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6월호

美, 남한 주요인사 2만명 해외소개 계획 세웠다

미 합참 비밀문서로 본 6·25전쟁 비사(秘史)

  • 이흥환 재미 언론인

    입력2006-10-10 14: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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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년 6월29일 한강전선 시찰한 맥아더, 2개 사단 파병요청.

    • CIA는 전쟁발발 기미를 전혀 몰랐다.

    • 미 육참총장 비망록 “(한국에서) 원자탄 사용의 조건을 결정하기 위한 검토가 이뤄져야 한다고 봄…”

    • 1951년 1월 미극동군 사령부, 패전 대비한 한국정부 피란계획 수립. “한국정부 관료 및 주요인사 100만명을 제주도로 소개하는 ‘대규모’와 주요인사 2만명만 해외로 소개하는 ‘제한소개’로 구분…”

    • 해외 소개 대상지로 하와이, 필리핀, 오키나와, 사이판, 티니안 등 검토.

    《대다수 미국인들에게 6·25는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이다. 그러나 미국은 잊지 않고 있다. 잊고 싶어도 잊지 못하는 전쟁이다. 그러면 한국인에게 6·25는 무엇인가. 잊지 말아야 할 전쟁이다. 잊어서는 안 되는 전쟁이다. 그러나 한국에도 ‘잊혀진 전쟁’이 되어가고 있다. 잊으려 해도 잊혀지지 않는 ‘미국의 6·25’와 잊지 말아야 하는데도 잊혀져가는 ‘한국의 6·25’, 이 둘의 차이는 기록의 차이다. 기록 보관의 차이고, 기록 공개의 차이며, 기록 공유의 차이다. 지금도 미 행정부 비밀문서 보관소에는 6·25관련 기록이 가득하다. 가득할 뿐 아니라, 살아 숨쉬고 있다. 영상·문서·마이크로 필름 등 방대한 자료가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신동아는 일부 공개됐거나, 공개됐더라도 극소수 사가들의 자료더미에 파묻혀만 있는 자료들을 포함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6·25 관련 자료들을 더 늦기 전에 공개한다. 한국전을 기록한 미 합동참모부와 극동사령부의 비밀 기록들이다. 전쟁의 또 한 축이었던 북한측의 자료를 접할 길이 없는 상황에 이 자료들은 여전히 반쪽 구실밖에 못 한다. 그래도 남의 것을 빌려온 것이긴 하지만 그 반쪽이나마 없는 것보다는 낫다. 이 자료들은 워싱턴에서 한반도 안보 관련 정보를 공급하고 있는 KISON(Korea Information Service on Net)이 미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굴해낸 것들이다. 》

    맥아더의 한강 전선 시찰

    “적군 진격 계속되면 남한 함락 위험”

    6·25 가 발발한 이튿날부터 남한에 있던 미국인들은 비행기와 배편을 이용해 일본으로 철수했다. 2000여 명이 빠져나갔다. 이승만 대통령이 대전행 특별열차를 타고 서울을 빠져나간 6월27일 새벽 2시. 그리고 다음날인 28일 오후 2시30분 한강교가 폭파됐다. 조선인민군의 한강 도하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파죽지세. 북한군은 밀고 내려왔고, 남한군은 밀렸다. 남한은 속수무책이었다. 서울이 북한군 수중에 떨어졌을 때, 일본 도쿄의 미 극동사령부 맥아더 사령관은 미 합동참모부에 전문을 띄운다. “미 2개 사단만 투입하면 한국을 방어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맥아더는 이 합참 보고서를 작성하기 전에 남한의 최전선으로 날아와 직접 한강 전선을 시찰했다.



    북한군의 전쟁지도에는 서울-수원-대전-대구 순으로 전선을 순차적으로 형성해가면서 남한을 점령하는 전쟁수행 계획이 그려져 있었다. 서울은 이미 함락됐고, 맥아더가 한강 전선을 시찰한 6월29일에는 언제 최전선이 무너질지 예측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1950년 6월30일자로 미 육군부(Department of the Army) 참모연락단에 접수된 1급 비밀(Top Secret) 보고서(문서번호: C 56942)는 도쿄의 맥아더 사령관에게서 날아온 것이었다. 맥아더의 한강 전선 시찰 보고서였다. 이 보고서는 육군부를 거쳐 합동참모부에 전달됐다.

    맥아더는 이 비밀 보고서에 자신이 직접 목격한 한국군의 개전 초기 대응상황을 구체적으로 묘사해놓고 있다. 한마디로 지리멸렬이었다. 전선의 이런 실상과 달리 맥아더의 눈에 비친 피란민은 ‘애국심’과 ‘미군에 대해 확고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맥아더는 이 6월29일의 최전선 시찰에서 석 달 후에 전개될 인천 상륙작전을 머리에 그리고 있었던 것으로 사가들은 기록하고 있다. 맥아더는 이 보고서에서 상륙 작전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곳곳에서 노장의 여유와 함께 앞으로 전개될 전황을 구체적으로 지적했으며, 일본 주둔병력 가운데 2개 사단을 투입해야 한다는 것도 언급했다.

    다음은 전선 시찰 다음날인 6월30일에 작성된 맥아더의 보고서 내용이다.

    본관은 오늘 수원에서 북쪽 한강에 이르는 남한군 전투 지역을 시찰했음. 시찰 목적은 남한군의 현 상황을 직접 정찰하고, 우리의 임무 수행을 위해 가장 효과적인 향후 지원책을 모색하기 위한 것이었음.

    남한 육군과 해안경비대는 혼란에 빠져 있었음. 진지하게 싸우지도 않고, 지휘력은 결핍한 채 자신들의 방식으로 전투에 임하고 있었음. 국내 치안 유지를 위해 경장비만으로 무장하고 조직됐던 탓에 기갑 및 공중 공격에는 대비하고 있지 않았으며, 북한군이 가지고 있는 주도권을 빼앗아오기에는 역부족이었음.

    남한군은 방어에 대한 철저한 대비책이나 보급계통, 보급체계에 대한 계획을 수립해놓고 있지 않았음. 후퇴시의 보급품 및 장비 파괴 대비책도 없었으며, 있었다 해도 시행되지 않았음. 결국 보급품과 중장비를 유실하거나 그대로 버렸으며, 상호 연락체계도 전혀 없었음.

