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불과 한 세대 사이에 전형적인 후진국에서 선진국 문턱까지 비약적인 경제개발에 성공했다. 그렇지만 지난 수십 년 동안 경제개발 위주의 정책을 펴온 결과 빈부격차는 심화됐고 지역 감정의 간극은 더 벌어졌으며 구석구석에 부정과 불법이 난무하는 그런 사회로 전락하고 말았다.
다른 한편, 이렇게 경제개발 제일주의가 지속되는 동안 우리는 그로 인해 얻어진 과실을 사회 구성원들에게 분배하는 문제에 등한해왔다. 노사문제의 격화는 결국 이런 부의 분배가 공정치 못했다는 데에서 기인한 것이며, 지역 갈등 역시 지역간 부의 분배가 잘못된 데에 상당 부분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정작 우리를 답답하게 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 자리잡고 있는 그런 완강한 갈등 구조가 아니다. 그것보다는 그런 갈등구조를 해소시키고 자 하는 사회적 노력과 장치가 제대로 준비돼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이런 갈등을 해소 내지는 완화하는 데에 얼마나 허약한지를 이제 막 현실화되고 있는 의약분업 제도를 통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의약분업이란 의사와 약사의 업무 영역을 완전 분리해서 의사는 진단과 처방을 담당하고 약사는 조제 및 투약에 전념케 한다는 선진국형 제도다. 우리가 종합병원을 방문할 때 알 수 있는 것처럼 의사들도 이제는 자신의 전공 분야가 아니면 환자를 볼 수 없을 정도로 현대 의학은 분업화돼 있다. 따라서 의사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나오는 새로운 의약품들에 대해 공부하리라고 기대하기는 힘들다. 새로운 제도가 대학에서 전문지식을 쌓은 약사들에게 약의 조제와 투약을 전적으로 책임지우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렇게 의약분업이 실시되면 그 혜택은 주로 환자 몫이 된다. 환자는 의사에게서는 정성을 다한 진료를 받을 수 있고, 약사에게서는 한결 저렴한 가격에 더 안전한 약을 구입해서 복용할 수 있다. 물론 의사와 약사들에게도 혜택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의사들은 약화(藥禍) 사고의 가능성에서 벗어날 수 있고 약사들은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의사들 쪽에서는 이제까지 병원에서 환자들에게 물리던 약값을 포기해야만 하므로 상당한 경제적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또 약국에서 파는 약에 대해서도 광범위하게 의료보험이 적용되기 때문에 일부 약사들도 수입이 줄어들 수 있다.
따라서 의약분업 제도의 시행은 그 본질상 의사와 약사 양쪽에 그리 달갑지 않은 제도다. 그런데도 의약분업이 촉구되는 것은 국민들에게 돌아가는 혜택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한 시민단체의 추산에 의하면, 이렇게 해서 얻어지는 경제적 이익이 연간 수조 원을 상회할 것이라고 한다.
기득권층의 밥그릇 싸움
사실 정부는 일찍부터 의약분업에 의욕을 보여왔다. 1963년에 제정된 약사법에 이미 의약 분업이 명기돼 있었다. 그리고 의약분업을 위한 시범 사업도 1984년부터 시행한 바 있으며, 지난 10여 년 동안은 의료개혁위원회, 의약분업추진협의회 등 여러 위원회를 구성해서 의약분업의 실시 시기와 시행 방법에 대해서 나름대로 대안을 내놓기도 했다.
그렇지만 의약 분업은 바로 그 제도의 당사자인 의사와 약사들의 반대로 오랫동안 시행이 유보됐으며 그 결과 마땅히 국민들에게 돌아가야 할 혜택이 아직까지도 주인에게 넘겨지지 못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쉽게 말해서 의약분업은 우리 사회를 선진국 사회로 진입하게 하는 좋은 제도 인데도 일부 기득권층의 밥그릇 싸움이 여태까지 발목을 붙잡고 있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딱한 사정은 지난 몇 년 동안 이 제도가 어떻게 추진되었는지를 살펴보면 극명하게 드러난다. 의약분업의 본격 실시가 법에 명시된 것은 1993년도의 개정약사법이다. 이 법에서는 의약분업 실시를 99년 7월 이전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1998년 12월 의사협회, 병원협회, 약사회가 각각 이 제도의 실시 연기를 국회에 청원했다. 이듬해 3월 국회는 이들 단체의 청원을 받아들여 시행시기를 1년간 연기하되, 2개월 내에 시민단체, 소비자단체 등과 함께 새로운 의약분업 모형을 도출하기로 하고 이에 실패할 경우 정부안대로 추진키로 합의했다.
