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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자의 촌철살인, 자연·해학·고독의 노래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 하이쿠 감상법

  • 유옥희 계명대 어문학부 교수·일어일문학

17자의 촌철살인, 자연·해학·고독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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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 한 줄의 시에 찰나와 우주를 담는다. 일본 전통시 하이쿠 읽기.》
우리 감각으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암호와도 같은 17자의 시가 있다. 대체 이 시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 길이여/ 행인 하나 없는데/ 저무는 가을”(바쇼·芭蕉)

“범종에 앉아/ 하염없이 잠자는/ 나비 한 마리”(부손·蕪村)

“여윈 정강이/ 부둥켜 안고 있네/ 오동잎 하나”(잇사·一茶)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 일본의 정형시 하이쿠(俳句)가 그것이다. 하이쿠는 5/7/5의 운율을 지닌 한 줄 짜리 시(간혹 삼행으로 나눠 쓰기도 한다)로,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으면서 오늘날까지 창작되고 회자되는 대중시이기도 하다.



센세이셔널한 일본의 대중문화가 아닌 한적한 정신문화의 하나인 하이쿠에 조심스러운 관심이 쏠리고 있다. 얼마 전에는 류시화 시인이 ‘한 줄도 길다’라는 하이쿠 번역시집을 내서 그 관심에 불을 지폈다. 일각에서는 일본의 대중문화에 대한 우려와 마찬가지로 ‘왜색’ 정서의 잠입을 염려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은 듯하다.

하지만 한국에서 요즘 보이는 하이쿠에 대한 관심은 오히려 너무나 늦은 것이라 해야 마땅하다. 하이쿠 읽기는 일본인의 사고나 미학을 읽어내는 지름길이 될 수 있는데, 일본 문학에 대해 ‘알고 싶기고 하고 무시하고 싶기도 한’ 복잡한 우리 정서 때문에 그런 길을 외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이쿠는 유럽 등 서구에는 이미 1910년대 에즈라 파운드를 중심으로 한 이미지즘이 일어났을 때 소개돼, 근 한세기가 지난 지금은 가장 세계화된 일본의 정신유산으로 자리잡았다.

많은 한국 시인들이 일본을 가까이 두고도 미국이나 프랑스에서 영어나 불어로 번역된 하이쿠를 처음 접하고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한국에서 나온 몇 안 되는 하이쿠 번역집들이 영역(英譯)된 하이쿠를 중역(重譯)한 흔적을 보이는 이유도 여기 있다.

하이쿠는 선시(禪詩)인가?

‘하이쿠’라고 하면 간혹 “아! 개구리 퐁당하는 그거요? 일종의 선시(禪詩) 같은 거 아니에요?”라든가, “바쇼라는 김삿갓 같은 방랑시인이 있었다던데…” 라는 정도의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는 바쇼가 읊은 “오래된 연못/ 개구리 뛰어드는/ 물소리 퐁당!”이라는 작품이 전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개구리가 뛰어드는 물소리로 인해 정적의 세계가 찰나적으로 깨졌다가 다시 원래의 정적으로 돌아가 ‘존재’를 인식하는, 일종의 선적(禪的)인 깨달음을 추구한 시라고 알려져 있다. 과연 이 시의 주제는 선적인 깨달음일까? 하이쿠는 진정 선시 같은 것일까?

평소 강단에서 학생들의 반응을 유도해보는 하이쿠 두 구가 있다.

“대야의 목물/ 버릴 곳이 없는/ 벌레 소리”(오니쓰라)

“나팔꽃 넝쿨에/ 두레박줄 빼앗겨/ 얻어마신 물”(치요조)

두 하이쿠는 풀벌레 소리나 나팔꽃을 사랑하는 마음을 암시적으로 표현한 공통된 기법의 작품이다. 그러나 표현방법도 생소할 뿐 아니라, 가을밤의 풀벌레 소리나, 하룻밤새 촉수가 쑥쑥 자라 넝쿨을 감는 나팔꽃의 습성을 잘 모르는 학생들에게는 거의 수수께끼일 수밖에 없다. 멍해 있는 학생들에게 “가을밤 외로운밤 벌레우는 밤…”이라는 가곡을 예로 들기도 하고, “나팔꽃이 어떻게 자라지? 여긴 화훼영농 후계자가 없나?”고 어설픈 힌트를 제시하기도 한다.

