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6월호

의약분업 사태로 본 우리 사회의 갈등구조

  • 홍욱희 세민환경연구소 소장 환경학박사

    입력2006-10-13 11: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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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갈등해소 전문가가 필요하다 선진국들에 비교해서 우리 사회의 갈등이 훨씬 더 많고 더 심각한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우리가 아직 그들만큼 공정하고 합리적인 사회 운영의 틀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지만 그 의미를 물어보면 얼른 대답하기 곤란한 단어들이 있다. 아마도 갈등(葛藤)이란 용어가 그런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 생각된다. 갈등이란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2개 이상의 대립하는 경향이 거의 같은 세기로 동시에 존재하여 행동결정이 곤란한 상태’라고 설명되어 있다. 쉽게 말해서 어느 두 진영이 강력하게 대립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전쟁이라는 극단적 형태의 물리적 충돌까지는 가지 못하고 서로 으르렁거리고만 있을 때, 이런 현상을 우리는 갈등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갈등이란 용어는 심리학에서 가장 먼저 사용됐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등장하는 저 유명한 대사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 (To Be or Not to Be?)”는 주인공 햄릿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복잡한 심리상태를 나타내는데 프로이트 이후의 심리학자들은 이런 인간의 내적 고뇌를 설명하는 수단으로 갈등이란 용어를 채용했다.

    갈등 많은 사회의 초상

    따지고 보면 우리 생활은 곧 갈등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날 때, 지금 일어나서 아침 운동을 할 것인가 아니면 자명종을 10분쯤 늦춰 놓고 비몽사몽의 나른함을 조금 더 즐길 것인가에서부터 출근길에 버스를 탈 것인가 지하철을 탈 것인가, 끊기로 결심했던 담배를 다시 시작할 것인가 참을 것인가 등등 우리 일상사는 선택의 문제로 가득 차 있고, 그 선택이 단순하지 않을 때(또는 단순하지 않다고 느낄 때) 그런 심리상태가 갈등 상태라고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이처럼 갈등이란 용어가 심리학자의 진료실을 벗어난 지는 이미 오래다. 바로 사람들 사이에서 팽팽한 긴장과 대립이 지속될 때 그런 관계를 설명하는 용어로 갈등이란 말이 쓰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인간 조직의 가장 기본 단위인 가족 구성원 간에도 심각한 대립이 발생한다. 부부간의 갈등,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 고부간의 갈등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갈등의 양상이 심각해지면 어느 한 쪽이 회복 불능의 피해를 보거나 아니면 결국 가정이 파탄나는 상태로까지 발전할 수 있다.



    마을, 직장, 학교, 지역 사회, 국가 등 점차 커지는 조직 속에서 나타나는 갈등의 양상은 이제 ‘인간 대 인간의 관계’가 아니라 ‘집단 대 집단의 관계’로 발전한다. 한 조직 내에서 2개 이상의 대립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그 구성원이 양편으로 나뉘었는데 양쪽 세력이 비슷하다면 곧 집단적 갈등관계가 조성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 주위를 한번 둘러보자. 아니면 신문을 한번 펼쳐보자. 어떤 사회적 갈등의 현장을 발견할 수 있을까?

    일반 직장에서 나타나는 갈등의 대표적인 예는 아마도 상사와 부하 직원 간의 갈등, 노사 갈등일 것이다. 학교에서는 교장이나 교감 등 학교 행정을 책임지는 관리자와 평교사들 사이에, 학급에서는 공부 잘 하는 학생과 그렇지 못한 학생 사이에 갈등이 발생할 소지가 많다. 일부 아파트촌에서는 재개발 시행 여부를 놓고 주민들 사이에서 의견 대립이 벌어지고, 지역 사회에서는 개발 이익의 극대화를 원하는 주민들과 무분별한 개발에 반대하는 환경단체들 사이에 갈등이 나타난다. 그런가 하면 쓰레기 소각장 설치 문제에서 보는 것처럼 지역민과 지방자치단체 사이에 공방이 불거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아마도 우리 사회에서 가장 심각한 갈등구조는 사회 전반에 걸쳐서 진행되고, 또 그로 인해 사회 구성원 모두가 피해를 보는, 그런 것들이 아닐까 한다. 그런 예로는 영호남간의 지역갈등, 최근 한창 문제가 되고 있는 의약분업 논쟁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듯이 이익집단들끼리 공익을 담보로 벌이는 직업간의 갈등,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고용자와 피고용자라는 사회계층간에 나타나는 노사 갈등, 사회정의의 실천인가 기득권의 고수인가로 대표되는 시민단체와 권력 간의 갈등 등이 될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왜 갈등이 많은가

