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6월호

그녀 앞에만 서면 ‘우람한 우즈’, ‘맥빠진 맥도웰’

  • 육성철 sixman@ilyo.co.kr

    입력2006-10-13 11: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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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리안 드림’을 찾아 바다를 건너 온 프로스포츠 용병들. 산 설고 물 선 이국땅에서 외롭게 땀 흘리는 그들에겐 ‘실력’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프로야구의 타이론 우즈(두산 베어스)와 프로농구의 조니 맥도웰(현대 다이냇). 두 사람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미국 출신의 흑인’이라는 것말고도 닮은 점이 더 있다.

    우선 미국에서는 둘 다 ‘실패한 인생’이었지만, 한국에 와서 정상에 오른 스포츠 스타라는 사실. 냉정한 프로의 세계에서 ‘이방인’이 3년 내리 주전을 지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맥도웰은 3년 연속 용병 MVP에 올랐으며, 우즈도 3년째 두산의 중심 타선을 이끌고 있다. 두 사람이 주목받는 또 한 가지 이유가 있다. 철저하게 ‘한국식’으로 바뀐 라이프 스타일이 그것이다.

    우즈, 아내 조언 따라 한국행

    타이론 우즈가 야구를 시작한 것은 1976년이었다. 전설적인 홈런왕 래지 잭슨(당시 볼티모어 오리올스, 통산 홈런 563개)의 호쾌한 타격에 반해 방망이를 잡았다. 일곱 살 때였다.

    우즈는 어려서부터 힘이 장사였다. 덩치는 일찌감치 키 183cm, 몸무게 100kg으로 탄탄해졌고, 그런 거구에서 터져나오는 타구는 걸핏하면 담장을 훌쩍 넘어갔다. 우즈의 목표는 당연히 메이저리거. 그러나 메이저리그는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느린 발과 수비 불안 때문이었다. 우즈의 100m 달리기 기록은 13초대를 넘기곤 했다. 메이저리그 선수로는 낙제점이었다. 수비력도 문제였다. 공받기가 서툴러 실수를 연발했다.



    우즈는 메이저리그 진출이 막히자 중남미로 눈을 돌렸다. 95년에 베네수엘라 리그에 참가, 홈런왕에 올랐다. 96년엔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보스턴 레드삭스 산하의 더블A팀 트랜턴 선더에서 25홈런, 97년엔 트리블A팀 포터킷 레드삭스에서 9홈런을 기록했다. 내심 98시즌 빅리그 진출을 기대했지만 물을 먹었다.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은 우즈가 여전히 “공격은 좋지만 발이 느리고 수비가 나쁘다”고 평가했다.

    이 무렵 우즈에게 희망을 열어준 사람이 애인 셰롤이었다. 85년 미국 플로리다주 브룩스빌의 한 슈퍼마켓에서 경리담당 직원과 아르바이트 고교생으로 만난 두 사람은 5년 뒤 장래를 약속한 연인으로 발전했다. 셰롤은 “우즈의 보호자는 나”라고 했고, 우즈는 “셰롤은 어머니 같은 여인”이라고 했다.

    셰롤은 우즈의 메이저리그 진출이 벽에 부딪히자 조심스럽게 한국 프로야구에 관한 정보를 뒤졌다. 당시 한국은 프로야구의 인기를 되살리기 위해 용병 수입을 적극 검토하고 있었다. 셰롤은 88년 서울올림픽을 통해 지켜본 한국에 대해 설명했고, 우즈도 음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국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연봉 9만4000달러. 메이저리그와는 비교도 안 되는 돈이었지만, 우즈는 어머니에게 “꼭 성공해서 메이저리그로 돌아가겠다 ”는 말을 남기고 태평양을 건넜다.

