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신문화연구원(원장 한상진)이 편찬 준비 8년, 출판 작업 4년 만에 만들어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본책 25권, 부록 3권). 연인원 7000명의 각계 전문분야 학자들이 동원되고 전문가들로 구성된 각종 편찬관계회의만 2000여 회를 거친 끝에 출판된 이 사전은, ‘조선왕조실록’ 완역 작업 이후 가히 국가 주도의 최대 편찬사업이라 할 만하다.
1980년에 작업을 시작한 이후 91년에 출판된 이 백과사전은 원고지 총 42만 매 분량에, 분류 항목은 6만5000개로 돼 있고, 동원된 자료는 4만 건에 이른다고 한다. 그런데 이 사전에는 최근 사학계와 고고학계에 태풍의 눈으로 떠오른 ‘풍납토성’ 항목이 없다.
풍납토성은 백제 초기 역사를 다시 쓰게 할 정도로 위력적인 역사 유적으로, 이른바 ‘한국판 폼페이 유적’에 비유되는데도 말이다. 현재 풍납토성은 ‘삼국사기’를 집필했던 고려의 김부식조차 그 정확한 위치를 모르겠다고 말했던, 한성백제(BC 18년∼AD 475년)의 도읍터이자 왕성인 ‘하남위례성’일 가능성이 매우 높고 또 토성 유적에서 유력한 증거들도 속출하고 있다.
백과사전 편찬 당시 전문가들이 풍납토성에 대해서는 수록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해서 일부러 뺐거나 아니면 실수로 빠뜨렸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일부러 뺐다는 인상이 짙다. 왜냐하면 이 사전에서 풍납토성이란 항목은 없는 대신 여기서 출토된 대표적인 토기, 이른바 ‘풍납동식토기’는 수록돼 있기 때문이다.
풍납동식토기란 1964년 당시 풍납토성 일대를 시범 발굴한 김원룡교수(서울대 고고미술학·93년 작고)가 그 발굴보고서인 ‘풍납리포함층조사보고’에서 이름붙인 것으로, 지금은 경질무문토기나 중도식토기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경질무문토기란 글자 그대로 단단하면서도 무늬가 없는 토기라는 뜻이며, 중도식토기란 이런 류의 토기가 1970년대에 전면 발굴된 강원도 춘천의 중도라는 지역에서 많이 출토됐기 때문이다.
이 백과사전에는 항목마다 집필자를 꼭 밝히고 있는데, 풍납동식토기는 역시 이 이름을 붙인 김원룡 교수가 집필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니까 이 사전은 풍납토성에서 나온 유물은 표제항목에 실어놓으면서도, 어찌된 일인지 토기가 출토된 풍납토성은 삭제하고 있는 것이다.
풍납토성은 그렇다 치자. 풍납토성과 함께 초기백제(한성 백제)의 왕성인 하남위례성의 유력한 후보로 꼽히던 몽촌토성과 경기 하남 이성산성은 어떨까? 둘 다 어엿하게 사전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몽촌토성 집필자는 백제 성곽 연구의 권위자로 당시 충남대에 재직하고 있던 성주탁 교수이고, 하남 이성산성 집필자는 1986년 이후 이곳 발굴을 도맡아온 한양대박물관장 김병모 교수(현 한국전통문화학교장)다. 그런데 몽촌토성에 대한 성주탁 교수의 설명에서 다음 구절이 주목을 끈다.
“특히 (몽촌토성과) 이웃하고 있는 풍납동 토성은 서기 1세기 경의 유적으로 추정되고 있어서 양쪽 성(풍납과 몽촌)이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성을 축조할 당시 지표면에서 주로 회백색연질토기 등 삼국시대 전기(前期) 유물이 출토될 뿐 삼국시대 후기나 고려시대의 것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이 토성은 백제시대 초기의 건국지로 알려져 있는 위례성으로 추정되고 있어 주목되는 성지(城址)다.”
