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6월호

책더미에서 월척을 낚는 묘미

  • 남재희 호남대 객원교수·전 노동부 장관

    입력2006-10-13 11: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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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헌책 수집광을 낚시꾼에 비유한다. 강이나 호수나 바닷가의 낚시꾼이 아니라 아스팔트 위의 낚시꾼이다. 낚시꾼의 재미와 마찬가지로 아스팔트 낚시꾼에게도 같은 묘미가 있다. 가끔은 ‘월척’의 희열을 맛보기도 한다. 》
    나이가 들면서 고민이 되었다. 비교적 큰 단독주택에 살지만 언제고 아파트로 이사는 하여야 하겠는데 그 많은 책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 생각만 하면 답답하여 두통이 올 지경이었다. 젊었을 때는 누가 물어보면 사설(私設) 도서관을 차리거나, 네 딸들 집에 골고루 나누어 주거나, 어디에 기증하면 될 것이 아니냐고 했다. 그러나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사설 도서관을 차리기에는 내게 그만한 돈이 없고, 딸들은 아파트 살림이나 외국 살림에 책이라면 손을 내젓고, 그렇다고 기증할 곳도 마땅치 않았다.

    내가 평생 극성스럽게 모은 책이 어느새 8만 권이 넘어버렸다. 포켓 북이나 잡지들도 한 권으로 쳐서 말이다. 90평이 약간 넘는 집이 온통 책으로 그득하다. 20년 전 그 반에 반도 못 미치는 양일 때 이사를 하려고 밖에 쌓아놓으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집 헌책 장사 하다가 망한 모양이군” 하더란다.

    얼마 전 시인 고은 씨와 우연히 만나 이야기하던 끝에 책이 화제가 되었다. 미국의 하버드대학에 머물렀던 그는 “케임브리지의 뒷길을 가다 보면 집 앞에 책을 수북이 쌓아놓고 마음대로 가져가라는 데도 있더군. 비 오는 날이면 비닐로 잘 가려놓기도 하고…”라며 그곳 소식을 전했다. 대학 인구가 압도적으로 많은 케임브리지이니 노년이 된 교수가 많아 그럴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대부분 아파트에 산다. 아파트에 살면서 책을 모은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오히려 갖고 있던 책도 가끔 정리하여 폐기 처분하는 게 사람들의 소일거리가 아닐까 싶다. 그런 책들이 헌책방에 쏟아져 나온다.

    그리고 책종이는 산성화 방지처리가 안 되어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어서 오래 되면 변색하거나 부식되는 문제도 있다. 그래서 마이크로 필름에 담아놓기도 하는데, 오래 전에 미국 잡지에서 도서관 책을 마이크로 필름에 담고 책 자체는 폐기하느냐의 여부를 놓고 논쟁하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난다.



    서울서 가장 큰 홍대 앞 온고당

    책을 모으는 데 열을 내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때부터다. 그러니 50년이 넘었다. 그 덕분에 서울 장안의 헌책방 주인들 사이에선 책 수집광으로 이름이 난 지 꽤 오래 되었다. 그래서 어렴풋하게나마 그룹이 형성된 그 방면의 사람들한테 가끔 인사를 받기도 한다.

    나는 책 이야기를 할 때는 고본(古本)과 헌책을 꼭 구분하여 말한다. 비슷한 말이지만 고본이라 할 때는 오래 되고 희귀한 책이라는 뜻이 담겨 있고, 헌책은 영어로 말하면 유즈드 북(used book), 즉 누군가의 손을 한 번 거친 책들이다. 그래서 고본점이라 해도 될 것을 나는 꼭 헌책방이라고 고집한다.

