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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폼페이’ 풍납토성의 감춰진 진실

  • 김태식 연합뉴스 기자

‘한국판 폼페이’ 풍납토성의 감춰진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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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납토성 발굴성과에 대한 설명회는 그 해 9월13일에 있었다. 언론과 관련 학자들에게 돌린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보도자료에는 “이로써 풍납토성이 하남위례성일 가능성이 커졌다”는 문구가 들어 있었다. 그렇지만 보도자료를 손질하는 과정에 이 구절은 빠졌다. 하남위례성이라는 단어를 뺀 주인공은 조유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그는 1971년 무령왕릉 발굴 이후 굵직굵직한 국가 주도 발굴 작업은 거의 모두 지켜본 문화재연구소의 산증인과 같은 사람이다.

성벽발굴 의미를 모를 리 없던 그가 보도자료를 손질하던 마지막 순간에 하남위례성이라는 문구를 뺀 이유에 대해 스스로는 “국립문화재연구소가 하남위례성이라고 발표해버리면 자칫 이것이 국가의 공식 의견인 것처럼 오해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도 성벽발굴로 볼 때 풍납토성이 하남위례성이 될 개연성이 가장 큰 곳임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다만 여러 가지 영향을 우려해 말을 극도로 아낄 뿐이었다.

어떻든 발굴단은 풍납토성의 성벽이 여기서 출토되는 경질무문토기 같은 유물들로 보아 이르면 기원 전후에 축조에 들어가 늦어도 기원후 200년 쯤에 끝났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비록 보도자료에 하남위례성이라는 말이 빠졌지만 풍납토성 축조시기에 대한 이런 발표는 폭탄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풍납토성이 하남위례성이건 아닌건 상관없이, 이 성을 쌓은 주인공인 백제는 늦춰 잡아도 200년쯤에는 이미 확실한 고대국가체제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원후 200년 경에 폭 40m, 높이가 적어도 9m 이상 되는 토성을 3.5㎞나 쌓아 올리기 위해서는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며 또 이런 노동력을 지속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실체가 있어야 한다.



발굴단의 이런 발표는 지금까지 한국고대사 연구를 뿌리째 흔드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한국고대사학자 대다수는 백제가 풍납토성 같은 거대한 성을 쌓을 수 있는 고대국가가 된 것은 3세기 중·후반 고이왕대 이후라고 보고, 그 이전 시기는 ‘원삼국’이라는 이상한 용어로 백제와는 구별되는 다른 사회로 설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발굴단 발표는 아울러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백제가 기원전을 18년 만주지방에서 내려온 부여족 갈래인 온조집단에 의해 건국됐고, 이미 기원을 전후한 즈음에 한반도 중남부 일대를 장악한 절대왕권국가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백제가 늦어도 서기 200년 쯤에 풍납토성을 축조했다는 것은 이런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9월13일 개최한 성벽발굴 현장설명회에서 조유전 문화재연구소장이 하남위례성이라는 문구를 빼는 대신에 한국고대사학계에서 ‘삼국사기’ 초기기록 신봉론자로 꼽히는 이종욱 교수(서강대)를 초청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교수는 ‘삼국사기’를 초기 기록까지 대폭 연구 자료로 수용해, 백제는 고이왕대 훨씬 이전에 강력한 국가가 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날 현장 설명회에는 몇몇 원로 사학자와 원로 고고학자도 참가했다. 기자가 파악한 대로라면 이들 원로학자들은 고이왕 이전의 백제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거나, 있었다 해도 한강 유역에서 조그마한 땅덩어리를 차지한 동네 국가였다고 보던 사람들이다. 그런 그들이 성벽 발굴 현장을 둘러보면서 이구동성으로 “이제는 ‘삼국사기’를 믿을 수밖에 없겠는데…”라고 하는 말을 분명히 들었다.

