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의 타이론 우즈(두산 베어스)와 프로농구의 조니 맥도웰(현대 다이냇). 두 사람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미국 출신의 흑인’이라는 것말고도 닮은 점이 더 있다.
우선 미국에서는 둘 다 ‘실패한 인생’이었지만, 한국에 와서 정상에 오른 스포츠 스타라는 사실. 냉정한 프로의 세계에서 ‘이방인’이 3년 내리 주전을 지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맥도웰은 3년 연속 용병 MVP에 올랐으며, 우즈도 3년째 두산의 중심 타선을 이끌고 있다. 두 사람이 주목받는 또 한 가지 이유가 있다. 철저하게 ‘한국식’으로 바뀐 라이프 스타일이 그것이다.
우즈, 아내 조언 따라 한국행
타이론 우즈가 야구를 시작한 것은 1976년이었다. 전설적인 홈런왕 래지 잭슨(당시 볼티모어 오리올스, 통산 홈런 563개)의 호쾌한 타격에 반해 방망이를 잡았다. 일곱 살 때였다.
우즈는 어려서부터 힘이 장사였다. 덩치는 일찌감치 키 183cm, 몸무게 100kg으로 탄탄해졌고, 그런 거구에서 터져나오는 타구는 걸핏하면 담장을 훌쩍 넘어갔다. 우즈의 목표는 당연히 메이저리거. 그러나 메이저리그는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느린 발과 수비 불안 때문이었다. 우즈의 100m 달리기 기록은 13초대를 넘기곤 했다. 메이저리그 선수로는 낙제점이었다. 수비력도 문제였다. 공받기가 서툴러 실수를 연발했다.
우즈는 메이저리그 진출이 막히자 중남미로 눈을 돌렸다. 95년에 베네수엘라 리그에 참가, 홈런왕에 올랐다. 96년엔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보스턴 레드삭스 산하의 더블A팀 트랜턴 선더에서 25홈런, 97년엔 트리블A팀 포터킷 레드삭스에서 9홈런을 기록했다. 내심 98시즌 빅리그 진출을 기대했지만 물을 먹었다.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은 우즈가 여전히 “공격은 좋지만 발이 느리고 수비가 나쁘다”고 평가했다.
이 무렵 우즈에게 희망을 열어준 사람이 애인 셰롤이었다. 85년 미국 플로리다주 브룩스빌의 한 슈퍼마켓에서 경리담당 직원과 아르바이트 고교생으로 만난 두 사람은 5년 뒤 장래를 약속한 연인으로 발전했다. 셰롤은 “우즈의 보호자는 나”라고 했고, 우즈는 “셰롤은 어머니 같은 여인”이라고 했다.
셰롤은 우즈의 메이저리그 진출이 벽에 부딪히자 조심스럽게 한국 프로야구에 관한 정보를 뒤졌다. 당시 한국은 프로야구의 인기를 되살리기 위해 용병 수입을 적극 검토하고 있었다. 셰롤은 88년 서울올림픽을 통해 지켜본 한국에 대해 설명했고, 우즈도 음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국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연봉 9만4000달러. 메이저리그와는 비교도 안 되는 돈이었지만, 우즈는 어머니에게 “꼭 성공해서 메이저리그로 돌아가겠다 ”는 말을 남기고 태평양을 건넜다.
98시즌에 우즈는 토종을 대표하는 ‘라이언 킹’ 이승엽과 불꽃 튀는 홈런 대결을 벌였다. 중반까지는 이승엽의 우세. 하지만 후반 들어 우즈가 추격의 고삐를 죄었다. 어느 새 이승엽의 기록을 넘어선 우즈는 6년째 아성으로 남아 있던 장종훈의 41홈런 기록마저 무너뜨렸다. 잠실구장을 홈그라운드로 쓰는 서울팀 최초의 홈런왕. 우즈는 한국 무대 데뷔 시즌에서 일약 MVP에 올랐다. 우즈가 신기록을 세우던 날, 셰롤은 그라운드까지 뛰어내려와 “You did it(당신이 해냈어)”을 연발했다.
“돈보다 의리가 중요”
셰롤의 뒷바라지는 두산 구단에서도 화제였다. 경기장으로 나서는 우즈에게 두산의 응원가를 불러주는가 하면, 직접 양념한 불고기를 만들어 식탁에 올렸다. 김치볶음밥도 두 사람이 즐겨 먹는 메뉴. 셰롤은 우즈의 몸이 무거우면 마사지로 몸을 풀어주며 기를 살렸다. 이 때문에 우즈는 셰롤이 미국에 있을 때는 방망이가 죽을 쑤다가도 아내가 한국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맹타를 휘둘렀다.
우즈는 서서히 한국식으로 변해갔다. 98시즌을 마친 뒤 일본 프로야구에서 우즈에게 스카우트 손길을 뻗친 적이 있다. 연봉만 따져보면 일본이 훨씬 유리했다. 하지만 우즈는 “돈도 좋지만 의리가 더 중요하다”며 한국에 남았다.
우즈가 98시즌 MVP에 오르던 무렵 메이저리그에서는 마크 맥과이어(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새미 소사(시카고 컵스)가 세기의 홈런왕 대결을 펼치고 있었다. 승자는 맥과이어. 도미니카 태생의 소사는 거센 추격전을 폈지만 아깝게 홈런왕 자리를 내줬다. 그때 우즈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맥과이어와 소사 가운데 누가 MVP가 돼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우즈는 잠시 생각하더니 소사라고 답했다. 같은 용병 처지인 소사에게 동정심을 느꼈던 것일까. 그렇지 않았다. 우즈의 생각은 달랐다. “맥과이어가 소사보다 홈런을 많이 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소사는 팀을 포스트시즌에 진출시켰다. 선수에겐 개인 기록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팀 성적이 우선이다.”