    대부분의 병사는 남쪽으로 내려가는 와중에 자신의 소총이나 카빈총을 휴대하고 있었음. 병사들은 하나둘씩 후방으로 모여들었는데, 전선 시찰을 위해 본관이 파견한 선발 장교단에 의해 다시 조직되어 편제를 갖추었음. 대포나 박격포, 탱크 저격용 무기가 없기 때문에, 고도의 지휘력이 발휘되었던 사례나 지침에 따라 지형 장애물을 최대한 이용, 적의 진격을 지연시키는 데에만 유일한 희망을 걸 수밖에 없는 상황임.

    일반 국민들은 평온하고 질서 있었으며, 규모에 맞는 삶을 살고 있었음. 애국심이 높고 미국에 대한 믿음이 강했음. 서울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공산 치하를 피해 내려가는 피란민으로 가득했음.

    남한군 병력은 2만5000명을 넘지 않을 것으로 추산됨. 이전 보고에서 지적했듯이 북한군은 기갑 장비로 무장하고 훈련이 잘 되어 있으며 지휘계통이 확립되어 있고, 소련제 비행기로 무장한 공격적인 공군의 지원을 받고 있음.

    본관은 수원과 부산항의 낙하 교두보를 통해 보급로를 확립 유지하는 데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 있음. 낙하 투입은 가장 결정적인 수단이긴 하나 항상 공중 공격 목표가 되고 있음.

    전방까지 진출한 적을 묶어두는 것이 필수적이며, 그렇지 않을 경우 적은 남한 전체를 장악하려 할 것임.

    한강 전선을 확보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나 결과는 극히 부정적임. 한강 전선과 수원-서울축 방어는 남한 중부 지방의 낙하 교두보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임.

    남한군은 전반적으로 적을 저지할 능력이 없으며, 현 전선은 또 한 차례 돌파될 위험성이 높음. 전선에 진출해 있는 적군이 진격을 계속할 경우 남한을 심각하게 위협할 것임.

    현 전선을 유지하고 향후 실지 회복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보장책은 전투 지역에 미 지상군을 투입하는 것임. 지상군 실병력 없이 해공군만 계속 동원하는 것은 결정적인 지원이 될 수 없음.

    허락된다면 본관의 의도는 즉각 미 지상군 연대 병력을, 이미 논의된 바 있는 주요 지역에 증원하고, 적의 공격을 조기에 차단하기 위해 일본 주둔 병력 가운데 2개 사단을 증강시키는 것임.

    지리멸렬한 이 지역에 육해공군을 총동원하지 않을 경우, 우리는 불필요하게 생명과 재산과 위신을 잃게 될 것임. 최악의 경우 패전의 불운을 안게 될 수도 있음.

    합참 합동정보단(JIG)의 CIA 질타

    “북의 남침 가능성에 대해 한마디 언급도 없었다”

    극 동군 사령관 맥아더가 전선을 시찰하고 난 직후인 1950년 7월10일, 워싱턴에 있는 합참 합동정보단(Joint Intelligence Group)은 2쪽짜리 정보보고서를 작성한다. 미 공군 소속인 합동정보단의 레지널드 밴스 대령이 합참정보처 부처장인 미 해병대 소속 V.E. 메기(Megee) 준장 앞으로 제출한 이 1급 비밀 보고서에는 ‘한국 상황 - CIA의 북한군 침략 조기 경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CIA에서 넘겨받은 한국 관련 정보를 놓고 합참 합동정보단이 나름대로 정보가치를 평가한 일종의 정보 평가서다.

    합동정보단은 CIA가 작성한 일일, 주간, 월간 보고서 등을 통해 전세계의 정보를 받아보고 있었다. 물론 합동정보단에 들어가는 대부분의 정보는 군사에 관련된 것이지만, 정치·경제·사회 각 분야의 정보 역시 유용하게 취급되었고, 한국 관련 정보도 예외가 아니었다.

    전쟁 발발 기미의 사전 탐지야말로 정보기관이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분야 가운데 하나다. 6·25 당시 미 CIA는 과연 전쟁을 예견하고 있었을까? 합동정보단의 이 정보 보고서에 따르면 CIA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3월1일부터 교전이 시작되기까지(6월25일까지) CIA로부터 접수한 ‘CIA 일일 정보 요약’에는 전쟁에 대한 언급이 한 건도 없었다”는 것이다. 보고서 첫 머리에서부터 CIA를 물고 들어간 이 보고서는 “같은 기간 CIA의 주간 정보 요약에서 언급된 한국 관련 사항은 다음과 같다”며 네 가지 항목을 지적하고 있다.

    a. 남한 선거에 관련된 3종의 보고.

    b. 남한의 퇴폐적인 경제와 정치 상황에 대한 3월31일의 장문의 보고 및 북한군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남한군 전력 증강을 주장하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비난.

    c. 남한을 피란지로 활용하려는 대만의 장개석에 대해 언급한 6월2일 보고. 이 보고에서 CIA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음: 남한은 소련과 중공에 너무 근접해 있기 때문에 피란지로는 적당하지 않으며, 기껏해야 비상사태시 임시 피란처나 불편을 감수한 피란처로 활용할 수는 있을 것임.

    d. 북한의 평화 통일 공세에 대해 언급한 6월16일의 보고. 이날 보고에서도 북한의 남침 가능성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음.

    CIA가 북한군의 움직임을 알고도 합참 정보 라인에 정보를 주지 않았을 리는 없다. 결국 CIA는 1950년 3월1일부터 6월25일까지 전쟁 발발 기미를 전혀 몰랐던 셈이다. 그러나 북한군의 38선에 대한 병력 증가가 남침으로 이어질 가능성에 대해서는 CIA도 우려하고 있었다. 합동정보단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5월15일에 작성 완료돼 6월19일에 보고된 ‘북한 정권의 현 능력’이라는 제하의 ORE 18-50 문서가 북한군 침략에 대한 CIA의 가장 최근 언급이라고 볼 수 있음. 이 문서는 38선상의 병력 증가가 ‘서울 점령을 포함, 남한에 대한 제한적인 단기 군사작전 전개를 가능케 할 수도 있다’고 언급하고 있음.

    CIA는 국경지대의 탱크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나 국경지대 마을의 주민 소개나 군사도로 건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음. G-2(정보참모부) 극동 파견대(합참 합동정보단의 극동사령부 파견대)에 따르면 CIA의 반대를 무릅쓰고 G-2가 북한군의 군사 능력에 대해 언급했음. 이것이 북한군 전력에 대해 언급한 유일한 문서이며, 6월20일 통상 절차를 거쳐 합동정보단에 접수된 바 있음.

