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스피해 연안5국 중에서도 카자흐스탄의 해안선이 가장 길며(1730km) 석유 부존량도 많다. 카자흐는 현재 하루 60만 배럴 정도의 석유를 생산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러시아를 거치지 않는 서방 직결 송유관이 없어 안정적인 석유 수출에 제약을 받고 있다. 송유관 부설 문제를 둘러싸고 미국과 러시아가 대립하고 있는 현장이 바로 카자흐스탄이다.
카스피해 분할 문제는 연안 5국이 안고 있는 매우 어려운 과제다. 연안 유전을 다수 보유하고 있는 카자흐스탄과 아제르바이잔은 카스피해 분할을 강하게 주장하여왔고, 이에 반해 러시아, 이란, 투르크메니스탄은 이를 거부해 왔다.
러시아는 당초 카스피해가 ‘대륙내의 저수지’이기 때문에 유엔해양법 협약이 적용될 수 없고 연안5국간 합의에 기초하여 동등하게 이용하여야 한다고 주장해 왔으나 최근 이를 다소 바꾸고 있다. 러시아로서도 석유개발이 당장 시급한 과제기 때문에 잠정적이라고는 하나 일단 카자흐스탄과 해양경계에 합의하였다.
카자흐스탄과 아제르바이잔은 카스피해를 ‘바다’로 간주, 영해와 배타적 경제수역(EEZ)을 가진다고 주장하는 반면 이란은 해양분할에 반대하면서 연안5국이 20%씩 동등하게 권리를 행사하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카자흐스탄 경제는 독립 직후 몇 년간 시장경제 체제로 바뀌는 와중에 다른 CIS 국가와 마찬가지로 혼란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96년부터 GDP성장률, 무역수지, 농·공업생산지수, 인플레이션, 환율 등의 경제지표상, 이미 거시경제 안정화 초기 단계에 진입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은 1996년 출판된 자신의 저서 ‘21세기 문턱에서’를 통해 재미있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소련 해체과정을 겪으면서 유사시에 대비하여 화폐명칭 및 도안을 채택하고, 인쇄준비 등 독자 화폐발행에 대비하면서도 1993년 8월 모스크바에서 옐친 대통령과 루블화 블록에 남겠다는 합의서에 서명하고 국내 비준절차까지 마쳤다는 것이다. 카자흐스탄은 아직 경제 자립과 독자 화폐 도입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통령은 이상적인 계획경제란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있을 수 없으며, 1989~91년에는 더욱 그러했던 시기라고 말했다. 또한 과거 소련계획경제 하에서 분야별 산업만을 모자이크 조각같이 가지고 있던 개별공화국들이 루블화 블록에서 빠질 경우 경제적 소외와 엄청난 시련을 겪으리라고 본 것이다. 그래서 그는 10월 중순 러시아 체르노미르딘 총리에게 루블화 블록을 유지하겠다는 재다짐까지 받았다. 그러나 러시아는 일방적으로 카자흐를 블록에서 빼버렸다. 결국 11월12일 카자흐스탄은 독자 화폐, ‘텡게’화를 도입하였다. 이로부터 겨우 5년 반의 시간이 흐른 99년4월, 카자흐스탄은 변동환율제를 채택하고 텡게화 태환을 허용했다. 작년 여름 이후 지금까지 텡게화는 안정을 유지하고 있으니, 짧은 기간에 이 나라가 이룬 것은 기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카자흐도 아시아 금융위기와 러시아 금융위기 여파로 98년 GDP 성장률 마이너스 1.9%, 산업생산 마이너스 3.5%라는 대단히 어려운 국면을 맞았으나, 이제 최악 국면을 벗어나 성장 궤도에 진입하였다. 작년 1.7%의 GDP 성장에 이어 금년1/4분기에도 성장세가 계속되고 있어 연간 3∼4%의 성장이 예상된다.
한국, 제2의 투자국
한국은 92년 1월 카자흐스탄과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그 이후 양국은 정치·경제·문화·예술·스포츠 분야에서 활발하게 교류했다. 특히 카자흐스탄 고위급 인사 방한이 많았으며, 경제·문화·예술계 인사 상호방문과 교류도 많았다. 서울, 부산, 대구 등 지자체와 자매결연도 했다.
