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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이상락의 이 사람의 삶

축구인 최은택

축구인 최은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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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 코칭 스태프로 대표선수를 이끌고 치렀던 경기 중에서 가장 보람 있었던 경기나 가장 아쉬웠던 경기는 어떤 경기였습니까?

“기분 좋았던 경기는 다 잊어버렸는데 가슴 아팠던 경기는 기억이 납니다.”

―어떤 경기였는데요?

“74년도에 이란에서 열렸던 아시안 게임에 국가대표 축구팀 코치로 참가했어요. 북한 대표도 참가했지요. 테헤란은 저녁에는 시원하지만 낮에는 굉장히 덥습니다. 이회택, 박이천, 김재한 등 평소에 팔팔 날던 선수들이 더위에 맥을 못 추는 겁니다. 예선 1차전에서 태국을 상대로 1:0으로 이겼어요. 선수단 관계자들이 실망한 거지요.”

그 당시 태국은 워낙 약체였기 때문에 10골 가까이 넣어야 만족해하는 분위기였다. 한국·태국전 다음 경기는 북한이 출전하는 경기였는데, 해가 지고 난 다음 선선한 날씨 속에 치른 탓인지 북한 선수들의 움직임은 남한 선수들보다 민첩해 보였다.



“그 한 경기를 보고 나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김택수 대한체육회장을 통해서 다음날 바레인하고의 경기에서 져주라고 지침을 내린 겁니다. 우리가 바레인을 이겨버리면 2회전에서 북한과 맞붙을 가능성이 있는데, 우리가 북한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얘기지요. 내가 보기에 당시의 북한 축구팀 실력은 우리보다 한 수 낮았어요.”

그때만 해도 스포츠 대결에서도 북한은 무찔러야 할 ‘적군’이었던 것이다.

―그 지시대로 이행했나요? 져주라는 지시에 선수들이 순순히 따르던가요?

“‘기관’으로 통하던 중앙정보부 관계자의 지시를 거역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바레인한테 1골만 먹고 져주라고 했는데 선수들이 ‘실수로’ 그랬는지, 아니면 그런 지시에 대한 반발이었는지, 거의 안 뛰고 서 있다가 4골이나 먹어버렸어요. 나도 선수를 해봤지만 경기에 나가서 져주라는 지시를 받거나 지시를 해보기는 처음이었어요. 당시 최영근 감독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축구판을 영원히 떠나고 싶을 만큼 참담한 심정이었습니다.”

아니나다를까, 북한은 남한 대표의 ‘보이지 않은 지원’에도 불구하고 예선 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신문에서는 주먹만한 활자로 멍청하게 서서 맥없이 당한 대표팀에 뭇매를 가했다. 그렇다고 “중앙정보부에서 지라고 하는데 어떡하란 말이냐”고 대꾸할 수도 없어 쏟아지는 비난을 고스란히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1976년 우루과이의 몬테비데오에서 열렸던 제5회 세계대학선수권대회에 감독으로 선수단을 이끌고 참가하여 파라과이를 꺾고 우승의 영광을 안았다. 대학선수권대회이긴 했으나 우리나라 남자 단체 구기 팀이 세계대회에 나가 우승을 하기는 ‘단군 이래 처음’이었다. 신연호, 유동춘, 김강남·성남 형제 등이 주축이었다.

―오랫동안 대학에 몸담으셨으니까 드리는 질문인데, 제가 보기에는 선수를 양성하는 시스템에 상당한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축구만 해도 이미 초·중·고 시절부터 아예 학업을 전폐하며 운동에만 매달리지 않습니까?

“교육정책이 잘못됐어요. 나는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부터 선수로 뛰었지만 그때는 학교 수업을 다 받으면서 운동했어요. 축구를 24시간 해야 되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하루에 두세 시간만 해도 충분해요. 초등학교 교육은 성인이 됐을 때 뭔가를 하기 위한 준비과정 아닙니까. 축구도 마찬가지예요. 어렸을 때 기본에 충실해야 나중에 훌륭한 선수가 될 수 있어요. 전국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어야 상급 학교에 진학할 수 있다는 식의 성과 지상주의로는 훌륭한 선수가 될 수도 없어요.”

