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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ㆍ25 50주년 특별연재

중공군 참전 경고한 주은래… 자만에 빠진 도쿄의 맥아더

‘잊혀진 전쟁’ 그 결정적 순간들의 秘錄(중)

  • 이정훈 hoon@donga.com

중공군 참전 경고한 주은래… 자만에 빠진 도쿄의 맥아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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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리와 기사문리 사이에는 동해로 흘러드는 광정천이라는 조그만 하천이 있다. 이 하천 위에는 다리가 걸려있는데, 이날 3사단이 38선을 걷어차고 북진을 개시했다고 하여 이 다리는 ‘돌파교‘가 되 었다. 돌파교 근처에는 38선 휴게소가 만들어졌고, 이곳에서 그리 멀지않은 동해안에 하조대 해수욕장이 있다.이날 수도사단도 창촌리에서 38선 휴게소가 만들어졌고,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동 해안에 하조대 해수욕장이 있다.이날 수도사단도 창촌리에서 38선을 돌파해 북진에 들어갔다.그 후 국방부는 이날을 기려 국군의 날을 10월1일로 정했다.

북진 명령을 내린 정 총참모장은 미군이 호되게 항의해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도 아무 말이 없더니, 10월2일 도쿄의 극동군사령부겸 UN군 사령부에서 ”UN군은 10월3일 0시부로 38선 이북의 북한지역에서의 작전을 연장한다”는 일반명령 제2호를 발표했다. 그리고 닷새 후 UN은 찬성 47, 반대 5, 기권 8로 UN군의 북진을 승인했다. 이로써 국군 1군단의 단독 북진은 추인받게 되었 다.

경북축선을 따라 서울로 올라오던 미 1군단이 10월5일 대전 충남도청에서 북진을 위한 사단장 회의를 열었다.미 1군단에 배속된 백선엽 국군 1사단장도 이 회의에 참석했는데,그가 받아든 명령서의 내용은 이러했다. ‘미 1기병사단이 미 1군단의 주공으로 경의국도를 따라 평양으로 진격한다.영연방 27여단은 군단 에비로 미 1기병사단의 뒤를 따른다.한국군 1사단은 경의축선의 좌측인 개성-해 주-안악으로 진격하며 작적을 소탕한다.‘

1894년청일전쟁 때 섭지초(葉志超)가 이끄는 청나라군이 평양성에 포진하고 한성 진격을 준비했다.그러자 일본군은 3사단과 5사단으로 1군을 편성하고 야마가타 아리모토를 사령관에 임명해 평양 진격 을 명령했다. 이때 야마가타는 ”대단한 난전(難戰)에 처하더라도 적에게 사로잡히지 말고 깨끗이 죽음을 선택해 일본 남아의 기상을 보여라!”고 연설했다.이 연설은 그 후 일본군의 ‘항복 거절‘ 전통 을 세우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일본군의 평양 공격 선봉대는 5사단이었다.5사단은 평양 우측으로 접근해 평양성 현무문을 점령함으로써 전투는 싱겁게 끝나고, 섭지초는 백기를 들고 항복했다.백사단장의 고향은 이러한 전투가 벌 어진 평양이다. 그는 미 1군단의 진격로가 청일전쟁 때 일본군이 진격한 것과 흡사하다고 판단하고, 즉시 밀번 1군단장에 면담을 요청해 국군 1사단도 평양으로 진격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밀번 1군단장은 가만히 듣고 있더니 ”한국군에는 차량이 많은가. 미군사단은 수백대의 차량을 갖고 있다.기동력과 화력이 우세한 미군사단을 앞세워 신속히 진군해야 한다”고 설명했다.백사단장 은”내 고향은 평양이고, 나는 청일전쟁사를 잘 알고 있다.비록 차량은 적지만 한국은 산이 험해 오히려 도보 진격이 빠를 수도 있다. 국군 1사단을 신계-수안을 거쳐 평양으로 진격하게 해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강청했다.물그러미 바라보던 밀번 군단장은 ”그러면 국군 1사단과 미 24사단의 진격로를 교체한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미 1군단의 진격로가 확정됐는데 뜻밖의 사태가 벌어졌다.서울을 점령하고 있던 미 10군단 예하 미 육군 7사단이 부산으로 내려가고,미 해병 1사단은 인천으로 이동한 것이다.맥아더 원수가 미10군단을 빼내 다시 원산으로 상륙시키는 작전을 계획했기 때문이었다.그런데 인천으로 보내고 육군 7사단은 경부선을 타고 부산항으로 집결케 한 것이다.

