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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취재

해체되는 공동체, 사라지는 한국어

조선족 민족교육의 현장을 가다

  • 김당 dangk@donga.com

해체되는 공동체, 사라지는 한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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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조선족은 이제까지 남·북한 사이에서 교량 구실을 해왔듯이, 앞으로도 남북 통일에 적잖이 기여할 수 있는 ‘민족 자산’이다. 위기에 처한 민족 자산을 보호하고 존중하는 것은 당연한 책무다.》
중국 길림성(吉林省) 통화(通化)지구 매하구(梅河口)시에 거주하는 이명철씨(58)는 최근 혼인을 앞둔 외동딸(24)과 난생 처음으로 크게 다투었다. 사실 이씨는 딸이 좋은 대학을 마치고 천진(天津)의 국제무역회사에 취직하기까지 단 한 번도 딸에게 큰 소리를 낸 적이 없었다. 딸 또한 학업에서부터 취업까지 한번도 아버지의 기대에 어긋난 적이 없었다. 그러던 딸이 최근 동족(조선족)이 아닌 이민족(한족)과 혼인하겠다 는 ‘폭탄선언’을 한 것이다.

한족(漢族)에 대한 어떤 편견도 없지만 막상 한족 사위를 얻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이씨는 절대 혼인을 허락할 수 없다고 윽박지르는 한편으로 어르고 달래도 보았다. 그러나 “한족학교를 다녔는데 어떻게 조선족과 결혼하기를 바라느냐”고 항변하는 딸을 설득할 명분이 이씨한테는 없었다. 그것은 이씨가 자초한 결과였다. 알고 보니 사위자리는 딸이 고중(高中: 한국의 고교에 해당) 때부터 사귀어온 남자친구였다. 아버지 욕심에 딸을 조선족학교에 보내지 않고 더 여건이 좋은 한족 학교에 보낸 것이 화근이라면 화근이었다.

100년이 넘는 조선족의 이주 역사에서 조선족이 동화(同化)되지 않고 중국 소수민족 구성원으로서 ‘조선족 공동체’와 ‘조선족 정체성’을 형성해 온 것은 부락 단위로 모여 사는 수전(水田) 농업(쌀농사)의 전통 속에서 조선어라는 민족언어와 민족교육 및 문화의 동질성을 유지해온 덕분이다. 사실 10여 년 전만 해도 조선족 공동체에서 조선어를 모르거나, 한족 학교를 다니거나, 이민족과 혼인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 ‘흔치 않던 일’이 이제는 ‘흔한 일’이 되었다. 문제는 조선족 사회에서 이런 일들을 앞으로는 더 자주 보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곧 100년 넘게 유지되어온 조선족 민족교육이 뿌리째 흔들리고 그 토대 위의 조선족 공동체가 붕괴되는 것을 의미한다.

뿌리째 흔들리는 조선족 민족교육

중국 길림성 남서쪽에 위치한 통화지구는 인근 요령성(遼寧省)과 성계(省界)가 맞닿아 있다. 지구 내에는 통화(通化)시말고도 북쪽의 매하구 시와 남쪽의 북한 땅 만포(滿浦)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집안(集安)시 같은 몇몇 소도시와 여러 현(縣)이 있다. 만주 벌판을 호령하던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혼과 일제 때 간도로 이주한 한(韓: 조선)민족의 뿌리가 면면히 이어져오는 지역이다. 하지만 앞으로 이곳에서 민족혼과 그 뿌리를 찾기는 점점 어려워질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이 나오고 있다. 조선족 민족교육이 무너져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매하구시 민족사무위원회 조선족 관할 조(趙)주임(한족)에 따르면 매하구시에는 현재 시내의 실험(實驗)소학 1개교를 포함해 조선족소학교 24개가 산재한다. 학생 수가 600여 명인 실험소학교는 길림성 내에서도 알아주는 학교다. 조선족인 김(金)교장에 따르면 이 실험소학은 길림성 내에서 연길(延吉) 소학교를 제외하고는 두 번째로 학생 수가 많은 학교다. 1949년 중국 해방 1년 전인 48년에 조선족 학생 60명으로 출발한 이 학교의 교사(校舍)는 95년 정부 지원으로 신축한 것이다. 컴퓨터실에는 조선족 소학교로는 드물게 컴퓨터도 70대나 있다. 특징은 상당수 농촌지역 학생들이 스쿨버스(1대)로 통학한다는 점이다. 통학거리는 버스로 반 시간 이내로 제한돼 있다. 졸업생은 100% 이 지역에서 명문학교로 꼽히는 매하구시 제11중으로 진학한다.

그러나 실험소학을 제외한 나머지 23개 학교의 경우 다른 농촌지역 학교들과 마찬가지로 학생 수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전체 학생을 통틀어도 한두 학급이 될까말까한 미니학교들이 속출하고 있다. 학생 수의 감소는 그만큼 폐교하거나 통폐합하는 학교가 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서의 조주임은 “시(市)정부는 농촌지역에 산재한 소학교를 시내로 통합해 기숙학교로 운영해나갈 계획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기숙학교가 문제 해결 방법은 아니다. 생활 형편이 어려운 농촌 가정에서는 아이들을 기숙사에 보내려면 부담이 크기 때문에 집 부근의 한족학교에 보내게 된다.