위 두 하이쿠는 문학성이 짙은 작품은 아니지만, 하이쿠를 이해하는 열쇠를 많이 지니고 있다. 첫째, ‘벌레’라는 키고(季語: 계절을 상징하는 말)다. ‘벌레’는 하이쿠에서는 반드시 풀벌레 소리를 의미하며 가을밤의 적막감에 대한 상징으로 표현된다. 둘째, 암시적인 표현기법이다. ‘가을 밤 풀벌레 소리가 너무 아름답고 쓸쓸하다’는 식의 직설적인 서술이 아니라, 그 풀벌레 울음을 차마 멈추게 할 수 없어 대야 물을 못 버린다고 돌려서 표현했다. 하루 저녁에 두레박 줄을 감고 있는 나팔꽃 넝쿨을 보고 가을 아침 자연의 오묘함에 감동하여 차마 넝쿨을 치우지 못하고 물을 얻어마신다고 말을 돌리고 있다. 셋째, 은연중에 표현된 해학이다. 위의 ‘풀벌레’ 하이쿠의 패러디로 “오니쓰라는/ 밤새도록 물대야를/ 들고 다녔네”(물을 쏟을 수가 없으니)라는 하이쿠가 나왔듯이 물대야를 들고 어정쩡하게 서 있는 모습이라든가, “어머, 이 나팔꽃 좀 봐! 물 길어야 되는데…”라며 멍청히 서 있는 사람의 표정을 떠올리면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는 것이다.

모든 하이쿠가 이들처럼 암시적이지는 않지만, 하이쿠는 짤막한 몇 글자에 많은 것을 함축한 채 엉뚱한 힌트만 제시해 놓고 나머지는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는 점에서 선시적인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원래 하이쿠는 반드시 계절적 미학을 살리고 해학적 요소가 살아 있어야 한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개구리 …퐁당!” 역시 계절감과 해학을 놓치지 않은 작품이다.

하이쿠는 집단의 놀이

불륜의 사랑을 아름답게 그린 일본의 영화 ‘실락원’에서는 주인공과 친구가 하이쿠로 허무한 심경을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남녀가 환상적인 밀회를 하는 장면에서 장작불을 피우고 연기하는 다키기노(薪能: 밤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일본 전통 가면극인 ‘노’ 공연을 하는 것. 비현실적 신비감을 준다)가 등장한다. 이것은 일본에서는 전통이 일상 속에 녹아 있음을 의미한다. 그 전통은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는 매개물이 돼 긴장을 이완시키기도 하고 극적 분위기를 고조시키기도 한다.

일본 위성방송에는 ‘하이쿠 왕국’이라는 정규프로그램이 있어 하이쿠가 일본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짐작케 한다. ‘하이쿠 왕국’의 내용을 살펴보면 일본에서 하이쿠가 하나의 지적인 유희로 발전해온 흔적을 읽을 수 있다.

몇 사람의 하이쿠시인이 모여 음행(吟行: 하이쿠를 읊기 위해 경치가 좋은 곳이나 명승고적을 찾아 걸어다니는 것)을 한 뒤, 한자리에 모여앉아 완성한 작품을 익명으로 제출한다. 이 작품들을 익명인 채로 벽에다 붙여 놓으면, 각자가 마음에 드는 작품에 빨간 점을 붙이며 왜 좋은지 이유를 설명한다. 한 차례 평이 끝나면 드디어 작가를 공개하게 되는데 가장 많은 점을 얻은 사람이 그날의 승자가 된다. 각자의 견해가 다양하겠지만, 앞서 얘기했듯 ‘벌레’라고만 해도 가을밤을 연상할 수 있는 미적 공감대가 필수적이며, 그러한 공동의 미의식을 매개로 한 일종의 놀이인 것이다.