    미국이나 유럽, 일본 등 선진국에서 생활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그런 사회에 비해서 우리 사회가 살기에 얼마나 피곤한 사회인지 잘 알고 있다. 살기에 피곤하다는 것은 곧 우리 사회에 내재하는 갈등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서 훨씬 더 심각하다는 말이 된다.

    잠시 선진국 생활의 예를 들어 보자. 부모 자식간의 문제는 선진국이라고 해서 우리와 크게 다를 점이 없지만, 적어도 선진국에서는 자녀에게 공부를 강요하는 부모는 찾아보기 힘들다. 부모가 아이들 등을 떠밀어서 학원이나 과외공부에 내모는 일도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 아이들 은 실력껏 자기가 하고 싶은 만큼만 공부하고, 그것만으로 직장을 구하고 생활해 나가는 데에 별로 부족함이 없다.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공부 잘하는 아이와 공부 못하는 아이를 차별하지 않고, 부잣집 아이와 가난한 아이를 차별하지 않으니 아이들이 학교에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을 상상하기 힘들다. 이런 사회라면 부모자식간의 갈등도 훨씬 적을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닌가(그렇다고 해서 갈등이 전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에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그 정도가 약하다는 말이다).

    부부간 문제도 우리보다 훨씬 덜 심각하다. 선진국의 이혼율이 우리보다 높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부부로 함께 사는 동안에는 배우자를 존중한다는 사회적 룰이 확립돼 있으니 갈등이 덜할 수밖에 없다. 집안일은 부부가 공동으로 하고, 주5일 근무제가 정착돼 있으니 주말은 어김없이 부부 단위로 생활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처럼 퇴근길 남편을 유혹하는 유흥업소들이 별로 없으니 아무래도 부부 사이가 우리보다 더 돈독할 것이 당연하다. 고부 갈등 역시 부부 중심의 전통이 확립돼 있는 서구 사회가 우리처럼 심각할 이유가 없다.

    직장과 사회에서의 갈등도 별로 다를 바가 없다. 선진국이라고 해서 직장과 사회에서 고용주와 피고용자, 관리자와 피관리자, 부자와 빈자, 권력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들 사이에 계급과 계층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런 구별은 어쩌면 우리나라보다 더 심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구별이 우리처럼 심각한 갈등의 양상으로까지 발전하는 경우는 드물다. 바로 갈등을 사전에 적절히 통제할 수 있는 사회적·제도적 장치가 마련돼 있고, 또 사회 자체가 합리성과 공정성의 바탕 위에서 작동해서 갈등이 불거질 소지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합리성· 공정성과 갈등의 정도