    현재 서울에서 가장 큰 헌책방은 홍익대학교 앞에 있는 ‘온고당’이다. 새로 지은 빌딩을 임대해 1층은 국내서적, 지하층은 외국서적 위주로 파는데 꽤 넓고 책의 유통도 빠른 편이어서 자주 가볼 만하다. 국내서적은 주인이 오토바이를 타고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아파트 같은 곳에서 사온다. 지하의 외국서적은 약간 값이 높은 것으로 나까마(중간상인을 일본말로 그렇게 부르는데 지금도 우리 사회에서 널리 통용되므로 편의상 이 말을 쓴다)들이 가져온다. 온고당이 제일 큰 책방이다 보니 나까마의 활동이 집중되어 좋은 책이 많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또 미술대학이 유명한 홍익대 근처이고 하여 미대생들이 미술책이나 디자인책을 찾느라고 쑤석대기도 한다.

    청계천 복개도로변에 있는 평화시장에도 헌책방이 많이 몰려 있다. 그 가운데서 외국서적만 고집하는 곳이 이름 그대로 ‘외국서적’이다. 내가 다니기 시작한 것만도 30년이 되었으니까 역사가 꽤 길다. 헌책방 집결지의 유일한 외국서적 전문점이어서 전에는 좋은 책이 많이 들어왔다. 비교적 학술서적이 많았는데 외국으로 이민 간 사람들 집이나 교수들의 유족으로부터 나왔으리라고 짐작했다. 요즘은 한산해졌다. 규모가 작은 책방이어서 나까마들이 찾지 않아서인 것 같다.

    서울 이태원에 영어로 ‘포린 북’라고 쓴 외국서적 전문 책방이 있다. 미군기지가 있고 외국 관광객이 즐겨 찾는 이태원시장이 있어 그런대로 활발하다. 서울에 사는 외국인들, 특히 중년부인들은 포켓 북을 갖고 와 자주 바꿔가기도 한다. 트레이드(trade)라는 것이다. 그러나 미군이 감축되고 난 후, 특히 징병제가 아니고 지원제가 되고 난 후로는 양이나 질에서 많이 떨어졌다. 예전에 징병제일 때는 대학재학생들이 군대에 와서 수준 높은 잡지들도 제법 흘러나왔는데 요즘은 찾기가 힘들다. 더 뉴 리퍼블릭(The New Republic), 디 애틀랜틱(The Atlantic), 더 네이션(The Nation), 더 포린 어페어스(The Foreign Affairs)등 좋은 잡지를 싼값에 많이도 샀다.

    연신내에는 ‘문화당’이라는 좋은 헌책방이 있다. 주인 말이 문경의 친구 여럿이 서울에 와서 모두 헌책방을 하게 되었는데 책방 이름은 똑같이 문화당으로 하기로 약속했다나…. 그래서 장승백이나 구로 쪽에 있는 다른 문화당을 일부러 찾아가 보기도 했다. 연신내와 같이 도심에서 떨어진 곳에 좋은 헌책방이 있느냐고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내 짐작으로는 그 주변의 갈현동 등에 지식인이 많이 살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1980년대 초 망원동에 홍수가 들었을 때 물이 살짝 스민 책들이 책방에 더미로 나왔고 그 수준이 꽤 높았다. 망원동에도 지식인들이 많이 살 것이라고 짐작했다.

    시청 앞 지하도에도 알찬 헌책방이 하나 있다. 거의 모두 영서(英書)이며 일서(日書)도 얼마간 있다. 이곳이 번창까지는 못 가도 그럭저럭 장사가 되는 것은 근처에 호텔이 많아서 그럴 것이라고 짐작한다.

    헌책방 순례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공씨책방’과 ‘동아서점’

    헌책방 이야기를 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공씨책방’과 ‘동아서점’이다. 공씨책방은 새문안교회 건너편에 있을 때 전성기를 누렸다. 서울에서 가장 크다고들 했다. 1층은 작았지만 지하층은 매우 넓었는데, 주인 공씨는 개미굴이라며 거기에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재미있어 벗어나기 어렵다고 익살을 떨었다.

