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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우리 페이스에 말리겠다
북한은 변하지 않을 수 없다. 너무 고립돼 있다. 결과적으로 미국한테 잘못 보이면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린 것 같다.
김정일은 인간미와 감성이 풍부해 보였다. 가식과 쇼맨십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착한 사람 같았다. 자라나면서 아버지에게 단단히 수업을 받아서인지 상식도 풍부하고 남쪽 사정을 아주 잘 알았다. 우리 테이블 사람들에게 건배를 제의하면서 “YTN 아무개 기자는 참 똑똑하다. 아주 잘하더라”는 말까지 했다. 기자 이름까지 기억하는 걸 보고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위원장이 포도주를 들고 테이블을 도는데 인간적인 면모가 보였다. 사장들에게 “오늘 잘 대접했으니, 내일 신문 한번 봅시다”라는 말도 했다.
당초 김정일 위원장과 만나는 것은 예정에 없었다. 그런데 ‘한겨레’ 최학래 사장이 북측 선전선동부장에게 만나게 해달라고 날마다 매달렸다. 나중에는 최사장이 “정말 못 만나게 할 거냐. 일정을 조정해달라”며 말싸움까지 했다. 그러니까 선전선동부장이 “여러분들이 김위원장의 일정에 맞춰야지, 어떻게 김위원장이 여러분들 일정에 맞추느냐”고 말했다. 헤드테이블에서 최학래 사장과 KBS 박권상 사장이 김정일 위원장 앞에서 팔짱을 끼고 웃으면서 얘기하는 걸 보고 북측 사람들이 상당히 놀란 것 같다.
김위원장이 지나치게 서두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러다간 북한이 우리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이 우리쪽 페이스에 말릴 수도 있겠다.
전반적으로 북한은 너무 못산다는 생각이다. 대동강 부근 150m 높이의 주체탑에서는 평양시내가 다 보인다. 평양은 아주 잘 꾸며진 계획도시였다. 하지만 외곽으로 가니까 페인트를 칠한 빌딩을 찾을 수가 없었다. 거의가 60년대에 지어진 건물이어서 넘어질 것만 같았다. 평양시내 주변에는 평야가 많았다. 옥수수를 많이 심었는데 황토가 대부분이어서 잘 안된다고 들었다. 옥수수밭 주변에는 원두막이 있었다. 그곳은 옥수수를 누가 훔쳐갈까봐 감시하는 곳처럼 보였는데 수행원은 “사람들이 일하다가 쉬는 곳”이라고 말했다. 묘향산으로 가는 길은 썰렁했다. 2시간 동안 겨우 7대의 차가 지나갔을 뿐이다. 북한 사람들은 주로 걸어다닌다고 했다.
우리는 대동강 인근의 봉화 초대소에 묵었다. 그곳은 예전에 봉화불을 올리던 장소였는데 김일성 주석의 아버지가 살았다고 했다. 백두산 가는 길에 있는 삼지연 초대소에도 갔는데 아주 고급이었다. 돈이 없어서 페인트칠은 못했지만 깨끗하게 꾸며놓았다.
두 사람에 한 대씩 승용차가 배정돼서 그걸 타고 다녔다. 자동차는 10년도 넘은 것 같았다. 나와 함께 다닌 사람은 신문사 부장인데 김일성대 출신이다. 하지만 매우 경직된 사람처럼 느껴졌다. 신문사에 갔을 때 2층까지만 보여주고 그냥 가자고 했다. 그래서 내가 “당신이 일하는 방을 보자”고 하니까 “시간이 없다”며 거절했다. 숙소에서 내방으로 오라고 해도 안된다고 하고, 사는 집을 구경하자고 해도 고개를 저었다.
내가 “세상은 정말 빠르게 변한다”고 하니까 그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며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기사 쓰는 것으로 안되니까 영어공부 열심히 하라”고 얘기해주었다. 그는 군대에서 8년 동안 복무하고 기자가 되었는데 한달에 70불을 받고 부인은 유치원 선생인데 45불을 받는다고 했다.
