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6월호

17자의 촌철살인, 자연·해학·고독의 노래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 하이쿠 감상법

  • 유옥희 계명대 어문학부 교수·일어일문학

    입력2006-10-13 11: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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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 한 줄의 시에 찰나와 우주를 담는다. 일본 전통시 하이쿠 읽기.》
    우리 감각으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암호와도 같은 17자의 시가 있다. 대체 이 시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 길이여/ 행인 하나 없는데/ 저무는 가을”(바쇼·芭蕉)

    “범종에 앉아/ 하염없이 잠자는/ 나비 한 마리”(부손·蕪村)

    “여윈 정강이/ 부둥켜 안고 있네/ 오동잎 하나”(잇사·一茶)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 일본의 정형시 하이쿠(俳句)가 그것이다. 하이쿠는 5/7/5의 운율을 지닌 한 줄 짜리 시(간혹 삼행으로 나눠 쓰기도 한다)로,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으면서 오늘날까지 창작되고 회자되는 대중시이기도 하다.



    센세이셔널한 일본의 대중문화가 아닌 한적한 정신문화의 하나인 하이쿠에 조심스러운 관심이 쏠리고 있다. 얼마 전에는 류시화 시인이 ‘한 줄도 길다’라는 하이쿠 번역시집을 내서 그 관심에 불을 지폈다. 일각에서는 일본의 대중문화에 대한 우려와 마찬가지로 ‘왜색’ 정서의 잠입을 염려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은 듯하다.

    하지만 한국에서 요즘 보이는 하이쿠에 대한 관심은 오히려 너무나 늦은 것이라 해야 마땅하다. 하이쿠 읽기는 일본인의 사고나 미학을 읽어내는 지름길이 될 수 있는데, 일본 문학에 대해 ‘알고 싶기고 하고 무시하고 싶기도 한’ 복잡한 우리 정서 때문에 그런 길을 외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이쿠는 유럽 등 서구에는 이미 1910년대 에즈라 파운드를 중심으로 한 이미지즘이 일어났을 때 소개돼, 근 한세기가 지난 지금은 가장 세계화된 일본의 정신유산으로 자리잡았다.

    많은 한국 시인들이 일본을 가까이 두고도 미국이나 프랑스에서 영어나 불어로 번역된 하이쿠를 처음 접하고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한국에서 나온 몇 안 되는 하이쿠 번역집들이 영역(英譯)된 하이쿠를 중역(重譯)한 흔적을 보이는 이유도 여기 있다.

    하이쿠는 선시(禪詩)인가?

    ‘하이쿠’라고 하면 간혹 “아! 개구리 퐁당하는 그거요? 일종의 선시(禪詩) 같은 거 아니에요?”라든가, “바쇼라는 김삿갓 같은 방랑시인이 있었다던데…” 라는 정도의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는 바쇼가 읊은 “오래된 연못/ 개구리 뛰어드는/ 물소리 퐁당!”이라는 작품이 전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개구리가 뛰어드는 물소리로 인해 정적의 세계가 찰나적으로 깨졌다가 다시 원래의 정적으로 돌아가 ‘존재’를 인식하는, 일종의 선적(禪的)인 깨달음을 추구한 시라고 알려져 있다. 과연 이 시의 주제는 선적인 깨달음일까? 하이쿠는 진정 선시 같은 것일까?

    평소 강단에서 학생들의 반응을 유도해보는 하이쿠 두 구가 있다.

    “대야의 목물/ 버릴 곳이 없는/ 벌레 소리”(오니쓰라)

    “나팔꽃 넝쿨에/ 두레박줄 빼앗겨/ 얻어마신 물”(치요조)

    두 하이쿠는 풀벌레 소리나 나팔꽃을 사랑하는 마음을 암시적으로 표현한 공통된 기법의 작품이다. 그러나 표현방법도 생소할 뿐 아니라, 가을밤의 풀벌레 소리나, 하룻밤새 촉수가 쑥쑥 자라 넝쿨을 감는 나팔꽃의 습성을 잘 모르는 학생들에게는 거의 수수께끼일 수밖에 없다. 멍해 있는 학생들에게 “가을밤 외로운밤 벌레우는 밤…”이라는 가곡을 예로 들기도 하고, “나팔꽃이 어떻게 자라지? 여긴 화훼영농 후계자가 없나?”고 어설픈 힌트를 제시하기도 한다.