물론 박순발 교수(충남대 고고학과)처럼 풍납토성이 늦어도 서기 200년쯤에 축조가 끝났을 것이라는 발표를 공개적으로 부정하면서, 축조시기는 일러야 3세기 초·중반을 넘어가지 못한다고 주장한 이도 있었다.

되살아나는 ‘삼국사기’

풍납토성 축조 연대는 사실 역사 교과서를 다시 쓰게 해야 할 정도로 엄청난 폭발력을 갖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국사교과서나 이기백 교수의 ‘한국사신론’을 통해 배운 백제는 서기 270∼280년쯤 제8대 고이왕대에 들어서서야 국가다운 국가, 이병도식 표현을 빌리자면 고대국가에 들어섰다.

이렇게 고이왕 이전 백제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한국고대사학이나 고고학의 분위기는 일제 식민사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백제가 기원전 18년에 건국했고 한반도 중남부 일대를 장악한 왕권국가였다는 ‘삼국사기’ 기록을 가짜라고 몰아붙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식민사학은 서기 300~400년까지 한반도 중부 및 남부지방은 변변한 국가가 없는 원시미개사회로 설정했다. 왜가 4세기 이후 6세기 즈음까지 한반도 남부 어디엔가에 임나일본부라는 조선총독부 비슷한 기관을 만들어 놓고 한반도를 식민지배했다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이 나오게 된 것도 다 이런 바탕이 있었기 때문이다.

임나일본부설이 말이 되기 위해서는 고대 한반도에는 신라나 백제 같은 강력한 국가가 있어서는 아니 되었다. 신라와 백제가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고대일본이 고대 한반도 남부를 식민지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대신 식민사학자들은 서기 300년 이전 신라와 백제가 한반도 중남부 일대에 득실대던 이른바 삼한 78개 국가 중 사로국(斯盧國)과 백제국(伯濟國)이라는 이름으로 겨우 고개를 내밀고 있는 중국 역사기록 ‘삼국지(三國志)’ 위지 동이전(魏志 東夷傳)을 신주단지 모시듯했다.

이렇게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부정하는 태도는 국내학자들에게도 이어졌던 것이다.

물론 풍납토성이 서기 200년쯤에 축조됐다고 해서 그것을 곧바로 ‘삼국사기’ 초기 기록이 정확하다는 증거로 연결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정말로 풍납토성이 이 때쯤 축조 완료된 것이라면 ‘삼국사기’말고 이런 백제의 힘을 설명할 만한 자료가 달리 없다는 점이다.

기자는, 풍납토성을 취재하는 동안 우리 학자들이 보여준 행태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단행본이건 논문이건 우리 학자들이 쓴 머리말에서 가장 흔히 발견할 수 있는 표현법으로 다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가 “오류가 있을 수 있으므로 동학(同學)들의 지도편달(혹은 질정)을 바란다”는 것이요, 둘째가 “이번 논고(論考)에서 다루지 못한 이 문제는 별도의 자리를 마련하겠다”는 것이요, 셋째가 “좀 더 많은 검토가 필요하다”는 말이 그것이다.

그런데 다른 학문 분야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우리 고고학계나 역사학계에서 이 말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였다가는 낭패 보기 십상이다. 편달, 즉 채찍질을 바란다고 해놓고선 자신의 학설이나 주장을 비판하는 ‘동학’에게는 발끈하다 못해 사이가 틀어지기 일쑤다. 그리고 필자가 약속한 ‘별도의 논고’는 당사자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나오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율배반의 학계

이 두 가지와는 좀 색다르게 “좀 더 많은 검토가 필요하다”는 말은 그동안 자신이 주장하던 학설이나 주장이 틀렸다는 유력한 증거가 나왔을 때 즐겨 쓰곤 한다. 풍납토성이 바로 이런 경우에 해당된다.