당시 한강 다리는 모두 파괴돼 고무 보트로 연결한 배다리 두 개뿐이었다. 그런데 한쪽에서는 미 10군단이 한강 남쪽으로 넘어오고, 다른쪽에서는 미 1군단이 한강 북쪽으로 넘어가니 자연 시간이 지체 되었다. 이 무렵부터 필리핀 부대를 선두로 나머지 12개국(미국군과 영국군 부대는 벌써 와 있었다) 부대가 차레로 한국에 도착하기 시작했다.‘오고 가고, 오고 가고‘승전의 기쁨은 잠시이고, 혼란스 러운 가운데 대규모 부대이동이 시작되었다.

맥아더의 이러한 조치는 10군단 지휘권을 8군 사령관인 워커 중장에게 주지 않겠다는 것이었다.서울로 총반격을 펴 북상할 때만 해도 워커사령관은 10군단이 당연히 자기 통제하에 들어올 거라고 믿고 있었다. 이 일로 인해 성격이 급한 워커는 맥아더를 맹비난했다.

물론 맥아더의 카리스마 때문에 면전이 아닌 자기 부하들 앞에서... 이 바람에 알몬드 10군단장도 워커를 싫어하기 시작했다.도쿄에 있는 맥아더원수는 워커에게 모든 것을 맡겨 한국전 승리의 공이 워커에게 몽땅 돌아가는 것을 꺼려 이른바 ‘분할 지배(divided and rule)‘를 한 것은 아닐까?

불꽃 튀는 북진 경쟁

10월6일 6-7-8사단으로 구성된 국군 2군단이 38선을 넘어 평강-철원-김화를 점령했다.국군에서도 공다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10월18일 밤 임부택 대령의 6사단 7연대는 강원도-함경남도와 붙어 있는 평안남도 양덕군 양덕읍을 점령했다.그런데 거의 동시에 황해도 신평군쪽에서 고근홍(高根弘) 대령이 이끄는 8사단 10연대가 들어왔다.그 즉시 두 연대장은 서로 ”양덕을 선점했다”며 말다툼에 들 어갔다.동해안에서는 수도사단과 3사단이 경쟁하듯, 중부전선에서는 6사단과 8사단이 경쟁하기 시작한 것이다.

두 연대가 다툰 것은 유재훙 2단장이 ”양덕을 먼저 점령한 부대에게 도로 사용 우선권을 준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도로를 먼저 사용하게 되면 그만큼 북진 속도가 빨라진다.당시 두 사단은 정일권 총 참모장에게서 비밀리에 양덕을 거쳐 평양쪽으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도로 사용 우선권을 놓고 다툴 수박에 없었다. 이미 10월10일 26연대가 서로 원산을 선점했다고 다툰 적이 있었다.

10월7일 미 1기병사단 수색대가 38선을 넘고 11일에는 미 1군단 예하 국군 1사단이 38선을 넘었다.하지만 미 1군단의 진격은 동부나 중부전선에 비해 현저히 늦었다.퇴각하는 인민군이 도로 곳곳에 지뢰를 매설해 놓았기 때문이다.

11일밤 더딘 진격속도를 고민하는 백선엽 1사단장이 밀번 1군단장을찾아가 전차 지원을 요청하자, 밀번 군단장은 30여 분을 생각하더니 전차 1개 중대(10대)를 보내주었다.이때부터 백 사단장은 공 병과 보병, 전차, 포병이 한 덩어리가 돼 진격하는 이른바 ‘패튼 전법‘을구사했다.2차 세게대전 때 유럽 전장에서 패튼 3군 사령관은 이러한 제병과 합동작전으로 쾌속 진군했다.

전차가 배속되자 국군 1사단 병사들의 사기가 크게 높아졌다.병사들은 ”우리는 전진한다”면서 ”전진, 전진!”이라는 구호가 굳어져 1사단은 ‘전진부대‘란 별명을 갖게 되었다.전진부대는 먼저 전차로 돌파하고, 이 돌파선을 중심으로 멈춰서서 좌우 면을 포위 공격한 다음 다시 전차를 돌진시키는 ‘분진협격(分進浹擊)‘전술을 구사했다. 이따금 공병대가 지뢰를 제거하기 위해 부대를 세울 뿐 전진 사단은 쾌속으로 진군했다.

이렇게 되자 미 1기병사단 우측에 있는 5기병연대와 국군 1사단 선봉대인 12연대 가속도 경쟁을 하는 모양이 되었다.국군 1사단은 파죽지세로 신계-수안-율리를 거쳐 10월 17일 평안남도 중화군에 집 입했다. 이때부터 국군 1사단은 잔적 소탕은 아예 포기하고 평양 선착에 몰두했다.10월18일 밤 평양 외곽 15km지점인 지동리에 도착한 백사단장은 15연대(연대장 조재미 중령)로 하여금 서북쪽으로 우회해 대동강을 건너 평양을 협격하라고 지시했다.