    위 두 하이쿠는 문학성이 짙은 작품은 아니지만, 하이쿠를 이해하는 열쇠를 많이 지니고 있다. 첫째, ‘벌레’라는 키고(季語: 계절을 상징하는 말)다. ‘벌레’는 하이쿠에서는 반드시 풀벌레 소리를 의미하며 가을밤의 적막감에 대한 상징으로 표현된다. 둘째, 암시적인 표현기법이다. ‘가을 밤 풀벌레 소리가 너무 아름답고 쓸쓸하다’는 식의 직설적인 서술이 아니라, 그 풀벌레 울음을 차마 멈추게 할 수 없어 대야 물을 못 버린다고 돌려서 표현했다. 하루 저녁에 두레박 줄을 감고 있는 나팔꽃 넝쿨을 보고 가을 아침 자연의 오묘함에 감동하여 차마 넝쿨을 치우지 못하고 물을 얻어마신다고 말을 돌리고 있다. 셋째, 은연중에 표현된 해학이다. 위의 ‘풀벌레’ 하이쿠의 패러디로 “오니쓰라는/ 밤새도록 물대야를/ 들고 다녔네”(물을 쏟을 수가 없으니)라는 하이쿠가 나왔듯이 물대야를 들고 어정쩡하게 서 있는 모습이라든가, “어머, 이 나팔꽃 좀 봐! 물 길어야 되는데…”라며 멍청히 서 있는 사람의 표정을 떠올리면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는 것이다.

    모든 하이쿠가 이들처럼 암시적이지는 않지만, 하이쿠는 짤막한 몇 글자에 많은 것을 함축한 채 엉뚱한 힌트만 제시해 놓고 나머지는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는 점에서 선시적인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원래 하이쿠는 반드시 계절적 미학을 살리고 해학적 요소가 살아 있어야 한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개구리 …퐁당!” 역시 계절감과 해학을 놓치지 않은 작품이다.

    하이쿠는 집단의 놀이

    불륜의 사랑을 아름답게 그린 일본의 영화 ‘실락원’에서는 주인공과 친구가 하이쿠로 허무한 심경을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남녀가 환상적인 밀회를 하는 장면에서 장작불을 피우고 연기하는 다키기노(薪能: 밤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일본 전통 가면극인 ‘노’ 공연을 하는 것. 비현실적 신비감을 준다)가 등장한다. 이것은 일본에서는 전통이 일상 속에 녹아 있음을 의미한다. 그 전통은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는 매개물이 돼 긴장을 이완시키기도 하고 극적 분위기를 고조시키기도 한다.

    일본 위성방송에는 ‘하이쿠 왕국’이라는 정규프로그램이 있어 하이쿠가 일본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짐작케 한다. ‘하이쿠 왕국’의 내용을 살펴보면 일본에서 하이쿠가 하나의 지적인 유희로 발전해온 흔적을 읽을 수 있다.

    몇 사람의 하이쿠시인이 모여 음행(吟行: 하이쿠를 읊기 위해 경치가 좋은 곳이나 명승고적을 찾아 걸어다니는 것)을 한 뒤, 한자리에 모여앉아 완성한 작품을 익명으로 제출한다. 이 작품들을 익명인 채로 벽에다 붙여 놓으면, 각자가 마음에 드는 작품에 빨간 점을 붙이며 왜 좋은지 이유를 설명한다. 한 차례 평이 끝나면 드디어 작가를 공개하게 되는데 가장 많은 점을 얻은 사람이 그날의 승자가 된다. 각자의 견해가 다양하겠지만, 앞서 얘기했듯 ‘벌레’라고만 해도 가을밤을 연상할 수 있는 미적 공감대가 필수적이며, 그러한 공동의 미의식을 매개로 한 일종의 놀이인 것이다.

