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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술문화 기행

데킬라는 목구멍으로, 코냑은 콧구멍으로

  • 권삼윤 문명비평가

데킬라는 목구멍으로, 코냑은 콧구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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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양의 술은 섬세하다. 미묘한 맛과 향의 차이, 그래서 마실 때도 코·입술·혓바닥 같은 섬세한 감각기관을 동원한다. 동양의 술은 투박하다. 술잔도 크고 두껍다. 거기에다 철철 넘치게 따른다. 홀짝거리며 마시면 안 된다. 단번에 목구멍으로 털어넣는다.》
얼마 전 스코틀랜드의 한 친구가 우리나라를 찾아오면서 선물로 술 한 병을 들고 왔다. 귀한 술이라며 2홉들이 위스키 한 병을 내놓았는데, 상표에는 발음하기도 힘든 ‘브루이치라디치(Bruichladdich)’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그 술을 앞에 놓고 친구는 “대서양으로부터 불어오는 거친 바람을 온몸으로 맞고 선 스코틀랜드 동부의 이슬레(Islay) 섬, 그곳에서도 바닷물과 강물이 서로 만나는 갯벌 아주 깊은 바닥에서 채취한 맑은 물로 만든 위스키”라고 했다. 100여 년의 세월(1881년부터 생산)이 흐르는 사이에 지형이 변해 이제는 원료가 되는 물을 더 이상 구할 수 없게 됐고, 물 재고마저 바닥나는 10년 뒤에는 술 생산도 중단된다는 얘기였다.

다시 맛보기 힘들 그 귀한 몰트 위스키를 잔에 따르고는 가만히 향내를 맡았다. 색깔은 투명에 가까웠고 향은 있는 듯 없는 듯 은은했다. 잔을 천천히 입술로 가져갔다. 가능한 한 목구멍으로 넘기지 않고 입안에 아스라이 퍼지는 맛을 오래도록 음미했다. 혀끝에 와 닿는 촉감은 아주 부드러웠고 뒷맛도 산뜻했다.

바로 그때 친구는 “좋은 위스키와 유명한 위스키는 다르다. 유명한 것이라고 해서 다 최상의 위스키는 아니다”며 위스키 본고장 출신답게 위스키론(論)을 풀어놓았다. 조니워커나 시바스 리갈은 유명한 위스키이고, 브루이치라디치는 유명하지는 않지만 분명히 좋은 위스키라고 예를 들었다. 무슨 상품이든 유명해지기까지는 엄청난 마케팅비용이 투입돼야 하는데 위스키도 거기에서 예외가 되지 않으며, 소비자는 그런 유명세를 치르느라 비싼 값으로 술을 마시게 된다는 것이었다.

조니워커의 판매전략



위스키라고 하면 누구나 맨 먼저 떠올리는 조니워커는 스코틀랜드에 본사를 둔 유나이티드 디스틸러리(UD)에서 생산된다. UD는 이 밖에 올드파, 드와, 벨즈 등의 위스키류와 헤네시 코냑, 그리고 진과 보드카도 함께 만드는데, UD를 먹여 살리는 으뜸가는 효자는 세계 스카치위스키 시장 점유율 1위를 자랑하는 위스키다. 회사 전체 수익의 약 80%를 위스키로 벌어들인다. 그중에서도 소비자의 취향과 주머니 사정에 따라 골라 마실 수 있도록 블루, 골드, 블랙, 레드 등 가격대가 각기 다른 4종의 라벨을 시장에 내놓고 있는 조니워커가 절반을 차지한다.

조니워커는 1820년 스코틀랜드의 소도시 킬마녹에서 조니 워커라는 잡화상 주인이 설립한 술 회사. 세인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은 1908년, 긴 장화를 신은 영국신사가 힘차게 걷고 있는 디자인의 심벌마크가 등장하면서부터였다. ‘아직도 건재하다(Still going strong)’는 글이 찍혀 있는 이 심벌마크는 조니워커의 손자 알렉산더 워커가 톰 브라운이라는 친구에게 디자인을 의뢰해 얻은 것이었다.