    합리성과 공정성이 존중받는 사회에서는 갈등 자체가 발생하기 힘들다. 회사의 경우를 예로 들어 보자. 우리나라에서 일반 직장인들이 겪는 갈등의 전형적인 예는 상사의 부당한 요구와 무례한 행동을 참아내기 어렵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사례는 직장인들이 글을 올리는 인터넷 상에서도 무수히 찾아볼 수 있는데, 상사가 부하의 업적을 마치 자기 것인 양 가로채고, 수시로 불필요한 야근을 시키고, 또 여자의 경우에는 함부로 추근거리는 등 그 양상은 가위 천태만상이다. 여기에 더해서 자신의 잘잘못에는 상관없이 구조조정이라는 미명하에 언제든지 해고될 수 있다는 신분상의 위기감까지 느끼는 직장인이라면, 그런 직장을 과연 다녀야 하는지 아니면 그만두어야 하는지 심각한 갈등을 겪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선진국이라면 이런 일이 우리만큼 흔히 발생할 수 있을까? 선진국의 제대로 된 회사에서는 상사가 부하 직원을 도와주지는 못할지언정 오히려 괴롭히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공정하고 합리적인 인사 관리가 정착된 회사에서는 그런 무능한 사람이 높은 자리까지 오른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도 혹시 선진국에서 직장인이 이런 부당한 일을 겪었다면 그는 어떤 행동을 취할까? 그 사람은 필경 회사의 고충처리 부서나 최고경영자, 아니면 지방자치단체의 근로자 보호 센터를 방문해서 자기가 겪는 어려움을 호소하고 해결책을 구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신고를 접수한 담당자는 즉각 다양한 압력 행사수단과 법적 장치를 동원해서 신고자의 고충을 해결해줄 것이다.

    이런 사회라면 피고용인이라는 사회적 약자가 고용인이라는 강자의 힘에 눌려 억울함을 당하는 일도 드물 것이다. 이렇게 사회적 약자가 제도적으로 보호받는 사회에서는 노사 관계도 유연해질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개인적 갈등이 사회적 갈등으로 퍼져나가기 전에 그 사회가 신속하게 갈등을 해소해서 사회의 안정성이 확고히 유지되는 것이다.

    지난 4월에 치러진 총선은 우리 사회에 드리운 지역 갈등의 골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다시 한번 일깨워주었다. 전국이 1일 생활권인 좁은 나라에 서 이처럼 지역 감정이 심화된 데에는 물론 오랫동안 쌓인 갖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지역 감정의 갈등은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공정하고 합리적인 제도가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역대 위정자들이 공정하고 합리적인 인사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공정하고 합리적인 지역 개발 정책을 펴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며, 또 공정하고 합리적인 법과 제도 마련에 등한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결국, 선진국들에 비해서 우리의 사회적 갈등이 훨씬 더 많고 더 심각한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우리가 아직 그들만큼 공정하고 합리적인 사회 운영의 틀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서 개인의 개성을 존중하고 가족 단위의 생활 을 중요시하는 사회적 관행들이 미처 정착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불과 한 세대 사이에 전형적인 후진국에서 선진국 문턱까지 비약적인 경제개발에 성공했다. 그렇지만 지난 수십 년 동안 경제개발 위주의 정책을 펴온 결과 빈부격차는 심화됐고 지역 감정의 간극은 더 벌어졌으며 구석구석에 부정과 불법이 난무하는 그런 사회로 전락하고 말았다.

    다른 한편, 이렇게 경제개발 제일주의가 지속되는 동안 우리는 그로 인해 얻어진 과실을 사회 구성원들에게 분배하는 문제에 등한해왔다. 노사문제의 격화는 결국 이런 부의 분배가 공정치 못했다는 데에서 기인한 것이며, 지역 갈등 역시 지역간 부의 분배가 잘못된 데에 상당 부분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정작 우리를 답답하게 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 자리잡고 있는 그런 완강한 갈등 구조가 아니다. 그것보다는 그런 갈등구조를 해소시키고 자 하는 사회적 노력과 장치가 제대로 준비돼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이런 갈등을 해소 내지는 완화하는 데에 얼마나 허약한지를 이제 막 현실화되고 있는 의약분업 제도를 통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의약분업이란 의사와 약사의 업무 영역을 완전 분리해서 의사는 진단과 처방을 담당하고 약사는 조제 및 투약에 전념케 한다는 선진국형 제도다. 우리가 종합병원을 방문할 때 알 수 있는 것처럼 의사들도 이제는 자신의 전공 분야가 아니면 환자를 볼 수 없을 정도로 현대 의학은 분업화돼 있다. 따라서 의사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나오는 새로운 의약품들에 대해 공부하리라고 기대하기는 힘들다. 새로운 제도가 대학에서 전문지식을 쌓은 약사들에게 약의 조제와 투약을 전적으로 책임지우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렇게 의약분업이 실시되면 그 혜택은 주로 환자 몫이 된다. 환자는 의사에게서는 정성을 다한 진료를 받을 수 있고, 약사에게서는 한결 저렴한 가격에 더 안전한 약을 구입해서 복용할 수 있다. 물론 의사와 약사들에게도 혜택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의사들은 약화(藥禍) 사고의 가능성에서 벗어날 수 있고 약사들은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의사들 쪽에서는 이제까지 병원에서 환자들에게 물리던 약값을 포기해야만 하므로 상당한 경제적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또 약국에서 파는 약에 대해서도 광범위하게 의료보험이 적용되기 때문에 일부 약사들도 수입이 줄어들 수 있다.