    98시즌에 우즈는 토종을 대표하는 ‘라이언 킹’ 이승엽과 불꽃 튀는 홈런 대결을 벌였다. 중반까지는 이승엽의 우세. 하지만 후반 들어 우즈가 추격의 고삐를 죄었다. 어느 새 이승엽의 기록을 넘어선 우즈는 6년째 아성으로 남아 있던 장종훈의 41홈런 기록마저 무너뜨렸다. 잠실구장을 홈그라운드로 쓰는 서울팀 최초의 홈런왕. 우즈는 한국 무대 데뷔 시즌에서 일약 MVP에 올랐다. 우즈가 신기록을 세우던 날, 셰롤은 그라운드까지 뛰어내려와 “You did it(당신이 해냈어)”을 연발했다.

    “돈보다 의리가 중요”

    셰롤의 뒷바라지는 두산 구단에서도 화제였다. 경기장으로 나서는 우즈에게 두산의 응원가를 불러주는가 하면, 직접 양념한 불고기를 만들어 식탁에 올렸다. 김치볶음밥도 두 사람이 즐겨 먹는 메뉴. 셰롤은 우즈의 몸이 무거우면 마사지로 몸을 풀어주며 기를 살렸다. 이 때문에 우즈는 셰롤이 미국에 있을 때는 방망이가 죽을 쑤다가도 아내가 한국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맹타를 휘둘렀다.

    우즈는 서서히 한국식으로 변해갔다. 98시즌을 마친 뒤 일본 프로야구에서 우즈에게 스카우트 손길을 뻗친 적이 있다. 연봉만 따져보면 일본이 훨씬 유리했다. 하지만 우즈는 “돈도 좋지만 의리가 더 중요하다”며 한국에 남았다.

    우즈가 98시즌 MVP에 오르던 무렵 메이저리그에서는 마크 맥과이어(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새미 소사(시카고 컵스)가 세기의 홈런왕 대결을 펼치고 있었다. 승자는 맥과이어. 도미니카 태생의 소사는 거센 추격전을 폈지만 아깝게 홈런왕 자리를 내줬다. 그때 우즈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맥과이어와 소사 가운데 누가 MVP가 돼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우즈는 잠시 생각하더니 소사라고 답했다. 같은 용병 처지인 소사에게 동정심을 느꼈던 것일까. 그렇지 않았다. 우즈의 생각은 달랐다. “맥과이어가 소사보다 홈런을 많이 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소사는 팀을 포스트시즌에 진출시켰다. 선수에겐 개인 기록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팀 성적이 우선이다.”

    그런 생각 때문일까. 거구의 우즈가 의외로 민감한 반응을 보일 때가 있다. 바로 팀이 연패에 빠져들 때다. 98시즌 중반 팀이 연속으로 역전패를 하자 우즈는 동료들 앞에서 진지하게 말했다. “처녀의 팬티를 덕아웃에 걸어놔야 악운을 피할 수 있다”고. 승패에 대한 우즈의 징크스는 동료들 사이에서도 유명하다. 지난 시즌엔 “우승 기원 고사 때 올린 돼지머리가 좋지 않았다”고 말해 두산 선수들을 한바탕 웃기기도 했다.

    지난해까지 우즈가 기록한 성적은 76홈런 204타점이다. 통산 타율도 3할을 넘겼다. 올시즌에선 초반 페이스로 볼 때 여름이 가기 전에 용병 최초로 100홈런 고지를 밟을 듯하다. 성실한 플레이와 검소한 생활이 몸에 밴 우즈에겐 이제 한국말로 농담을 걸 만큼 여유도 생겼다. 메이저리그로 돌아가겠다는 야망은 이루지 못했지만, 대신 한국 프로야구 최고의 용병이라는 명예를 얻었다. 우즈의 마지막 꿈은 두산이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는 것이다.

    신선우 감독의 용병 길들이기

    우즈가 차분하게 레이스를 펼치는데 비해 맥도웰은 곧잘 흥분한다. 두산의 코칭스태프가 우즈에게 모든 것을 믿고 맡기는 반면, 현대의 신선우 감독은 맥도웰의 일거수 일투족에 주목한다. 야구와 농구라는 종목의 차이를 넘어 두 선수의 한국 살이에는 다른 구석이 많다.