카자흐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한국은 93~99년 외국인 총투자(82억불)의 19.9%를 차지하여, 미국(29.3%) 다음 제2의 투자국이 되었다.(3위는 13.5%인 영국, 4위는 5.6%인 터키)
삼성물산이 95년부터 시작한 이 나라 국영구리광업공사 대리경영(위탁경영)은 파산상태에 있었던 국가기업을 1년 만에 정상화시킨 모범사례로 꼽히고 있다. 외국에서는 이 사례를 주목하고 있는데 오히려 한국에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삼성은 당초 카자흐 내의 동광 12군데, 제련소 2군데로 시작하였다가 안정적인 전력 확보를 위해 추가로 발전소 3개와 발전용 채탄을 위한 탄광 2군데를 인수하였다. 현재 총5만8000명 고용에 연간매출액은 거의 10억불을 바라보고 있다. 삼성은 95년부터 지금까지 3억불 이상을 투자하였으며, 향후 안정적인 경영권 확보를 위해 회사 지분 40%를 인수하였다. 기술 혁신, 경영 쇄신을 통해 95년 당시 연간 13만톤에 불과하던 구리 생산 실적이 현재 36만톤으로 늘었으며 지금도 계속 증가 추세다.
바야흐로 국영구리광업공사는 원가절감 및 수직·수평계열화로 국제경쟁력을 갖춘 회사로 탈바꿈하였다. 생산되는 99.99%의 고순도 구리는 대부분 유럽으로 수출해 EU제국 구리 수입 수요의 20%를 공급하고 있으며, 카자흐 총수출의 11%를 벌어들이고 있다.
직접 고용에 따른 부양인구는 약 20만 명에 달하한다. 또 광산도시에는 회사가 직영하는 문화시설, 광업박물관, 의료시설이 들어서 있어 삼성의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사업 하나로 삼성은 이 나라 지도층의 신뢰를 얻었다. 현재 삼성은 ‘외국투자협의회’의 멤버로서 세계적인 금융, 석유 메이저, 에너지, 회계법무분야 2개 회원사들과 나란히 카자흐스탄 국가경제시책 자문에 응하고 있다. 회사사장인 김 블라디미르와 수석부사장 윤 루슬란은 모두 고려인들로, 삼성이 육성한 전문경영인이다.
그 다음으로 LG전자가 연산 30만대 규모의 TV조립라인을 근간으로 오디오, 비데오, 세탁기를 현지에서 조립생산하고 있으며, 생산품의 절반 가량을 수출하고 있다. 알마티 LG제품은 현지인들에게 가전분야의 최고급 브랜드로 자리잡고 있다. LG는 앞으로 생산품목을 컴퓨터 모니터, 냉장고, 진공청소기 등으로 확대하여 중앙아시아 5개국의 주공급기지로 육성하고, 러시아를 포함한 CIS지역에 공급하는 전략적 우회기지로 키워가기 위해 투자를 확대할 계획이다.
그밖에 삼성전자, 대우자동차 등의 대기업 주재사무소와 신동아(茶제조공장, 중형 슈퍼마켓 운영 등), USKO(건설업, 보일러 제조, 가구제조, 창고업 등), 그라프로(봉제업) 등이 활동하고 있으며 건설, 제조, 유통, 항공·운송, 유흥업 등 다양한 분야에 소규모 투자가 이루어져 있다.
또한 5월중 알마티시에 1880개의 가게를 가지는 4800만 달러 규모 대형 유통단지 건설 프로젝트가 한국업체 주도하에 착공될 예정이다. 이는 포스코개발주식회사가 공사를 맡게 된다. 이 유통단지는 동대문시장을 벤치마킹해, 시장 주변에 많게는 100개 정도의생산공장까지 유치하며, 장거리 버스운송업까지 함께 운영해 중앙아시아의 물류거점으로 키워 나간다는 구상이다. 이 유통단지는 한국 동대문·남대문시장과 연계해 한국과의 교역증진에도 중요한 몫을 할 것으로 기대돼 상점분양에 대해 이미 국내외의 관심이 크다.
