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능성 화장품으로 설립 5년 만에 업계에서 탄탄한 기반을 다진 한독화장품이 세계 발모제 시장 석권을 다짐하고 나섰다. ‘스펠라 707’이 그 주인공. “대머리들의 마음고생은 이제 끝”이라고 자신한다.》
발모제 시장 개척을 위해 더위도 잊고 미국, 중국 등지로 뛰어다니다 이제 막 돌아왔다는 한독화장품 박효석(朴孝石·61) 사장은 “스펠라 707이 탈모로 고민하는 이들의 가슴앓이를 확실하게 해결해줄 것”이라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국내의 대머리 인구는 전체 인구의 12%에 이르고, 성인 남성 가운데 20%가 대머리인 것으로 추정된다. 500만∼600만 명이 탈모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얘기. 여성 탈모자도 80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이런 사정을 반영하듯 국내 발모제 시장은 2000억 원대 규모를 넘어섰는데, 최근 들어 20∼30대 남성 중에 대머리가 크게 늘어나면서 시장 규모가 곧 두 배로 성장할 전망이다. 국경을 넘어 전 세계의 대머리 인구를 생각하면 발모제 시장의 성장세는 어마어마하다.
그 동안 이 황금 시장을 향해 군침을 흘리며 세계 각지의 유명, 무명 제약회사와 화장품 회사들이 수많은 발모제를 개발했지만, 아직까지 대머리들의 마음고생을 속시원하게 없애준 약은 나오지 않았다. 박효석 사장이 도전장을 내민 것은 이 때문이다.
스펠라 707은 행인 도인 당귀 하수오 황기 감초 인삼 동충하초 등 12가지 전통 한방 생약으로 만들었는데, 97년 이후 각종 탈모증 환자 5000여 명을 대상으로 임상실험을 거쳐 개발했다고 한다. 실험 결과 6개월 이상 사용한 사람에게서 90% 이상의 탈모 억제와 발모효과가 나타났다고 한다.
박사장은 발모제의 효능에 대한 소비자들의 불신을 고려, 그 동안 이 약으로 치료받은 환자들의 신상을 정확하게 밝히도록 했다. 또한 치료과정을 매달 사진과 비디오로 촬영해 환자 자신은 물론, 다른 탈모증 환자들도 효능을 지켜볼 수 있게 했다.
피실험자 신상 공개
“발모제 갖고 사기 치는 사람이 많다 보니 본인이 직접 사용해 보지 않으면 효능을 믿으려 들지 않아요. 하다못해 주위 사람들이라도 써보고 권해야 관심을 갖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진으로 확실하게 보여주니 안 믿을 수가 있나요. 지금은 사용해본 사람들이 소문을 내 스스로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요.”
서울 봉천동 한독화장품 본사 3층에 있는 ‘스펠라랜드’의 벽면은 이런 자료들이 빽빽이 붙어 있었다. 환자들의 치료과정을 보면 대개 약물치료를 시작한 지 3개월 정도가 지나면 가느다란 모발이 생겨나다가 6개월쯤 되면 눈에 띄게 모발이 굵어지고 수도 많아졌다. 1년 가량 치료받은 사람은 거의 정상인에 가깝게 머리가 검게 자랐다. 모든 대머리들에게 사진에서와 같은 효과를 나타낸다면 스펠라 707이 ‘발모제 시장의 비아그라’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 같아 보였다.
지금까지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은 탈모 치료약은 미국에서 개발한 ‘미녹시딜’과 ‘프로페치아’ 단 두 가지뿐이다. 미녹시딜은 원래 고혈압 치료제로 개발됐는데, 고혈압 치료과정에 이 성분의 부작용으로 환자의 몸에 털이 나자 아예 대머리 치료제로 다시 개발한 것이다. 전립선 비대증 치료제였던 프로페치아도 치료를 받던 환자에게서 털이 나는 것을 보고 발모제로 개발한 것이다.
