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9월호

“6·15선언, 정권 바뀌면 휴지조각 될 수 있다”

보수파의 직격탄/이상우 서강대 교수

  • 박성원·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입력2006-08-14 14: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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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부가 투명한 대북정책으로 이 사회 주류를 이루는 보수세력을 납득시키지 못한다면 보혁갈등은 깊어질 것입니다. 대북정책에 기울이는 노력만큼 보수를 설득하고 동의를 구하는 정치적 노력을 펴지 않는다면 화를 자초할 수 있어요.”
    원로 정치학자 이상우(李相禹·62·서강대) 교수는 남북문제와 관련해 보수적 성향이 뚜렷한 인사다. 이교수는 이번 인터뷰를 통해서 남북정상회담 이후 급격히 변화하고 있는 남북관계 속에서 내연(內燃)하기 시작한 우리 사회의 이념적 갈등양상에 큰 우려를 나타냈다. 그는 특히 “정부가 아직 우리 사회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보수층에 대한 설득과 동의를 얻어내지 못한 채 ‘북한이 변화했다’고 속단, 과속하고 있다”면서 “이런 상태로 가면 머지 않아 남남(南南)갈등으로 인해 대북협력 정책 자체가 큰 어려움에 부딪히고 정권의 장래에도 빨간 불이 켜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 먼저 인터뷰에 들어가기 전에 남북문제와 관련해 보수다 진보다 하는 개념부터 좀 따져보기로 하죠. 현실 세력으로서 보수와 진보를 얘기할 때는 정치학적인 보수-진보의 개념과는 좀 다를 것 같은데….

    “일반적으로 보수는 현존질서(status quo)를 지키자는 것이고, 그것을 넘어서 고쳐나가자는 게 진보죠.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남북관계와 관련해서 보수라고 하면 현존 대한민국을 지킨다는 것이고, 이는 곧 대한민국이 기초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 이념과 체제를 수호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유민주주의라는 것은 개인의 인권과 자유, 삶의 질을 집단보다 우선시하는 겁니다.

    이런 보수 시각에서는 남북통일문제의 기본 전제가 되는 민족주의에 관한 생각도 진보세력과 다릅니다. ‘북한이 남이 아니니까, 북한 주민에 대한 동포애적 입장에서,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로운 세상을 북한 동포들도 누리게 해주겠다’는 정도가 보수 쪽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통일보다는 이념, 즉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생각인 거지요.

    반면 진보 쪽 사람들은 민족을 이념보다 우선시하는 경향이 많아요. 또 다분히 집단을 개인보다 앞세웁니다. 이런 점에서 일반적인 정치학적 용어로 말하는 진보와는 정반대가 되는 겁니다. (정치학에서는) 과거 집단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인권을 신장한다든지 개인의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진보였는데, 우리의 경우는 그 반대가 돼 버리죠. 평화와 통일의 비중에 있어서도 평화보다는 통일을 우선하자는 거고요.



    진보에는 친북적 진보와 낭만적 자유주의자(romantic liberalist)가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주사파 등 북한의 이념 노선을 따르는 세력이 친북적 진보라면 독재정권 하에서 서구와 같은 인권 자유 등 자유민주사회의 기본가치가 무시되는 데 저항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소위 ‘민주화세력’이 로맨틱 리버럴리스트라고 할 수 있어요. 사실 이 둘은 집단을 중시하느냐 개인을 중시하느냐에 따라 본래 양극에 있는데, 과거 권위주의적 독재정권에 반대해왔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어요. 이 공통분모를 기반으로 집권한 게 현 김대중정부라 할 수 있는 겁니다.”

    국내정치에 남북관계 이용 의심

    ─ 그렇다면 현 정부의 노선이랄까, 이념은 구체적으로 어디에 가깝다고 보십니까?

    “굳이 분류한다면 물론 진보죠. 친북은 아닌 것 같지만. 우리 헌정사상 첫 진보정권으로 볼 수 있어요. 현 정부에서는 대한민국의 기본이념인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비중이 전통 보수보다는 훨씬 약하다고 봅니다.”

    ─ 우리 현실에서 북한과 남한이라는 상이한 체제가 어디까지 공존할 수 있느냐에 대한 시각 차이도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정부는 이 가운데 북한과 공존이 가능하다는 생각인 것 같고요.

