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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최후의 미륵보살 진덕여왕

  •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신라 최후의 미륵보살 진덕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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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당 태종은 김춘추와 한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되었다. 김춘추가 떠난 지 석달 만인 5월 기사일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제일 낭패한 것은 김춘추였고 더욱 실망한 것은 신라 백성들이었다. 당 태종이 유조(遺詔)를 남겨 고구려 정벌을 포기하라 했다 하니 이제 신라는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남는 방법을 강구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백제는 때를 놓치지 않고 8월에 장군 은상(殷相)이 정병 7000을 거느리고 석토(石吐) 등 7성을 공격하여 함락한다. 진덕여왕은 김유신과 김죽지(金竹旨), 김천존(金天存) 등으로 하여금 이를 막게 하니 김유신은 적의 첩보를 역이용하는 첩보전으로 이를 물리친다.

신라는 어떻게 하든지 다시 당 고종(高宗) 이치(李治, 628∼683년)의 비위를 맞춰 당나라 원군을 끌어와야 했으므로 고종 영휘(永徽) 원년(650)부터 스스로의 연호를 폐지하고 당나라 연호를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6월에는 김춘추의 장자인 김법민(金法敏, 626∼681년)을 사신으로 보내면서 진덕여왕이 직접 지어 비단에 무늬 놓아 짜낸 대당태평송(大唐太平頌) 5언 시축(詩軸)을 선물로 가져간다.

당나라의 융성과 번영을 칭송한 시였으니 당 고종이 그 정성에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해인 영휘 2년(651) 2월에는 김춘추의 둘째 아들인 23세의 청년 김인문(金仁問, 629∼694년)이 조공사겸 숙위 왕자가 되어 당나라로 떠난다. 바로 밑의 아우인 김문왕과 교대하기 위해서였다. 김인문이 마음에 들었던 당 고종은 바다를 건너온 노고와 충성을 가상히 여긴다며 좌령군위장군(左領軍衛將軍)의 벼슬을 특별히 내려준다.

이로부터 김인문은 한 살 아래인 당 고종과 깊은 인연을 맺어 우정어린 신뢰를 바탕으로 신라와 당 사이를 오가며 여러 가지 외교적 문제를 원만하게 풀어나가는데 진력하게 된다. 그는 대부분의 세월을 당 고종 측근에서 보내다가 결국 66세로 당 고종보다 11년 후에 당나라에서 생을 마감하고 시신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와 부왕인 태종 무열왕의 능 아래에 배총(陪)으로 묻히게 된다.



장차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오직 조국을 위하는 마음으로 아우를 대신해 숙위왕자로 잠시 머물다 가겠거니 하고 온 걸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3년 뒤인 진덕여왕 8년(654) 3월에 진덕여왕이 돌아가자 부친 김춘추가 신라왕으로 추대되어 그는 진짜 왕자의 신분이 되었다.

그동안 신라에 하강한 미륵보살의 화신으로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이 왕위에 올라서 신라를 불국토로 이끌어 나갔던 것인데 두 여왕을 거치면서 그들을 구심점으로 하는 화랑 조직이 충분히 그 진가를 발휘하여 고구려와 백제의 끊임없는 침략에 목숨을 아끼지 않고 저항하여 진흥왕 시절에 확장해 놓은 국토를 잘 지켜 왔었다.

선덕여왕을 원화로 받들며 성장한 화랑 1세대인 김유신 세대가 벌써 60대로 접어들어 국가 원로의 반열에 오르게 되니 원화의 기능은 이제 한계에 도달하게 되었다. 즉 미륵보살의 출현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더구나 당이라는 의지할 만한 우방이 생겨 고구려와 백제를 확실하게 견제해 주니 이제 구차스럽게 미륵보살에 의지하여 민심을 결집시키지 않아도 백성들의 사기는 충천하고 민심은 하나로 결집되게 되어 있었다.

선덕여왕 말년에 비담 등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보수 반동세력들이 모두 표면으로 떠올랐다가 일망타진된 것도 민심을 결집하는데 더 없이 큰 도움이 되었었다. 그러니 이제 진골 세력이 국정을 뜻대로 움직여갈 수 있었다.

그래서 진흥왕의 혈통을 가장 순수하게 계승하고 있던 김춘추가 자연스럽게 왕위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처남인 김유신이 막강한 군사력으로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었다는 사실이 결정적인 추대 요인이 된 것도 사실이었다.

김유신은 화랑 집단을 기반으로 하여 전 신라의 군사권을 완전 장악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당시 진골 귀족의 수장이던 김알천 장군이 보위에 오르기를 극구 사양하고 김춘추를 추대하여 보위에 오르게 하였던 것이다. 혈통으로 보아도 그는 진흥왕의 방계였을 터이니 순수 진골 혈통이어야 한다는 명분에 맞지도 않았다. 이래서 여왕은 양대에서 끝나고 김춘추가 왕위에 올라 진정한 부계 중심적 진골왕통이 이어지게 되었다.