앞서 살펴본 대로 지금까지 우리 고고학자나 고대사학자 대다수는 한성백제 시기(BC 18∼AD 475년) 왕궁이 있던 왕성으로 몽촌토성이나 이성산성, 혹은 하남 춘궁리 일대를 지목했다. 특히 몽촌토성은 아주 유력했다. 그러다 97년 이후 풍납토성 일대를 발굴한 결과 이곳이 백제왕성일 수도 있다는 증거들이 속속 튀어나옴으로써 몽촌토성을 백제왕성으로 보던 학자들 중 일부는 공개적이든 비공개적이든 기존 학설을 수정하고 있다.

반면 몽촌토성을 백제왕성으로 주장하는 학설을 못내 포기하기 힘든 몇몇 학자는 “풍납토성이 백제왕성이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이런 반응과 함께 몽촌=백제왕성 학설파 중 나머지 일부는 “백제왕성이 풍납토성이라는 주장은 좀 더 많은 검토가 필요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학자들이 불리할 때 흔히 쓴다고 보기로 든 그 표현법이다.

그런데 문제는 “좀 더 많은 검토가 필요하다”거나 “결정적인 증거” 운운하는 학자들이 스스로 모순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몽촌=백제왕성을 줄기차게 주장했던 한 학자는 최근 개최된 학술대회에서 풍납토성에 대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최근 새로 발굴조사중에 있는 풍납동 토성(풍납토성)은 백제의 왕성이 틀림없다고 하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그런데 풍납동 토성이 백제는 말할 것도 없고 고구려, 신라 어떤 도성지(都城址)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형태를 하고 있어 축성의 주체 세력 및 시기와 관련하여 그 성격에 관한 판단에서 신중을 요한다.”

한마디로 풍납토성이 백제왕성이라는 주장은 좀 더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과연 그 자신이 수십년간 내세운 몽촌=백제왕성이라는 주장은 신중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백제도성에 대해 이 학자가 1987년에 발표한 논문을 보면 몽촌이 백제왕성이라고 지목하면서 다음과 같이 한 말이 눈길을 끈다.

“백제초기 하남위례성으로 비정되고 있는 몽촌토성의 발굴조사에서도 성 안에서는 왕궁지로 추정될 만한 유적이 발견되지 않고, 특수용도의 유적만 확인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역시 성 남쪽 기슭에 왕궁을 중심으로 한 시설물이 배치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말로 보아 이 학자 또한 몽촌=백제왕성이라는 주장을 고고학적인 증거가 있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추정했을 뿐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명백한 자기모순이다. 풍납토성이 백제왕성이라는 판단을 내리기에는 신중해야 한다면서도 정작 자신의 지론인 몽촌=백제왕성이라는 주장은 신중치 못했음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풍납토성에 대한 이런 반응과는 별도로 풍납토성이 백제왕성이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어디 있느냐” 하는 말 속에 담긴 모순 또한 따로 짚어 보아야 한다. 과연 이런 주장을 하는 학자들이 말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내가 바로 하남위례성이오” 하는 따위의 금석문 출현을 의미하는 것인지 확실치 않지만 어떻든 이런 논리대로라면 경주나 부여, 공주도 신라와 백제의 수도가 결코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경주나 부여, 공주 또한 그렇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단 한 군데도 없다. 그러나 결정적인 증거가 없음에도 경주나 부여, 공주가 신라와 백제의 수도였음을 부인하는 고고학자나 역사학자는 적어도 강단에서는 단 한 명도 없다.

한편 문화재연구소의 성벽 발굴이 끝날 즈음 풍납토성 한 가운데쯤 되는 경당연립재건축아파트 건축 예정지에 한신대박물관이 발굴 작업에 들어갔다. 9∼19층짜리 고층아파트 221세대가 들어설 이 부지는 공사면적이 2300평 가량 되지만 이 중 1000평 가량만 발굴됐다.

한국의 폼페이와 트로이

사실 풍납토성을 보존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게 한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발굴 성과 만큼이나 탈도 많았다. 오죽했으면 보존을 우려한 재건축아파트 조합원들이 굴삭기를 동원해 발굴현장을 밀어버렸을까?

