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퇴장인가, 교묘한 위기 탈출인가. 경제개발시대의 ‘영웅’ 정주영(鄭周永·85)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전격 퇴진을 선언, 재계에 충격을 주었다. 그것도 자신의 뒤를 이어 현대호(號)를 이끌고 있는 두 아들 정몽구(鄭夢九·62) 현대자동차 회장과 정몽헌(鄭夢憲·52) 현대그룹 회장까지 동반 퇴진시키는 구도여서 충격은 일파만파로 증폭됐다.
하지만 현재까지는 정몽헌 회장만 아버지의 지시를 따르고 있는 어정쩡한 모양새다. 그간 구구한 억측과 갖가지 음모설이 쏟아져 나왔지만, 수소폭탄급 폭발에 뒤이은 먼지폭풍이 서서히 걷히면서 재계는 이번 사태를 정몽헌 회장측이 벌인 ‘실패한 친위 쿠데타’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실패한 친위 쿠데타?
“오후 2시에는 발표 못해. 내용도 없는데다, 이익치 문제가 아직 결론이 안 났단 말이야.”
현대그룹 자구계획 발표를 2시간 가량 앞둔 5월31일 정오 경. 정몽구 회장(이하 ‘MK’)의 핵심 측근인 현대차 고위 관계자는 기자와 점심식사를 하다 말고 손사래를 쳤다. MK 계열의 간부들 사이에선 ‘회장’이라는 직함을 잃은 지 이미 오래인 이익치(李益治) 현대증권 회장의 신변처리 문제 때문에 2시로 예정된 발표는 어려울 것이라는 추측이었다. MK측에서 봐도 그 무렵 빚어진 정몽헌 회장(이하 ‘MH’) 계열사의 유동성 위기는 쉽게 해법을 찾기가 어려울 듯했다.
이 관계자는 말을 계속 이어갔다.
“하긴 이익치 문제말고 달리 또 뭐가 있겠어. 이번 발표에서는 얼렁뚱땅 유임되는 것으로 했다가 나중에 본인이 자진 사퇴하는 형식으로 처리하겠지.”
그의 말마따나 현대의 유동성 위기는 6조원 가량을 추가로 확보하고 이익치 회장 등 몇몇 경영인이 퇴진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아가는 듯했다. 이번 위기가 현대건설, 현대상선 등 MH의 계열사에서 비롯됐으니만큼 현대자동차 등 MK 계열 회사들은 이 문제에 대해 그다지 걱정할 게 없어 보였다.
한가로운 점심식사가 끝나갈 즈음, 기자의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2시에 발표합니다.”
MH쪽 직원은 이 한 마디만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MK측에선 그때까지만 해도 단지 이익치 회장의 신변문제가 가닥이 잡힌 것쯤으로 추측할 따름이었다. 잠시 후 마른 하늘에 날벼락 치듯 전개될 초유의 사태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2시가 약간 지나서 발표된 현대의 최종 자구계획은 방송과 통신으로 나라 안팎에 전해지면서 ‘거인의 아름다운 퇴장’이라는 즉각적인 반응을 이끌었지만, 정작 MK측은 허를 찔린 셈이었다. 이날 발표를 맡은 현대그룹 김재수(金在洙) 구조조정위원장은 “명예회장께선 평소 정몽구 회장에게 앞으로는 전문경영인 체제로 가야 한다고 누차 말씀하셨다”고 부연했지만, 정작 MK측에서는 항명 조짐이 불거졌다. 현대건설에서 불거진 유동성 위기의 불똥이 난데없이 현대자동차까지 날아가 경영권을 위협하는 상황으로 반전됐기 때문이다.
‘박세용 파동’ 때부터 갈등
이러한 자구계획은 현대에 본격적인 전문경영인 시대가 도래했다기보다는 정주영이라는 개발시대의 영웅을 희생양 삼아 새로운 형태의 오너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두 번째 진통이 시작됐음을 의미한다고 보는 이가 많다.
이번 사태가 한 마디로 MH의 친위 쿠데타 성격을 띠고 있다는 얘기다. 그룹 경영 주도권을 둘러싼 지난 3월말의 ‘1차 왕자의 난’에 이어 두 달 만에 ‘2차 왕자의 난’이 터진 셈이지만 두 난(亂)의 판도는 판이하게 달랐다.
MK와 MH의 경영권 다툼은 지난해 말 박세용(朴世勇) 현대상선 회장 겸 그룹 구조조정위원장의 인사 파동 때부터 조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현대그룹 고위 관계자의 말이다.