그러나 스펠라 707은 처음부터 발모제로 개발됐고, 이런 약품들보다 발모율도 훨씬 높다는 것. 더욱이 순수한 생약 추출물로 만들어져 부작용이 없기 때문에 다른 발모제들과는 달리 여성이나 어린이들도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미녹시딜과 프로페치아의 경우 약을 사용하는 동안에는 어느 정도 효과가 있지만, 치료를 중단하면 2개월 안에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가는 반면, 스펠라 707은 일단 모근이 형성돼 머리카락이 나기 시작하면 치료를 중단해도 그 자리에서는 계속 머리카락이 자란다고 한다.
스펠라 707은 바르는 발모제, 탈모 방지 및 비듬 제거용 헤어샴푸, 그리고 건강보조식품 등 3종류가 한 세트를 구성하는데, 확실한 발모 효과를 위해선 6개월∼1년 정도 사용해야 한다고.
약학박사인 박효석 사장의 10여 년에 걸친 연구의 결실인 스펠라 707은 ‘발모촉진용 외용액제’로 국내 특허등록을 마쳤다. 이어 일본에서도 올해 초부터 준텐도대학 부속병원 등 유수한 종합병원에서 임상실험을 실시한 결과 90% 이상의 환자에게서 탈모 억제와 발모 촉진 효과가 나타나 후생성의 인정을 받았다.
‘스펠라랜드’ 통해 모발 관리
이에 따라 일본에 ‘스펠라 저팬’이라는 회사가 만들어졌고. 8월8일 한독화장품과 수출계약 조인식을 가졌다. 한독화장품은 2년 동안 1200만 달러어치의 스펠라 707을 수출하기로 하고 이날 1차분으로 300만 달러어치를 선적했다. 일본의 경우 우리보다 탈모증 환자 수가 더 많은데다, 탈모증에 대한 문제의식도 높아 업계에서는 스펠라 707의 일본 시장 판도에 주목하고 있다. 스펠라 707은 현재 중국 베이징대학에서도 임상실험중이다.
스펠라 707은 지난해 11월부터 시판됐는데, 9개월 만에 전국에 30여 개의 지역점을 두게 됐다. 제품 판매는 이들 지역점을 통해서만 이뤄진다. 유통망을 단일화 한 것은 치료효과를 높여 신뢰를 두텁게 하기 위해서다. 박사장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성질이 급해서 발모제도 몇 번 발라보고 효과가 금방 나타나지 않으면 사용을 중단한다”며 “발모제는 오랜 기간 꾸준히 사용하면서 모발을 관리해야 효과를 볼 수 있기 때문에 탈모 전문관리센터인 스펠라랜드를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스펠라랜드는 약사와 의사를 위주로 프랜차이즈를 구성해 환자들에게 전문적인 치료기회를 제공한다. 이곳에서는 전자현미경으로 환자의 두피상태를 조사한 후 먼저 두피를 청결하게 하고 영양분을 공급한다. 그런 다음 탈모 유형에 따라 치료에 들어간다. 그간 스펠라 707로 효과를 본 사람들이 동호회를 만들기도 했는데, 회원 수가 5000여 명에 달한다고 한다.
박효석 사장이 화장품 사업에 뛰어든 것은 95년. 이제 겨우 5년밖에 되지 않았으나 매출이 100억 원대에 이르는 탄탄한 중견 기업으로 자리 잡았다. 그 동안 인천 남동공장에서 제품을 생산해오다 지난해 11월 경기도 화성에 1만 평 규모의 첨단 공장을 완공해 지금은 이곳에서 제품을 만들고 있다. 남들이 공장문을 닫던 IMF 구제금융 시기에 이 회사는 새 공장을 짓기 시작했던 것.
한독화장품은 120여 명의 본사 직원과 2500여 명의 방문판매 사원들이 이끌고 있다. 모든 제품은 방문판매 사원들을 통해서만 판매한다. 대부분의 화장품 회사들이 대형 할인매장으로 납품하고 있는 요즘에도 이 회사는 옛날 식 방문판매를 고집한다. 고객에게 적시에 가장 효과적인 제품을 올바른 정보와 함께 공급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화장품 원료로는 황금(黃芩) 감초 매실 의이인 천화분 난초 은행잎 올리브 맥아유 알로에 등 한방 생약과 자연 추출물을 사용하는데, 이 때문에 한독화장품 제품은 피부 보호제인 것은 물론, 피부를 재생시키기까지 하는 기능성 화장품(화장품과 의약품의 중간 형태)이다.