    사실 발생과정을 보면 하이쿠는 문예공동체 속에서 감성적 교감을 즐기는 일종의 놀이였다. 그리고 5/7/5, 17음이 처음부터 독립적으로 읊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 명이 5/7/5와 7/7을 교대로 이어서 읊던 렌쿠(連句)에서 발전한 것이다.

    요즘도 하이쿠 모임만 1000여개

    그러니 앞 사람이 읊은 것을 잘 파악해서 이미지를 보충하고 뒷사람이 잘 연결할 수 있도록 여백을 남겨야만 했다. 바쇼와 그 문하생의 시집인 ‘사루미노(猿)’의 경우를 보자.

    ①“부스럭부스럭/ 짚신을 삼고 있는/ 어스름 달밤”

    ②“벼룩을 털려고/ 자다 깬 초가을”

    ③“쥐도 안 잡히고/ 굴러 떨어졌나/ 괴둔 됫박”

    ④“비뚤어져 뚜껑도/ 안 맞는 궤짝 하나”

    렌쿠의 한 부분으로, 전원이 가을밤의 정경을 읊은 것이다. ①번은 달빛을 이용해서 밤일을 하는 빈한한 농가의 일상을 읊은 것인데 ②번에서는 앞구의 계절감을 이어받아 초가을 밤에 벼룩에 시달리다 잠에서 깬 사람이 옷을 탁탁 터는 광경을 연결하고 있다. 그리고 ③번에서는 그 벼룩을 터는 기세에 쥐를 잡으려고 괴둔 됫박이 굴러 떨어진 광경을 연상하고 있다. 마지막 ④번은 앞 구의 분위기에서 누추한 집을 연상하여 그에 어울리는 뚜껑이 잘 맞지 않는 부엌 궤짝을 무대 소품처럼 배치한 것이다. 이처럼 렌쿠는 전체 작품의 통일성을 노린 것이 아니라 전후 구의 조화와 전환의 묘미를 즐기는 것이다.

    그러려면 서로 이어서 읊는 각각의 시적 세계에 대한 깊은 공감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이쿠는 서로의 미적 공감대를 향유하는 희열을 즐기는 고차원적 유희였던 것이다. 근래 오가타 쓰토무(尾形)씨 등이 하이카이(俳諧)가 지닌 ‘공동체의 문학(座の文學)’적 요소를 주장하고 있다. 문학에 나타난 일본인의 집단주의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일본에는 현재 800에서 1000개에 가까운 하이쿠 결사(結社)가 있다. 결사란 공동의 문학적 취지하에 하이쿠잡지를 내는 것을 목적으로 주재자(主宰者)를 중심으로 모이는 하이쿠 집단을 가리킨다. 최근 들어서는 문화센터와 유사한 하이쿠 교실이 성행하고 있는데, 이 교실들은 하이쿠를 즐기는 사교모임으로도 한몫을 하고 있다. 다른 취미활동보다 하이쿠는 서민들의 지적 욕구를 채워준다는 면에서 더욱 흡수력이 있는 것이다.

    일본인들이 일상생활에서도 직설적인 표현보다는 그때그때의 분위기에 맞춰서 우회적인 표현을 잘 한다는 것은 우리가 익히 아는 사실이다. 하이쿠는 바로 이러한 일본적인 언어표현의 핵심이다. 집단 속에서 이미 많은 부분의 정서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고 그 가운데서 꼭 필요한 최소한의 암시적인 언어들만 표현되었을 때, 무언의 공감은 표현 이상으로 긴밀한 정서적 교감을 가져다 준다. 집단적 정서를 이해하지 못하고 색깔이 다른 타자는 여기서도 당연히 ‘집단따돌림’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집단을 벗어나 시공을 초월한 보편적인 예술성을 추구하고자 평생을 방랑으로 일관했던 시인이 바로 바쇼다.