“운동과 학업을 병행해야 한다”

―최근 한 여자 수영선수가 선수촌을 이탈했다가 징계당한 사건을 두고 엘리트 체육 중심의 폐해를 지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운동을 하면서 학업도 병행하겠다면 그렇게 하도록 장려해야지…. 운동시간에 자기 능력 이상의 목표를 향해서 매진할 수 있도록 강도 높게 훈련시키는 것, 그건 당연히 해야 합니다. 그러나 개인 생활을 못하게 하고 운동 이외의 소질개발 기회를 봉쇄해버린다면 그건 감옥이지요. 교육적이 아니에요. 제자들 사이에 나는 아주 무서운 감독으로 소문나 있습니다. 그러나 대학 선수들 합숙훈련을 할 때에 나는 대학원생들 데려다가 영어 공부도 시켰습니다. 물론 중고등학교 때 공부를 거의 하지 않은 학생들이라 흥미를 느끼는 선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최은택 교수는 우리나라 축구인 중에서 해외 연수를 가장 많이 받은 지도자다. 1972년 말레이시아에서 열렸던 FIFA 코칭스쿨에 참가하여 100여일 동안 연수를 받고 돌아왔고 1977∼78년 2년 동안은 독일에서 공부할 기회를 가졌다.

말레이시아 연수 때에는 간단한 영어시험만 보고 참가했으나, 독일 유학은 사정이 달랐다. ‘괴테 인스티튜트’에서 유학시험을 치러 합격해야 비자를 주는 조건이었다.

“축구협회 추천으로 유학 간다고 신문 보도가 났는데, 독일어 못해서 못 간다면 망신 아닙니까. 독일어 개인교습을 받느라 땀깨나 흘렸지요. 6개월을 밤낮 없이 공부했더니 눈병이 생겨서 수술을 받아야 할 지경이 됐습니다.”

간신히 시험에 합격해서 독일로 간 그는 6개월 동안 현지에서 어학연수를 더 받은 다음에 쾰른 체육대학에 배치됐다. 그는 그래도 의사소통에 애로가 있더라면서, 외국말 배우는 것이 축구보다 더 어렵더라고 실토했다.

79년 그는 대한축구협회의 최연소(41세) 이사가 되었고, 그해 아시아축구연맹 기술이사에 선임되었다. 이어서 한양대 체육대 교수로 임용된 그는 84년에는 프로축구 포철팀의 감독을 맡기도 했다. 92년부터 4년간 체육대학장을 지내던 그가 학교로부터 1년간의 안식년을 부여받은 때가 96년이었다.

이제 연변에 진출하게 된 내력을 들어볼 차례다.

“내가 골프를 잘 치는 편입니다. 우리나라 대학교수 중에서는 아마 둘째 가라면 섭섭할 겁니다. 그런데 골프를 열심히 하다 보니 팔꿈치에 통증이 생겼어요. 국내에서는 아무리 치료를 해도 낫지 않아 걱정하고 있었는데, 한양대학에서 체육학 석사과정을 공부하고 있던 중국 연변 출신 조선족인 추명(秋明)이라는 청년이 중국에 가서 한방(漢方) 치료를 받아보라고 하는 바람에 건너가게 됐어요.”

술과 담배에 절어 있던 연변팀

추명은 80년대에 최교수가 아시아 축구협회 일로 중국에 갔을 때 통역을 담당했던 학생인데 최교수의 주선으로 한양대에 유학 왔다. 연변으로 건너간 최교수는 추명의 안내로 현지 축구관계자들을 두루 만나볼 기회를 가졌다.

―중국의 프로축구 갑A리그는 어떻게 운영되고 있었습니까?

“지금은 14팀인데 당시에는 12팀이었어요. 리그가 끝난 뒤 하위 2개팀은 2부로 떨어지고 2부에서 잘 한 팀이 갑A로 올라오는 방식입니다.”

―연변팀은 모두 조선족으로만 구성돼 있습니까?

“조선족 자치주인 연변을 연고지로 하고 있는데, 조선족 선수가 60% 정도 되고 한족(漢族)과 아프리카에서 온 용병도 있었어요.”

최교수는 연변대학으로부터는 안식년인 1년 동안 겸임교수를 맡아달라는 제안을, 그리고 자치주 당국으로부터는 2부 리그로 떨어지기 직전에 있는 축구팀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는다. 겸임교수 제안은 쉽게 승낙했으나 꼴찌를 면치 못하고 있는 축구팀을 맡는 것은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탐색차 선수단을 방문한 최교수는 실망하고 말았다. 선수들이 감독·코치와 맞담배질을 하고 있었고, 경기가 없는 날은 술에 절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주 당국에 감독 수락 조건을 제시했다.