    따라서 의약분업 제도의 시행은 그 본질상 의사와 약사 양쪽에 그리 달갑지 않은 제도다. 그런데도 의약분업이 촉구되는 것은 국민들에게 돌아가는 혜택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한 시민단체의 추산에 의하면, 이렇게 해서 얻어지는 경제적 이익이 연간 수조 원을 상회할 것이라고 한다.

    기득권층의 밥그릇 싸움

    사실 정부는 일찍부터 의약분업에 의욕을 보여왔다. 1963년에 제정된 약사법에 이미 의약 분업이 명기돼 있었다. 그리고 의약분업을 위한 시범 사업도 1984년부터 시행한 바 있으며, 지난 10여 년 동안은 의료개혁위원회, 의약분업추진협의회 등 여러 위원회를 구성해서 의약분업의 실시 시기와 시행 방법에 대해서 나름대로 대안을 내놓기도 했다.

    그렇지만 의약 분업은 바로 그 제도의 당사자인 의사와 약사들의 반대로 오랫동안 시행이 유보됐으며 그 결과 마땅히 국민들에게 돌아가야 할 혜택이 아직까지도 주인에게 넘겨지지 못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쉽게 말해서 의약분업은 우리 사회를 선진국 사회로 진입하게 하는 좋은 제도 인데도 일부 기득권층의 밥그릇 싸움이 여태까지 발목을 붙잡고 있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딱한 사정은 지난 몇 년 동안 이 제도가 어떻게 추진되었는지를 살펴보면 극명하게 드러난다. 의약분업의 본격 실시가 법에 명시된 것은 1993년도의 개정약사법이다. 이 법에서는 의약분업 실시를 99년 7월 이전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1998년 12월 의사협회, 병원협회, 약사회가 각각 이 제도의 실시 연기를 국회에 청원했다. 이듬해 3월 국회는 이들 단체의 청원을 받아들여 시행시기를 1년간 연기하되, 2개월 내에 시민단체, 소비자단체 등과 함께 새로운 의약분업 모형을 도출하기로 하고 이에 실패할 경우 정부안대로 추진키로 합의했다.

    그 후 경실련, 참여연대, 녹색소비자연맹 등의 시민단체와 의사협회, 약사회가 의약분업 시행 방안을 협의하여 작년 5월에는 의약분업 시행 방안을 정부에 건의했으며, 정부는 이 합의안을 토대로 구체적인 시행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서 의약단체 대표, 소비자 단체, 시민단체, 언론계, 학계 대표 등 25명으로 의약분업실행위원회를 구성하게 된다. 이 위원회는 작년 9월17일 의약분업 시행방안 최종안을 발표했고, 국회가 이를 약사법 개정안에 반영해서 12월7일에 통과시켰다. 이제 금년 7월1일부터 우리나라도 의약분업의 시대를 맞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 사회가 의약분업 제도를 놓고 엎치락뒤치락하는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 볼 수 없던 전대미문의 사건들이 있었다. 바로 의사들이 작년 11월부터 금년 4월까지 불과 6개월 동안에 3번씩이나 전국적인 집단 휴진과 집회를 가졌던 것이다. 점잖은 의사들이 기득권 유지를 위해서 체면불고하고 거리로 나섰다는 사실은 적지 않은 당혹감을 불러일으켰지만 대다수 국민들의 반응은 냉정했다.