한─카자흐 간의 무역량은 수교 첫해인 92년 1000만달러 규모에서 95년 1억2600만달러, 96년 2억3000만달러, 97년 1억7500만달러, 98년 1억3500만달러로 1억∼2억 달러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다만 99년도는 환율자유화에 따른 카자흐 화폐의 평가절하로 우리의 수출규모가 대폭 줄었으나, 금년부터 카자흐스탄의 경제가 회복되고 있어 무역규모도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물론 장밋빛 전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 넓은 국토에 견주어 인구가 적어 국가 기간 인프라를 구축하고 이를 유지·보수하는데 드는 사회적 비용이 높다. 도로망, 통신망, 전력망, 에너지망을 구축하더라도 인구가 적어 단위당 이용 비용이 높다. 산업화에 따라 농촌지역 인구가 도시로 이동하겠지만,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리고 국제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인력 양성에도 시간이 걸릴 것이다. 다만 이 나라는 비교적 교육을 잘 받은 양질의 저임 노동력이 많고 서구제국의 언어를 쉽게 익힐 수 있으며, 동서양과 연계하기 좋기 때문에 다른 개발도상국보다는 유리한 위치에 있다.
민족혼을 간직하고 있는 고려인
카자흐스탄에 고려인이 정착하게 된 것은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 때문이다. 구한말 굶주림을 피하거나 항일독립운동을 위해 연해주 등 극동지역으로 이주했던 한인들은 1937년 가을 강제로 기차에 태워져 카자흐스탄 각지의 황무지에 내던져졌다. 이들이 처음 기착한 ‘우슈토베’지역에는 당시 한인들의 고통을 기억하고 달래기 위한 큰 기념비가 시내 공원에 세워져 있다. 또한 풀뿌리로 연명하며 땅굴을 파고 고통스럽게 살았던 당시 생존 현장도 일부 보존되어 있다.
강제 이주 초기 몇년간 대단히 많은 고려인들이 기아와 질병으로 숨져갔다. 나머지 생존자들이 생명이나마 이을 수 있었던 것은 한민족의 강인한 정신과 또한 유목민으로서 외부인을 배척하지 않고 도와준 카자흐인들의 인간적인 애정 때문이다.
이들 이주민 대열에는 만주와 연해주를 일대로 항일 무장투쟁을 벌였던 많은 독립투사가 섞여 있었다. 스탈린은 민족정신이 강한 이들을 주변 지역보다 더욱 황량했던 카자흐스탄 이곳 저곳에 흩어놓았다. 그러나 이들은 꺾이지 않고 강제 이주당한 그 이듬해에 벌써 ‘원동사범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시작했다. 또 연해주에서 해오던 한글신문을 계속 발행하고, 극단을 만들어 민족혼과 정신을 이어 나갔다. 근면한 정신으로 유목사회이던 카자흐에 농업을 보급해 토착 카자흐인들의 신뢰를 얻고 중앙아시아 땅에 뿌리를 내렸다.
홍범도장군 묘소가 이 곳에 있으며 임시정부 초대 총리를 지낸 이동휘선생, 재무국장 최재형, 황운정, 유격대장 민긍호, 민족교육 및 독립투사 계봉우의 자녀 또는 손자들이 이 나라에 살고 있다. 여기에 북한독재체제에 항거하여 망명한 사람들과 사할린 등지로부터 이주해 온 사람들까지 10만여 명이 고려인 사회를 형성하고 있다.
고려인들은 어디를 가나 유전인자에 새겨 있기라도 한듯 높은 교육열로 자녀들을 가르쳤고 근면한 노동으로 소수민족으로는 드물게 고위관리와 지도층 인사를 많이 배출했다. 2세, 3세로 내려오면서 한국말을 이해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크게 줄었다. 그러나 긴 세월동안, 그것도 공산체제 온갖 부정적인 반한선전책동하에서, 제대로 된 한복, 악기 하나 갖추지 못하고서도 우리의 고전연극을 공연하고, 합창단을 만들어 민족문화를 이어온 이들을 보면 감동적이고 자랑스럽다. 이들의 삶의 기록과 생존 현장을 보면 우리의 민족성과 민족문화는 바로 주변의 강대국 사이에서 형성된 ‘생존 양태’임을 확신하게 된다.
오늘날 고려인들 사이에 한국말 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다. 한국기업들이 고려인로부터 도움을 받기도 하고 고려인도 한국기업 지원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아직 많은 고려인이 카자흐국민들과 마찬가지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들 고려인들은 모두가 일제와 냉전기에 걸친 역사적 단절 속에서도 민족 혼을 지녀왔고 카자흐민족의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왔다. 이들은 한국과 카자흐스탄 우호친선관계를 발전시키는데 교량 구실을 할 수 있다. 이들이 신뢰받는 카자흐의 국민으로, 존경받는 민족그룹으로 성장할 수 있게 우리 정부와 국민들이 지원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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