    맥도웰은 미국 텍사스주 알링턴대를 졸업하고 유럽으로 날아갔다. NBA에서 뛰기에는 힘과 기술, 스피드가 모두 떨어졌다. 스페인에서 3년, 포르투갈에서 1년, 키프로스에서 3개월. 그러면서 맥도웰은 나름대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한국의 감독들은 그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한국 프로농구 지도자들의 눈이 의심스러운 대목이다.

    97년 가을 미국에서 프로농구 트라이아웃 캠프가 열렸다. 맥도웰이 유럽에서 돌아온 뒤였다. 10개팀 감독이 성적의 역순으로 용병을 찍고 있었다. 먼저 맥도웰에게 관심을 둔 팀은 대우(신세기의 전신). 하지만 대우의 한 관계자가 맥도웰의 외모를 보고 난색을 표했다. 우락부락한 몸, 툭 튀어나온 이빨, 깔끔하지 못한 콧수염…. 한마디로 팀 이미지 구기기 십상일 듯한 선수였다. 이렇게 해서 맥도웰은 드래프트 18번째로 현대의 품에 안기게 됐다.

    맥도웰의 98∼99시즌 용병 파트너는 제이 웹이었다. 두 선수는 한국에 오자 마자 혹독한 신고식을 치렀다. 현대측이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라” 며 대형 마트에 두 선수를 보낸 것이 화근이었다. 맥도웰과 웹은 산더미처럼 물건을 산 뒤 구단에 돈을 대신 내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신선우 감독은 두 선수의 짐을 모두 꾸려서 숙소 밖에 내놓았다. “그런 정신자세라면 필요없으니 미국으로 돌아가라”는 뜻이었다. 피 말리는 신경전 끝에 결국 용병들이 무릎을 꿇었다. 사실 트라이아웃까지 끝난 마당에 마땅히 돌아갈 곳도 없었다.

    놀라운 것은 이때부터 맥도웰이 무섭게 변했다는 사실. 신선우 감독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따랐다. 현대의 전력이 급상승한 건 당연한 일. 맥도웰은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이상민, 조성원 등과 함께 공포의 속공을 연출하며 현대를 무적함대로 바꿔놓았다. 시즌이 끝난 뒤 재계약 1순위였던 제이 웹이 맥도웰에게 밀려 퇴출됐을 정도.

    두 번째 시즌에서도 맥도웰은 최강의 파워포워드였다. 이번엔 재키 존스와 짝을 이뤄 기아의 트윈타워 윌리포드-리드와 맞붙었다. 당초 팽팽하리라던 예상은 빗나갔다. 맥도웰이 리드와 벌인 1대1 대결에서 완승을 거두자 챔피언 결정전도 싱겁게 끝났다. 이때부터 농구계에선 “맥도웰을 잡지 못하면 현대를 이길 수 없다”는 말이 나왔다.

    하지만 맥도웰이 언제나 펄펄 날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우즈와는 딴판으로 맥도웰은 약혼녀가 한국에 들어오기만 하면 맥을 못췄다. 구단에서는 맥도웰의 사기를 고려해 합방을 허락했지만 체력이 문제였다. 맥도웰은 세 번째 시즌에서도 ‘약혼녀 징크스’를 깨지 못했고, 이는 결국 챔피언 결정전의 부진으로 이어졌다. 맥도웰은 3년 연속 용병 MVP란 대기록을 세웠지만 팀의 3연패를 이끌지는 못했다.

    맥도웰이 한국 농구에 잘 적응할 수 있었던 데는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이 한몫 했다. 소주와 삼겹살, 순대에 떡볶이까지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식성, 감독과 코치 앞에서 다짜고짜 “나에게 주장을 맡겨달라”고 요구하는 뚝심, 5반칙 퇴장을 당하고도 “심판이 나를 표적으로 삼고 있다”고 소리치는 넉살…. 농구팬들에게 맥도웰은 바라만 봐도 즐거운 선수다.