    주인 공진석씨는 고졸 학력인데 월간 ‘신동아’의 논픽션 공모에 헌책방 이야기로 당선되어 그때 받은 상장을 상점에 자랑스럽게 걸어놓기도 했다. 또 ‘책사랑’이라는 얇은 개인 잡지도 열 번쯤 발행했는데 나도 거기에 수필 하나를 기고하기도 했다. 그는 헌책에 재미를 붙여 열성적으로 헌책을 찾아 서울 장안을 헤집고 다녔다. 헌책 이야기를 할 때는 늘 의욕이 넘쳤으며, ‘서울에서 가장 큰 헌책방’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 공씨는 어느 날, 나이는 30대 중반쯤이었을까, 여느 때처럼 헌책을 사갖고 오다 버스 안에서 혈압 때문에 숨을 거두었다. 대단히 애석했다. 그의 부인과 여동생은 지금도 신촌에서 작은 헌책방을 하고 있는데 그분들이 고인을 추모하는 뜻으로 ‘책사랑’ 마지막호를 발행했을 때 나도 정성들여 회고담을 써서 기고했다.

    동아서점은 동아일보사 건너편의 지금은 없어진 중부소방서 쪽에 있을 때 활발했다. 주인 강씨는 처음에는 무척 고생을 했단다. 원래 명동 쪽에서 헌책 노점을 하다가 발전하여 번듯한 책방을 차리게 된 것인데 새문안교회 건너편으로 이사하여 영업을 하다가는 출판업에 뛰어들어 좋은 영서를 냈다. 지금도 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사라지는 헌책방들

    헌책방은 대체로 사양길이다. 통계를 잡아가며 연구는 안 해보았지만 대충 이런 판단이 든다.

    첫째, 시대적 추세가 점차 활자매체에서 시청각매체로 옮겨가면서 헌책방을 찾는 사람들이 줄어들었다. 더구나 근래 인터넷 열풍이 불면서 더 심해진 것 같다. 온고당 지하층 책임자는 몇 년째 활자 중심의 책을 찾는 사람은 급감하고, 사진이나 그림 중심의 책을 찾는 사람들이 현저히 늘어나고 있다고 했다. 나도 그런 느낌이다. 우선 나부터도 좋은 사진이 많이 든 책을 선호하게 되었다.

    둘째, 아파트가 주된 주거공간이 되면서 사람들은 책을 간수하기 어렵게 되어 버렸다. 아파트에서 책은 천덕꾸러기 신세다. 또 복사술이 발달하여 사람들은 꼭 필요한 부분만 복사하여 보기도 한다.

    셋째, 건물 임대료가 다락같이 올라 헌책 장사로는 임대료를 감당하기 어렵고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 그런 탓인지 헌책방이 사라진 자리에는 호프집이나 밥집이 들어서는 경우를 자주 보았다.

    영국에서는 런던에서 조금 떨어진 한적한 시골에 헌책방이 모여들기 시작하여 지금은 관광명소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 보았다. 우리나라도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정보화 혁명시대에 그런 아이디어는 시대착오가 될 것이라 체념하게 된다.

    넷째, 주한미군의 감축과 징병제의 폐지로 미국 책의 유통량이 줄어들었다는 것은 이미 말한 대로다.

    용산 삼각지 골목 안에 내가 알기로도 30년이 넘은 양서 헌책방이 있었다. 좋은 책이 많이 나왔는데 5~6년 전쯤부터 시들해지더니, 나로서는 겨우 ‘포린 어페어스’를 살 정도의 효용밖에 없는 집이 되어버렸다. 그 오래 된 집이 작년에 불고기집으로 전업했다. 시대의 변화를 극명하게 말해준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 집주인은 자녀교육에는 성공하여 그래도 위안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과천 헌책방 이야기는 전에 ‘신동아’에 수필로 쓴 적이 있다. 관청들이 모여 있는 과천의 한 빌딩 2층에 넓은 헌책방이 있어 가끔 갔는데 그 집의 중년 여주인은 “헌책방은 헌책을 버리지 않고 모아 학생들에게 제공한다는 취지에서 사회 봉사를 하는 것이고, 그에 수반되는 집세 같은 적자는 아래층에서 경영하는 전통찻집의 수입으로 메운다”고 했다.