    이 비밀 보고서가 CIA의 정보수집 능력을 질타하는 가장 결정적인 증거로 들이댄 것이 바로 북한의 국경지대 마을 주민 소개와 군사도로 건설이다. 전쟁 발발의 대표적인 징후인 국경 지대 주민 소개와 도로 건설에 대해서 CIA가 일언반구 없었다는 지적이다. 합동정보단 보고서는 이 두 가지 징후에 대한 현지 보고가 왜 누락됐는지 그 과정을 조사하기 위해서 정보보고 계통을 조사중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 보고서는 또 군 정보계통과 CIA가 6·25 발발을 전후한 시기에 북한군의 능력을 평가하는 데 커다란 이견을 보이고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정보수집 및 배포과 책임자인 앤드류에 따르면, 최근의 현지답사 보고서 사본이 정보서비스단(SI, Service Intelligence) 요원들에게 연구용으로 제출되었음.

    마을 소개와 군사도로 건설건에 대한 보고가 G-2에 제출됐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정밀 검사가 진행중임. 극동 파견대에 따르면, 만약 그러한 정보가 접수됐다면 매우 중요한 정보로 취급됐을 것이나 두 건에 대한 정보는 전혀 그들에게 접수된 바 없다고 함.

    3월에 작성된 두 종의 주간 정보요약에서 G-2가 북한의 전시 대비태세 강화와 전력증강, 춘계 침략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점이 흥미로움. 북한 병력 증강 상황에 대해 언급한 CIA의 ORE 18-50은 G-2의 요청에 의해 18개월 만에 처음 작성된 것인데, 북한군 병력증강을 지적한 극동 파견대 맥내어 대령의 의견을 CIA가 반대했음. 북한군의 군사 능력이 ORE 18-50에서 지적된 것만큼 높지는 않다는 것이었음.

    우리는 CIA로부터 북한군의 침략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접수한 바 없음. 세계 다른 지역에 대한 정보에 대해서도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북한 관련 정보에 관한 한 우리가 CIA로부터 북한의 침략 가능성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지 못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임.

    미 육참총장 비망록

    한반도 원자탄 사용 계획

    6·25 당시 미국은 원폭투하 계획을 수립했다. 사실이다. 원자탄 사용을 계획하긴 했으나 실행하지는 않았다. 이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언제, 어떻게 미국이 한반도에서 핵무기를 사용하려 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가 없었다. 그것은 고작해야 일부 전문가들 사이에서만 떠돌던 공개된 비밀이었다.

    한국의 공립학교 교과과정에는 6·25 당시 미국의 원자탄 사용계획에 대한 언급이 없다. 계획만 세웠을 뿐 정작 시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해서인가? 아니면 핵무기의 가공할 파괴력과, 상상하기조차 끔찍한 핵무기 사용의 정치적 의미에 대한 무지 때문인가?

    태만 때문이든 무지 때문이든 혹은 의도적인 망각 때문이든 사실을 사실대로 기록하지 않거나, 사실대로 기록하지 못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따라서 6·25 당시 미국이 원폭투하 계획을 수립했다는 것은, 전쟁 발발 50주년이 된 지금까지도 최소한 한국의 일반 국민들에게는 사실인 동시에 사실이 아니라는 자괴적인 역설로 존재할 뿐이다.

    1950년 11월20일 미 육군참모총장 콜린스(Collins)가 작성한 비망록은 이 역설을 역사의 장으로 끄집어낸다. 이 한 장짜리 비망록은 다른 1급 비밀문서와 서류 작성의 형식에서 다를 것이 전혀 없다. 그러나 이 비망록은 여타 서류와 다른 점이 하나도 없다는 점에서, 다른 서류와 똑같이 보관되고 똑같이 취급되며 똑같이 공개되고 있다는 점에서, 4문단짜리의 길지 않은 내용 치고는 너무 많은 것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원자탄 사용이 검토됐던 1950년 11월은 전황이 분기점에 있던 시기다. 1950년 9월15일 인천 상륙작전으로 유엔군은 10월1일 38도선을 돌파해 북진을 시작한다. 맥아더는 북한에 무조건 항복의 최후 통첩을 보내는 동시에 그 해 크리스마스 전까지는 미8군 병력이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유엔군이 38도선을 돌파한 다음날인 10월2일. 이날은 마오쩌뚱이 인민지원군이라는 이름으로 중공군 일부를 한국에 파견하기로 결정한 날이기도 했다. 이때 맥아더의 판단은 “중국과 소련의 개입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것이었다.

    10월15일 맥아더는 트루먼 대통령과 태평양의 웨이크 섬에서 만난다. 중국 및 소련의 참전 가능성을 짚어보고, 북한지역 접수에 따른 점령지 행동계획 및 통일이 된 후의 한국 부흥계획 등을 직접 만나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웨이크 섬에서 돌아온 맥아더는 비행기를 타고 한반도로 날아와, 개전 초기인 6월29일 한강 전선을 시찰하던 때와는 전혀 다른 상황에서 전선을 시찰하고 참전 병사들을 독려한다.

    평양을 접수한 것은 이로부터 이틀 후인 10월19일이고, 또 일주일 후인 10월26일에는 한국군 6사단이 압록강변의 초산을 점령한다. 만주를 코앞에 둔 상황이었다.

    그러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는 일시에 역전되고, 1군단과 10군단 등 미군 주병력은 미 전사상 유례가 없는 후퇴 기록을 남기게 된다. ‘한국에서의 원자폭탄 사용 가능성’이라는 제목의 육참총장 비밀 비망록도 중공군 참전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된다.

    1. 중공군의 명백한 한국전 개입과 유엔사 사령관에 대적하는 추가 병력투입 가능성이 다시 한번 유엔군이 원자탄을 사용할 가능성을 제기함. 현재는 유엔군을 위협할 만한 적군의 어떠한 병력 증강도 재래식 공중 폭격을 통해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상황임. 합참이 이 문제를 검토해야 할 것으로 판단함.

    2. 합참이 한국에 원자탄을 사용하는 것에 관한 견해 제출을 요구받을 것으로 사료됨. 또한 중공군이 전면적으로 참전할 경우, 중공군 주 병력과 보급품 집결지에 대해 원자탄을 사용하게 되면 유엔군의 방어 위치를 확고히 하거나 만주 국경으로 중공군을 조기에 퇴치하는 데에 결정적인 구실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됨.