그런 생각 때문일까. 거구의 우즈가 의외로 민감한 반응을 보일 때가 있다. 바로 팀이 연패에 빠져들 때다. 98시즌 중반 팀이 연속으로 역전패를 하자 우즈는 동료들 앞에서 진지하게 말했다. “처녀의 팬티를 덕아웃에 걸어놔야 악운을 피할 수 있다”고. 승패에 대한 우즈의 징크스는 동료들 사이에서도 유명하다. 지난 시즌엔 “우승 기원 고사 때 올린 돼지머리가 좋지 않았다”고 말해 두산 선수들을 한바탕 웃기기도 했다.
지난해까지 우즈가 기록한 성적은 76홈런 204타점이다. 통산 타율도 3할을 넘겼다. 올시즌에선 초반 페이스로 볼 때 여름이 가기 전에 용병 최초로 100홈런 고지를 밟을 듯하다. 성실한 플레이와 검소한 생활이 몸에 밴 우즈에겐 이제 한국말로 농담을 걸 만큼 여유도 생겼다. 메이저리그로 돌아가겠다는 야망은 이루지 못했지만, 대신 한국 프로야구 최고의 용병이라는 명예를 얻었다. 우즈의 마지막 꿈은 두산이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는 것이다.
신선우 감독의 용병 길들이기
우즈가 차분하게 레이스를 펼치는데 비해 맥도웰은 곧잘 흥분한다. 두산의 코칭스태프가 우즈에게 모든 것을 믿고 맡기는 반면, 현대의 신선우 감독은 맥도웰의 일거수 일투족에 주목한다. 야구와 농구라는 종목의 차이를 넘어 두 선수의 한국 살이에는 다른 구석이 많다.
맥도웰은 미국 텍사스주 알링턴대를 졸업하고 유럽으로 날아갔다. NBA에서 뛰기에는 힘과 기술, 스피드가 모두 떨어졌다. 스페인에서 3년, 포르투갈에서 1년, 키프로스에서 3개월. 그러면서 맥도웰은 나름대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한국의 감독들은 그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한국 프로농구 지도자들의 눈이 의심스러운 대목이다.
97년 가을 미국에서 프로농구 트라이아웃 캠프가 열렸다. 맥도웰이 유럽에서 돌아온 뒤였다. 10개팀 감독이 성적의 역순으로 용병을 찍고 있었다. 먼저 맥도웰에게 관심을 둔 팀은 대우(신세기의 전신). 하지만 대우의 한 관계자가 맥도웰의 외모를 보고 난색을 표했다. 우락부락한 몸, 툭 튀어나온 이빨, 깔끔하지 못한 콧수염…. 한마디로 팀 이미지 구기기 십상일 듯한 선수였다. 이렇게 해서 맥도웰은 드래프트 18번째로 현대의 품에 안기게 됐다.
맥도웰의 98∼99시즌 용병 파트너는 제이 웹이었다. 두 선수는 한국에 오자 마자 혹독한 신고식을 치렀다. 현대측이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라” 며 대형 마트에 두 선수를 보낸 것이 화근이었다. 맥도웰과 웹은 산더미처럼 물건을 산 뒤 구단에 돈을 대신 내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신선우 감독은 두 선수의 짐을 모두 꾸려서 숙소 밖에 내놓았다. “그런 정신자세라면 필요없으니 미국으로 돌아가라”는 뜻이었다. 피 말리는 신경전 끝에 결국 용병들이 무릎을 꿇었다. 사실 트라이아웃까지 끝난 마당에 마땅히 돌아갈 곳도 없었다.
놀라운 것은 이때부터 맥도웰이 무섭게 변했다는 사실. 신선우 감독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따랐다. 현대의 전력이 급상승한 건 당연한 일. 맥도웰은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이상민, 조성원 등과 함께 공포의 속공을 연출하며 현대를 무적함대로 바꿔놓았다. 시즌이 끝난 뒤 재계약 1순위였던 제이 웹이 맥도웰에게 밀려 퇴출됐을 정도.
두 번째 시즌에서도 맥도웰은 최강의 파워포워드였다. 이번엔 재키 존스와 짝을 이뤄 기아의 트윈타워 윌리포드-리드와 맞붙었다. 당초 팽팽하리라던 예상은 빗나갔다. 맥도웰이 리드와 벌인 1대1 대결에서 완승을 거두자 챔피언 결정전도 싱겁게 끝났다. 이때부터 농구계에선 “맥도웰을 잡지 못하면 현대를 이길 수 없다”는 말이 나왔다.
하지만 맥도웰이 언제나 펄펄 날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우즈와는 딴판으로 맥도웰은 약혼녀가 한국에 들어오기만 하면 맥을 못췄다. 구단에서는 맥도웰의 사기를 고려해 합방을 허락했지만 체력이 문제였다. 맥도웰은 세 번째 시즌에서도 ‘약혼녀 징크스’를 깨지 못했고, 이는 결국 챔피언 결정전의 부진으로 이어졌다. 맥도웰은 3년 연속 용병 MVP란 대기록을 세웠지만 팀의 3연패를 이끌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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