    몇 년 후 찾아가보니 건너편 빌딩 안 슈퍼마켓 구석으로 옮겨져 있었다. 그 집 역시 집세를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얼마 전에 한양대 이영희 명예교수의 칠순 출판기념회에서 그 여주인을 만났다. 그이 역시 지식여성임에 틀림없다.

    ‘오거서(五車書)’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전철 홍대역에서 가까운 곳에 ‘오거서’라는 좋은 이름의 책방이 있었다. 옛날에 다섯 대의 수레에 실을 정도의 책이라 하면 엄청나게 많은 분량의 책이어서 오거서(五車書)라는 말이 생겨났다.

    그 오거서 책방 주인도 수준이 있는 점잖은 지식인이다. 헌책에 약간의 골동품도 갖추고 하여 책방을 유지해 왔으나 역시 임대료 때문에 이리저리 옮기곤 하다가 지금은 극동방송 부근의 큰길가로 옮겼다. 가끔 들러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우리나라 서적에 대해 넓게 알고 있으며, 사회문제에 대한 식견도 뚜렷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좁은 책방에 앉아 있기에는 아까운 인물이다. 더구나 지금은 헌책방 쇠퇴기가 아닌가.

    지방여행을 갈 때는 일부러 시간을 내어 헌책방에 들러본다. 부산의 대청동 미국문화원 주변은 피난 시절 헌책을 사러 다니던 곳이어서 늘 반갑다. 지금은 그곳엔 책방이 없고 대신동 쪽으로 조금 가다 보면 책방들이 몰려 있다. 거기에 가면 기념으로 여하튼 책 몇 권을 사든다. 대구에서도 헌책방을 찾았다. 그러다 모르던 교수들과 초면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헌책방을 찾는 동류의식이 발동하는 것이다. 광주에서도 헌책방 안내를 받아 가보았다가 역시 방문 기념으로 굳이 몇 권을 샀다.

    외국도시에 가서도 며칠 머물게 되면 꼭 헌책방을 찾아간다.

    일본 도쿄의 ‘간다(神田)’는 너무 유명한 곳이다. 한국의 헌책방에 비교하면 책의 수집이나 그 배열이 몇 급 위 수준이다. 가보면 이것이 전통 있는 헌책방이구나 싶다. 한국의 헌책방처럼 임대료에 치여 이리저리 이사 다니지 않고 부럽게도 몇십 년씩 한자리를 붙박이로 지키고 있는 것이다.

    처음 간다에 들렀을 때 가와이(河合榮次郞) 교수의 ‘자유주의의 옹호’ 초판본을 사들고 감격한 기억이 생생하다. 일제 파시즘에 감연히 맞선 가와이 교수가 아니던가. 종이는 재생지로 형편없었지만 매우 소중하게 여겨졌다.

    파리에 가서는 유명한 센 강변의 헌책방 노점을 가보았다. 노틀담사원 근처에 노점 서너 개가 있는데 규모는 작지만 문화도시의 풍경에 귀중한 보탬이 되어 보였다. 노점이기 때문인지 헌책인데도 포켓 북조차 투명비닐로 포장하여 먼지가 들어가지 않게 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미국 하버드대 케임브리지 이야기는 고은 시인 말을 인용했지만 30여 년 전 내가 유학 갔을 때는 하버드 쿱(공제조합이란 뜻) 책방 구석에 헌책 코너가 있어 싸게 살 수 있었다. 또 가끔 책을 ‘세일’하는 곳도 있어 지난 시절의 좋은 책을 헐값에 구입할 수도 있었다.

    내가 사는 책은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있다. 과학책도 좋은 이론서는 모은다. 인문 쪽에 비중을 두는데 문학서부터 철학·종교까지 광범위하다. 그리고 특히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영국의 페이비어니즘 관계 책은 기를 쓰고 모은다. 시드니 웹 부처, G.D.H 콜, 해럴드 라스키 등등의 책은 물론 관련 연구서까지 말이다.