    3. 위 1번항과 관련, 본관은 원자탄 사용 지시의 조건을 검토해야 한다고 생각함. 이 조건에 따라 공격 가능한 목표가 설정될 수 있으며, 정책적 측면과 작전 측면에서 모두 어떤 추가된 준비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를 결정할 수 있음. 이는 이 폭탄을 사용할 경우 적당한 시기가 언제인지를 확실히 하기 위한 것임.

    4. 따라서 본관은, 이 문제를 우선적으로 합참의 해당 위원회에 상정해 견해를 회신해줄 것을 건의함.

    주요 인사 2만명 해외 대피

    중 공군의 개입은 전황을 180도 바꾸어놓는다. 미군 전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치욕’의 후퇴가 거듭되면서 1951년 1월10일,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워싱턴의 미 합참에 긴급 전문을 보낸다. “현재 여건에서는 남한에서 전선을 유지하기가 힘들다. 유엔군 철수는 불가피하다. 한반도에서 철수할 것인지 아니면 계속 한반도를 지킬 것인지 양단간에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미 열흘 전인 1950년 12월30일에 맥아더는 중국 본토 폭격을 합참에 건의한 바 있다. 맥아더의 기본 구상은 중국 공격을 통한 확전이었다.

    사흘 후인 1월13일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에게 친서를 발송한다. 전쟁을 한반도 내에 국한시켜야 하며, 38선에서 휴전 협의를 시도하고, 그것이 불가능하면 미 8군을 철수하라는 것이었다.

    1951년 1월, 미 극동군 사령부는 한반도에서의 전면 철수에 대비한 한국정부 피란계획을 수립한다. 1월9일에 작성된 미 극동사령부의 1급 비밀(Top Secret) 보고서는 한반도 철수 및 한국 고위인사를 포함한 요인들의 소개 계획을 인원 수까지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이 계획에 따르면, 미 극동사령부는 한국정부 관료 및 주요 인사 100만 명을 제주도로 소개시키는 ‘대규모 소개’와, 주요 인사 2만 명만 선정해 제주도가 아닌 해외 지역으로 소개시키는 ‘제한 소개’의 두 방법이 검토됐다.

    또한 이 보고서는 제주도를 소개지로 선택했을 때의 장단점을 분석하면서, 소개지 선택에 따른 고려 사항을 열거하고 있다. 이 보고서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한반도 완전 포기시 한국군과 미군의 병합(incorporation)을 제안한 점이다. 한국군 병력을 오키나와로 이전하는 계획이 수립돼 있었고, 200명의 한국 정부 요인을 하와이나 미 영토 내의 기타 지역에 망명시키는 계획도 입안돼 있었다.

    이 보고서는 마지막 부분에 ‘토의를 위한 시안(試案)’이라는 단서를 달아놓기는 했지만, 소개 대상 및 소개 예상지 등을 구체적으로 거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난민 소개 및 망명정부 계획이 극동사령부와 합참 군 고위층에서 한반도의 완전 포기를 상정해놓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이 보고서 가운데 주요 부분을 옮긴 것이다.

    제주도로 대규모 소개(80만명에서 100만명)시킬 것인지, 아니면 제한된 인원(1만~2만 명 규모)만 선정해 세계 각지의 최적지로 분산시킬 것인지가 소개의 문제임.

    한국 정부 이전을 포함해 가능한 한 많은 인원을 제주도로 소개시킬 경우의 이점은 다음과 같음.

    1. 공산주의자의 보복으로부터 많은 인원을 구할 수 있음.

    2. 공산주의자의 완전 승리를 부인할 수 있음.

    3. 미국과 유엔이 결단력을 가지고 반격할 수 있는 지속적인 상징이 될 수 있음.

    4. 자유 한국 정부가 한국에 남아 있음을 보여주는 지속적인 상징이 될 수 있음.

    5. 제주도에서 비정규전(게릴라전)을 지원하고 심리전을 펼 수 있음.

    6. 한국 정부의 힘(energy)을 지속적으로 방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따라서 망명 정부라는 이름을 듣지 않을 수 있음.

    제주도로 소개시킬 경우 불리한 점은 다음과 같음.

    1. 언제까지 한국을 방위하고 한국민을 지원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을 할 수 없음.

    2. 제주도 유지를 위한 유엔의 지속적인 지원을 얻기 힘들고, 참전 동맹국들간의 이견이 증폭될 수 있음.

    3. 공산주의자들과 협상이 타결될 경우 제주도를 포기하고 내줄 가능성이 있으며, 그렇게 되면 무력 대결의 결과로 지금 제주도를 포기했을 때보다 미국이나 유엔에 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

    4. 제주도에 유입된 대규모 소개민을 원조하는 데에 따른 심리적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음.

    5. 제주도가 대만과 같이 인식되는 것이 불가피함.

    따라서 제주도를 피란지로 선택할 것인지는 아래 사안들을 포함한 관련 제반 사항들을 검토해 결정해야 함.

    1. 한국 본토에 대한 작전을 지속하기 위해 한국인을 활용할 것인가.

    2. 제주도를 차지해 공산 진영에 넘겨주지 않는 것이 군사적으로 중요하며 실용적인가.

    3. 미국이 일본에 준하는 우선 순위를 가지고 제주도를 방어하고 지원하는데 필요한 군사력과 물자를 제공하는 책임을 떠맡을 용의가 있는가.

    4. 제주도를 차지하거나 공산주의자에게 넘겨주는 것이 바람직하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을 경우, 한국 영토 및 피란지에서 한국 정부와 상당수 요인들을 유지하는 데에 따른 정치적 이익이 군사적인 불이익보다 과연 클 것인가.

    만약 제주도로 소개시키지 않기로 결정할 경우, 다음과 같은 우선 순위와 일반적인 중요도에 입각해 제한적인 소개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임.