    “긴 긴/ 한줄기 강이여/ 눈덮인 들판”(본초)

    “유채꽃이여/ 달은 동녘에/ 해는 서녘에”(부손)

    “백정의 마을도/ 밤에는 아름다운/ 다듬이 소리”(잇사)

    “겨울바람이여/ 맨땅에서 날 저무는/ 거리의 광대”(잇사)

    위와 같은 하이쿠를 보면 최소한의 점만 배치하고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이성복 시인은 하이쿠적 감동을 ‘일본도로 단칼에 내려쳤을 때, 일순 잘린 단면에 아무 것도 안 보이다가 잠시 후 피가 뚝뚝 흐르는 듯한 느낌’과 같은 것이라고 예리하게 표현한 적이 있다.

    최근 우리말의 고유 리듬을 살려 시조의 활성화를 모색하고 있는 이종문 시인은 오늘날의 시는 지나치게 산문화해 시 본연의 운율이나 리듬을 상실하고 있으며, 이러한 시기에 극도로 축약된 하이쿠의 형식 자체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또한 일본의 영문학자이면서 하이쿠적 표현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도야마 시게헤코는 ‘생략의 문학’에서 “긴 시에서 짧은 시로 가는 데는 아무래도 인간, 문학이 함께 성숙해지는 것이 전제가 된다. 서로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의 공동체 내부에서는 장황한 서술이나 묘사를 요하지 않는다. 중요한 점을 지적하면 충분하다”고 했다.

    국내에 나온 하이쿠선집에서는 하이쿠의 본래적 의미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번역이 눈에 띈다. 가령 “오월장마여/ 큰강을 앞에 두고/ 집 두 채”(부손)란 하이쿠가 “오월 장마비 속에/ 집 두 채가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와 같이 서술식으로 번역한 것이다. 이 시의 초장은 ‘오월 장마비 속에’라고 뒤와 연결시킬 것이 아니라 이 구절에서 한번 끊어야 한다. 이때 ‘-여(や)’라는 것이 끊는 말, 즉 기레지(切字: 한 하이쿠 안에서 문장을 끊어주는 조사나 조동사)가 되는데, 이 기레지는 짧은 시의 어느 한부분을 끊어줌으로써 시공간을 확대하는 구실을 한다.

    ‘--이여!’라는 영탄형 조사가 진부하다고 요즈음은 쓰지 않는 경우도 많지만, 이러한 문말조사를 붙이든 안 붙이든 간에 이 작품의 경우 작가의 의도는 ‘오월장마’에서 한 번 의미를 단절시키고 있다. 이리하여 오월 장마비가 가득 내린 풍경을 눈앞에 먼저 그리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장도 ‘마주보고 있다’라는 서술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두막 두 채’라든가 하는 명사로 마쳐야 한다. 강한 여운을 남기기 위해서다.

    찰나적 아름다움의 영원성

    그리하여 이 시는 장마비로 잔뜩 불어난 강물의 ‘역동성’, 강물의 범람으로 금방이라도 집이 떠내려갈 것 같은 ‘긴박감’, 그리고 집이 한 채가 아니라 두 채인 것에서 안 떠내려 가려고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듯한 ‘안쓰러움’ 등으로, 단절된 공간을 메워 전체 이미지를 형성하는 것이다. 직선적인 서술을 했을 경우 의미전달은 확실하지만 문장의 단편처럼 인식되어 자칫 감동이 사라질 수 있다.

    이리하여 하이쿠는 때로 그 짧음 속에 점을 배치하고 불연속적인 단절의 효과를 살려 “거친 바다여/ 사도섬에 가로 놓인/ 은하수”(바쇼)와 같이 광대무변한 우주를, “자세히 보면/ 냉이 꽃 피어 있는/ 울타리로다”(바쇼)와 같이 조화(造化)의 감동을, “가는 봄이여/ 묵직한 비파를/ 안은 이 기분”(부손)같이 낭만적 우수를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하이쿠가 최근 인기를 끄는 또 하나의 이유로 우리가 잊고 있던 계절적 정서에 대한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는 것도 있을 것이다. 하이쿠는 발생 초기부터 앞서 든 키고(계절어)라는 형식을 가지고 있다. 키고는 계절적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동시에 변화하고 스러져가는 것들에 대한 애수를 동반하며 찰나적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기호다. 화산 지진 태풍과 같은 천재지변이 잦고 비가 많이 오는, 날씨 변화가 심하여 모든 것에 대해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없던 자연환경에서 저절로 생겨난 일본인들의 미학일 것이다.