    “남과 북의 관계에서 본다면 서로가 이념과 체제를 달리한다는 점에서 정반대이고 상극 체제예요. 그러니까 통일을 할 수가 없잖아요. 하나로 된다는 얘기는 북한이 현재의 체제와 이념을 포기하고 자유민주주의, 즉 다원주의 상대주의 가치관을 도입하든지 아니면 우리가 북한과 같은 이념체제를 도입하는 거죠.

    그런데 우리 남쪽에서는 이념이 통일보다 소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이념(자유민주주의)을 지키기 위해 50년 전에 북한과 끝까지 전쟁을 했어요. 많은 사람의 목숨을 잃어가면서 말이죠. 그래서 우리 입장에서는 통일을 위한다 하더라도 이념 체제를 포기할 수 없는 상태이고, 북한도 이념을 절대 포기 못할 거 아니에요? 그럼 결국 공존밖에 없어요. 그런데 항시 불안한 공존상태에서 살수는 없잖아요. 지금까지 남쪽의 대북정책은 이 공존을 제도화하자는, 다시 말해 평화를 제도화하자는 것이었어요. 서로 다르니까 통일은 불가능하지만, 다른 상태에서 서로가 인정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보자는 거죠. 전통 보수에 있어 대북정책의 핵심이 공존정책이니까 공존에 관한 한 현 정부와 생각이 다를 게 없어요.

    다만 문제는 공존단계가 아직 정착되지 않았고 제도화되지 않았는데, 정부가 건너뛰어서 통일단계로 들어가려고 하니까 전통보수가 당황하는 거지요.”

    ─ 그렇다면 전통 보수와 정부 간에는 현 상황에 대한 해석과 인식의 차이밖에 없다는 겁니까?

    “아니죠. 근본적 차이가 있지요. 아까 얘기한 것처럼 전통 보수에서는 통일보다 자유민주 이념을 더 소중히 여깁니다. 이것은 광복 직후의 좌우 이념갈등 때와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우리가 통일을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했다면 6·25전쟁을 왜 했겠습니까? 그게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300만명의 희생을 불사하면서 전쟁을 한 것입니다.

    ‘대화’를 얘기할 때도 진보세력은 ‘통일을 위한 대화’를 하자는 겁니다. 반면 보수는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전쟁말고 평화를 유지하는 선에서 ‘화해’를 위해 대화를 하자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통일의 목적 자체를 ‘북한 동포들도 자유민주주의체제 하에서 살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에 두는 것이 전통 보수입니다.

    이런 근본적 시각차는 물론이고 앞서 말한 현 단계에 대한 인식의 차이도 분명 있어요. 정부는 북한이 지금 변화하고 있고, 변했다고 보는 겁니다. 북한이 변했으니까 우리와 가까워질 수 있고 가까워지는 길로 들어섰다고 보는 거예요. 전통 보수에서는 북한에 외형적 전술적 차원의 변화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기본 이념에 관한 한 변했다고 하는 어떠한 징후도 없다 이거에요.”

    ─ 현 정부가 그렇게 북한의 변화를 전제하고 들어가는 데에는 국내정치적 목적에서 남북문제에 관해 뭔가 빨리 가시적 성과를 내야겠다는 욕심이 개재했다고 보십니까?

    “현 정부의 권력기반은 상대적으로 진보쪽인데 우리 사회에서 아직까지는 보수가 다수이고 진보는 소수예요. 거기에다가 지역적으로도 호남이라는 소수에 근원을 둔 취약한 정권이에요. 그렇다면 현 단계에서는 차기 정권 창출이 상당히 어렵다고 보지 않겠습니까? 만일 앞으로 남쪽에서 보혁(保革) 갈등이 일어난다면 다음 선거에서는 패배할 수밖에 없어요.

    이 한계를 이런 틀 안에서는 해결할 수 없으니까, 국내 차원을 넘는 남북관계를 진전시킴으로써 국내의 지지기반을 확충하고 보수세력의 저지선을 돌파하자는 생각을 할 수 있겠지요. 통일이라는 민족적 대업을 수행한다는 명분으로 국내에서 반대파를 압도하는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을 거라는 판단을 할 수 있어요.