성교수는 몽촌토성을 얘기하면서 풍납토성의 중요성을 특별히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또 김원룡 교수가 풍납동식토기를 집필한 것으로 보아, 이 백과사전이 편찬될 즈음에도 우리 학계에서는 풍납토성을 나름대로 주목하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하겠다.
홍수가 발굴한 풍납토성
그런데도 풍납토성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게재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풍납토성이 세상에 어떻게 알려졌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풍납토성을 처음 발굴한 것은 사람이 아니다. 1925년 한반도 중부를 강타한 ‘을축년 대홍수’가 지나간 다음 풍납토성 남쪽 성벽 가까운 곳에서 한 항아리가 모양을 드러냈다. 그 안에는 청동초두 2개가 나란히 들어 있었다. 초두란 주전자 비슷하게 생긴 것으로, 주로 제사 같은 신성한 의식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물건이다. 실제 요리에 사용됐을 수도 있겠으나 당시 상당한 고위층이 사용한 물건임에는 틀림없다.
이곳에서는 청동초두 뿐만 아니라 과대금구와 유리구슬을 비롯한 중요 유물이 함께 확인되면서 아유카이(鮎貝房之進) 같은 일부 일본학자는 1934년에 이곳이 바로 ‘삼국사기’가 말한 하남위례성이라고 지목하기도 했다. 어떻든 이곳의 중요성이 대두됨에 따라 풍납토성은 1936년 고적으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풍납토성은 곧 잊혀졌다. 왜냐하면 1939년 역사학자 이병도(1989년 작고)가 ‘진단학보’에 풍납토성이 하남위례성이라는 아유카이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백제가 초기에 고구려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쌓은 사성(蛇城)이라고 주장했고 이것이 이후 통설로 굳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풍납토성=사성’이라는 이병도 학설이 근거가 박약한 언어학적 지식을 기초로 했다는 점이다. 이병도는 하남 춘궁리 일대를 하남위례성 터로 비정하면서, 풍납(風納)의 경우 그 지명을 순 우리말로 풀면 ‘바람드리’가 되니 사성(蛇城)의 순 우리말인 배암드리와 비슷한 고로 풍납토성이 곧 사성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런 주장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첫째, 사성이 백제 당시에 배암드리라 불렸다는 증거가 있어야 하고 둘째, 풍납 또한 백제 당시 지명이 풍납 혹은 바람드리였다는 증거가 있어야 하며 셋째, 설사 그렇다 해도 배암드리와 바람드리가 같은 말이라는 증거가 있어야 하는데, 이를 만족시키는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이는 철저한 문헌고증과 비판을 트레이드 마크로 내세웠던 이병도식의 실증주의가 얼마나 겉다르고 속다른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그런데도 풍납토성은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사성으로 굳어졌다.
을축년 대홍수 후 풍납토성은 한동안 암흑기에 놓여 있었다. 그러다가 1964년 여름, 당시만 해도 민가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황무지 같은 풍납토성에 삽과 괭이를 걸머진 대학생들이 무리지어 나타났다. 학생들은 교수의 지시에 따라 풍납토성 안쪽 이곳저곳 몇 군데를 골라 땅을 파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들은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3학년 재학생들이었고, 학생들을 지도한 선생은 김원룡 교수였다. 서울대에 고고인류학과가 생긴 때가 1961년이고 국내 최초로 이 학과 창설을 주도한 이가 김교수인데, 그는 나중에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내는 등 우리나라 고고학계의 태두로 꼽히는 인물이다.
여하간 서울대 학생들이 풍납토성 발굴에 들어갔던 1964년은 고고인류학과 창설 4년째로 첫 번째 졸업생 배출을 앞두고 있던 때였다. 당시 이 학과 3학년 과목 중에 고고학 야외실습이란 게 있었다. 명색이 고고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인데 발굴 한번 못해 보고 대학을 졸업할 수는 없는 일이라 생각했던지 김교수는 이런 과목을 개설했던 것이다. 그리고 고고학 야외 실습장소로 택한 곳이 바로 풍납토성이었다. 심하게 표현하자면 풍납토성은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재학생들의 실습 도구였던 셈이다.