    예컨대, “가는 봄이여/ 새 울고 물고기 눈에/ 어리는 눈물”이라는 바쇼의 하이쿠를 보자. ‘가는 봄’은 봄을 나타내는 키고이면서 봄을 아쉬워하는 석춘(惜春)의 정서에 여행길에 배웅나온 사람들과 나누는 석별의 정을 중첩시킨 것이다. ‘가는 봄’은 일본인들이 즐겨 쓰던 키고로, 가는 세월의 아쉬움과 영원한 시간의 흐름을 상징하는 감성적 시어로 자리잡고 있다. 때로 “이 쓸쓸함이/ 밑빠진 듯 내리는/ 진눈깨비여”(조소)와 같이 계절감각이 직설적으로 드러나는 경우 상징적인 맛은 다소 떨어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계절과 인간의 동일시

    하이쿠의 계절감각은 다분히 불교를 감성적으로 받아들였던 문화적 전통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불교적 감성을 잘 표현하고 있는 일본의 중세 수필에 이와 같은 글귀가 있다.

    ‘아다시 들판 묘지의 이슬이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고, 도리베산 화장터의 연기가 언제까지나 흩어져 없어지지 않은 채, 이 세상에 천년만년이고 산다면 얼마나 멋이 없겠는가? 이 세상은 덧없고 무상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 아니던가? 생명 있는 것을 보면 인간만큼 오래 사는 것도 없다. 하루살이가 저녁을 기다려 죽고, 여름 매미는 봄과 가을이 있는지조차 모른다고 하지 않던가? 고스란히 1년을 사는 것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이 여유로운 것이다. 아쉽고 섭섭하게 여기면 천년을 산들 하룻밤의 꿈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어차피 영원히 살지는 못할진대 이 세상에 오래 살아 그 무슨 소용 있으리. 명이 길면 추해진다. 길어도 마흔을 못 넘겨 죽는 것이 아름다울 것 같다(쓰레즈레구사·徒然草).’

    즉 인생은 유한하고 무상하기 때문에 아름답다는 일본인의 세계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것이 결국 벚꽃의 미학과 할복자살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을 것이다. 바쇼는 ‘건곤(乾坤)의 변화는 문학의 씨앗’이라고도 하고 ‘사계절은 하이쿠의 친구’, ‘변화 속에 파고들어 정을 느낄 때 하이쿠는 저절로 된다’고 했다.

    우리는 요즘 계절의 변화를 잊고 산다. 춥다 덥다 하며 난방과 에어컨이 잘 갖춰진 아파트에 틀어박혀서만 산다면 우리의 감성은 무뎌지고 말 것이다. 그리고 풀꽃이나 야생화가 쉬 스러진다고 하여 사철 꽃을 피우는 장미나 사철 푸른 난초만 보고 있으면 계절 변화에 둔감해질 것이다. 인간은 어차피 스러져가는 존재이며, 같이 스러져가는 존재로서 자연과 동일시될 때 정서의 카타르시스를 얻을 수 있고 감성적 미학이 생겨난다. 하이쿠는 근본적으로 계절이라는 코드가 있기 때문에 ‘자연’ ‘환경’이라는 오늘날의 화두와도 부합한다.

    하이쿠는 계절의 단면을 포착한다. 찰나적인 단면에서 계절의 아름다움이 감각적으로 스며나오는 것이다.