    그런 면에서 남한내 헤게모니 확보와 정권연장이라는 국내정치적 목적을 위해 남북관계를 이용하려 한다는 의심을 받을 소지가 있어요. 여기에 비록 동상이몽이긴 하지만 북한도 나름대로 필요성이 있기에 절호의 기회가 마련된 거지요.”

    전통보수 반발, 조직화 가능성

    ─ 보수 쪽에서는 그러한 정부의 대북 드라이브에 대해 불만과 우려를 갖고 있으면서도 외향적으로는 이를 잘 표출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지난 50년 동안 국내에서는 정부가 항상 보수였고, 사회의 주류가 전부 보수였어요. 그러니까 다른 점에서는 여러 가지 불만과 반대가 있었을지 몰라도 적어도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한다는 점에서는 정부와 국민이 일치돼왔거든요. 그래서 전통 보수의 입장에서는 반공은 상식이고, 당연한 것이고. 특별히 노력하거나 의식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어요. 전부 자기 생업에 바쁘고 자기 할 일이나 했지 의식적으로 우리 이념체제를 지키고 대한민국 체제를 수호하자는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반면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은 항상 정부에 반대하는 위치에 있고, 소수로서 정부에 반대하려니까 스스로를 조직해야 하고 이념적 무장을 해야 했어요. 그러니까 비록 숫자로는 소수지만 잘 조직되고 의식화된 게 진보이고, 다수라고 하면서도 의식화되지 않고 거기에 이념적으로도 깊게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보수예요.”

    ─ 그럼 이런 보수의 침묵이 앞으로도 계속될까요?

    “글쎄, 바로 그게 문제입니다. 그런 보수들이 갑자기 이런 상황에 부딪히니까 당황하는 거예요. 으레 정부가 우리 편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고 하니까, 새삼 이걸 다시 생각해보고 따져봐야 할 것 아니에요? 뭔가 이상하다, 혼란스럽다, 옛날 같으면 반공을 하면 정부도 칭찬하고 6·25 때가 되면 우리 입장에서 뭔가 강한 얘기를 하는 게 정상이었는데, 6·25 50주년 행사도 하지 말라고 하고, 북한을 욕하지 말라고 하니까 혼란스럽다는 게 보수 쪽에서 나타난 첫 번째 징후들이에요.

    여기서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일단 전통 보수 쪽에서 생각을 가다듬기 시작할 것이고 점차 조직화, 의식화될 겁니다. 그 단계가 되면 보혁 갈등이 심화되고 표출될 것인데 그게 걱정스러운 겁니다. 나는 사실 이번 남북 정상회담을 보면서 ‘앞으로 6개월 안에 심대한 내부 갈등이 야기되겠구나’ 하고 걱정했는데, 3개월 만에 벌써 전통 보수들이 이념을 체계화하고 조직을 만들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요”

    ─ 그렇다면 갈등이 깊어지기 전에 보수 성향의 학자들이라도 먼저 보수세력이 느끼고 있는 당혹감과 걱정을 이성적으로 잘 전달해서 인식의 갭을 좁히는 노력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누가 그런 것을 막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직접적인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보수적 견해를 가진 지식인들이 자기네 견해를 펼쳐 보일 수 있는 마당을 제한당한다면, 예컨대 신문 잡지 같은 데서 기회를 주지 않는다면 그게 간접적으로 제약이 되는 거지요.”

    ─ 그런 제약이 실제 있다고 보십니까? 또 정부가 그런 작용을 하고 있다고 보실 만한 근거가 있습니까?