이전에 무역업에 종사했던 브라운이 조니워커사의 경영에 깊이 관여하게 된 것은 우연한 계기에서 비롯됐다. 조니워커사가 홍수로 큰 피해를 당해 도산 위기에 빠지자 그는 무역업자 출신답게 해외시장 개척에서 해결책을 찾았고, 그 과정에 특이한 마케팅 전략을 구사했다.

이런 전통을 가진 조니워커는 지금도 나라별로 특화된 광고전략을 편다. 유럽대륙에서는 누구와도 함께 어울려 마시는 술이라는 이미지를 살리고, 검은색이 행운을 상징하는 미국에서는 검은 고양이와 피아노의 검은 건반을 광고에 등장시켜 고급스런 분위기를 강조하며, 태국에서는 젊은층을 대상으로 능동적이고 활동적인 특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접근한다. 조니워커는 2차 세계대전 중에도 광고를 계속한 유일한 술 회사였다.

그러나 지금의 조니워커사는 워커 가문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1940년대에 워커가의 대가 끊겼기 때문이다. 그 후 ‘양조장 연합’이란 뜻의 유나이티드 디스틸러리로 상호를 바꾸었고, 1987년에는 기네스 그룹의 일원이 됐다. 세계의 진기록 모음집인 ‘기네스북’을 출간하는 기네스 인터내셔널이 바로 그 모기업이다.

기네스 그룹은 UD를 인수하면서 미국 유수의 광고기획사인 오길비 앤 마더사의 앤소니 테넌트 회장을 전격 스카우트해 UD의 판매 및 유통 부문을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그 핵심은 미국 일본 호주 아프리카 등지에 각각 해외 판매거점을 확보, 현지 실정에 맞는 마케팅방법을 채택하고 그 책임자도 영국인이 아닌 현지인을 고용하는 것이었다. UD는 최근 한국, 일본 등 동남아시아 시장이 급격하게 성장하는 것을 중시, 이 지역에 대한 홍보와 판촉활동을 크게 강화했다. 한국은 그 덕분에 세계에서 다섯 번째 가는 스카치위스키 소비대국으로 부상했다.

오크통이 빚은 술맛

조니워커나 발렌타인, 시바스 리갈, 글렌피딕 등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스카치위스키 회사들은 뛰어난 마케팅전략 못지않게 질을 향상하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스카치위스키의 역사를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위스키란 말은 ‘생명의 물’이란 뜻의 켈트어 ‘위스케 베아타(uisge beatha)’에서 나왔다. 유럽대륙의 원주민이기도 한 켈트인들이 마지막까지 살았던 곳이 지금의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였다.

그러나 이런 이유만으로 이곳이 자연스레 위스키의 본향으로 떠오른 것은 아니다. 증류주가 유럽대륙에 처음 등장한 것은 12세기로, 십자군원정대가 중동의 연금술사들에게서 비법을 전수받고 돌아온 뒤였기에 켈트인들의 술이 지금의 위스키였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런데도 이곳이 위스키의 원조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보리와 같은 추동작물이 재배되는 지역인데다, 무엇보다 질 좋은 피트(peat), 즉 이탄(泥炭)이 지천에 깔려 있어 맥아(몰트)를 건조하는 데 더없이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어서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의 시골 가정에선 맥아를 대개 응달이나 뜨뜻한 방바닥에서 말렸는데, 스코틀랜드에선 피트를 태우면서 그 불로 맥아를 직접 말려 피트의 연기가 맥아에 깊이 스며들도록 했다. 스카치위스키에 독특한 향이 밴 것은 이 때문이다. 이를 ‘스모키 플레이버(smokey flavor)’라고 하는데, 아일랜드에서는 피트를 사용하면서도 스코틀랜드인들과는 달리 간접 건조방식을 이용하기 때문에 아이리시 위스키에는 이런 훈향이 없다. 그래서 아이리시 위스키는 스카치위스키와 쉽게 구별된다.

