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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산책

조선시대 공포의 ‘신참 신고식’

향응에서 육체적·정신적 학대까지

  • 박홍갑 국사편찬위원회 편사부 연구원

조선시대 공포의 ‘신참 신고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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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때 이런 일도 있었다. 성종 25년(1494) 변방의 절도사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변종인(卞宗仁)에게 도총관 자리를 제수하였다. 그는 무신으로 혁혁한 공을 많이 세워 공조참판에 올랐고, 그 이후로도 주로 변방의 절도사 임무를 맡아 다년간 한양을 떠나 있었다. 이에 내심 불만을 가진 그의 아내가 도성 안에 근무할 수 있도록 상언(上言)을 올린 것이 받아들여졌다.

변방절도사는 종2품 무관이니, 행정계통의 관찰사와 맞먹는 자리다. 그리고 정2품 도총관은 수도를 지키는 오위도총부의 최고 자리니, 무반으로는 실질적인 총지휘관이 되는 셈이다.

그런데 변종인은 도총관으로 부임한 뒤 군사들의 훈련상황을 점검하려고 훈련원에 갔다가 허참례를 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휘하 관원들이 지영(祗迎; 아랫관원이 윗관원을 맞이하는 예)하지도 않고 이름을 부르면서 욕을 하는 ‘변’을 당하고 말았다. 변종인이 신고식을 생략하자, 새까만 후배가 지영은 고사하고 원로 대신인 그를 “어이! 신참” 하고 불러댄 것이다.

장관 길들이기

모욕당한 변종인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새까만 후배인 훈련원의 권지들에게 당한 수모를 생각하면, 자리를 더 이상 보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권지란 급제한 뒤 수습으로 업무를 익히는 자 아닌가. 임금께 아뢰고 스스로 피혐(避嫌 ; 일신상의 이유로 관직에 나아가지 않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조선시대 허참례를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계급의 높낮이를 떠나 그 부서에서 얼마나 오래 근무했나를 따지는 풍속인 것이다. 오늘날 장관이 부임한 이후 직업관료들에게 왕따당하고 임기 내내 휘둘리다 그만두는 사례가 많듯이, 장관 길들이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하찮은 비관(卑官)들이 재상을 욕보인 일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던 성종은 훈련원 권지 이극달(李克達) 등 관련자 14명을 불러 조사하였다. 그런데 그들의 대답은 이러했다.

“무과 출신인(武科出身人)은 당상·당하를 묻지 않고 모두 주효(酒肴)를 판비(辦備)하여 본원(本院)의 남행(南行)과 서로 만나본 연후에야 선생안(先生案)에 제명(題名)하고, 선생이라고 일컫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비록 당상이라도 지영(祇迎)하지 않고, 신래(新來)의 이름을 부르니 이것은 옛 풍습입니다.”

‘선생안’이란 역대 관직 역임자 명단을 묶은 책이다. 계급에 상관없이 신참자는 먼저 근무하던 자들에게 술과 안주를 준비하여 한턱을 써야 선생안에 이름을 올려주는 동시에 선생이라 일컫고, 지영(祗迎)의 예를 하게 된다.

계급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새로 부임하는 자가 술과 안주로 대접해야 하는 모임을 상회례(相會禮)라고 칭한다. 이 역시 면신례의 일종이다. 결국 성종은 관료의 기강을 바로잡는다는 명분으로 관련자들을 추국(推鞫)하여 보고하도록 사헌부에 지시하는 선에서 끝내고 말았다.

이는 조선시대 신참의 신고식이 갓 들어온 신임관료만이 아니라 다른 부서에서 전근해 오는 기존 관직자들도 피할 수 없는 통과의례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더구나 한 부처의 장으로 취임하여도 신고식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이었으니 무서운 풍속이 아닐 수 없다.

업무 연속성은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꼭 필요한 부서에는 구임(久任)이라는 제도를 마련하여 전문성을 높인 것이 조선이었다.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업무에 익숙한 사람은 어느 사회에나 필요하다. 그러나 한 자리에 오래 있으면 부정과 폐단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렇듯 관료제도에도 장·단점이 공존할 수밖에 없다. 허참례 역시 관료제도를 운영하는 데 엄연한 하나의 풍속으로 존재했고, 그것이 끼치는 영향이 긍정적이었든 부정적이었든 오늘날까지 그 남아 있다.

면신례를 거부한 간 큰 신참들

그런데 조선의 엄격한 신고식 규율에 정면으로 대든 신참들도 있다. 요즘 말로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신참이었던 것이다.

태종 17년(1417) 문과에 올라 평안감사를 지낸 박이창은 기개가 있고 활달하여 얽매이는 성격이 아니었다. 또한 강직하면서도 해학이 있었다. 젊어서 학문에 힘쓰지 않았지만, 고향 상주에서 열린 향시에서 장원을 차지한 후 마음을 달리 먹고 공부를 하였다. 이후 마침내 문과에 급제하니, 예문관으로 배속받았다.