    1. 대통령, 내각, 국회의원, 중앙 및 지방 고위 경찰을 포함한 정부 주요 인사와 가족들(4000명)

    2. 한국군 선임 장교 및 기술 요원과 가족들(3000명)

    3. 종교계 및 교육계 인사 등 사회 지도자를 포함한 비정부기관 요인들과 가족들(1만 명)

    4. 정보 계통에 의해 선정된 주요 전쟁 포로 및 요원들

    5. 한국군

    한국군 소개는, 그들을 어디로 소개할지 소개 지역을 결정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인 요인이 되긴 하겠지만, 우선적으로 한국군의 잠재력에 대한 군사적 판단에 기초해야 함. 즉 만약 제주도를 차지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이 나거나 한국에 대한 군사작전을 계속하는 것으로 결정이 날 경우, 또는 두 가지를 모두 시행하는 것으로 결정이 날 경우에, 한국군 소개는 기본적으로 한국군이 미군에 병합(incorporation into US armed forces)된다는 관점에서 시행돼야 함. 그러나 이런 관계가 설정된다 하더라도 한국군에 대한 극동 지역 전반의 시각을 공정하게 감안해야 하기 때문에, 한미 병합군은 오키나와 같은 고립된 지역에 기지를 두고 정상적으로 운영되도록 해야 할 것임.

    망명 정부

    유엔과 미국이 원칙적으로 한국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는 한, 한국 정부의 존재는 계속 인정되고 지원받을 것임. 정부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구성 요소는 대통령과 내각 및 국회로 인원은 총 200명임.

    유엔 책임하에 한국 정부를 존속시킨다는 원칙이 유지된다면, 한국 정부에 하와이 또는 미 영토 내의 기타 지역에 피란지를 제공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임.

    위에 언급한 것들은 다만 토의를 위해 마련된 시안일 뿐임. 합동참모부의 일반적 견해 외에 하기 질의 사항에 대한 답변을 특별히 요청함.

    1. 군사적 관점에서, 제주도를 차지하고 공산 진영에 넘겨주지 않는 것이 중요하고 실용적인가.

    2. 상기 질의에 대한 답변이 긍정적일 경우, 국방부는 제주도에 거주하게 될 약 80만 명에 달하는 인구를 방어하고 지원하기 위해, 일본에 준하는 우선 순위를 가지고, 군사력과 물자를 지원하는 것에 동의하는가.

    한국 정부와 대규모 피란민들이 현재 제주도로 이동중임을 감안할 때 위 사항들에 대해 결정을 내리는 것은 중대한 사안이며, 제주도를 포기하는 쪽으로 결정을 내릴 경우 난처하고 어려운 상황에 직면할 수 있음.

    미 합참 합동전략계획위원회의 극비계획

    ‘망명정부 제주도로’

    남 한 영토에서 한국 정부 요인을 포함한 한국인을 해외로 소개한다는 미군의 계획은 같은해(1951년) 6월에 더욱 구체화된다. 미 합참 합동전략계획위원회(JSPC, Joint Strategic Plans Committee)가 6월18일 작성해 합참에 보고한 ‘한국인 소개에 대한 예비연구(A Preliminary Study on the Evacuation of ROK Personnel from Korea)’라는 제목의 1급 비밀문서가 그 내용을 밝히고 있다.

    가로 21cm, 세로 36cm의 리걸 사이즈 용지 12매에 담겨 있는 한국 소개계획은 유사시 제주도(이 문서에서는 제주도를 ‘Quelpart Island’로 표현하고 있다)를 포함, 미 본토와 하와이, 필리핀, 오키나와 및 사이판, 티니안, 괌 등이 있는 마리아나 제도(필리핀 군도 동쪽에 있는 섬들)를 소개 가능 지역으로 설정하고 그 장단점을 분석하고 있다.

    이 보고서의 첫 장 ‘문제점’이라는 항목에는 “남한으로부터 한국인들이 소개될 경우 소개지 선정을 검토하기 위한 것이며, 소개 필요시 실시될 것임”이라는 단서를 달아놓았다. 또 ‘건의사항’ 항목에는 “a. 미 극동군 사령관(CINCFE)과 태평양 사령관(CINCPAC)으로부터 이 보고서를 접수할 수 있는 미 육군참모총장과 해군 작전참모장은 이 보고서 내용에 대한 각자의 견해를 밝혀줄 것”과 “b. 위 요청 사항에 대한 답변을 들은 후 합동전략계획위원회는 검토안을 수정하고 이에 따라 차후 행동을 건의하겠다”는 두 가지 건의사항을 덧붙이고 있다.

    또한 합동전략계획위원회는 이 보고서를 작성하기 이틀 전인 6월16일자 보고서(SM-1494-51)에서 한국 소개계획이 미 합참을 포함해 국방장관 및 국무부 대표들 사이에 이미 1월부터 장시간에 걸쳐 여러 차례 토의된 바 있음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합참은 오늘(6월16일) 회의에서 극동사령부가 한국인 소개지 결정 문제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을 알았음. 한국 소개 문제는 지난 1월 합참 의장과 국방장관, 국무부 대표들 사이에 장시간에 걸쳐 여러 차례 토의된 바 있음. 이 토의가 진행되는 동안 한국인을 소개할 후보 지역으로 미국, 하와이, 필리핀, 오키나와, 마리아나 제도, 제주도 등이 언급되었음.

    우선 미 본토 지역은 한국에서 거리가 멀다는 점과, 고려중인 대규모 소개가 사실상 유엔의 문제라는 사실 때문에 적합하지 않다는 의견이 개진되었음.

    하와이 역시 미 본토와 마찬가지 문제 때문에 적합하지 않음.

    필리핀은 한국인과 필리핀인 사이의 인종적 유사점이 없다는 점에서 역시 부적합 지역으로 의견이 모아졌음.

    오키나와 역시 기본적으로 군사시설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부적합함.

    마리아나 제도, 특히 사이판과 티니안, 괌은 군 및 기타 정부 요원들이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적합하지 않음.

    제주도는 물 공급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소개지로는 부적합함.

    위에 언급한 후보 지역들은 소개 인원이 약 75만 명에 달한다는 사실을 전제로 타당성이 검토된 것임.

    상기 주제와 관련, 합참은 1951년 6월20일 국무부 관계자들과 토의가 예정돼 있는 바, 합동전략계획위원회에 동 주제에 대한 검토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지시함.

    남한 소개계획은 단순한 예비 검토 차원이 아니었다. 실제 발생 가능한 상황을 전제로 입안되고 구체적인 실시 계획이 수립돼 있었다. 합동전략계획위원회가 이 비밀보고서 겉장에 “보고 내용을 우선적으로 검토해 줄 것”을 건의하고 있는 사실이나, 국방부와 국무부 대표가 여러 차례에 걸쳐 이 문제를 신중하게 검토하면서 한국 소개에 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 극동사령부가 이미 소개지 결정 문제를 미룰 수 없는 당면 과제로 설정했음을 합참이 인식했다는 사실 등이 이를 입증한다.