    하지만 최고의 용병 맥도웰에게도 위기가 찾아왔다. 프로농구가 수입 용병의 신장제한 규정을 재조정하면서 맥도웰의 입지가 좁아진 것. 지난 시즌까지 장신 용병은 205cm, 단신 용병은 193cm가 제한선이었다. 이것이 다음 시즌부터는 장신 208cm, 두 용병 합계 398cm로 재조정된 것(단신 규정은 사라졌다). 이럴 경우 그동안 경쟁력이 떨어졌던 194∼199cm급 선수들이 대거 영입될 것이 확실하다(한국농구연맹에 기록된 맥도웰의 신장은 190.5cm지만 일부에서는 그의 실제 키가 195cm라고 주장하고 있다).

    용병이 들어온 순서는 축구가 가장 빠르고, 농구와 야구가 그 뒤를 잇는다. 최초의 용병은 83년 프로축구 포항제철(포항의 전신)이 브라질에서 임대해온 미드필더 세르지오 루이스 코고와 호세 로베르트 알베스. 84년에는 네덜란드의 랜츠베르겐이 현대에 입단해 어시스트상을 받았다. 1년 뒤엔 태국의 축구영웅 피아퐁이 럭키금성 유니폼을 입고 득점상과 어시스트상을 휩쓸었다. 이때부터 프로축구에서는 용병이 ‘플러스 알파’의 전력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프로야구의 경우 용병의 범위를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용병 도입시기가 달라진다. 일반적으로 용병은 ‘외국에서 활동하는 선수’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83년부터 한국 프로야구에 뛰어든 재일동포 선수들도 이 부류에 든다. 한 시즌 30승의 대기록을 세운 장명부, 절묘한 투수 리드로 해태 전성시대를 열었던 김무종도 83년에 한국 무대에 뛰어들었다. 그들 또한 한국에서 ‘외지인’ 취급을 받으며 눈물젖은 빵을 씹었다.

    재일동포 최초로 타격왕에 오른 고원부(빙그레), 삼성의 이만수와 치열한 타율 경쟁을 펼친 홍문종(롯데) 등은 한국 프로야구의 텃세를 서러워했다. 시즌 막판으로 가면서 한국 투수들이 자신들에게 좋은 볼을 던지지 않았다는 것. 여기에 화가 난 재일동포 투수들이 한국 타자들을 계속해서 볼넷으로 내보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이들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용병은 ‘보이지 않는 적’과도 싸워야 한다. 그만큼 ‘코리언 드림’을 실현하는 게 힘들다는 뜻이다.

    야구의 우즈, 농구의 맥도웰에 비길 만한 프로축구 용병은 누구일까.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부산 대우와 수원 삼성에서 뛰었던 유고 용병 드라큘리치 샤샤를 꼽을 수 있다. 샤샤는 95년 유고의 명문클럽 레드스타에서 부산 대우로 이적했다(이적료 20만달러). 2년여의 탐색 끝에 그의 진가가 나타난 것은 97시즌. 샤샤는 부산의 공격진을 리드하며 프로축구 최초의 3관왕을 이끌었다. 97시즌 성적은 11득점, 5도움.

    끈질긴 귀화 유혹

    98시즌 중 샤샤는 신흥 명문으로 떠오른 수원으로 이적했다. 이번에도 팀이 우승을 차지했다. 샤샤는 팀을 옮기는 와중에도 10득점, 12도움을 기록했다. 99시즌은 샤샤의 독무대였다. 시즌 초반부터 골 폭풍을 일으키더니 무려 23골을 터트렸다. 그러나 호사다마라던가. 샤샤는 친정팀 부산과 겨룬 최종 결승전에서 손으로 골을 넣는 해프닝을 연출했다. 샤샤의 거짓 골 세러모니에 속은 중국인 심판은 득점을 인정했고, 그해 프로축구의 마지막 잔치는 엉망이 됐다.

