 도대체 그 친구들 코드가 뭔지…. 마음 맞추기가 쉽지 않아요.”

때로는 그런 ‘차이’들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입기도 한다. 정모(40)씨가 관리팀장으로 있는 휴대전화 단말기 부품업체는 직원들이 돌아가며 저녁밥을 지어먹는다. 식비도 줄이고 시간도 아끼자는 발상인데, 밥을 한다는 것 자체가 아니라 열댓 살은 어린 직원들의 말투며 생각 없는 행동들이 자꾸 정씨의 자존심을 건드린다.

“밥이 조금 잘못 되면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싫은 소리들을 해요. 물론 자기들끼리도 그러니까 나만 특별히 미워한다고 할 순 없지요. 하지만 전 그렇게 나이도, 직위도 무시한 채 뭐든 ‘내 감정대로만’ 말하고 움직이는 친구들이 종종 이해가 되질 않아요. 업무 처리가 부실해 좀 나무라면 토라져 불러도 대답조차 하지 않지요. 요즘은 내가 너무 리더십이 없고 포용력도 부족한 것이 아닌가, 자격지심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비즈니스 컨설팅 업체를 운영하는 김도연(36)씨는 직원을 뽑을 때 대기업 출신을 선호하게 된다고 말한다.

“능력은 조금 못 미쳐도 기본 소양을 갖춘 사람들에 게 마음이 가요. 1,2년이라도 대기업 생활을 해 본 친구들이 아무래도 참을성 많고 예의도 바르지요. 그렇다고 할 말도 못하며 살라는 뜻이 아니라, 때로는 조직을 위해 자기 계산은 좀 접어둘 줄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거죠.”

동료들과의 공동 창업이 아니라 어느날 갑자기 낯선 회사에 몸담게 된 이들은 말 통하는 사람이 없어 외롭다는 하소연을 하기도 한다. 월간지 기자 출신인 신모(36)씨는 매달 원고 마감 시즌이면 통닭이며 과일 등속을 사들고 전 직장을 찾는다. 반갑게 맞아주는 옛 동료들과 이런저런 잡담을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기분전환이 된다. 휴대폰 단말기 부품업체 정팀장도 마음이 울적할 때면 옛 직장 근처 호프집에서 입사 동기들을 만난다. 이직 전에는 술자리를 별로 즐기지 않던 그였다. 그러나 이제는 같은 추억, 동일한 웃음과 고민의 주파수를 가진 그들과 나누는 맥주 한 잔이 그렇게 달고 시원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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