고고학자들에게 1000평이라는 면적은 사실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데 풍납토성은 달랐다. 97년 문화재연구소의 현대아파트 건축예정지 발굴에서 밝혀졌듯이, 이곳 또한 유물의 지뢰밭이라 할 만큼 수많은 유적과 유물이 묻혀 있었다.

이곳은 또한 풍납토성이 한국의 폼페이 유적이니, 한국의 트로이니 하는 유명한 말을 낳기도 했다. 폼페이는 한신대발굴단 일원인 권오영 교수가 풍납토성을 비유한 말이고, 트로이는 배기동 교수(한양대 고고인류학과)가 풍납토성 보존을 촉구하는 한 신문 기고문을 통해 밝힌 말이다. 풍납토성을 비유하는 폼페이니 트로이니 하는 말들이 풍납토성 보존에 큰 몫을 한 것만은 분명하다.

이곳은 우여곡절 끝에 일단 사적지정이 예고돼 보존키로 결정된 지역이지만 아직 발굴이 완료되지는 않고 있다. 어떻든 발굴 결과 지금까지 이곳에서는 200여 기의 유적이 확인되고 450상자 분량의 각종 초기백제 유물이 출토됐다.

이중 특히 관심을 끈 것은 동서쪽으로 16m가 드러나고 남북쪽으로 현재까지 14m가 확인된 대형 건물터와 최대 길이 9m, 깊이 2.5m 가량이나 되는 대형 구덩이 유적이다.

커다란 돌을 초석 비슷하게 깔아놓은 이 대형 건물터는 규모가 엄청나거니와 구조로 보아 제사 터 같은 공공건물 시설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나오고 있으며, 구덩이 유적은 쓰레기장이었던 듯 토기 같은 각종 생활용품이 쏟아져 나왔다.

구덩이 출토 유물 중에는 ‘대부(大夫)’ 및 ‘정(井)’이라는 글자가 적힌 토기가 있었고, 아래턱만 남은 말뼈 14마리 분이 확인됐다. 이런 유물들이 풍납토성의 성격을 결정하는데 어떤 영향을 끼칠 지 아직은 속단할 수 없다. 다만 출토 유물이나 유적으로 보아 풍납토성이 백제 당시에 대단한 인구 밀집지역이었고 대단히 중요한 성이었음에는 틀림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해준 것만은 분명했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경당연립재건축아파트 예정지는 비록 재건축조합원들에 의해 일부가 파괴되기는 했지만 역설적으로 이를 통해 풍납토성이 보존되는 길을 열었다는데 의미가 있다 하겠다.

지난 5월13일 오전에 발생한 문화유적 훼손이라는 사건은 3일 만인 5월16일 국무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풍납토성이 정말로 하남위례성이라면 돈은 얼마가 들든지 이를 보존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하게 만들었고, 그 후속조치로 문화재위원회가 5월26일 이곳을 사적으로 지정한다는 결정까지 하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실제로 풍납토성이 왕성이냐 아니냐, 혹은 그것이 언제 누구에 의해 축조되었느냐 하는 것보다 더욱 시급한 것이 보존이라 할 수 있다. 풍납토성은 학계에서 팽개치는 바람에 지금은 22만6000평이나 되는 토성 안쪽에 아파트 41개동을 비롯해 각종 고층빌딩이 들어서 있으며 이곳 거주 인구만도 4만명을 헤아린다. 이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다.

마지막으로 경당연립아파트 건축예정지가 촉발한 풍납토성 보존운동에서 꼭 지적할 것은 이것을 주도한 세력이 학계가 아니라 언론과 시민단체였다는 점이다. 이 운동에 당연히 앞장섰어야 할 학계는 빠져 있다시피 했다. 이는 우리 학계가 두고두고 반성해야 할 대목이다.

신동아 2000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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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식 연합뉴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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