    이런 사태가 없었다면 우승팀의 득점왕인 샤샤에게 MVP가 떼논 당상이었다. 하지만 축구계는 그의 ‘부도덕성’을 집요하게 따졌다. 비난의 화살이 줄기차게 쏟아진 데는 용병이라는 이유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그는 마침내 기자단 투표에서 안정환에게 밀리는 아픔을 겪었다. 한때 한국 귀화설까지 나돌았던 샤샤는 운명의 ‘손장난’으로 좌절을 맛봐야 했다.

    그후 재기를 다짐하고 뛰어든 일본 J리그. 하지만 그곳에서 샤샤는 특유의 뚝심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미 한국식 축구에 익숙해진 몸이 일본 스타일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탓이다. 결국 샤샤는 황선홍과 맞바꾸는 조건으로 다시 한국행, 올해 K리그를 뛰게 됐다.

    프로축구의 특급 용병들에게는 끈덕진 유혹이 따라다녔다. 포항의 라데, 일화의 샤리체프, 전남의 마시엘, 수원의 샤샤 등이 절정의 기량을 뽐낼 무렵 축구계는 ‘귀화’라는 비장의 카드를 흘리곤 했다. 여기에는 월드컵에 4회 연속으로 진출한 축구강국이면서도 아시아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한 비애가 담겨 있다. 할 수만 있다면 용병을 내세워서라도 세계 무대로 진출하고 싶은 욕망이라고나 할까.

    이 가운데 최초로 귀화한 선수는 발레리 사리체프다. 천안 일화의 골키퍼로 4년 연속 베스트 11에 올랐던 사리체프는 소속팀을 정규리그 3연승 으로 이끈 주인공이다. 92년부터 4년간 내리 0점대 실점률을 기록한 사리체프의 ‘신화’ 때문에 타 구단들은 앞을 다투어 외국인 골키퍼를 영입 했고, 이 때문에 협회는 ‘골키퍼에 한해 용병을 제한한다’는 특례조항을 만들기도 했다.

    사리체프는 올시즌 안양 LG의 골문을 지키고 있다. 족보가 바뀌어서 이제 그의 이름은 구리 신씨 1대인 ‘신의손’이다. 하지만 그가 태극마크를 달 가능성은 거의 없다. 나이(40세)도 나이지만, ‘(다른 국적으로) A매치(국가대표팀간의 경기)에 뛴 선수는 국가대표가 될 수 없다’는 단서조 항이 그의 행보를 가로막고 있다.

    현재 축구협회가 강력히 귀화를 추진하고 있는 선수는 전남의 마시엘. 97년 영입돼 수비수로는 드물게 3년 연속 베스트 11에 뽑힐 만큼 기량이 출중한 선수다. 성실하고 성격까지 원만해 소속팀에서도 인기가 높다. 하지만 마시엘은 귀화 제의에 시큰둥한 반응. 그는 조국 브라질이 A매치에서 이겼다는 뉴스를 접할 때마다 창문 밖에 국기를 내걸고 소리를 지르며 기뻐하는 ‘애국자’다.

    마시엘은 무관심해도 그에 대한 축구인들의 짝사랑은 계속될 듯하다. 월드컵을 2년 앞둔 상황에서 마시엘 같은 수비수를 찾기는 하늘에서 별 따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국 축구는 늘 고질적인 수비 불안에 허덕이는 실정이다.

    악동 列傳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처럼 용병들에게 한국은 낯설고 거친 땅이다. 한국에서 성공하려면 기량만으로는 부족하다. 상대를 압도할 수 있는 근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렇다고 이것이 지나치면 표적이 되기도 한다. 실제로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도 한국 스타일에 적응하지 못한 스타들이 있었다. 그들에게 불명예스럽게 따라붙는 별명이 바로 ‘악동’이다.