    “제가 보지 않았으니까 알 수는 없어요. 그러나 보수성향의 사람들이 글을 쓰고 자기 의견을 공개적으로 밝히기를 꺼리는 그런 분위기가 있는 것만은 사실이에요. 보수 논객들은 칼럼이나 대담 좌담 등에 넣어서는 안되는 걸로 돼 있고, 그런 리스트가 작성돼 있다고 불만스러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교수들 사이에서도 개별적으로 만날 때는 걱정을 많이 하는데 막상 드러내놓고 얘기하기는 꺼립니다. 남북관계 등에 관해 보수적 시각에서 공개적으로 문제점을 거론하면 괜히 왕따되는 분위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 보수론자들이 공개적으로 잘 나서지 못하는 데는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보수세력이 권력이나 기득권층의 비민주와 독점을 옹호하면서 일종의 반대급부를 받아왔다는 국민의 인식도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맞는 지적이에요. 이게 하나의 역사의 아이러니예요. 그동안 역대 정부는 분단의 특수성 때문에, 이념과 체제갈등을 벌여온 북한 때문에,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면서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체제도전에 대해서는 역설적이지만 비민주적으로 탄압을 해왔어요. 전통보수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이것이 다분히 인권탄압이고 비민주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더 큰 차원에서, 체제수호라는 차원에서 여기에 묵시적으로 동의해왔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나서서 보수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곧 비민주라는 것과 일치되거든. 게다가 그동안 우리 정치지도자들이 도덕적으로 부패했었거든요. 이런 사람들과 동일시되고 싶지 않으니까 되도록 말하지 않으려고 하는 거예요.”

    ─ 단순히 현실적 분위기나 약점 때문이 아니라 탈냉전의 흐름이 한반도에도 시작되면서 종래의 보수 시각을 고수할 논리적 근거가 약화된 측면은 없다고 보십니까?

    “탈냉전은 그간 우리 정부가 하나의 정책목표처럼 내세웠던 것입니다. 냉전체제 해체를 추구해왔단 말이지요. 그런데 탈냉전이라는 것은 공산권의 붕괴로 인해 이뤄진 하나의 결과이지 그것을 목표로 해서 이뤄낸 것은 아니잖아요? 남북관계에서 탈냉전이란, 북한이 체제를 바꾸면 탈냉전이 되는 거예요.

    보수 쪽 시각에서 볼 때는 북한체제의 탈공(脫共)이죠. 북한이 현재의 체제를 버리고 민주화돼야만 탈냉전이 되는 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정부는 북한이 그렇게 바뀌지 않았는데도 북한과 함께 뭘 할 수 있다고 하니까 전통 보수에서는 이상하게 생각하는 거죠.”

    ─ 그러면 북한이 체제나 이념의 변화조짐을 보이기 전에는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대화협력은 하지 말아야 합니까?

    “물론 남북관계는 개선돼야지요. 그건 보수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관계개선의 목적이 뭔지가 분명해야 합니다. 전통보수 입장에서는 화해를 위하고 공존에 합의를 보고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남북간 관계개선에 대해서는 전폭적으로 지지합니다. 그런데 그 단계를 넘어서 ‘이념을 초월해서 손잡고 나가자’고 한다면 저항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북한을 변화시키기 위한 탈냉전은 좋고 그 전에도 공존을 제도화하고 화해하는 것까지는 좋지만, 북한체제가 바뀌지 않고 집단주의 또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주의 그대로인데도 북한과 더불어 체제통합 논의를 하려고 한다면 보수 쪽에서는 의심할 수밖에 없는 거지요. 가령 지난 6·15 정상회담 합의사항 제2조(연합제와 낮은 단계의 연방제의 공통점 인정) 같은 것에 대해 의심하게 되는 거지요. 이건 우리가 이념을 포기할 수도 있다는 암시를 주는 것이 될 수도 있어요.”

    ─ 6·15 정상회담에 이어 남북적십자회담이나 7월말 서울에서 열린 남북장관급회담의 결과 등으로 볼 때 남북간 화해협력 기조가 정착 단계 또는 제도화 단계에 들어섰다는 평가가 많은 것 같은데요. 동의하십니까?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건 북한 자체가 변하지 않았는데 덮어놓고 다음 단계에 들어간 것이거든요. 우리가 전통적으로 지지해온 것은 남북간에 일단 평화를 정착시키고 공존에 합의를 보고 나서 서로 교류협력을 증대시켜서 신뢰를 구축하고 그 다음 어느 단계에 가서 북한이 변한다고 할 때에 통일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평화정착도 공존에 관한 합의도 이번에 다 건너뛰고 들어갔다는 말입니다. 앞의 대전제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협조라는 후속조처단계로 들어갔다는 거예요. 이렇게 해가지고는 남북한 간에 근본적 문제는 하나도 해결이 안된다고 봐요.”

    기초 건너뛴 남북관계 오래 못갈 것

    ─ 하지만 주변 강대국들도 이번 정상회담 등을 적극 환영하고 있지 않습니까?