“박세용 회장 거세는 이익치 회장이 낸 아이디어였고 MH가 이를 승인했다는 게 그룹 내부의 정설이다. MH와 박회장은 92년 현대상선 비자금 사건으로 함께 구속되면서 가까워졌고, 그 전까지 왕회장(정 명예회장) 사람으로 분류되던 박회장은 이 때부터 범(汎) MH 계열에 포함되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해 그룹 구조조정 작업이 본격화되면서 MH와 박회장 사이가 차츰 소원해지기 시작했다.
깐깐하고 치밀한 성격인 박회장은 구조조정 과정에서 MH에게 이렇다 할 도움을 주지 못했다. 박회장은 현대를 자동차·중공업·전자·건설·금융 및 서비스 등 5개 소그룹으로 분할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를 통해 부채비율 200% 목표를 달성한다는 것이었다.
이 방안은 MK가 자동차 소그룹을, MH가 전자·건설·금융 및 서비스 소그룹을, 정몽준(鄭夢準·49) 의원이 중공업 소그룹을 맡게 돼 있어 사실상 그룹의 후계구도를 정하는 작업이었는데, 그 구도에 대해 MH의 불만이 컸던 것 같다. 형과 동생에게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등 세계에 내놔도 부럽지 않은 기업들이 돌아간 데 비해 자신의 몫은 초라하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이익치의 역습
MH의 몫으로 결정된 현대전자는 반도체 특수를 누리고는 있었지만, LG반도체와 합병 후유증을 앓고 있었다. 그룹 모기업인 현대건설은 부실 규모가 2조 원대에 달한데다 건설 경기 침체로 내수 부진에 허덕이고 있었다. 현대증권을 비롯한 금융 부문도 외형만 화려할 뿐 실속이 없다는 것이 여러 차례 확인됐다. 그나마 ‘현금 장사’의 창구 노릇을 했던 현대상선은 금강산 관광 등의 대북사업에 돈을 쏟아 붓느라 여력이 없었다.
이 과정에 MH측은 박회장에게 ‘확실한 도움’을 기대했지만, 박회장은 5개 소그룹 분리라는 원칙의 이행에만 관심을 둬 불만을 샀다.
이에 따라 MH측은 5개 소그룹 계열 분리를 유야무야하려는 구상에 들어갔다. 이를 위해서는 계열 분리안을 추진 중인 박회장을 거세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때 이익치 회장이 박회장을 현대차 회장(사흘 뒤 인천제철 회장으로 재발령)으로 전보하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는 게 이 관계자의 주장이다.
1차 왕자의 난은 이회장의 업무정지가 풀리는 3월24일을 D데이로 삼아 전개됐다. 이회장은 ‘바이코리아’ 펀드 자금을 현대 계열사에 불법 지원한 혐의로 기소됐고, 당시 2심이 진행되고 있었다. 금융감독원은 이와는 별도로 이회장에 대해 업무정지 명령을 내린 바 있는데, 그것이 이날부터 풀리게 돼 있었다. 때문에 MK측은 이회장의 업무정지 해제를 계기로 그를 증권 회장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려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회장은 이를 거부하면서 MH와 함께 1차의 난을 주도했다. 그 결과 MH를 그룹의 유일한 회장으로 등극시키는 데 성공함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더욱 굳히게 된다. 상처를 입은 MK측은 이를 계기로 자동차 소그룹 분리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5월25일 현대건설의 유동성 위기 공개와 함께 본격화된 2차 왕자의 난은 1차의 난에서 기세를 올린 MH가 그룹의 후계구도를 아예 새로 짜기 위한 의도에서 촉발시켰다는 시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허울뿐인 현대그룹 회장 자리를 포기하는 대신 현대자동차 등 우량 계열사의 경영권을 확보, 실질적인 파워를 거머쥐려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회를 현대건설의 유동성 위기에서 찾았다는 게 이 음모설의 핵심이다.
이에 대해 MK측 고위 관계자는 “MH가 5개 소그룹 분리 계획의 판을 깨고 자신을 중심으로 그룹구도를 재배치하려는 의도”라며 “현대차의 지분 변동을 MK와 상의하지 않은 것이 그 증거”라고 지적했다.
금융권에 따르면 현대건설의 유동성 위기는 이미 올해 초부터 조짐을 보였다고 한다. 그룹이 신뢰도 추락에 직면하면서 업종 특성상 경기 회복의 사각지대이자 부실 규모가 큰 현대건설이 이미 기업어음(CP) 연장과 회사채 차환 발행(만기 상환을 목적으로 다시 회사채를 발행하는 것)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는 것. 현대 관계자는 “은행 대출을 마음대로 이용하던 다른 그룹과는 달리 현대는 92년 대선 이후 정부의 ‘돈줄 죄기’ 후유증으로 CP 등 단기성 차입을 늘릴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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