    우선, 합참은 소개 대상 한국인을 두 그룹으로 나누었다.

    한국 소개와 관련, 소개 대상 한국인은 두 범주로 나뉨. A급은 정부 관료와 군 정예 요원 및 국립 경찰을 포함함.

    A급은 (공군 2500명과 1만4300명의 해군 및 해병대 요원을 포함해) 총 30만543명이며, 화물량은 51만7200t으로 추산됨.

    B급은 정부 관료의 직계 가족과 국립 경찰, 비정예 군 요원, 종교계 인사 및 전문직 지도자와 그 직계 가족들, 부두 노동자 및 철도 노동자 등 유엔을 지원하는 소수 잡무원들을 포함함. B급은 총 18만2000명이며 화물량은 총 18만2000t으로 추산.

    A급과 B급을 합한 총인원은 48만2543명이며, 총화물량은 69만9200t임.

    8군 사령관은 소개작업을 확실히 추진하기 위해 B급 소개 대상자 가운데 전부 또는 일부를 배제할 권한이 있음. 사전 선정된 1만명의 전쟁포로와 1만t의 화물도 소개계획에 포함됨. 한국 군사고문단(KMAG) 요원들은 최종 목적지까지 한국군과 동행할 것임. 소개 대상 한국군은 한국 군사고문단 요원들의 지휘에 따라야 함. 부산이 주요 승선항으로 지정됐으며, 다른 항구들도 이용 가능함. 소개 한국인들은 일본에 도착한 후 다음 이동지인 사이판과 티니안으로 이동함.

    소개는 패전을 의미한다. 따라서 한국 소개작전은 패전을 전제로 한 것이며, 망명 정부 수립 여부는 정치·군사적 파장을 고려해 결정짓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부산항에서 배를 타고 일본에 일단 도착한 후 최종 목적지인 사이판과 티니안 섬으로 대피할 인원 수는 남한 전체 인구의 1.9%였다. 하지만 사이판과 티니안 섬이 최종 피란지로 결정된 것은 아니었다.

    사이판과 티니안 섬은 미 태평양 사령부가 관할 책임을 지고 있는 신탁통치령이었다. 이 지역 신탁통치령에 대한 행정 책임은 1951년 7월1일자로 미 해군에서 내무부로 이양될 예정이었다. 또한 사이판과 티니안은 미국의 태평양 전략에서 빼놓을 수 없는, 군사적으로 절대 필요한 전략 요충지였으며 극비 프로젝트가 진행중인 곳이기도 했다. 미 전쟁 해군부 장관 앞으로 보고된 1947년 9월12일자 비망록에서 합참의장은 이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태평양은 어느 지역이든 두 가지 점에서 전략적 통제가 필요한 주요 지역임. 첫째, 미국의 장래 안보에 필요한 군사기지이며 둘째, 잠재적인 적의 공격으로부터 이 지역의 군사 시설을 필히 방어해야 함.

    1951년 6월13일에 작성된 미 육군 문서(DA IN 3433)에서 극동사령관 맥아더는 남한에서 소개된 피란민이 부산항을 떠나 사이판-티니안에 도착하기까지는 90일이 소요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D-Day로부터 1진이 사이판-티니안에 도착하기까지 약 90일이 소요될 것으로 추산됨. 이 기간은 보안 점검과 섬 사용에 필요한 조치를 마무리하기에 충분함. 이런 상황과 보안문제를 감안할 때 내무부가 개입하는 것은 불필요하며 바람직하지도 않음. 또한 이 소개계획은 지원계획을 준비할 마리아나 군도의 지역 사령관 외에는 누구에게도 통보하지 말아야 함.

    맥아더의 이 메시지에 대해 육군부는 6월15일 극동사령관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조언을 한다.

    사이판과 티니안을 한국인 피란지로 사용하는 데 따른 반대 의견이 있기 때문에 극동사령관은 이 섬들을 활용하는 계획을 잡지 말아야 함. 난민이 대량 유입된다 하더라도 극동사령부 임무를 지원하는 요원들의 기존 작전 활동을 방해해서는 안 됨. 다른 지역을 활용하는 대안 모색을 요청함. 합참도 대안을 강구할 것임.

    사이판-티니안 섬을 피란지로 설정하는 문제는 여전히 미결이었다. 최종 피란지 결정에 앞서, 피란민 수 결정, 소개할 피란민의 급수를 매기는 작업, 수송 방법, 소개지 정착 후의 행정 지원 등 난제가 산적해 있었다. 합동전략계획위원회가 대안으로 제시한 것은 한국 정부를 최대한의 병력과 함께 제주도에 정착시킨다는 안이었다.

    한국 피란민 소개의 문제점은 대략 다음 몇 가지로 분석할 수 있음. 첫째는 피란민의 자의적 선정임. 극동사령부가 이 문제를 검토해본 결과, 피란민 선정 우선 순위와 범주를 2종 이상으로 잡아야 할 것임. 그러기 위해서는 전체 인원 결정 등에서 8군 사령관에게 더 많은 재량권을 부여해야 함. 꼭 소개해야 할 전체 인원 수를 줄이는 것을 고려해야 함.

    화물 운송, 임시 목적지와 최종 목적지 선정, 소개지 도착 후의 행정 지원 문제 등을 소개에 따른 여타 문제점에 포함해야 함. 이 문제점들에 대한 예비 분석에서 피란민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것이 강조됐음.

    목적지와 관련, 한국 정부를 최대한의 병력과 함께 제주도에 정착시키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 사료됨. 이 섬은 남해안에서 50마일, 부산에서 150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함. 폭 12마일, 길이 35마일의 이 섬에는 작은 개천이 많으며, 소규모 항구와 몇 개의 소규모 비행장도 갖추고 있음.

    남한 잔류 한국 지상군의 효과적인 전투 수행을 위한 지원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극동사령부가 일본에서 한국군 병력을 활용하는 방안을 수립해야 함. 일본 내에서 인구 밀집도가 낮은 홋카이도 지역이 바람직함. 일본에 무장 한국군이 나타나면 공산 진영이 항의할 것이 분명하나, 소련군이 참전하는 구실을 제공하지는 않을 것임.

    대만이 한국 지상군을 추가 흡수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한국 망명정부가 제주도를 포기해야 할 경우 한국 망명정부에 장소를 제공하는 것도 가능할 듯함.