    이렇게 의약분업 제도가 숱한 좌절과 고난 속에서 어렵사리 시행되어 가는 과정을 지켜보노라면 우리 사회의 갈등 구조가 얼마나 해소되기 어려운지를 이해할 수 있다. 더불어서 그런 사회적 갈등을 극복하고자 할 때 정작 필요한 준비 작업들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에 대하여 적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전략

    광복 이후 지난 반세기 동안,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점진적으로 축적돼온 우리 사회의 갈등구조를 단기간에 해결하고자 하는 시도는 별로 바람직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이제 우리도 더 이상 단순한 구조의 후진국형 사회가 아니기 때문에 정치권력의 일방적인 독주가 용납되기도 어렵고, 또 설령 그렇다고 해도 기대만큼 효과를 얻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의약분업의 예로 다시 돌아가 보자. 과거 10여 년 동안 정부가 의약분업 실시에 미온적이었으며 의학계와 약학계, 그리고 그들의 로비에 휘둘린 정치권의 압력에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만약 정부가 그 제도를 일방적으로 밀어부쳤다거나 아니면 아예 추진을 포기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가장 바람직한 시나리오는 제대로 된 의약분업이 진작부터 시행돼야 했다는 것이다. 의약분업은 빨리 시행되면 그만큼 더 많은 혜택이 국민들에 게 돌아갈 수 있는 제도기 때문이다. 의약분업이 가능한 빨리 시행되는 것도 좋지만 바람직한 형태로 시행되는 것 또한 중요하다.

    의약분업 시행을 앞두고 이해당사자인 의사와 약사들의 집단행동을 일방적으로 몰아치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 구성원 누구라도 자신이 어떤 사회적 제도의 시행으로 직접적인 불이익을 당한다면 그것에 대해 반발할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은 그 제도 가 아무리 사회적으로 유익하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런 당사자들의 이유있는 주장을 그린벨트 해금에 얽힌 논란에서, 또 지역 재개발 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갈등 등에서 자주 들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무수히 많은 사회적 갈등이 얽히고 설킨 우리 사회에서 그 해결책 없음만을 한탄하거나 아니면 급진적인 개혁으로 한꺼번에 모든 갈등을 씻어버리기를 바라는 태도는 결코 좋은 것이 아니다. 국민 소득 1만달러의 사회에서는 그 어느 쪽도 바람직한 선택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모든 점을 감안할 때 우리에게 주어진 사회적 갈등 해소의 전략은 다음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강력하면서도 공정하고 합리적인 리더십이 필요하다. 만약 문민정부 시대에 의약분업 제도를 시행할 수 있었던 강력한 리더십이 존재했더 라면 그 제도는 지금보다 완벽한 형태로 우리 사회에 정착했을 것이다. 지난 1년 동안 의사·약사들의 조직적인 반대를 무릅쓰고 어렵게나마 이 제도가 추진될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사회적인 환경이 바뀐 덕분이라기보다 새 정부가 개혁과제의 하나로 추진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개혁을 추진하는 리더십이 합리성과 공정성을 결여해서는 일을 성사시키기 힘들다. 새 정부는 의약분업과 함께 그린벨트 해금도 추진하고 있는데, 이 방안은 피해당사자가 별로 없는데도 시민환경단체들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에 실패하여 추진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런가 하면 지역감정을 해소한다면서 정부의 일방적인 독주로 추진되는 박정희 대통령 추모사업이나 위천공단 건설 사업 등은 지역 갈등을 완화하기는커녕 오히려 조장할 수도 있다. 그 사업의 추진이 공정하고 합리적이지 못해서 국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의약분업 제도가 기득권층의 강력한 반대에도 추진될 수 있었던 이유의 하나는 그 시행방안의 작성 과정에 시민단체들이 참여해서 공정성과 합리성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만약 보건복지부가 구태의연하게 관변단체나 참여시키고 친정부 인사들로 위원회를 구성해서 그 작업을 맡겼다면 의약분업의 실행은 아직도 요원했을 것이다. 이처럼 사회적 갈등의 해소에는 합리성과 공정성에 바탕을 두는 강력한 리더십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둘째, 제도와 관행의 개선은 점진적이고 지속적이어야 한다. 지난 수십년간 급속한 발전과정에 우리 국민은 어느새 매사에 서두르는 속성을 갖게 됐다. 이렇게 매사를 서두르는 관행이 한편으로는 사회적 갈등을 부추기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려는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다는 점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처럼 너무 서두르는 습관이 다시 한번 사회적 갈등을 부추기는 현상을 최근에 똑똑히 목격하고 있는데, 그것은 벤처산업에 대한 정부의 지나친 지원이다. 벤처산업 육성은 애초에 IMF 사태로 허약해진 우리 기업들의 사기를 높이고 굴뚝산업 위주의 후진국형 산업구조를 선진국형 산업 구조로 거듭나게 한다는 좋은 목적에서 출발했다. 이제 한바탕 광풍이 몰아치고 난 지금, 그 결과는 어떠한가?