    요즘은 관심의 초점이 달라졌다. 이제는 나이 탓에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하는 데는 한계를 느낀다. 그래서 사진으로나마 세계일주를 하려는 것이다. 세계 여러 나라와 도시들의 사진첩, 박물관·미술관 사진첩 등 되도록 컬러이고 영문으로 된 것을 모아 즐겨 뒤적거린다.

    그러다 보니 리투아니아, 룩셈부르크의 사진첩, 블라디보스토크 사진첩, 상해혁명운동사 사진첩 등 재미있는 것도 구했다. 특히 러시아혁명의 시작부터 소련 붕괴까지를 담은 사진첩은 비장하다. 20세기 역사를 손으로 거머쥔 듯 느끼게 하는 좋은, 비극적 사진들이다.

    나는 헌책 수집광을 낚시꾼에 비유한다. 강이나 호수나 바닷가의 낚시꾼이 아니라 아스팔트 위의 낚시꾼이다. 낚시꾼의 재미와 마찬가지로 아스팔트 위의 낚시꾼에게도 같은 묘미가 있다. 가끔은 ‘월척’을 낚는 희열을 맛보기도 한다.

    영어사전으로는 옥스퍼드 영어사전이 유명하다. 거기에는 20여 권으로 된 ‘Oxford English Dictionary’와 그것을 줄여 2권으로 된 ‘Shorter Oxford English Dictionary’가 있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흔히 콘사이스라고 부르는 ‘Concise English Dictionary’가 있다. ‘OED’를 처음 발견하고 용기를 내어 샀을 때의 그 희열감이란…. 나중에 영어를 전문으로 하여야 할 분에게 기증했다. 그리고 훨씬 더 뒤에 OED 20여 권을 2권으로 압축한 사전을 싼값에 사고는 기뻐했다. 2권으로 압축했기 때문에 확대경이 첨부되어 있어 그것으로 확대해 보아야만 잘 보였다.

    그 밖에도 월척이 많지만, 로댕의 에로틱 데생집도 희귀본이 아닌가 한다. 앞으로 훌륭한 조각가에게 주기 위해 지금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하나만 더 이야기하면, 내 월척 중에 소중한 것은 영문으로 된 중국 건축 사진첩이다. 나는 서양 숭배자다. 건축에 있어서는 특히 그렇다. 그리스의 아크로폴리스나 로마의 콜로세움, 파리의 베르사유 궁전 등 서양 건축물을 볼 때마다 항상 압도되어 왔고 거기서 동양의 열등감을 느껴왔다. 그러다가 중국 건축 사진첩을 보고는 생각이 달라졌다. 대리석이 없어서 그렇지 중국의 건축은 서양의 그것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예를 들어, 널리 알려진 건축물이지만 베이징의 천단(天壇)이 그랬다.

    모으는 재미 못지 않은 주는 재미

    나는 멍청하다. 50년 동안 희귀본인 고본에 관심을 가졌더라면 지금 엄청난 희귀본 소장가가 되었을 것이다. 내 지인 가운데 그런 사람이 있다. 그는 국내책 중에도 특히 잡지와 시집의 초판본만 모은다. 그리고 외국책으로는 이집트에 관한 것과 에로티시즘의 수작을 수집한다. 쉽게 말하여 환가(換價)성이 있는 책들이다.

    한번은 어느 마음씨 좋은 책방 주인이 내가 희귀본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자 최남선의 ‘백팔번뇌’ 시집을 굳이 사두라고 했다. 장정·서문·발문에 노수현·이광수 등 우리나라 명사가 대거 동원된 책이어서 가치가 있단다. 희귀본으로서의 고본이라고 산 것은 그것 정도다.

    책은 모으는 재미도 있지만 주는 재미도 그에 못지않다.