    99시즌 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의 4번타자 펠릭스 호세도 ‘악동’ 별명을 얻었다. 그는 한국에 들어오기 전부터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다. 91년 메이저리그 올스타에 선발된 전력을 인정받아 99년 용병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로 지명됐다. 롯데 구단의 기대처럼 호세는 홈런포를 펑펑 날리며 부산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99시즌 롯데와 삼성의 플레이오프 7차전(10월20일). 호세는 대구 구장의 열성팬들 앞에서 보란 듯 승부에 쐐기를 박는 홈런을 터트렸다. 이 순간 관중석에서 물병이 날아들었고 그중 하나가 호세의 머리에 명중했다. 흥분한 호세가 관중을 향해 욕설을 퍼붓자 이번엔 라면 국물이 날아들었다. 그러자 호세는 덕아웃에서 들고온 야구 방망이를 휘두르며 응수했다. 이 사건은 대구와 부산의 야구팬들을 자극했다. 대구에서야 호세가 ‘죽일놈’이었지만, 부산에서는 ‘의지의 사나이’였다. 부산이 연고지인 롯데가 보기에 호세는 밉지 않은 선수였다. 그러나 호세는 롯데를 버리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메이저리그에 재도전하기 위해서였다.

    펠릭스 호세와 이름이 같은 해태의 말래브 호세는 엉뚱한 해프닝으로 전국방송을 탔다. 해태가 타선을 보강하기 위해 영입한 호세는 김포공항에 입국할 때 권총을 소지하고 있다가 경찰에 적발됐다. 해태의 호세는 야구도 열심히 했고 성격도 원만해 기대를 모았지만, 결정적으로 실력이 따라주지 않았다. 호세의 방망이가 신통치 않음을 확인한 김응용 감독은 시즌이 시작되기도 전에 퇴출을 결정했다.

    프로농구의 용병들은 한술 더 뜬다. LG 세이커스의 버나드 블런트는 뛰어난 실력을 보였지만 ‘내신성적’은 낙제점이었다. 98∼99시즌을 앞두고 일본 세미프로리그 팀과 이중계약을 맺는가 하면 99∼2000시즌 직전엔 연봉에 부과된 세금을 구단이 내라고 떠넘겼다. LG는 블런트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김인양 부단장과 이충희 감독을 미국 필라델피아에 ‘사절단’으로 급파하는 성의를 보였지만, 블런트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협상이 벽에 부딪히자 블런트는 곧바로 짐을 꾸렸다. 이 바람에 LG는 지난 시즌에 고전을 면치 못했고, 이충희 감독은 성적 부진으로 해임됐다.

    98시즌엔 동양의 그레그 콜버트가 시즌 직전 구단과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야반도주하는 사건이 있었다. 그가 없는 동양은 32연패의 수모를 당했다. 동양의 희망이라며 기대를 모았던 콜버트는 팀을 떠나기 직전 “어머니가 아프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실은 가출한 아내와 딸을 찾기 위해 서둘러 비행기에 올랐다는 후문. 가장의 해외 진출에 따른 가족의 생이별이 빚어낸 촌극이었다.

    나래(삼보의 전신)의 브라이언 리스는 괘씸죄로 방출된 케이스. 그는 코칭스태프의 말을 무시하고 개인 행동을 일삼다가 눈 밖에 났다. 나중에는 컨디션이 나쁘다는 이유로 출장을 거부하다 퇴출당했다. 이밖에 신세기의 말린 킴브룩과 기아의 디온 브라운은 신병(身病)을 숨기고 입국했다가 뒤늦게 밝혀져 쫓겨난 선수. 프로농구의 경우 선수들이 셀프리스트에 몸 상태를 정확하게 기록하도록 돼 있지만, 돈이 급한 용병들 은 부상 사실을 숨기곤 한다. 하지만 기아의 디온 브라운은 변호사까지 내세워 결백을 주장했고 이 때문에 농구계에서는 ‘브라운의 실력이 수준 미달이자 기아가 부상을 핑계로 돌려보냈다’는 소문이 돌았다.