피트로 말린 위스키에서 그런 향내가 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 ‘폭풍의 언덕’에 나오는, 자홍색 꽃을 피우는 히스(heath)라는 목본식물이 이 피트 위에서 자라다 죽고 자라다 죽고 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사이 히스의 향기가 그 속으로 녹아들었다가 그것이 타면서 다시 위스키에 스며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기의 스카치위스키는 지금의 것과는 아주 달랐다. 단지 톡 쏘는 향과 거친 맛을 지닌 평범한 알코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 18세기 초에 결정적인 전기를 맞이했다. 지방정부가 높은 주세를 부과하자 양조업자들은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몰래 술을 만들었는데, 그때 단속을 피하느라 낡은 오크통 속에 위스키를 담아 위장했다. 이것이 호박색을 띠며 독특한 향내와 부드러운 맛을 내는 오늘날의 위스키를 탄생시켰다. 오크통 속에서 우러난 여러 성분이 위스키와 어울리면서 그런 결과를 만든 것.

이런 까닭에 스카치위스키는 스코틀랜드산 오크통에서 숙성돼야 제 맛이 난다는 말이 생겨났다. 세계의 위스키 애호가들이 다른 브랜드를 제쳐놓고 스카치위스키를 탐하는 것도 이 지방에서 나오는 오크통의 독특한 재질 때문이다. 조니워커 블랙 라벨의 경우 오크통 안에서 최소한 12년간 보관된다. 발렌타인의 나이가 17년이냐, 25년이냐, 아니면 30년이냐를 따지고 그 연수가 올라감에 따라 가격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가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맛과 원가의 절묘한 타협

스코틀랜드에는 좋은 물이 많이 흐른다. 그 중에서도 숲이 울창한 협곡, 연어가 노니는 굽이쳐 흐르는 강, 그림 같은 어촌이 있는 하이랜드는 스카치위스키의 최대 생산지다. 이곳에서는 골짜기의 눈이 녹아 생긴 순수한 물로 위스키를 빚는데, 몇몇 양조장에서는 방문객들에게 제조과정을 직접 보여주기도 한다.

에든버러 북쪽의 스트라트스페이(Strathspey)는 몰트 위스키 양조산업의 중심지이며, 그 북쪽의 인버네스(Inverness)는 ‘댈러스 듀(Dallas Dhu)’라는 ‘몰트 위스키 트레일’의 출발점이다. 12세기 도미니크 수도사들이 사용했다는 샘물로 위스키를 빚는다는 시바스 리갈 양조장도 이 근처에 있다. 위스키 양조장이 하이랜드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아래의 로랜드와 섬 지역에도 산재해 있다. 브루이치라디치가 생산되는 이슬레, 스키예(Skye), 멀(Mull) 등이 그런 곳들이다.

위스키는 엿기름만으로 만드는 몰트 위스키와 곡류 등을 함께 섞어 만드는 그레인 위스키로 크게 나눌 수 있다. 후자는 발아시키지 않은 보리·호밀·옥수수·때로는 감자 전분을 기본 재료로 해서 소량의 엿기름을 거기에 섞어 당화(糖化)시키는 방법을 쓴다. 엿기름에는 강력한 당화효소가 있어 기술적으로는 문제가 없지만, 이 경우 향기가 떨어지는 단점이 있다. 그럼에도 그레인 위스키를 생산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생산원가가 몰트 위스키보다 훨씬 싸게 먹히기 때문.

생산원가와 맛, 이 이율배반적인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해 나온 것이 이른바 블렌드 위스키다. 양산된 그레인 위스키에 향기짙은 몰트 위스키를 혼합해 만드는 위스키가 그것이다. 조니워커, 시바스리갈, 발렌타인 등의 유명한 위스키는 모두 블렌드 위스키인데, 이들은 생산량이 충분하므로 세계시장을 상대로 마케팅 전략을 구사할 수 있는 것이다.