    앞서 말한 바 있는 망원동에 물이 들었을 때 하베이의 혈액순환에 관한 고전의 한정 복사본을 샀다. 그래서 의학을 하는 권이혁 박사(전 서울대총장)에게 선물로 주었다. 연필로 ‘몇 권 가운데 몇 권째’라고 표시가 되어 있는 한정판으로 그리 흔치 않은 책이라 한다. 나중에 권박사에게 식사대접을 정중하게 받았다.

    한번은 한 교수가 마야나 잉카문명에 큰 관심을 표명하는 것을 듣고는 ‘멕시코’라는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옥타비오 파스가 서문을 쓴 결정판이라 할 책을 선물했다. 또 한 교수는 생활에 도움이 되는 수필을 집필하는 데 골몰하고 있어 ‘영혼을 위한 수우프’라는 영문판 책을 선물했더니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고마워 했다.

    한 친구는 신학 전공이 아닌데도 성경 공부에 열중하기에 성경에 나오는 일상의 모든 것에 대한 전집(예를 들어 여성·의식 등등)을 읽어 보라고 주었다.

    후배 관리들과 술을 마시게 되었을 때는 라켈 카슨의 ‘침묵의 봄’을 한 권씩 선물하며 환경에 관한 명저라고 꼭 읽어보라고 권했다. 내가 아끼는 신문사 후배와 만나서는 헨리 키신저의 영문 회고록을 선물하며 공부하라고 했다. 어렵지만 꼭 읽어 안목을 넓히라는 것이다.

    신문사 편집국장으로 있을 때는 기자들에게 책을 많이 선물했다. 공부하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아마도 후배들에게 몇백 권을 주었을 것이다. 노동부에 있을 때도 출입기자들에게 영문 원서를 몇 권씩 주었다. 다른 것을 주는 것보다 내 마음도 편하고 흐뭇했다. 정치를 하면서도 당직자들이나 유권자들에게 책 선물을 많이 했다. 손쉬운 문학전집이나 역사물을 위주로 선물했다. 유권자나 당직자들의 교양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회식만 하는 것보다는 내 마음도 훨씬 편했다.

    요즘 대학에 강의를 나가면서는 ‘한 학생에게 한 권의 책’을 목표로 책을 선물한다. 공부 잘하는 학생들에게는 ‘전쟁과 평화’ ‘레미제라블’ ‘스카레트’ ‘장미의 이름’ 등 영문 포켓 북을 주로 주는데 대부분의 학생이 “영문 아니에요. 읽기 힘들어요” 한다. 그러면 “요즘 같은 세계화 시대에 자네들 영어를 잘해야 하네”하고 읽기를 강권한다.

    그러면서 내가 고등학교 시절, 대학 초년에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조셉 콘래드의 ‘암흑의 심장’, 토머스 울프의 ‘시간과 강’ 등을 영문으로 읽은 경험, 그래서 공부나 인간적 성장에 큰 도움이 된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는 왜 헌책을 그리도 많이 모았을까?

    헌책을 거의 광적으로 수집한 나의 50년을 가끔은 미련했다고 후회한다. 이제 그 많은 책이 때로는 거추장스럽다. 특히 이사할 때를 생각하면 아찔해지기까지 한다.

    나는 왜 헌책을 그렇게도 많이 모았을까? 심리학적인 분석대상이다. 어렸을 때 무엇인가 부족함을 느꼈고 그래서 그 결핍감을 메우려는 탐욕이 생겨난 것만 같다. 모든 것에 만족하며 자랐으면 그런 탐욕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부모님은 다른 것은 몰라도 내가 책을 사는 데에는 몹시 관대했다. 그래서 책을 산다면 두말하지 않고 돈을 주셨기 때문에 책 모으기가 가능했을 것이다.