김부식의 유교사관과 일연의 불교사관의 한계

그런데 이런 사실을 모르고 여왕이 양대만 출현했다는 피상적인 현상으로만 파악한다면 여왕 출현의 이유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방법이 없게 된다. 그래서 고려 인종 23년(1145)에 김부식(金富軾, 1075∼1151년)이 유교사관(儒敎史觀)에 입각하여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편찬해 내면서 성골(聖骨)이라는 허상(虛像)의 골품을 하나 더 추가하고 그 골품이 끝나가는 현상으로 여왕의 출현을 합리화시키려 하였을 것이다. 유교사적 안목으로 볼 때 이런 방법 외에 이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길은 없기 때문이었다. 이에 김부식은 진덕여왕이 돌아간 사실을 기록한 다음 아래와 같은 주석을 덧붙여 놓고 있다.

“나라 사람들이 일컫기를 시조 혁거세로부터 진덕에 이르기까지 28왕을 성골이라 하고 무열왕으로부터 끝왕에 이르기까지를 진골이라 일컫는다고 한다. 당나라 영호징(令狐澄)도 ‘신라기(新羅記)’에서 이르기를 그 나라 왕족은 제1골이라 부르고 나머지 귀족은 제2골이라 부른다고 하였다.(國人謂 自始祖赫居世 至眞德 二十八王 謂之聖骨, 自武烈王 至末王 謂之眞骨. 唐令狐澄 新羅記曰 其國王族 謂之 第一骨, 餘貴族 第二骨.)”

나라 사람들의 말이라 하여 그 말의 출처를 모호하게 얼버무린 것부터가 김부식이 꾸며낸 말인 것을 보여주는데, 당나라 사람 영호징이 쓴 ‘신라기’를 구차스럽게 인용하고 있으나 제1골과 제2골의 의미가 성골과 진골의 존재를 의미한다기보다 오히려 진골과 그 밖의 귀족을 의미하는 내용이라서 성골이라는 골품은 없었고 진골만 존재했다는 사실을 더욱 부각시켜 준다.

그런데 이런 김부식의 유교사적 합리성 부여가 뜻밖에 불교사관에 입각하여 편찬된 ‘삼국유사’로 이어지면서 더욱 뚜렷하게 윤색되는 어처구니 없는 결과를 가져와 이를 확실한 역사사실로 굳혀 놓고 만다. 고려 충렬왕(1275∼1308년)때 석일연(釋一然, 1206∼1289년)이 중국측 불교 역사책인 ‘고승전(高僧傳)’과 ‘불조통기(佛祖統紀)’의 체제를 혼합하여 삼국시대의 역사를 불교사적 안목으로 편찬해 놓은 것이 ‘삼국유사’인데, 거기서 성골의 존재를 재확인해 주었다. ‘삼국유사’ 권 1 왕력(王曆)에서 신라 제 27 선덕여왕조의 세주(細註)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기 때문이다.

“성골 남자가 다하였기 때문에 여왕이 섰다.(聖骨男盡, 故女王立.)”

김부식이 처음 꾸며내느라 모호하게 표현했던 내용을 한층 분명하게 설명해 놓은 것이다. 아마 일연은 김부식이 모호하게 표현해 놓은 사실을 분명하게 밝혀 놓는 것이 의미있는 일이라고 여겼던 듯하다.

700여년 전의 신라 사정을 정확히 알 수 없는 일연이 당시로서는 짐작도 할 수 없는 여왕 출현의 배경을 굳이 불교사적인 시각으로 교정하여 보려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김부식이 모호하게 표현해 놓은 사실을 더 간명직절(簡明直截; 간단하고 명쾌하게 일직선으로 끊어냄)하게 표현해 놓는 것을 자기 몫으로 여겼던 모양이다. 이런 능력은 오히려 일연이 타고난 역사가다운 자질이라고 높이 평가할 수도 있다.

태종(太宗) 무열왕(武烈王) 김춘추(金春秋)

김춘추는 진지왕의 장손이자 이찬 용수(龍樹)의 장자이며 진평왕의 외손자로 가장 순수한 진골 혈통을 타고난 인물이었다. 더구나 그 아버지는 제2의 석가로 불리는 대승불교의 중흥조인 용수보살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고 있었다.

용수보살은 용궁에 들어가 대승불교의 꽃이라 할 수 있는 ‘화엄경(華嚴經)’을 가져왔다고 전해지는 인물이다. 그러니 김춘추는 신라를 화엄불국세계로 만들어 나갈 자격을 타고난 인물로 지목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그의 용모는 매우 잘생겨서, ‘용과 봉의 모습이요 하늘에 뜬 해와 같은 얼굴(龍鳳之姿, 天日之表)’이라고 극찬을 받을 만큼 잘생겼던 당 태종조차 한눈에 반할 정도였으니 그만한 기대는 걸어볼 만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인물만 잘생긴 것이 아니라 도량이 넓고 지혜가 출중하며 덕이 높고 문무의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아 이를 겸전했었다 한다. 그러니 거의 전인적인 덕목을 갖춘 현군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신라에 이런 어진 임금이 등극했다는 사실은 고구려나 백제에 위협적인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이에 고구려는 무열왕 원년(654) 10월에 말갈병을 이끌고 백제와 함께 신라를 공격하여 신라의 북쪽 33성을 빼앗는다.