주력 생산 제품은 스킨, 로션, 에센스, 영양크림, 마사지 크림, 클렌징 크림 등 6가지 기초 화장품이다. 이들 제품은 연령에 따라 3가지 타입으로 나뉜다. 여드름이 많은 10대를 위한 ‘달란트’, 여드름과 민감성 피부를 가진 20대용 ‘리브가’, 피부가 건조해진 40∼50대를 위한 ‘스펠라’가 그것. 이중 스펠라는 기능성이 가장 강화된 제품으로 기미 주근깨 잔주름 예방효과가 크다고 한다.
이 밖에도 각종 색조 화장품과 여드름 전문 화장품(토닉 9011, 토닉 9012, 콘디셔너), 특수화장품(나이트 크림, 스펠라 아이젤, 스펠라 썬크림), 목욕제품(한방비누, 샤워젤, 바디 마사지, 정금치약), 피부기능 활성제품, 건강보조식품(스펠라 라파) 등을 생산하며, 남성용 화장품도 연령층에 따라 다른 종류의 스킨과 로션을 만들고 있다. 현재 생산제품은 총 70여 종.
한독 제품은 기능성 화장품이다 보니 일반 화장품보다 가격이 두 배 정도 비싸다. 그래도 한 번 제품을 써본 소비자들은 계속 찾는다고 한다. 한 방문판매 사원은 “써본 사람들의 ‘자발적 광고’ 덕분에 구매자가 계속 늘고 있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물건을 사용해본 사람들이 다시 그 물건을 찾는다는 것은 품질에서는 일단 인정을 받았다는 얘기.
그러나 한독화장품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더 나은 제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부설 연구소를 두고 신제품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박효석 사장은 전남 해남의 ‘꽃이 만발한다’는 화산면에서 4남2녀중 셋째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5학년 때 6·25가 터졌고,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아버지는 경찰관이던 삼촌 때문에 인민군들에게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병을 얻어 세상을 떴다.
그는 넉넉지 못한 살림에도 대학에 진학했다. 의과대학 진학을 꿈꿨지만, 가정 형편을 생각해 졸업하자 마자 돈을 벌 수 있는 약학대학을 지원했다. 65년 조선대 약학과를 졸업한 그는 계획대로 졸업 직후 광주 월산동에 약국을 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약국을 운영한다는 것은 단조로운 일상의 반복이었고, 수입도 생각했던 것처럼 대단치 않았다.
1년 남짓 지난 후 그는 넓은 바닥에서 제대로 한번 해보자는 생각에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운동장 근처에 자그마한 약국을 열었다. 그러던 어느날 종로를 걷다가 눈이 번쩍 뜨이는 광경을 목격했다. 대형 약국들이 즐비하게 서 있는데, 약국마다 손님들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바로 저거다’ 싶었다.
천당에서 지옥으로
박사장은 당장 그날부터 대형 약국을 차릴 계획을 세우고, 약 공급업자들로부터 이런 약국을 내려면 돈이 얼마나 들고, 마진은 얼마나 되는지, 운영상태는 어떤지 하는 정보를 하나하나 입수했다. 큰 약국을 차릴 요량으로 열심히 돈을 모아 2년 만에 꿈을 이뤘다. 약사를 7명 고용해 종로5가에 ‘성실약국’이라는 간판을 내건 것. 예상대로 손님들이 줄을 이었다.
“말 그대로 돈을 쓸어 담았습니다. 하루 장사를 마치고 나면 돈이 얼마나 많은지 새벽까지 돈을 세어도 다 못 셀 정도였어요. 벌긴 많이 벌었지만,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일만 하니까 돈을 쓸 시간이 없었지요.”