    프로축구에서는 수원 삼성의 데니스가 악동으로 꼽힌다. 데니스는 끊임없는 돌출행동으로 몇번이나 도마에 올랐다. 98시즌에는 부산의 수비수 김주성과 신경전을 펼치다 넘어진 김주성을 걷어차 7개월 출장정지를 당했다. 또한 최근엔 수원이 야심을 갖고 준비한 아시아클럽컵 본선 경기 도중 같은 팀 대선배 황선홍과 티격태격하는 소동을 일으켰다. 결국 수원은 조직력이 무너지면서 4개팀 가운데 꼴찌를 하고 말았다.

    용병들의 한국 생활은 어떨까. 흔들림없이 자신의 길을 걷는 선수들도 있지만, 지독한 향수병 때문에 자기 실력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선수도 많다. 용병들이 가장 견디기 어려워하는 문제는 역시 이성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그들만의 방식’으로 욕구를 해소하는 강심장이 있는가 하면, 빛을 보기도 전에 한국을 떠나는 감성파들도 있다.

    프로축구 천안 일화의 미첼은 ‘가출용병’으로 불렸다. 고국인 카메룬으로 떠나기만 하면 연락이 두절됐기 때문이다. 99시즌에는 휴가를 받아 귀국한 뒤 4개월이나 소식을 전해오지 않았다. 이것은 미첼의 복잡한 가정사에서 기인한다. 일부다처제를 허용하는 카메룬의 관습에 따라 미첼은 3명의 아내를 두고 있다. 첫째 아내는 미국에, 둘째 아내는 카메룬에, 셋째 아내는 한국에 살았다. 미첼은 카메룬에 갈 때마다 아내들을 ‘정리’하느라 애를 먹었다. 한국에 있을 때는 한 달에 수백만원의 전화요금을 물어야 했다.

    미첼의 말썽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98시즌 후 일화의 동계훈련에도 참가하지 않더니, 99시즌 직전엔 100kg이 넘는 거구의 몸으로 입국했다. 미첼이 겨우 공을 찰 정도로 몸을 만들었을 무렵엔 뜻하지 않은 변수가 생겼다. 카메룬 국가대표팀에 차출돼 팀에서 이탈한 것. 일화가 하위권을 맴도는 동안 미첼은 단 한 게임에도 출전하지 못했다. 올 시즌에도 미첼은 수원과의 슈퍼컵 결승을 불과 하루 앞두고 귀국하는 무성의를 보였다. 참다 못한 천안 구단은 마침내 퇴출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파라의 자살 소동

    프로농구 용병들 사이엔 이른바 ‘이태원 회동’이라는 것이 있다. 향수병을 이기지 못한 용병 선수들에게 이태원은 일종의 해방구다. 이곳에 가면 ‘욕구’도 풀 수 있고, 같은 처지의 용병들끼리 어울려 술도 마실 수 있다.

    초창기부터 이 모임을 주도해온 선수는 기아와 SBS에서 뛰었던 프로농구 원년 용병 1호 클리프 리드. 그는 신참 용병들에게 ‘한국에서 즐기는 법’에 관한 노하우를 알려주는 ‘마담뚜’ 노릇도 하고 있다. 이태원 회동에서는 용병들이 당하고 있는 불이익에 대해 열띤 토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실제로 일부 선수는 이태원 회동 이후 팀에 돌아가 태업을 벌인 일도 있었다.