    인종적인 적대감과 공간 부족으로 임시 체류가 아닌 한 한국 민간인들이 일본에 머물 수는 없으며, 대만 역시 공간 부족으로 한국 민간인들의 피란처로 사용될 수는 없음. 더구나 한국인들이 동남 아시아의 어떤 나라에든 피란처를 마련할 경우 중공을 자극하게 되므로, 가까운 장래에 동남아시아 지역에 피란처를 마련하는 것은 고려할 수 없음(특히, 중공을 자극하는 어떠한 움직임에 대해서도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프랑스와 영국을 감안할 때 더욱 그러함).”

    합동전략계획위원회는 인도네시아, 필리핀, 네덜란드령 뉴기니도 한국인 소개지로 거론됐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부적합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경우, 인도네시아 정부가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으며 정부가 취약하다는 점을 들어 고려 대상에서 제외됐고, 네덜란드령 뉴기니는 영토 내에 네덜란드인이 많지 않다는 점이 배제 이유가 되었다.

    필리핀은 대량의 한국 난민을 받아들일 능력이 있긴 하나, 필리핀 정부가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취약하며 인종적으로도 한국인과 상반되는 점이 있기 때문에 필리핀 역시 한국인 피란처로는 고려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것이 합동전략계획위원회의 판단이었다.

    유엔의 신탁통치하에 행정적으로는 뉴질랜드의 지배를 받고 있던 서사모아, 아메리칸 사모아, 파푸아(또는 브리티시 뉴기니) 등지도 피란 후보지로 거명됐다. 섬나라를 피란지로 택할 경우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대상은 인구비율의 변동이었다.

    파푸아의 겨우 총인구가 30만밖에 되지 않는데, 전체 인구와 맞먹거나 더 많은 한국인이 대량 이주할 경우 어떤 문제가 생길지 유추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상황이었다.

    소개지를 최종적으로 결정하기 위해서는 모든 후보지에 대한 정치·경제·인종적 문제점을 모두 감안해야 하는데 문제는 시간이었다. 모든 소개 후보지에 대해 철저하게 분석 작업을 실시할 시간적 여유가 충분치 않았던 것이다.

    분산 수용안도 대안 가운데 하나였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탓에 피란지로 적합하지는 않지만 분산 수용이 가능하기만 하다면 피지, 뉴 캘러도니아, 뉴 헤브리디스 군도 등도 고려할 만했다.

    어쨌든 합동전략계획위원회는 보고서에서, 유엔군이 한국에서 철수할 경우를 대비한 한국 소개 계획의 결론을 다음과 같이 내리고 있다. 한국 정부는 제주도로 철수하되 장기간 제주도를 사수하며, 여의치 않을 때는 극동사령부의 사전 계획에 따라 대만이나 류큐 열도에 망명정부를 수립하고, 민간 피란민은 극동사령부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 서사모아, 팔라우 등지로 옮겨가되, 본국으로 다시 귀환할 때까지는 유엔의 통제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a. 한국인 소개는 한국전에 참전해 의무를 수행한 유엔의 책임하에 실시돼야 함. 하지만 예기치 못했던 소개 계획이 사전에 공표되었을 때의 심리적 동요를 막기 위해 소개가 임박할 때까지는 유엔에 발표하지 말아야 함.

    b. 공산 치하에서 한국인들이 겪게 될 보복의 고통을 감안할 때, 유엔은 실질적으로 한국민들을 소개시킬 도덕적 의무가 있음.

    c. 한국 정부는 제주도에서 가능한 한 장기간 지원을 받아야 함. 대만으로 피란해 망명정부를 구성하거나, 대만이 여의치 않을 경우 대안 지역으로 류큐 열도에 망명정부를 수립하는 계획은 극동사령부가 준비해야 함.

    d. 일본을 방어하기 위해 한국군을 활용하는 것은 군사적으로 유리한 측면이 있으며, 이런 우발 사태에 대비한 계획은 극동사령부가 준비해야 함. 한국군을 대만으로 소개시키는 대안 역시 극동사령부가 맡아야 함.

    e. 극동사령부는 위의 b, c, d항에서 적시한 소개 대상 한국인 수를 검토해야 하는 바, 소개 대상을 여러 등급에 따라 우선 순위를 나누되 엄격하게 시행해야 함.

    f. 모든 한국인은 소개시, 비상사태가 종료되고 최종적으로 본국에 귀환할 때까지는 유엔의 지시에 따라야 함.

    g. 소개 대상인 비군사 요원 가운데 노약자와 여성, 아이가 많은 수를 차지하게 될 것임.

    h. 비군사 요원들의 소개지로 가장 적합하고 가능성이 높은 지역은 (1)서사모아 (2)팔라우(Palau), 얍(Yap), 포나피 아일랜드(Ponape Islands) (3)브리티시 뉴기니(파푸아 뉴기니)와 뉴기니령(Territory of New Guinea) 등임.

    리지웨이 극동군사령관의 한국군 전력 평가

    “장교 지휘력 엉망”

    6·25 전쟁이 터졌을 당시 ‘대한민국 육군’의 나이는 채 두 살이 못 되었다. 대한민국 최초의 군대인 남조선 국방경비대가 창설된 것은 1946년 1월. 미 군정청 국방사령부에 소속돼 있던 이 국방경비대는 정부 수립과 더불어 1948년 9월1일에 국방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며칠 후 다시 대한민국 육군으로 개칭됐다. 해군과 공군력은 전무했고, 담요 물통 등 개인 장비에서 개인 화기 및 부대 장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미국에서 조달받았다.

    더구나 국방경비대가 처음 창설될 때의 상황은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우선 광복 이후 남한에는 각종 군사 단체가 병립해 있었다. 해외에서 들어온 병력도 있었다. 미 군정이 우여곡절 끝에 이들을 통합해 국방경비대라는 간판을 달고, 마셜이 총사령관에 임명됐다. 전국적으로 모병을 하면서 8개 연대가 창설됐고, 미국식 편제로 군 조직이 개편되었다. 한 나라의 군이 형성되는 과정이기도 했지만, 전쟁을 치르기에는 모든 면에서 역부족이었다.

    낙동강 전선 형성, 인천 상륙작전, 북진, 중공군 참전 등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상황은 전쟁 발발 1년 만에 38도선의 전선 교착 상태로 빠져들었다. 워싱턴에서는 휴전 문제를 둘러싸고 설왕설래가 한창이었으나,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군 10개 사단을 추가 무장하는 데 필요한 장비 지원을 요청했다.