    기업은 기업들대로 그동안 길러 놓았던 우수한 인재를 벤처산업에 빼앗겨 허탈해하고, 남은 인력들은 대체 인력을 구할 수가 없어서 빠져나간 사람의 몫까지 처리해야만 하는 격무에 시달리고, 사회는 사회대로 일확천금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 위화감이 커지고, 주식시장 과 코스닥 시장은 혼란에 빠지고….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국민소득 1만불의 사회에서는 더 이상 과거처럼 급속한 개혁 처방이 통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식의 개혁은 국민들로 부터 예기치 못한 반발만 불러일으킬 따름이다.

    지역갈등 해소를 위한 대책이나 정치권 개혁을 위한 방안들, 정부의 구조조정을 위한 조치들이 그 당사자들로부터 반발을 불러일으키지 않으려 면 주도면밀하게 작성된 행동 계획들이 점진적이고 지속적으로 추진돼야 한다. 이런 중장기적인 시책의 수행에 최고 통치자의 강인한 리더십이 전제해야 함은 물론이다.

    갈등구조는 점점 더 복잡해지고…

    셋째, 갈등 해결을 위한 연구가 폭넓게 이뤄져야 한다. 대부분의 사회적 갈등은 그 역사가 길고 그만큼 사회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또 사회가 복잡해지고 다면화하면서 그 갈등구조 역시 점점 더 정교해지고 있다. 우리는 이렇게 복잡해진 사회적 갈등의 예를 흔히 볼 수 있다. 반공 이데올로기는 그 역사가 아주 긴 사회적 이념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남북의 정상이 만나기로 되어 있는 지금도 우리 사회의 일각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하지만 바로 이런 반공 이데올로기의 득세로 인해 그동안 얼마나 많은 민주인사들이 고초를 겪었던가. 필경 우리 사회에 내재하는 가장 심각한 갈등의 하나는 반공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일부 기득권층과 또 그런 사람들 때문에 물심양면으로 피해를 본 사람들 사이의 보이지 않는 이념적 갈등일 것이다.

    이제는 노사 관계 양상도 예전과는 크게 달라졌다. 똑같은 노동자지만 벤처기업에 근무하는 어떤 노동자는 연봉이 억대를 넘어서 여느 회사의 경영자들보다 더 풍족한 생활을 누린다. 그런가 하면 파견 근로자가 정규 근로자보다 많은 직장이 흔하고, 시간제 근로자도 점점 더 많아지는 추세다. 이런 상황에 전통적인 노사 관계의 정립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더욱이 재택 근무가 일반화하고 외국인 노동자도 점점 더 늘고 있는 현실이 아닌가.

    이처럼 다원화, 다양화하는 사회 속에서 갈등의 해결책을 찾는 작업은 이제 점점 더 어려운 일이 되고 있다. 어느 한쪽의 사정을 감안해서 마련하는 갈등 해소책은 다른 한쪽의 공감의 불러일으키기 힘들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선진국에서는 오래 전부터 사회적 갈등에 대한 연구가 대단히 활발하다.