각각 한국의 중·고교에 해당하는 초중(初中)과 고중(高中)으로 가면 소학보다는 사정이 낫지만 한족중학교에 비교하면 교학·시설 면에서 차이가 크다. 통화시의 경우 조선족학교는 소학교와 초중·고중을 합쳐 21개다. 이 가운데 시내에 있는 조선족 고중은 1개교인데 다른 6개 한족 고중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시설이 나쁘다. 통화시 조선족학교 문(文)교장은 “한족학교에는 다들 있는 컴퓨터를 우리는 돈을 빌리고 학생 돈 걷어서 들여놓았다”고 말했다. 중국 정부가 표방하는 소수민족 우대정책에도 ‘보이지 않는 차별’이 있다는 것이다.

조선족 소학교의 역피라미드 구조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이란 이를테면 한족학교에는 컴퓨터 교육을 위한 지방정부의 교육예산이 계획대로 배정되는데 조선족학교에는 예산은 잡혀 있지만 배정은 더디게 함으로써 결국 ‘목마른 놈이 우물 파게 하는’ 식이다. 물론 이와 같은 눈에 보이지 않은 차별은 개발 도상에 있는 중국 경제의 전반적인 투자 우선순위와 관련이 있다. 교육은 기업처럼 ‘생산단위’가 아니기 때문에 투자 우선순위에서 밀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교원들이 천직(天職)인 교사직을 버리고 돈을 벌기 위해 학교를 떠나는 것을 나무랄 수 없는 세태다. 한 조선족 학교 여선생이 “서울에 간 적이 있다”고 해 ‘순진하게’도 “교원 연수를 다녀왔냐”고 물으니 이 여교사는 “왜요? 교원 공작(工作)을 하다가 돈 벌러 산업연수생으로 서울에 갔는데 공장에서 건강이 나빠져 다시 돌아와 복직했어요”라고 대답한다.

아무래도 소도시에 비해 현(縣) 지역으로 가면 사태는 더 심각하다. 휘남조중(朝中: 조선족 중학교) 최영철 교장에 따르면 휘남현(輝南縣) 관내 16개 소학교 학생 수는 연 20%씩이나 감소하고 있다. 조양진(朝陽鎭)은 통화지구 휘남현의 현 소재지로 한국으로 치면 읍 단위에 해당하는 소도시다. 조선족 인구는 1만6800명 정도. 그러나 읍내에서 유일한 조선족소학교에는 교원과 학생만 있을 뿐 교사(校舍)가 없다. 이 학교 학생들은 현재 인근 한족소학교에 세 들어 있다. 그 사유는 이렇다.

몇 해 전에 이 지역을 휩쓴 홍수로 학교 건물이 물에 잠겨 붕괴될 위험에 처하자 읍내 조선족 유지들을 중심으로 뜻을 모아 빚을 내서라도 교사를 신축하기로 했다. 문제는 돈이었다. 그런데 우연찮게 재미 한인교회들의 연합선교단체인 만나선교회(회장 이학권 목사·252쪽 관련 기사 참조)와 연(緣)이 닿아 이 단체의 지원으로 현재 교사를 신축하고 있다. 그러느라 학생들이 한족학교에 세 들어 있는 것이다.

번듯한 한족학교 한 켠의 낡은 교실에서 곁방살이를 하는 조선족 학생들은 겉보기에도 초라했다. 활기 넘치는 한족 학생들에 견주어 아이들도 기운이 빠져 있는 듯 보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저학년의 경우 한 학년의 학생 수가 10명도 안 되는 것이었다. 고학년의 경우 학생 수가 20명이 넘었지만 1∼2학년은 7∼8명에 불과했다. 그러니 1학년에서 6학년까지를 모두 모아도 한두 학급을 채우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저학년으로 내려갈수록 학생 수가 적어지는 조선족 소학교의 역(逆)피라미드형 구조는 조선족이 집단 거주하는 이른바 조선족 작거(作居) 지구가 산재한 동북(東北) 3성(省), 즉 길림·요령(遼寧)·흑룡강(黑龍江)성의 다른 학교도 마찬가지다.

최근 재외동포재단(이사장 김봉규)이 공개한 중국 현지 실태조사 결과를 보아도 사정은 비슷하다. 중국과 러시아 국경지역에 위치한 시골 마을인 흑룡강성(黑龍江省) 목단강(牧丹江)지구 동녕현(東寧縣) 삼차구진을 중심으로 조사한 것인데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기차를 타면 이곳을 거쳐 흑룡강성 성도(省都)인 하얼빈(哈爾濱)으로 이어진다. 안중근(安重根)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 전 이곳 동녕현에서 군사훈련을 했다는 얘기가 전해오고 있다. 또 여기서 멀지 않은 목단강 해림(海林)시에는 김좌진 장군이 세운 고령자(高嶺子) 소학교가 지금도 남아 있다. 만주 일대가 다 그렇듯이 이곳 또한 통화지구와 마찬가지로 19세기 말∼20세기 초 항일 독립운동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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