사관인 한림이 근무하는 예문관은 신고식이 세기로 이름난 곳이니, 박이창의 성격으로 선배들에게 여러 번 꾸짖음을 듣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그는 50일이 지나도록 선배들이 면신해 주지 않아 관직에 임용되지 못하자 분을 참지 못하고 스스로 자신이 앉아야 할 좌석에 앉아버렸다. 이리하여 당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자허면신(自許免新)’이라 일컬었다.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에 배속된 이율곡도 면신례 자리에서 고참들에게 공손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관직에 바로 나가지 못하고 파직된 적이 있다. 이퇴계가 이 소식을 듣고 신래를 희롱함이 무리한 시속이나 이미 알고 그 길로 들어갔으니 홀로 모면할 일도 아니구나 하고 한탄했다는 것이다.

이런 악연이 있는 율곡은 선조조에 들어와 관을 부수고 옷을 찢으면서 진흙 속에 굴리는 면신례의 가혹한 폐단을 강력하게 제기했고 그 풍습을 중지하라는 명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명령은 조선 초기부터 늘 있었지만 면신례는 없어지지 않고 이어져온 것이니,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또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광좌는 젊은 시절 과거 공부를 같이하던 박태한·최창대 등과 함께 급제하면 신래의 행동에 절대로 응하지 말자고 굳게 약속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숙종 20년(1694) 별시에 세 사람은 동반 급제하였다.

그런데 같은 연배의 친구들이 박태한이 고집불통인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애당초 부르는 자가 없었다. 또 장원급제한 이광좌는 좌주(座主; 고시를 맡은 대제학을 좌주라 하고 합격생을 문생이라 하여, 좌주문생 관계가 사제간 이상으로 돈독하였음)인 정승 남구만이 불렀지만 끝내 불응하니 남구만도 웃으며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최창대는 아버지의 간곡한 권유를 뿌리치지 못하고 면신례란 통과의례에서 온갖 수모를 당하고 말았다. 그는 박태한에게 서신으로 “귀신 같은 행동을 이미 면하지 못했고, 조롱하고 장난하는 데에 이르러서도 남을 따라 같은 행동에 휩쓸린 것이 많았으니, 형과 더불어 거취를 같이하지 못한 것을 깊이 후회한다”고 적어 보내기도 했다.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들이 엽각(사냥에서 순위를 재는 일종의 행사)을 하면 자질구레하지만 풍습이기에 공자도 따랐다는 고사가 있는데, 당시 면신례를 보는 사대부들의 눈은 공자의 엽각과 다름없었다. 퇴계의 생각도 이에 근거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관례를 무시한 간 큰 아웃사이더는 아무나 흉내낼 수는 없는 것이었고, 또 계속 아웃사이더로 살아간 것도 아니었다.

면신례의 사회사적 의미

아무튼 조선의 신래들은 호된 신고식을 치르고 나면, 한층 성숙한 조직원이 돼 일체감과 소속감을 분명하게 느낀다. 그들만이 가지는 엘리트의식 속에서도 철저하리만큼 동료애를 발휘하는 동료의식이 내재하고, 이기심을 버린 이타심을 바탕으로 국왕과 대신들에게도 굽히지 않는 기개를 키워 가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시대 관료사회에서 면신례라는 통과의례는 경제적 침학과 정신적·육체적 가학이 도를 넘을 때 부정적 기능도 나타났지만, 이런 의식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긍정적 기능도 무시할 수 없음을 동시에 알아야 한다.

조선시대 선비정신이란 것도 그들의 경제적 기반 위에서 마련되었다는 점엔 부정할 수 없다. 언제 관직을 그만두어도 양반 신분으로 향촌사회에서 즐기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경제적 기반, 이것이야말로 선비정신을 뒷받침하는 가장 큰 무기가 아니었던가. 그러한 경제적 바탕 위에서 면신례 등을 통한 일체감을 조성하는 분위기가 그 사회를 통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처럼 개성과 창의력을 바탕으로 움직이는 다원화된 정보화사회에서 전통적인 신고식 문화가 얼마나 유효할지는 의문이다. 오늘날은 조직의 질서나 사회통합 같은 가치관보다 개성과 각자의 다양한 재능이 존중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보화사회에서 첨단을 걷는 산업일수록 신입사원과 고참은 상하로 연결되는 구성원이 아닌 경쟁관계일 수밖에 없다. 확산돼 가는 연봉제 속에서 자신의 능력만이 유일한 생존 수단이 된다. 이는 진실로 삭막한 사회다.

그런데도 우리는 개인과 개인을 연결하는 단순한 기계적인 고리가 아니라, 유기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 통과의례를 모색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이 없다면 너도나도 삭막한 정보화사회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세상천지가 벤처와 코스닥 열풍으로 정신없이 돌아가고, 인터넷이 지구를 묶어 디지털 세대가 주인인 이 땅에서 아날로그 세대도 엄연히 공존하면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디지털 세대만 사는 세상이 도래할지라도 신고식 문화의 긍정적인 기능까지 없애야 하는가.

다만 새로운 신고식 문화를 위해서는 일체감 조성을 목적으로 한 기계적인 연대가 아니라 역동적이고 살아 움직이는 연대 방법을 찾도록 우리 모두 노력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새 천년 21세기에는 멋진 신고식 문화를 만들 수 있도록 다같이 노력해야 할 것이다.冬

신동아 2000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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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갑 국사편찬위원회 편사부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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