조니워커 블랙의 경우 40개 이상의 몰트 위스키를 섞어 만든다. 어떤 몰트 위스키를 얼마나 섞는지는 블렌딩 총책임자인 ‘마스터 블렌더’만 알고 있다. 이 비법은 위스키 영업의 핵심이기 때문에 코카콜라의 원액 성분처럼 절대로 공개되지 않으며, 마스터 블렌더 자손 대대로 전수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렇게 블렌딩 과정을 거친 위스키는 원액 상태로 오크통 속에 들어가 오랜 기간 숙성된다. 이 과정을 통해 위스키는 깊고 은은한 향취를 더해간다. 다양한 위스키가 모이는 ‘양조장 연합’일 수밖에 없는 블렌드 위스키의 최대 메이커, 조니워커사는 그래서 UD란 이름을 갖게 됐다.

위스키는 고급술이다. 영국인들도 자기네 술이지만 워낙 비싸서 마음대로 마시지 못한다. 그들의 대중주점인 펍(pub)에 들어가 보면 비교적 싼 술인 미국의 진 종류나 아니면 라거 비어보다 쓰면서 더 독한 영국식 생맥주 에일(ale)을 주로 마시는 것을 볼 수 있다. 값비싼 스카치위스키를 혓바닥으로 음미하기는커녕 곧장 목구멍에 탁 털어넣고는 “역시 비싼 술이 잘 넘어가. 목에 착 감겨서 내려가는 맛이라니” 하며 마셔대는 사람은 영락없이 한국사람이다.

이런 주법은 우리 성질이 급해서이기도 하고, 술을 홀짝홀짝 마시면 ‘사나이답지 못하다’고 생각해서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우리네 술이 대개 도수가 비교적 약한데다 맛과 향을 느껴가며 마시는 것이 아니어서 그런 습관이 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술을 목구멍으로 넘기는 순간 맛의 극치를 경험한다.

비싼 술을 마시는 서양사람들은 코와 혓바닥에서 쾌감을 느낀다고 할 수 있다. 반면 한국 사내들의 ‘술 성감대’는 입술도 혓바닥도 아닌 목구멍이다. 그래서 얼큰하게 한 잔 걸치면 자연스레 육자배기 한 가락이 구성지게 뽑혀나온다.

말이 나왔으니까 펍에 대해 한마디만 하고 넘어가자. 펍은 ‘퍼블릭 하우스’의 준말이다. 그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나이와 성별·직업에 관계없이 이용할 수 있는 공공의 공간이다. 그렇긴 해도 주고객은 샐러리맨들이다. 남녀가 함께라면 펍보다 분위기가 밝은 라운지 바로 간다.

펍에는 평범한 샐러리맨들이 하루 일과를 끝내고 가벼운 마음으로 찾아와 좋아하는 술을 한 잔 하든가, 아니면 친구들과 어울려 다트 놀이를 하다 간다. 문은 대개 정오에 열었다가 밤 11시쯤에 닫는다. 이곳에서 맥주를 마시려면 그냥 ‘비어’라고 해서는 못 알아듣고, ‘비터 에일(bitter ale)’이라고 해야 된다. 병맥주를 주문할 때는 ‘라거 비어’라고 해야 알아듣는다.

펍이 영국사회에 자리잡은 것은 엘리자베스 1세 치하였던 16세기 초. 왕실이 세수(稅收)를 늘리기 위해 귀족이나 특정단체에게 펍 운영권을 허가해주고는 펍이 아닌 곳에서는 술을 팔지 못하게 하면서부터였다. 술집이면서 대중의 집회소이고, 또한 역마차의 발착소 구실까지 했던 펍은 19세기 초, 산업혁명의 여파로 사회변혁이 가속화되자 직업알선소나 노동조합의 임시사무실로도 이용됐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때가 펍의 전성시대였다.

그러나 모든 것은 차면 넘치는 법. 펍이 대중화되고 그리하여 알코올 중독이 사회문제로 떠오르자 당국은 펍의 자격요건을 강화했고 이는 펍을 위축시켰다. 그렇지만 펍은 지금도 여전히 영국인들의 지친 마음을 어루만지며 사랑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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