돈이 주체할 수 없이 들어오자 사채놀이를 시작했다. 선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장사는 약 파는 장사보다 훨씬 더 짭짤했다. 돈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큰돈이 모이자 이번에는 마진을 많이 내는 화공약품 공장을 인수했다. 겨우 30대 초반에 대형 약국과 공장까지 갖게 되니 세상이 다 내것 같아 보였다. 그렇게 몇 년을 지내면서 안하던 술도 입에 대고 생활도 방탕해졌다. 그러나 하늘은 교만해진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72년, 그의 돈을 빌려다 쓴 회사가 부도위기에 몰렸다. 빌려준 돈을 받으려면 그 회사 대신 부도를 막아야 했다. 갖고 있던 돈은 물론 주변 사람들의 돈까지 모두 끌어와 막았다. 그러나 결국 부도가 났고 그는 빚더미에 올라 앉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부도가 난 지 한 달 뒤에는 화공약품 공장에 불이 나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하루 아침에 알거지가 됐다. 빚쟁이들에게 다 내주고 나니 몸뚱이 하나 뉠 곳도 남아 있지 않았다. 세 아이를 끌고 서초동 꽃동네 판자촌에 단칸방을 얻어 들어갔다. 몸에 지닌 거라곤 옷가지와 패물 몇 개가 전부였는데, 이것들을 전당포에 맡기고 입에 풀칠을 했다. 웬만큼 가까운 이들에겐 다 돈을 빌리고 못 갚았기 때문에 더는 빌릴 데도 없었다. 생각 끝에 한 친구를 찾아가 하소연했다. 친구는 “돈은 어떻게든 마련해볼테니 다시 약국을 차려보라”고 했다.
“그날 신촌에서 친구를 만난 후 차비가 없어 서초동 집까지 걸어 왔어요. 그 때는 한강에 제 1한강교밖에 없었던 걸로 기억되는데, 그 다리를 건너면서 ‘다시 성공하기 전에는 절대로 한강 다리를 건너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친구로부터 빌린 돈은 30만 원. 이 돈으로 임대료가 싼 봉천동에 ‘한독약국’이라는 작은 약국을 열었다. 집을 따로 구할 형편이 못돼 조제실에서 살림까지 꾸렸다. 이렇게 바닥까지 떨어져보니 인생관이 바뀌더라고 한다.
“사람이 좀 살 만하면 좀체 변하지 않아요. 그런데 갈 데까지 가라앉고 나면 그땐 변해요. 빈털터리가 되고 나니까 어려운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고, 이들을 도와야겠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감기에 걸려도 돈이 없어 약을 못 사먹는 사람들에게 빈 박카스 병을 깨끗이 씻어 쌍화탕을 끓여 담아주곤 했어요. 약국을 찾는 사람들이 그때부턴 그냥 환자가 아니라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손님 한 사람 한 사람을 참으로 귀하게 대하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한 번 찾아온 손님은 철저하게 관리했다. 고객차트를 일일이 만들어 자료화했다. 그랬다가 다음에 다시 약국에 오면 친근하게 이름도 불러주고 그 전에 불편했던 곳은 어떤지 세심하게 챙겼다. 그러자 단골이 하나 둘 늘기 시작했다. 일회용 반창고 하나 사러 온 사람에게도 마실 것을 내놓으며 인심을 쓰자 이 사람들이 다른 손님을 데려 오기도 했다.
피부약 개발로 재기
겨울이면 화상 환자들이 약국을 많이 찾았다. 치료비가 비싸 병원에 갈 형편이 못되는 사람들은 상처를 동여맨 채 약국으로 달려왔다. 이런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박사장은 피부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여러 서적을 뒤적이며 연구를 거듭하던 중 꿀풀과 다년초인 황금에 피부 재생효과를 지닌 바이칼린 성분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는 이 물질을 추출해 여러 가지 실험을 거친 후 치료제로 만들어 사용했다. 효과는 매우 좋았다. 그러자 소문을 듣고 곳곳에서 피부병 환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는 바이칼린 성분에 갖가지 한방 생약 추출물을 배합해 기미, 주근깨 치료제도 만들어봤다. 이것 역시 치료효과가 좋았다. 이를 상품화하라는 요청이 많이 들어와 ‘샤론크림’이라는 이름으로 시중에 내놓았다. 제품은 날개돋친 듯 팔려 나갔다. 자신감을 얻은 그는 이어 신경통, 류머티스, 관절염 약도 만들었는데 이들도 치료효과가 좋았다.