“팀을 맡기려면 내가 하자는 대로 해야 한다, 2부로 떨어지더라도 성적을 두고 시비하지 말라, 선수 기용이나 관리에 대해서도 일절 간섭하지 말라.”

그런 조건이었다. 그는 팀을 맡자 일대 수술을 단행했다.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선수들을 모두 쫓아냈어요. 그러고는 18∼19세의 어린 선수 30명을 모아 기초훈련부터 시키기 시작했어요. 그러자 주변에서 야단이 났지요. 쓸 만한 선수들은 다 내보내고 어린애들을 데리고 무슨 프로축구를 하겠다는 거냐고요. 그래서 나한테 맡긴다고 했으니 이런저런 소리 말라고 했지요.”

뿐만 아니라 20명이 똑같이 나눠 갖던 경기수당도 시합에 나가는 11명에게만 주겠다고 선언했다. 아침운동이라는 걸 모르던 선수들에게 겨울철(11월)인데도 ‘6시 훈련집합’ 명령을 내렸다. 안 나오면 월급에서 벌금을 공제하겠다고 했다.

“돈 벌려면 뛰어라”

선수들이 달라지는 것이 확연하게 보였다. 다음해 봄, 시즌이 시작됐다. 문제는 대부분의 선수들이 시합경험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첫 게임 상대는 최강을 다투던 상해팀이었다. 2:1로 졌다. 그러나 선전이었다.

그런데 이후 5게임을 내리 져버렸다. 연변 자치주 당국은 물론이고 주민들 사이에서도 말이 많았다. “성적 가지고 왈가왈부하지 않기로 했잖으냐. 열여덟 열아홉의 어린 선수들이니 2부로 떨어지더라도 거기서 충실히 기반을 닦은 다음 다시 갑A리그로 올라와야 그 실력이 영원히 가는 거다. 자꾸 간섭하면 그만두겠다”라고 엄포를 놓았다.

6번째 상대는 군(軍) 팀인 ‘8·1隊’였다. 연변팀은 상대의 홈구장인 북경 근방에서 벌인 시합에서 3:0으로 승리했다. 첫 승리였다. 조선족 신문인 ‘종합신문’은 ‘연변팀, 목마름에서 해탈’이라는 큼지막한 제목 아래 ‘눈물겨운 승리’라고 표현했다. 연변 주정부의 정룡철 주장(州長)은 선수단에 축전을 보냈다.

―특별하게 지시한 전술이 있었습니까?

“워낙 개인기가 약하다 보니 그걸 커버하기 위해서 많이 뛰는 축구를 했습니다. 그리고 지역을 좁히는 전술로 나갔어요. 공을 뺏기면 거기서 싸우지 말고 전부 우리 문앞으로 후퇴해서 수비를 강화했다가 상대로부터 공을 빼앗으면 벌떼처럼 달려나가는 거죠.”

97 시즌에 4등을 했다. 꼴찌팀을, 그것도 어린 선수들을 다듬어 4강까지 끌어올리자 전중국이 깜짝 놀랐다. 그것도 ‘한 게임은 져주고’ 거둔 수확이었다. 한 경기를 일부러 져주다니?

“천진팀이었어요. 그 팀은 전년도에 2부로 떨어졌다가 97년도에 1부로 올라온 팀이었거든요. 우리가 막판에 천진팀에 이겨버리면 그 팀은 또다시 2부리그로 추락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단 말입니다. 그런데 예전에 연변팀이 2부 추락 위기에 처했을 때 천진팀이 한 번 져준 적이 있었다는 겁니다. 내가 완강하게 거부했지요. 세상에 경기에서 패하라는 지시를 선수들한테 내리라니 무슨 소리냐, 그런 식으로 나오면 한국으로 돌아가버리겠다고 했지요.”

그러나 이미 주(州)의 수장들 사이에 거래가 이뤄진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아시안 게임에서 중앙정보부의 지시로 져준 후 자괴감으로 축구판을 떠날 생각까지 했던 그로서는 선수들에게 “운동장에 나가서 지고 오라”는 지시를 내릴 수는 없었다. 최감독은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는 방법을 택했다. “좋다. 2진 선수들만 출전시키겠다. 그래도 천진팀이 진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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