남쪽의 김정일신드롬도 알고 있어
북한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많이 변했다.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북한이 주체사상에 입각해 변화를 거부한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그런데 높은 사람부터 낮은 사람까지 골고루 만나보니까 정말 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임있는 사람들이 북한의 한계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을 보고 새삼 놀랐다. 나는 사실 그들이 정치적으로 김일성 주석의 유훈통치를 계속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니까 김정일 위원장의 카리스카가 이미 김일성 주석의 후광을 넘어선 것 같다. 김위원장은 북한의 당·정·군을 확고하게 장악하고 있는 것 같았다.
북한 사람들은 자주적인 의식이 강해보였다. 개방을 하되 중국식 개방은 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확고하게 갖고 있었다. 중국이 개방을 해서 부익부빈익빈이 더욱 심해졌는데 그건 사회주의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그들은 남쪽을 이길 수도, 먹을 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남쪽이 잘산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들은 자존심을 중시하고 있었다. 남쪽보다 가난하다고 생각하지만 체제에 대한 자부심은 훨씬 강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책을 많이 봤는지 아는 게 많았다. 순간 판단력도 뛰어났고 임기응변에도 능했다. 자기 나름의 논리가 있어서 어떤 질문을 던져도 막힘이 없었다. KBS와의 악연에 대해 “본의 아니게 KBS를 욕할 때가 있었다. 본의가 아니라는 걸 이해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참 절묘하게 피해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유머감각도 뛰어났다. 우리중 한사람이 포도주를 조금 따라주니까 김위원장이 “이게 인사입니까”라고 말했다. 이왕 따를 거면 가득 따르라는 뜻이었다. 제주도 사람에게는 “한라산에 가야지요”라고 말하고, 전주 사람에게는 “시조 묘에 참배하겠다”는 말도 했다. 그래서 ‘아무나 북쪽의 지도자가 되는 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정일 위원장과 김대중 대통령이 좋은 파트너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위원장은 판단력도 빠르고 어떻게 해야 북한이 살아갈 수 있을지를 아는 것 같았다. 김정일 체제가 안정적으로 가면 남북관계도 좋아질 것으로 생각된다. 혹시 군부에서 누가 나타난다면 복잡해질 것이다. 김위원장 주변에는 젊은 친구들이 많은 것 같았다. 누가 “젊은 사람들이 큰 일을 하고 있습니다”고 하니까 한 친구가 “남쪽에서도 386세대가 국회의원을 하고 있으니, 북쪽에서도 젊은 세대가 열심히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모든 것이 김위원장으로 통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위원장은 “내가 결심하면 내일이라도 미국과 수교할 수 있다”는 말까지 했다. 수행원과 안내원은 꼬박꼬박 ‘위대한 영도자’ ‘경애하는 김정일 장군’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안내원에게 “결혼은 언제 할 거냐”고 물으니까 “당과 김정일 장군을 위해서 몇 년 더 일하고 천천히 하겠다”고 대답했다. 북쪽 사람들은 남쪽에서 이른바 ‘김정일 신드롬‘이 생겼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헤어스타일과 선그라스가 유행한다는 얘기도 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 물었더니 인기가 괜찮다고 했다. 안내원과 수행원은 김대통령을 언급할 때 꼭 ‘각하’라는 존칭을 붙였다.
백두산으로 일출을 보러 갔을 때다. 천지에서 보트를 탄 사람도 있고 산천어 회를 먹은 사람도 있다. 일부 사장들은 안내원들의 손을 잡고 ‘우리의 소원’을 합창했다.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은 ‘내곁에 있어주’를 불렀다.
북쪽 사람들은 6·16 공동선언을 남북통일의 ‘성전’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대로 실천하면 통일이 된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