남은 이는 11연대장 김동빈 대령과 12연대장 김점곤 대령이었다.그때까지 주공은 김점곤 대령이 이끄는 12연대였다.육사 1기 동기인 두 사람은 경쟁 심리가 작동해 서로 주공을 차지해야 한다며 신 경전을 펼쳤다. 이때 사단장이 위엄을 놓치면 작전은 뒤죽박죽이 돼버린다.백사단장은 눈을 딱 감고 ”12연대는 구공으로 전차와 협동해 오늘밤 안에 대동교를 향해 진격하고, 11연대는 미림 비행장과 평양비행장을 거쳐 능라도 상류인 주암산 및에서 대동강을 도하하라”고 지시했다.

10월19일 날이 밝자 ‘모스키토‘라 불리는 정찰기가 나타나 국군 1사단과 미 1기병사단 상공을 오가며 쌍방의 위치를 알려주었다.미 1기병사단도 중화를 통과하고 있었다.지동리부터 평양까지는 허허 벌판인데 문제는 지뢰였다.국군 1사단 12연대가 지뢰를 하나하나 제거하며 미 1기병사단과 합류하기로 한 대동교 입구의 선교리 로터리에 도착한 것은 오전 11시쯤이었다.그 순간 ”꽝”하는 폭음과 함 께 대동교가 무너져 내렸다.

개전 첫날 국군 1사단은 임진강 철교 폭파에 실패했는데 인민군은 정확한 시기에 대동교를 폭파한 것이다.그러는 사이 국군 1사단에 배속된 미군 전차병들이 ”Welcome 1st Cav.Division-from 1st ROK Division Park‘(환영! 미 제1기병사단-한국군 1사단 백선엽)라는 피켓을 만들었다.

40분이 지나자 미 1기병사단 선두와 함께 밀번 1군단장, 게이 1기병사단장 그리고 트루먼 미 대통령의 특사인 로 소장이 도착했다.이로써 국군이 미군보다 먼저 평양에 도착한 것이 확인되었다.어느 틈엔가외신 종군기자들이 나타나 플래시를 터뜨렸다.한`미 장병들은 얼사 안고 춤을 추었다.

국군사단의 평양선착

이 시각 서북쪽으로 우회한 1사단 15연대가 수심이 낮은 곳을 택해 대동강을 건너 김일성대학을 접수하고, 이어 평양 중심부(당시는 일본식으로 ‘本평양‘으로 불렀다)에 도착했다.12연대에 평양 선착을 내준 11연대는 수심이 얕아 ‘도섭장(渡涉場)이라 불리는 지점을 택해 대동강을 건넜다.이러한 지점 선정은 백사단장이 평양 곳곳을 잘 알았기 때문에 가능했다.하지만 미군은 공병부대가 부교를 설 치한 다음에야 강을 건넜다.

국군1사단과 미 1기병사단이 평양 시내로 막 들어갈 때쯤 평양 서쪽에서 일단의 부대가 몰려왔다.그 바람에 크게 긴장했는데, 뜻밖에도 7사단 8연대(연대장 김용주 대령)로 밝혀졌다.백사단장이 김 대령을 찾아 ”왜 남의 작전 구역에 무단으로 침입했느냐”고 야단치자,김대령은 ”유재흥 군단장과 신상철 사단장의 명령을 받고 진로를 바꿔 평양으로 진격했다‘고 대꾸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정일권 총참모장에게 어떻게 해서라도 국군 부대를 먼저 평양에 선착시키라고 지시했다.그래서 정 총참모장은 국군 부대로만 편성된 2군단에 평양 공격을 명령했던 것이다. 평안남도 양덕에서 6사단 7연대와 8사단 10연대가 우격다짐을 하게된 것도 그래서였다.그러나 두 사단이 싸움을 벌임에 따라 6사단과 8사단은 북쪽으로 진로를 바꾸게 하고 대신 7사단에 평양 진격임무를 내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날 백선엽 사단장은 아주 중요한 일을 간과하고 말았다.10월20일 포스터 중령이 이끄는 미 2사단 소속 장교들이 평양에 들어와 공공건물을 샅샅이 뒤져 발견한 모든 문서를 도쿄에 있는 미극 동군 본부로 보냈다.이 문서 중에는 인민군 최고사령부가 4사단장 이 권무소장 앞으로 보낸 ‘선제타격‘ 계획도 들어있었다. 이로써 미군은 6·25가 인민군의 남침으로 시작되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 거를 확보했다.그러나 당시 한국군은 문서 수집의 중요성을 간과했다.

10월21일 이승만 대통령은 평양시민대회를 열고 국군 1사단을 표창했다.같은 날 도쿄에서 날아온 맥아더 원수도 평양 돌입 선봉대인 미 1기병사단 5연대 F중대를 사열했다.사열 도중 맥아더는 갑자기 ”96일 전 포항으로 상륙할 때 있었던 병사가 있으면 앞으로 나오라”고 명령했다.그러자 200명의 병사 중에서 단 5명이 앞으로 나왔는데, 그중 3명은 부상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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