    가끔 친구들이 무슨 책을 그리 많이 사느냐고 핀잔을 줄 때도 있다. 그러면 나는 익살을 섞어 이렇게 반문한다. 어느 재벌은 자동차 수집광이지 않느냐, 또 어느 재력가는 여자 수집광(?)이지 않느냐, 거기에 비하면 책 수집은 돈이 덜 드는 것이다. 또 수석을 모으는 취미, 난초를 모으는 취미, 우표를 모으는 취미보다 더 생산적이다, 그렇게 답변하곤 했다.

    헌책을 사면 우선 앞뒷면에 있는 추천문을 읽는다. 그리고 목차를 천천히 살피고 서문을 읽는다. 가끔은 결론 부분까지 가는데 그런 ‘대접’을 받는 책은 드물다. 끝까지 독파하는 책은 훨씬 더 드물지만. 그래서 나는 책을 수집하는 것이지 읽는 것은 아니라고 꼭 힘주어 해명한다.

    어쨌든 책수집 취미 덕분에 나는 책 세계의 짜임새를 대충 짐작하게 되었다. 도서관의 사서들이 아마 그럴 것이다. 그래서 어떤 테마가 나오면 대개 어떻게 전개될 것이라고 윤곽을 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우선 잡지 편집에 도움이 되었다. 옛날에 ‘서울평론’이라고 하는 주간지를 2년간 편집했는데 그때 비교적 호평을 받았다. 지금도 가끔 ‘서울평론’이 좋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요즘 계간 ‘다리’의 편집을 책임지고 있는데 평가는 엇갈리고 있지만 내 나름대로 헌책 수집으로 얻은 안목이 크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이를 먹어가니까 감각 면에서 시대변화에 뒤떨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공포에 가까운 두려움은 있지만 말이다.

    나의 헌책방 순례는 치유될 수 없는 병

    요즘은 인터넷 시대다. 나는 ‘컴맹’일 뿐만 아니라 인터넷도 외면하고 있다. 스스로 인터넷 시대의 석기시대인을 자처한다. 하기는 나는 항상 유행에 몇 발짝씩 뒤늦게 살아왔다. 대학 시절 사르트르가 휩쓸 때도 그러려니 하다가 10년, 20년 후에 관심을 갖고 좀 읽어보았다. 마셜 맥루한이 여기저기 오르내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기는 마르크시즘에 대해서도 그랬다. 젊은 시절 한참 마르크스가 운위될 때도 기본적인 것 몇 가지 읽었을 뿐이다. 그리고 소련과 동구권이 몰락하고 마르크시즘이 아주 한물 가다시피한 요즈음 가끔 기본적인 이론서를 끄집어내 음미하는 것이다. 아마 인터넷도 유행이 휩쓴 후 멍청하니 따라가려 할지 모르겠다. 나이 든 사람의 완고함이라 할까. 하기는 인터넷 운운하는 것도 속도의 문제, 공간의 문제이지 인간의 근본적인 생각의 문제는 여전히 자신에게 맡겨진, 자신과의 씨름이 아니겠는가.

    요즘도 계속 헌책방 순례하느라 용돈의 대부분은 거기에 지출되지만 나는 골프를 안 치니까 그 비용으로 충당한 셈으로 친다. 치유될 수 없는 병이다. 그동안 모은 책들은 대충 정리를 마쳤는데, 다시 사모으니 집안식구들의 눈치가 보일 뿐만 아니라 개과천선(改過遷善) 없이 또다시 골칫덩이를 키워가고 있는 것이 내가 생각해도 이상하다. 미련함은 죽기 전에는 못 고치는 것인가.

    역시 시대의 변화를 말하는 듯 요즘은 중국의 사진집이 많이 눈에 띈다. 나는 오늘도 온고당에 가서, 이미 갖고 있는 것이지만 중국의 자금성·만리장성·이화원 등의 사진집을 살 계획이다. 동네 후배들에게 주면 얼마나 좋아할 것인가.

    내게 서울에 사는 재미를 묻는다면 그 첫째가 헌책방 순례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 재미 때문에 도저히 시골 생활은 못 할 것 같다. 그리고 그 두 번째가 친구들과 어울리는 허름한 대폿집이라 해둘까.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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