    “모기소리 난다/ 인동덩굴 꽃잎이/ 떨어질 때마다”(부손)

    “무지개를 토하고/ 막 피어나려는/ 모란이여”(부손)

    “바위산의/ 바위보다 더 하얀/ 가을 바람”(바쇼)

    “도미자반의/ 잇몸도 추워라/ 어물전 좌판”(바쇼)

    “파를 하얗게/ 씻어서 쌓아놓은/ 매운 추위여”(바쇼)

    철학적 성찰에서 하이쿠 연구를 시작한 우리나라 초기의 하이쿠 연구자 이영구씨는 부손의 “가오리연이여/ 어제 하늘이 있던/ 그 자리”가 불후의 명작이라고 얘기한 적이 있다. 회갑이 지난 원로 교수의 이야기가 처음에는 얼른 와닿지 않았고 이유를 물어본 적도 없지만, 나이가 들고 세월을 절감할 때쯤 되니 그 의미가 다가왔다. 이 하이쿠는 노년에, 파란 초봄 하늘에 떠 있는 연을 시린 눈으로 바라보며 어릴 적 시간으로 타임슬립하여 동심의 세계를 회상한 것으로, 항상 어딘가로 돌아가고픈 인간의 근원적 향수를 나타냈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한 찰나적인 단면에서 영원한 시간의 흐름을 보는 것이다.

    방랑 하이쿠시인 바쇼가 그린, ‘코고는 소리 그림’ 이라는 낙서 같은 그림이 있다. 애제자 도코쿠와 여행하다가 함께 여관에 묵었는데 이 사람이 어찌나 요란스럽게 코를 고는지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그 소리를 장난삼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푸대 같은 것이 좁아졌다 늘어졌다 하는 모양으로 그려서는 그 폭을 한 치, 세 치 등으로 표시하여, 제일 요란하게 고는 부분을 넉자 반으로 적어 놓았다.

    또, 동북기행중에는 묵을 곳이 없어 헛간을 빌려 눈을 붙이며, “벼룩과 이/ 말이 오줌싸는/ 베갯머리”라는 하이쿠를 읊고 있다.

    이와 같이 하이쿠는 삶을 해학적으로 객관화하는 태도를 바탕에 깔고 있다. 하이쿠와 일본의 전통시가 다른 점은 그 길이의 짧음이라는 것 외에 이러한 대상파악 방법이라고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하이미(俳味)’, 즉 하이쿠적인 맛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담담하고 자유로우며 해학적이고 서민적인 멋’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화려한 색채감이 나는 부손의 하이쿠에는 이와는 또 다른 측면의 유미주의적·도회적 성향이 있지만, 하이쿠의 발전단계에 있어서는 해학적인 담담함으로 인해 서민의 애환을 위무하는 시로 그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바쇼의 “겨울 바람이여/ 볼이 부어 쑤시는/ 사람의 얼굴”이라든가, “헤진 여름옷/ 아직도 이(蝨)를 다/ 잡지 못하고”, “고양이 사랑/ 끝날 적 침실에는/ 어스름 달빛”과 같은 것이 그렇다.

    선적인 깨달음으로 알려진 “오래된 연못/ 개구리 뛰어드는/ 물소리 퐁당!”의 경우도 사실은 선적인 깨달음이라는 의미 이상으로, 전통시에서 개구리 울음만을 운치있게 읊어왔던 시적 컨텍스트를 벗어나 개구리가 우스꽝스럽게 몸을 뻗는 실체를 연상케하고 그 개구리가 퐁당하는 소리가 멍하니 있던 자신을 깨우는 듯한 파격적인 해학을 동반한 것이다.

    하이쿠가 길이는 짧은데도 좀더 긴 형식의 와카(5/7/5/7/7의 운율을 지닌 정형시)와 달리 우리 정서와 부합하는 면이 많은 것은 이러한 소탈하고 해학적인 대상파악 덕인지도 모른다. 삶의 괴로움을 승화시킨 해학적인 소탈함이라면 단연 잇사가 한몫을 하고 있다. “뒷골목에는/ 개 뒷간 위로도/ 첫눈내리고” “매화향기여/ 그 누가 찾아와도/ 이빠진 찻잔” “소변을 보고/ 몸을 떠니 비웃어라/ 귀뚜라미여” “텅빈 배에/ 천둥소리 울리는/ 여름들이여” “이것이 고작/ 마지막 살 집인가/ 눈이 다섯자” “타버린 집터/ 따끈따끈하구나/ 벼룩 설친다”와 같은 것으로, 강단에서 이 시들을 학생들에게 제시하면 설명없이도 이해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하이쿠 탁상’의 세 다리가 된 시인들

    하이쿠가 오늘날 일본의 국민시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하이쿠라는 탁상의 멋진 세 다리가 된 세 명의 위대한 하이쿠 시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쇼(松尾芭蕉·1644~1694), 부손(謝蕪村·1716~17 83), 잇사(小林~茶·1763-1827)가 바로 그들로, 이들은 하이쿠라는 탁자에 여러 가지 음식을 올려 놓을 수 있는 장(場)을 마련해 놓았다.