    용병들의 성적 욕구 불만에 얽힌 에피소드 한 토막. 97~98시즌 현대에서 맥도웰과 공포의 더블 포스트를 이끌었던 제이 웹은 이듬해 재계약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제이 웹은 일본으로 떠났는데, 서둘러 떠나는 바람에 숙소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다. 뒤늦게 제이 웹의 방을 청소하던 구단 관계자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방 구석구석에 포르노 사진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던 것. 용병들의 밤문화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토종과 용병이 한데 어울려 지내다 보면 배꼽을 잡는 일도 자주 벌어진다. 토종 선수들이 용병들에게서 문화적 충격을 받는 일도 있지만, 그보다는 용병들의 고충이 묻어나는 사연이 훨씬 많다.

    프로야구 98시즌 삼성 라이온스에서 뛰다가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돌아간 파라. 그는 곱슬머리를 관리하느라 애를 먹었다. 어느 날엔가는 면도칼을 들고 화장실에 들어가 머리를 자르고 있었다. 이것은 파라의 평소 습관이었다. 하지만 화장실에서 파라의 행동을 처음 본 동료는 그가 자살을 기도하는 것으로 오해했다.

    99시즌 LG 트윈스에서 뛰었던 케빈 대톨라는 돈을 아끼려고 미국에서 쓰던 가전제품을 통째로 실어왔다. 그러나 전자제품 코드를 콘센트에 꽂을 때마다 불꽃이 튀었다. 미국에서 사용하는 전압이 100볼트인데 비해 한국은 220볼트였기 때문인데, 한동안 이런 사정을 몰랐던 대톨라는 걸핏하면 말썽을 일으키는 전자제품 때문에 머리 끝까지 열이 뻗쳤다.

    99시즌 해태 타이거즈의 용병이던 윌리엄 브릭스와 트레이시 샌더스는 어느날 아침 일찍 통역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파트 스피커에서 무슨 소리가 계속 나오는데 영 심상치가 않다는 것. 두 사람은 “한국에 전쟁이 터진 것 같다”며 수화기를 스피커에 갖다댔다.

    “주민 여러분 오늘은 반상회가 있는 날입니다. 주민 여러분께서는 한 분도 빠짐없이….”

    프로농구의 버나드 블런트는 한국 심판에게 웃는 표정을 지으면서 욕설을 퍼붓곤 했다. 판정이 애매하면 얼굴엔 미소를 띠면서도 입으로는 ‘fuck…’ 어쩌고 저쩌고 했다. 하지만 외국인 심판이 나오면 입을 꼭 다물었다.

    험난한 코리안 드림

    용병들은 한국에서 짧은 기간에 성공하고 싶어한다. 그들의 눈높이로 보면 한국시장은 분명 만족스러운 곳이 아니다. 언젠가는 더 큰 무대에 진출하겠다는 게 그들의 꿈이다. 하지만 한국시장이 그리 호락호락한 것은 아니다. 지금껏 수백명의 외국 선수들이 한국을 찾았지만, 금의환향 한 사람은 극소수다. 프로농구의 경우 최근 3년간 용병들의 재계약 비율이12.5%, 20%, 35%에 지나지 않았다. 프로야구의 경우 아직 시즌 초반 인데도 해태와 SK가 용병 전원을 물갈이했다. ‘코리언 드림’이 만만치 않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실례다.

    날이 갈수록 한국 시장에 진출하는 용병들의 수준은 높아지고 있다. 올 시즌엔 메이저리그 타격왕을 차지했던 프랑코가 삼성에 입단했다. 프로축구에서도 역대 이적료 최고액인 120만달러짜리 유고 용병 안드레가 안양 유니폼을 입었다.

    하지만 선수들의 몸값이 높아진 만큼 이방인을 대하는 의식수준도 함께 올라가지는 못했다. 일부 국내 선수들은 용병은 거칠게 밀어붙여도 된다는 그릇된 태도를 갖고 있다. 용병이 잘 돼야 한국 스포츠가 잘 된다는 ‘동업자 정신’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때다. 박찬호와 이종범이 차별대우를 받아서야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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