그러니 당시 발굴은 지금 기준으로 보면 발굴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성인 몇 명이 들어가 설 수 있을 만한 구덩이 몇 개를 파고는 어떤 유물이 나오는지를 확인하는 수준에 그쳤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형편없는 발굴이었지만 이것을 토대로 한 김원룡 교수의 풍납토성에 대한 평가는 충격적이라 할 만했다. 이 시범발굴에 대한 보고서는 1967년 서울대박물관 학술총서 제3권으로 나왔는데, 김교수는 “풍납토성은 하남위례성과 거의 동시인 기원후 1세기에 축조돼 한성백제가 멸망한 5세기쯤까지 사용된 성”이라는 견해를 내놓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김교수는 이 보고서를 낸 같은 해에 “풍납토성 발굴로 보아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믿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는 요지가 담긴 기념비적인 논문인 ‘삼국시대의 개시에 관한 일고찰’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학맥이 없어 버림받아
그런데 김교수는 어찌된 셈인지 풍납토성 발굴 보고서에서 풍납토성이 사성이라는 이병도의 주장을 지지하는, 이상한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김교수가 ‘삼국사기’ 초기 기록이 믿을 만하고 풍납토성이 기원후 1세기경에 축조됐다고 판단했다면, 풍납토성은 결코 사성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성’이라는 단어는 백제본기에서 딱 두 군데 등장한다. 그 첫째가 책계왕 원년, 즉 서기 286년에 “고구려 침입에 대비해 아차성과 사성을 쌓았다”는 대목이요, 둘째가 한성백제가 멸망하던 개로왕 21년(475) “사성 동쪽에서 숭산(崇山) 북쪽까지 강을 따라 둑을 쌓았다”는 대목이 바로 그것이다. 이로 보아 사성은 286년에 처음 축조된 것이다.
김교수가 ‘삼국사기’ 기록을 신뢰하고 풍납토성이 기원후 1세기경에 축조됐다고 믿었다면 3세기 후반에야 축조된 사성이 풍납토성일 수는 없는 법이다. 이렇게 이병도나 김원룡은 약속이나 한 듯이 그 근거를 잘못 들이대고 말았다.
그런데 참말로 어이가 없는 점은 풍납토성이 사성이라면서 북치고 장구친 이병도와 김원룡의 주장이, 명백한 결함이 있는데도 얼마전까지 우리 학계의 많은 사람들이 믿고 따르는 통설이 되다시피 했다는 점이다.
백제의 시조 온조가 십제(十濟)라는 이름으로 한성(漢城)에 도읍했던 시기의 왕궁인 하남위례성 후보지 중 하나로 꼽히는 풍납토성은 왜 이렇게 형편없는 대접을 받았을까?
기자는 몽촌토성이나 이성산성의 경우와는 달리 풍납토성은 이곳 발굴을 독식하거나 주도한 특정 학맥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몽촌토성의 경우 이곳을 일찌감치 백제왕성으로 지목한 김원룡 교수로 대표되는 서울대라는 든든한 백이 있었고, 이성산성도 한양대박물관이 10여년 째 발굴을 전담하고 있는 데다 이곳을 관할하고 있는 지방자치단체가 대단한 애정을 쏟고 있는 터였다.
이에 반해 하남위례성의 후보지로 가장 말석에 자리잡고 있던 풍납토성은 처음부터 버려진 땅이었다. 몽촌토성 왕성론을 주장하는 김원룡 교수가 이곳을 팠지만 야외실습 대상일 뿐이었고 애초부터 ‘사성’으로 굳어져 있었다.
그래서 풍납토성이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실리지 못했다 해서 항의하는 학자도 단체도 없었다. 학맥이 없다는 것, 이것이 어쩌면 풍납토성의 가장 큰 비극이었던 셈이다. 이렇게 버림당한 풍납토성에는 이후 수많은 건물과 사람들이 들어찼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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