    바쇼는 “파초에 태풍불고 물대야에 빗소리 듣는 밤이여”라는 그의 시처럼, 파초와 같이 비바람에 찢기기 쉬운 식물을 사랑하고 그 스산함을 사랑했던 시인이다. 자신의 이름도 파초라고 지었던 그는 집단의 놀이로 존재하던 하이쿠에 문학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방랑하고 독서했던 구도자적 인물이다. 그리하여 하이쿠에 자연과 인생의 의미를 부여, 하이쿠가 예술적 보편성을 지닌 문학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시란 ‘짓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의 합일에서 저절로 ‘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변화하는 찰나적 아름다움에서 영원성을 발견하는 ‘불역유행(不易流行)’이라는 철학적 용어를 만들어냈다.

    바쇼 하이쿠의 색깔은 수묵화처럼 수수하고 담백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화려한 유화(油畵)와도 같은 색감과 낭만을 부여한 시인이 있다. 바로 화가를 본업으로 하며 모란꽃을 특히 좋아했던 부손이다. 그는 “모란 잎져서/ 서로 포개어진다/ 두 세 이파리” “꽃을 밟았던/ 짚신도 보이는데/ 아침잠 깊고” “낮에 띄운 배/ 미친 여인 태웠네/ 봄날의 강물”같이, 선명한 인상(印象)이나 화려한 색감 속의 우수(憂愁)를 그려 하이쿠가 낭만적인 시로 발전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했다. 이러한 요소로 인해 유럽에서는 바쇼보다 더 알려져 있다.

    잇사는 바쇼나 부손이 지닐 수 없었던 흙냄새 물씬나는 토속적인 시를 읊어 하이쿠가 명실상부한 민중시로 거듭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벼룩과 파리에/ 조롱을 당하면서/ 오늘도 저문다” “봄눈 녹아서/온 마을 가득한/ 아이들 소리”, 또 걸인을 읊은 “내민 찬합에/ 동전 서너개 뒹구네/ 저녁 겨울비”같은, 민중이 친근감을 느끼면서도 고통을 위무받을 수 있는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는 찢어지게 가난했지만 반골정신과 너털웃음을 지닌 지극히 인간적인 시인이었다고 한다. 류시화시인이 ‘한줄도 길다’에 잇사의 시를 제일 많이 실은 것도 우리 정서와 잘 통하기 때문인 것 같다. 잇사의 시는 바쇼나 부손과 같은 여백이나 상징적인 맛을 떨어지지만 하이쿠를 민중시로 토착화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 시인은 죽음에 임하여 “방랑에 병들어/ 꿈은 마른 들판을/ 헤매고 돈다”(바쇼), “흰 매화향에/ 하얗게 날이 새는/ 밤이 오누나”(부손), “이 대야에서/ 저 대야로 옮겨가는/ 요지경 인생”(‘잇사’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이 지었을 개연성도 높다고 알려짐)이라는 각자의 음색에 맞는 임종시를 남기고 타계했다.

    마음의 쉼터, 여백

    그렇다면 이 시점에 왜 하이쿠인가 하는 물음으로 돌아가보자. 우리는 속도, 기능, 풍부함, 논리성을 추구하는데 익숙해 있고, 정보사회화에 따라 모든 것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명확한 것, 자세한 것을 선호한다. 그리고 사이버공간이나 바이오테크놀로지 등으로 자연의 순환 사이클을 잊어가고 있다. 무감각해진 정서의 반작용으로 지극히 자극적인 것에서 웃음을 취하려고도 한다.