그러자 무열왕은 2년(655) 정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구원을 요청한다. 이때 둘째 왕자인 김인문이 당 고종 측근에서 숙위왕자로 시위(侍衛)하고 있었으므로 이 요청은 바로 받아들여져 3월에 당 고종은 영주(營州)도독 정명진(程明振, ?∼662년)과 좌우위중랑장(左右衛中郞將) 소정방(蘇定方, 592∼667년)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고구려를 침략하게 하니 이들은 5월에 귀단수(貴端水)를 건너가 신성(新城)을 함락하여 불지르고 돌아온다.

그런데 무열왕은 등극하면서 자신의 재위 기간에 반드시 백제를 멸망시키겠다고 자신과 한 약속을 결행하려 한다. 백제 의자왕 손에 잡혀 죽은 큰딸과 큰사위 및 그 가족의 복수를 하기 위해 대장부로서 스스로 약속했던 ‘백제 삼키는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다.

우선 큰 아들 법민을 태자로 삼고 셋째 왕자 문왕을 이찬(伊), 넷째 왕자 노단(老旦)을 해찬(海), 다섯째 왕자 인태(仁泰)를 각찬(角), 여섯째 왕자 지경(智鏡)과 일곱째 왕자 개원(愷元)을 각각 이찬으로 삼아 왕실의 지위를 튼튼하게 한 다음 손위 처남인 김유신과의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하기 위해 자신의 딸인 지조(智照)공주를 환갑이 된 김유신에게 처녀로 시집보낸다.

백제를 멸망시키자면 신라의 군사권을 한손에 장악하고 있는 김유신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김유신은 9월에 백제의 도비천성(刀比川城)을 공격하여 빼앗는데 이미 그전부터 부산(夫山)현령으로 있다가 백제의 포로가 되어 백제의 권신인 좌평 임자(任子)의 종이 되어 있던 조미곤(租未坤)을 간첩으로 삼고 임자를 포섭하여 백제의 기밀을 모두 탐지해내고 있었다.

이에 백제를 삼키는 일이 급속도로 진행되어 나갔다. 그런데 의자왕은 신라의 계속되는 불행에 안도하며 신라의 와신상담(臥薪嘗膽)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교만과 사치 및 음란한 즐거움에 빠져 세월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백제에도 세태를 바르게 보는 눈이 있었으니 좌평 성충(成忠)이 그런 사람이었다. 성충은 의자왕이 환락에 탐닉하는 것을 보다 못해 의자왕 16년(656) 3월에 이를 극간하게 되는데 의자왕은 도리어 그를 옥에 가두어 죽게 한다. 성충은 죽기 전에 이런 상소를 올려 백제의 멸망에 대비하라고 했다.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못하니 원컨대 한마디 하고 죽게 하십시오. 신이 일상 시운의 변화를 관찰해보니 반드시 전쟁이 일어나겠는데 무릇 용병에는 반드시 그 지세를 택하여 상류를 차지하고 적을 맞아야 그런 연후에 보전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국의 군대가 쳐들어 오면 육로는 탄현(炭峴)을 지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伎伐浦) 기슭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 험악하게 막힌 곳에 의지한 연후에 적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자왕은 성충의 이런 충간에 귀도 기울이지 않고 임자와 같은 간신의 말을 믿고 기고만장하여 환락의 나날을 보내게 된다.

한편 신라는 무열왕 3년(656) 숙위왕자 김인문이 당나라에서 돌아오자 그를 군주(軍主)에 임명하고 7월에는 김인문 대신 셋째 왕자인 우무위장군 김문왕을 숙위왕자로 당나라에 보낸다.

그러나 김인문과 정이 깊었던 당 고종은 다시 김인문을 불러들이는데, 귀국하여 부왕의 백제 병탄 의지를 확인하고 돌아간 김인문은 당 고종을 움직여 백제 정벌군을 발동하도록 막후에서 교섭한다. 신라에서는 이와 때를 맞춰 백제를 정벌할 만반의 준비를 갖춰나간다.

그런데 마침 무열왕 6년(659) 4월에 백제가 경북 인동 지역의 독산성(獨山城)과 동잠성(桐岑城)을 침공해 온다. 신라는 이것을 빌미삼아 사신을 당나라로 보내 군사를 빌리는 한편 8월에는 아찬 김진주(金眞珠)를 병부령(兵府令)으로 삼아 총력전 체제로 돌입한다. 때 맞추어 다음해인 무열왕 7년(660)년 정월에 상대등 금강(金剛)이 죽자 김유신을 상대등에 임명하여 전시 내각을 김유신 중심으로 일원화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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