다시 돈을 벌기 시작했다. 그래서 빚도 모두 갚고, 지금의 사옥 자리도 샀다. 한독화장품 사옥은 지하 3층, 지상 7층짜리 건물인데, 박사장은 돈 한푼 없이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 층 한 층을 지어 올릴 때마다 꼭 필요한 만큼의 돈이 마련됐다고 한다. 기독교 장로인 박사장은 건물이 완공되자 감사의 의미로 꼭대기층인 7층에 성전을 꾸몄다.
그가 샤론크림 등 여러 종의 치료약을 직접 만들어 좋은 반응을 얻는 것을 보고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는 “이들 제품을 기초로 화장품을 만들어보라”고 조언했다. 박사장은 화장품 만드는 기술과 시설이 약 만드는 기술이나 시설과 다를 게 없겠다는 생각에 화장품을 만들 계획을 세웠다.
여의도에 작은 사무실을 얻어 우선 6가지 기초 화장품을 생산하기로 하고 연구인력을 모아 제품 개발에 들어갔다. 화학재료는 전혀 사용하지 않고 생약만 사용해 화장품을 만들겠다는 생각이었다. 인천 남동공단에 1300평 남짓한 건물을 구해 생산시설을 들였다. 95년 4월 마침내 제품이 생산되기 시작했다. 화장품 회사를 세울 결심을 한 지 불과 7개월 만의 일이었다.
그런데 막상 제품이 생산된 후에 문제가 생겼다. 그때껏 제품 연구와 생산에만 급급했던 나머지 판매망을 전혀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한 유통업체와 계약하고 지나치게 많은 양의 제품을 만들어 놓았는데, 판매가 계획대로 되지 않아 재정적인 어려움까지 닥쳤다. 생산에 들어간 지 6개월이 지나도록 단 한 개의 제품도 팔리지 않았다. 하루빨리 판매망을 뚫어야 했다.
당시 화장품 시장에서는 유명회사, 무명회사를 가릴 것 없이 모두 할인판매를 통해 유통되고 있었다. 소비자들도 거의 다 할인점을 통해 화장품을 구입했다. 이때 한 유통업체에서 연락이 왔다. 화장품을 아주 저가로 납품하면 자신들의 유통망을 통해 보급해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박사장은 내키지 않았다. 소비자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할인점에 내놓는다는 것도 꺼림칙했고 납품가도 너무 쌌기 때문.
방문판매 통해 급성장
이때 부인 나애숙씨가 주부사원 제도를 도입해보자고 했다. 주부사원을 통한 방문판매는 한때 유행했다가 대형 할인점들이 생겨나면서 거의 사라진 방식이었다. 이 방식은 제품을 알리는 데는 더디지만 고객과 1대 1로 대면해 구매가 이뤄지기 때문에 품질만 좋다면 ‘한번 고객은 영원한 고객’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주부사원들에게 처음엔 샘플제품을 나눠주며 제품 선전을 하게 했다. 시간이 지나자 샘플을 써본 사람들이 효능이 좋다며 제품을 구입했다. 제품 판매와 함께 미용사원들이 피부 마사지와 피부상태 점검, 메이크업 강좌 등을 무료로 해주자 소비자들의 반응은 더욱 좋았다.
이렇게 주부사원 제도가 자리를 잡아가면서 회사도 성장을 거듭했다. 9개월 동안 두 차례나 시설을 확장했고, 설립 1년만에 제품 종류도 36종으로 늘었다. 최근에는 중국에도 수출되고 있는데, 아직은 소량이지만 중국의 엄청난 시장규모로 볼 때 효능이 인정되면 수출고가 급증할 전망이다.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부지런함”이라고 강조하는 박사장은 매일 새벽 4시30분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한다. 성공을 위한 첫째 조건은 갖춘 셈이다. 그는 ‘정직한 경영’과 ‘나눔의 정신’으로 나머지 조건을 채워 넣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