    하이쿠에는 이와는 반대 방향의 코드가 있다. 속도보다는 세월의 연륜을, 풍부함 보다는 여백을, 논리보다 비논리를, 명확한 것보다는 감춰진 매력을, 드라마틱한 것보다는 일상의 아름다움을 찾으며, 모든 것을 자연속 순환 사이클 안에서 계절적 정서를 빌려 표현하고자 한다. ‘숨은 1인치를 찾았어요’라는 광고 카피처럼 우리가 잊고 있던 삶의 한 여백을 찾아낸 듯한, 또한 속도감을 잊었다가 호흡을 조절하는 듯한 여유로움을 느끼게 하는 매개체가 되고 있다.

    이처럼 하이쿠는 그 짤막함 때문에 이 바쁜 현실에 읽기 편하고 여백의 쉼터를 주는 문화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오늘날의 감수성과 통하는 대목도 적지 않다. 가령 “가을 깊은데/ 옆방은 무엇하는/ 사람인가”(바쇼)에서는 현대사회에서 느끼는 군중속 고독을 처절하게 느낄 수 있다. “서늘하게/ 벽에다 발을 얹고/ 낮잠을 자네”(바쇼)에서는 삶의 고단함 속에서 얻는 작은 휴식의 위안을 본다. “여름잡초여/ 무사들의 꿈이/ 사라진 흔적”(바쇼)에서는 17세기나 오늘이나 도도한 자연의 섭리 앞에 허무한 공명심을 읽고 “이 가을엔/ 왜 이리 늙는가/구름에 가는 새”(바쇼)에서는 늘그막의 적막감과 존재의 고독을 느낄 수 있다. “남의 말하면/ 입술이 시리구나/ 가을 찬 바람”(바쇼)나 “벌레를 죽이며/ 입으로는 말하네/ 나무아미타불”(잇사)는 오늘날에도 늘 보고 겪는 상황과 감성들이다.

    앞서 언급했듯 하이쿠는 그들 문화의 문맥 속에서 읽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의 문화는 다분히 감성적이다. 감성은 대상의 변화 그 자체를 오감(五感)으로 감지하고 하나의 통합된 정서를 형성하지만 따져 설명하는 것을 거부하고 분위기로 모든 것을 파악한다.

    고래로부터 일본의 미의식은 직설적이지 않고 분명하지 않음을 그 공통분모로 하고 있다. 일본인이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말끝을 흐리며 여운을 남기는 것은 맺고 끊듯이 이야기하는 것은 아름답지 않다고 인식하는 미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표현하지 않는 것을 아름답다고도 볼 수 있지만 때로는 그 모호함 때문에 곤욕을 치르기도 한다.

    시를 통한 모국어 갈고닦기

    철학자이면서 최근 문화평론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이진우씨는 선(禪)이나 명상이 그 본래 의미와는 달리 상품화하는 경향을 지적하며 하이쿠도 그 문화의 본질과 동떨어져 상품화할까봐 우려한다. 하이쿠의 상품화는 경제성을 지닌 ‘왜색’ 정서의 잠입을 뜻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하이쿠를 통해 이해할 수 없던 일본인들만의 독특한 표현방식을 읽어내고, 그들의 자연사랑과 미완의 미를 통해 각박한 현실을 살아가는 오늘의 삶에 힌트로 삼으면 족한 것이다.

    또하나 하이쿠에서 배워야 할 것은 일본인들이 하이쿠를 오늘날까지 사랑함으로써 일본어를 갈고닦는 점이다. 사실 하이쿠는 다작하는 그 가운데 수작이 생겨나는 메커니즘을 갖고 있다. 유명한 하이쿠 작가들의 작품도 수만점 중에서 가려낸 수작들이 전해지는 것이다. 일문학자로 하이쿠를 연구하면 할수록, 우리의 고유의 리듬과 아름다움을 지닌 시조에 눈을 돌리게 된다. 섬나라 문학인 하이쿠에서는 우리 시조에서 만나는 인생의 달관과 너그러움에서 오는 ‘흥(興)’의 문화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시조의 형식 안에 신세대의 감수성을 담은 작품이 나오지 말란 법 또한 없다.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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