사실 발생과정을 보면 하이쿠는 문예공동체 속에서 감성적 교감을 즐기는 일종의 놀이였다. 그리고 5/7/5, 17음이 처음부터 독립적으로 읊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 명이 5/7/5와 7/7을 교대로 이어서 읊던 렌쿠(連句)에서 발전한 것이다.

요즘도 하이쿠 모임만 1000여개

그러니 앞 사람이 읊은 것을 잘 파악해서 이미지를 보충하고 뒷사람이 잘 연결할 수 있도록 여백을 남겨야만 했다. 바쇼와 그 문하생의 시집인 ‘사루미노(猿)’의 경우를 보자.

①“부스럭부스럭/ 짚신을 삼고 있는/ 어스름 달밤”

②“벼룩을 털려고/ 자다 깬 초가을”

③“쥐도 안 잡히고/ 굴러 떨어졌나/ 괴둔 됫박”

④“비뚤어져 뚜껑도/ 안 맞는 궤짝 하나”

렌쿠의 한 부분으로, 전원이 가을밤의 정경을 읊은 것이다. ①번은 달빛을 이용해서 밤일을 하는 빈한한 농가의 일상을 읊은 것인데 ②번에서는 앞구의 계절감을 이어받아 초가을 밤에 벼룩에 시달리다 잠에서 깬 사람이 옷을 탁탁 터는 광경을 연결하고 있다. 그리고 ③번에서는 그 벼룩을 터는 기세에 쥐를 잡으려고 괴둔 됫박이 굴러 떨어진 광경을 연상하고 있다. 마지막 ④번은 앞 구의 분위기에서 누추한 집을 연상하여 그에 어울리는 뚜껑이 잘 맞지 않는 부엌 궤짝을 무대 소품처럼 배치한 것이다. 이처럼 렌쿠는 전체 작품의 통일성을 노린 것이 아니라 전후 구의 조화와 전환의 묘미를 즐기는 것이다.

그러려면 서로 이어서 읊는 각각의 시적 세계에 대한 깊은 공감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이쿠는 서로의 미적 공감대를 향유하는 희열을 즐기는 고차원적 유희였던 것이다. 근래 오가타 쓰토무(尾形)씨 등이 하이카이(俳諧)가 지닌 ‘공동체의 문학(座の文學)’적 요소를 주장하고 있다. 문학에 나타난 일본인의 집단주의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일본에는 현재 800에서 1000개에 가까운 하이쿠 결사(結社)가 있다. 결사란 공동의 문학적 취지하에 하이쿠잡지를 내는 것을 목적으로 주재자(主宰者)를 중심으로 모이는 하이쿠 집단을 가리킨다. 최근 들어서는 문화센터와 유사한 하이쿠 교실이 성행하고 있는데, 이 교실들은 하이쿠를 즐기는 사교모임으로도 한몫을 하고 있다. 다른 취미활동보다 하이쿠는 서민들의 지적 욕구를 채워준다는 면에서 더욱 흡수력이 있는 것이다.

일본인들이 일상생활에서도 직설적인 표현보다는 그때그때의 분위기에 맞춰서 우회적인 표현을 잘 한다는 것은 우리가 익히 아는 사실이다. 하이쿠는 바로 이러한 일본적인 언어표현의 핵심이다. 집단 속에서 이미 많은 부분의 정서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고 그 가운데서 꼭 필요한 최소한의 암시적인 언어들만 표현되었을 때, 무언의 공감은 표현 이상으로 긴밀한 정서적 교감을 가져다 준다. 집단적 정서를 이해하지 못하고 색깔이 다른 타자는 여기서도 당연히 ‘집단따돌림’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집단을 벗어나 시공을 초월한 보편적인 예술성을 추구하고자 평생을 방랑으로 일관했던 시인이 바로 바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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