그 후 경실련, 참여연대, 녹색소비자연맹 등의 시민단체와 의사협회, 약사회가 의약분업 시행 방안을 협의하여 작년 5월에는 의약분업 시행 방안을 정부에 건의했으며, 정부는 이 합의안을 토대로 구체적인 시행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서 의약단체 대표, 소비자 단체, 시민단체, 언론계, 학계 대표 등 25명으로 의약분업실행위원회를 구성하게 된다. 이 위원회는 작년 9월17일 의약분업 시행방안 최종안을 발표했고, 국회가 이를 약사법 개정안에 반영해서 12월7일에 통과시켰다. 이제 금년 7월1일부터 우리나라도 의약분업의 시대를 맞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 사회가 의약분업 제도를 놓고 엎치락뒤치락하는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 볼 수 없던 전대미문의 사건들이 있었다. 바로 의사들이 작년 11월부터 금년 4월까지 불과 6개월 동안에 3번씩이나 전국적인 집단 휴진과 집회를 가졌던 것이다. 점잖은 의사들이 기득권 유지를 위해서 체면불고하고 거리로 나섰다는 사실은 적지 않은 당혹감을 불러일으켰지만 대다수 국민들의 반응은 냉정했다.
이렇게 의약분업 제도가 숱한 좌절과 고난 속에서 어렵사리 시행되어 가는 과정을 지켜보노라면 우리 사회의 갈등 구조가 얼마나 해소되기 어려운지를 이해할 수 있다. 더불어서 그런 사회적 갈등을 극복하고자 할 때 정작 필요한 준비 작업들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에 대하여 적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전략
광복 이후 지난 반세기 동안,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점진적으로 축적돼온 우리 사회의 갈등구조를 단기간에 해결하고자 하는 시도는 별로 바람직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이제 우리도 더 이상 단순한 구조의 후진국형 사회가 아니기 때문에 정치권력의 일방적인 독주가 용납되기도 어렵고, 또 설령 그렇다고 해도 기대만큼 효과를 얻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의약분업의 예로 다시 돌아가 보자. 과거 10여 년 동안 정부가 의약분업 실시에 미온적이었으며 의학계와 약학계, 그리고 그들의 로비에 휘둘린 정치권의 압력에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만약 정부가 그 제도를 일방적으로 밀어부쳤다거나 아니면 아예 추진을 포기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가장 바람직한 시나리오는 제대로 된 의약분업이 진작부터 시행돼야 했다는 것이다. 의약분업은 빨리 시행되면 그만큼 더 많은 혜택이 국민들에 게 돌아갈 수 있는 제도기 때문이다. 의약분업이 가능한 빨리 시행되는 것도 좋지만 바람직한 형태로 시행되는 것 또한 중요하다.
의약분업 시행을 앞두고 이해당사자인 의사와 약사들의 집단행동을 일방적으로 몰아치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 구성원 누구라도 자신이 어떤 사회적 제도의 시행으로 직접적인 불이익을 당한다면 그것에 대해 반발할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은 그 제도 가 아무리 사회적으로 유익하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런 당사자들의 이유있는 주장을 그린벨트 해금에 얽힌 논란에서, 또 지역 재개발 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갈등 등에서 자주 들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무수히 많은 사회적 갈등이 얽히고 설킨 우리 사회에서 그 해결책 없음만을 한탄하거나 아니면 급진적인 개혁으로 한꺼번에 모든 갈등을 씻어버리기를 바라는 태도는 결코 좋은 것이 아니다. 국민 소득 1만달러의 사회에서는 그 어느 쪽도 바람직한 선택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모든 점을 감안할 때 우리에게 주어진 사회적 갈등 해소의 전략은 다음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강력하면서도 공정하고 합리적인 리더십이 필요하다. 만약 문민정부 시대에 의약분업 제도를 시행할 수 있었던 강력한 리더십이 존재했더 라면 그 제도는 지금보다 완벽한 형태로 우리 사회에 정착했을 것이다. 지난 1년 동안 의사·약사들의 조직적인 반대를 무릅쓰고 어렵게나마 이 제도가 추진될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사회적인 환경이 바뀐 덕분이라기보다 새 정부가 개혁과제의 하나로 추진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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