    1951년 5월1일, 맥아더의 뒤를 이어 신임 극동군 사령관이 된 리지웨이는 워싱턴의 육군부로 한 장짜리 1급 비밀 전문을 발송한다. 수신은 육군부로 되어 있지만, 콜린스 육군 참모총장만 볼 수 있도록 한 전문이었다.

    이 전문에서 리지웨이 사령관은 이승만 대통령이 요청한 한국군의 10개 사단에 대한 추가 무장건을 언급하면서, 장비를 추가 공급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강력하게 피력하고 있다. 지휘력이 엉망이고 훈련 상태가 형편없는 현재의 한국군에 무기와 장비를 지원하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나 다름없다는 판단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한국군 10개 사단 추가 무장 요청건 참고 요망. 미군 감축을 위해 한국군 부대를 추가 무장하는 것에 대한 장기 계획안이 검토되고 있음. 현재의 한국군이 제대로 된 전투수행 능력을 보여주지 않는 한, 한국군에 대한 추가 장비 공급은 시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본인의 판단임. 이와 관련, 4월28일자 밴 플릿 장군의 메시지를 아래와 같이 인용하며, 본인도 밴 플릿 장군의 의견에 동의함.

    한국군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는 인력이나 장비가 아니라 지휘력 부재와 훈련 미흡에 있음. 극소수 장교를 제외하고 한국군 내에는 지휘력 부재가 만연해 있음. 지휘력 부재와 훈련 미흡 상태가 개선되지 않는 한, 추가 조직을 허가하고 추가 장비를 공급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낭비일 뿐임.

    한국전 개전 이후 지금까지 한국군이 유실한 장비는 10개 사단이 필요한 장비의 양을 초과했음. 더구나 장비를 유실해가며 그만큼 적에게 타격을 입힌 것도 아니며, 어떤 경우에는 전투와 아무 상관 없이 유실된 경우도 있음. 이번 주만 해도 기타 장비를 포함해 3개 포병 대대(2개 한국군 대대와 1개 미군 대대)의 장비가 유실되었음. 주로 한국군의 지휘력 부재와 전투 의지 부족에 기인한 것임.

    이 전문에서는 리지웨이 사령관이 밴 플릿의 입을 빌려 간접적으로 한국군의 문제점을 질타하고 있으나, 2개월 후인 7월22일자 비밀 전문에서는 직접 자신의 입을 통해 더욱 호되게 한국군의 지휘력과 기강 해이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리지웨이 사령관은 이 전문 외에도 이미 일곱 차례에 걸쳐(C-61433, C-61589, C-61856, CX-62109, C-63287, C-63504, CX-65446) 한국군의 문제점을 워싱턴에 보고한 바 있다. 물론 이승만 대통령의 추가 장비공급 요청을 반대하는 것이었고, 다음 전문에도 나타나 있듯이 리지웨이의 한국군에 대한 불신은 극에 달해 있었다. 특히 장교들의 지휘력은 ‘취약’으로 평가하기조차 과분할 만큼 엉망인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애국심도 명예심도 충성심도 품위도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육군부 긴급 통지 96459. 7차례에 걸쳐 개진한 바 있는 한국군에 대한 본인의 의견은 지금도 전혀 바뀌지 않았음. 이 문제에 대해 여러 차례 토의에서도 밝힌 바 있듯이 아래의 문제점은 재차 강조되지 않으면 안 됨.

    지금 군 조직에서 절대 필요한 것은 전문 군인으로서 제대로 된 능력을 갖춘 장교단임. 이 장교들은 투지에 불타며, 진취적인 지휘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하고, 애국심, 명예심, 품위, 충성심, 프로다운 자긍심 등 기본적인 정신무장이 되어 있어야 함. 현재 한국군에는 그런 장교단이 없음. 그런 장교단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시간이 많이 필요함.

    설사 그런 그룹이 생기더라도, 유능한 군의 두 번째 기본 요소이자 장교와 마찬가지로 정신 무장이 되어 있고 전문인으로 자질을 갖춘 하사관 문제가 여전히 남게 됨. 현재 한국군에는 그런 하사관이 없음. 이 두 가지 기본 요소가 갖춰지기 전에는 한국군은 유능한 전투력이 될 수 없음.

    장교와 하사관 그룹을 새로 창출해내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주한 미 군사고문단(KMAG)임. 미국은 이 주한 미 군사고문단을 통해 실질적으로 한국군에 명령을 내리고 있고,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음. 한·미 간에 이런 관계가 종결되면 한국군에 능률적인 전투력을 심어주는 데 필요한 시간이 더 늘어나게 됨.

    한번 더 본인의 강력한 의견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자 함. 대한민국과 공산주의 위성국 간의 전쟁을 매개로 미국이 러시아와 군비 경쟁에 돌입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고 봄. 북한의 중국 공산주의자나 소련 연대에 맞서 싸울 수 있을 만큼 남한 군대를 완벽하고 능률적인 군대로 만들기 위해서라면 결코 남한에 장비를 대주거나 지속적인 지원을 해줄 수가 없음.

    상기 의견과 과거의 언급에 기초해볼 때, 가장 낙관적으로 보더라도 보충 계획과 훈련 계획이 시행될 경우 현재 상황에서 한국군의 능률을 완비하려면 최소 3년이 걸릴 것임. 만약 교전이 끝나고 훈련 교관이 한국군의 기본 훈련에 즉각 투입된다면 최소 2년으로 단축이 가능함.

    리지웨이 사령관은 이 전문에서 이 밖에도 훈련 시설 집중화, 9주짜리 보병 재교육 프로그램 실시, 장교 훈련 코스의 24주 연장(현재 18주) 등 구체적인 한국군 능률화 시안을 제시하고 있다.

    극동사령관 맥아더는 개전 초 한강 전선을 시찰하면서 무기가 아닌 ‘지형 장애물’에 의지해 싸우는 한국군을 보았고 제대로 된 지휘관은 찾아보기가 힘들다고 했다. 개전 1년이 지난 후 맥아더 후임이었던 도쿄의 리지웨이도, 직접 전투를 지휘했던 8군 사령관 밴 플릿도 같은 말을 했다. 장비를 지원해야 소용없다는 것이었다.

    남한 철수와 망명정부. 파푸아뉴기니나 서사모아에 발을 붙인 피란민의 모습과 대만의 한국 망명정부는 상상하기조차 싫다. 미 육군참모총장이 언급했던 원자탄은 입에 담기 끔찍하지만 사실이었고 현실이었다.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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