    이런 선진국들에 반해서 우리나라에서는 사회적 갈등 문제를 연구하는 변변한 연구소조차 하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사회적 갈등문제는 사회학자들의 중요한 관심 영역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어찌된 영문인지 사회학자들이 활동할 수 있는 무대가 그리 넓지 못하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국가적 목표가 있다면 그것은 선진국 사회 진입일 것이다. 그런데 선진국이 되려면 국민소득 증가에 앞서서 우리 사회를 선진국형 사회로 바꾸는 일이 중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사회적 갈등의 벽을 낮추어야 하는데, 그 첫째 과제는 바로 갈등 해결을 위한 연구를 성실히 수행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마지막으로, 갈등 해결을 위한 전문가와 전문기관의 육성이 절실하다. 우리 사회에서는 어떤 중요한 사안이 부각됐을 때 정부가 쉽게 생각하고 추진하는 것이 위원회를 구성하는 일이다. 그래서 노사문제가 심각해지면 노사문제 해결을 위한 위원회가 만들어지고, 지역갈등이 심화되면 지역갈등 해소를 위한 또는 지역화합을 위한 무슨무슨 위원회가 만들어진다. 성차별 문제가 부각되면 또 그 문제를 다루는 위원회가 제안되고 쓰레기 문제를 다루는 위원회, 심지어 정부와 시민단체 사이를 조정하는 위원회까지 발의된다.

    갈등해소 전문가가 필요하다

    이런 위원회 구성 관행이 잘못됐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필자가 우려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그렇게 구성된 위원회 위원들이 실제로는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에 대한 전문가들이 아니라는 말이다. 아니, 어쩌면 그들은 적어도 우리 사회에서는 전문가에 속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선진국의 전문가들처럼 잘 훈련된 전문가들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앞에서 들었던 의약 분업의 예를 다시 들어봐도 그렇다. 이런 의약분업의 시행에 대비해서 우리 정부와 학계, 의료계, 시민단체들은 얼마나 연구를 했고 이 분야 전문가를 몇 명이나 육성했을까? 필자는 만약 우리나라 규모의 선진국이 의약분업의 전면적 실시를 앞두고 본격적으로 준비에 임했다면 적어도 10년 전부터 무수히 많은 연구들을 진행시키고 그 결과 수십 명, 수백 명의 박사급 연구자들을 양성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의약분업 문제를 다루는 전문가래야 일부 관변 연구소와 몇몇 대학에 근무하는 의료정책 연구자 몇 명이 고작이다.

    그토록 의약분업에 반대하던 대한의사회와 대한약사회도 의약분업에 대비해서 관련 연구를 수행했다는 말을 필자는 아직 듣지 못했다.

    사정이 그랬기 때문에 의약분업을 위한 시행방안 마련에 시민단체들이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만 시민단체의 간부들로 위원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두어 달 밖에 되지 않는 짧은 기간에 과연 의약분업의 실시에 따르는 제반 사항을 다 점검할 수 있었을까?

    이처럼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사회적 파급효과가 큰 사안이라고 해도 결국은 비전문가, 아니면 기껏해서 반(半)전문가들의 손에서 결정되는 것이 보통이다. 사정이 그러니 정책 시행과정에 부작용이 없을 리가 없고, 또 설령 부작용이 나타난다고 해도 그것이 시정되기까지 상당한 기간을 소요하기가 다반사다.

    필자의 결론은 이렇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에 내재하는 그 강인한 갈등의 구조를 일정한 수준까지 정리해야 하는데, 이 일은 기득권층의 완강한 저항 때문에 결코 쉽지 않다. 그렇지만 이런 갈등구조의 타파 없이는 선진국에 진입할 수 없기 때문에 합리성과 공정성에 바탕을 두는 강력한 리더십이 절실히 요청된다.

    그렇지만 리더십만으로 개혁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제도와 관행의 개선에는 인내가 필요하고, 온 국민의 공감을 얻을 수 있도록 사전에 철저한 연구가 필요하다. 더불어 관련 전문가들의 육성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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