    “국제적 반응도 마찬가지예요. 정상회담에 대해 나온 성명들을 자세히 보면 남북이 화해한다는 것은 일단 모든 나라가 지지합니다.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모두 마찬가지예요. 그러나 거기까지입니다. 한발 더 나가서 남북간에 이념을 초월한 통일을 한다고 하면 전부 견제하는 거지요. 그 경계하는 목소리가 미국과 일본에서는 강하게 나오고 있어요.

    일본에서도 남북한 간에 화해를 위한 정상회담은 전폭적으로 지지하지만 이념을 초월한 통일로 들어서는 것에 대해서는 우려할 수밖에 없다고 나와요. 만일 후자라고 한다면 이제는 한일관계도 재평가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념을 포기한다고 하면 그동안 같은 이념을 가졌기에 우방관계를 유지해온 한국과 더 이상 그런 관계를 지속할 수 없다는 거지요.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동안 유지해온 한미동맹의 근거가 뭡니까? 공산주의 위협에 맞서 공동 이익을 수호한다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가 이념을 초월해서 북한과 접근한다고 하면 미국으로서는 한미동맹의 바탕이 깨진다고 보는 거예요. 그래서 미국도 지금 그걸 우려하고 있어요.”

    ─ 현재 전개되고 있는 남북간 대화협력은 어느 정도로 지속될 것 같습니까? 또 만일 이게 실패로 끝난다면 남북한 내부에 각각 어떤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십니까?

    “앞서 말한 것처럼 앞뒤를 건너뛰고 다음 단계로 들어간 것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기초가 안된 상태에서 나간 것이기 때문에 수명이 오래 가지 못할 것으로 봅니다. 어느 정도 가다보면 북한이 변화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고, 사상누각이라는 것을 알 수 있기에 더 이상 진행될 수가 없게 되지요. 그리 오래 가지 않아서, 늦어도 반년 이내에 그런 상태가 오리라고 봅니다.

    이 경우 우리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 내지 신인도는 급격하게 떨어질 것입니다. 북한의 김정일정권에 미칠 영향이란 것은 크지 않다고 봅니다. 이번에 나름대로 어떤 목적을 갖고 대화를 추진해온 것이지만 목적을 달성하지 못해도 그만이지요. 뭐, 북한이 그것으로 인해 특별히 큰 피해를 입을 일은 없는 것 아니에요?”

    김정일 답방, 국내정세에 달려있어

    ─ 북한도 이번에 나름대로 ‘위험한 도박’을 했다는 평가도 있는데요. 만일 이 물꼬를 되돌릴 경우 김정일국방위원장도 상당히 부담을 안게 될 거라는….

    “저는 그렇게 안 봅니다. 북한은 우리와 체제구조가 달라요. 우리는 민주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와요. 대통령이나 정부 지도자라는 사람들은 주권자인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만 행사하는 사람들이에요. 북한은 그렇지 않아요. 지도자가 결정하면 그만이에요.

    이번에 정상회담도 하고 대외적으로도 갑자기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는데, 이것은 북한이 자신감을 가졌기 때문이에요. 정부는 북한이 궁지에 몰려서 마지막에 할 수 없이 남쪽을 이용하려고 대화에 나온 걸로 보는 것 같은데, 저는 그 반대로 봅니다. 남쪽에 동조세력이 상당히 많이 성장했으니까 과감히 남쪽에 뛰어들어서 남쪽으로부터 인민의 지지를 확실히 얻어낼 수 있다고 북한이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만일 이것이 전모가 다 밝혀져서 진행되던 모든 것이 중단됐다 해도, 북한으로서는 이루려는 것을 못 이루는 것이 될 뿐 아무 문제될 게 없는 겁니다. 잘됐으면 좋았겠지만 아니면 그만이라는 얘기지요.”

    ─ 늦어도 내년 봄까지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 답방이 있다고 하고, 최근에는 이르면 10월쯤에 이뤄질지 모른다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김정일 서울방문 저지투쟁’을 벌이겠다는 보수 운동단체들까지 있습니다.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방문이 과연 성공적으로 이뤄질 것 같습니까?”

    “그것은 국내정세에 따라 결정될 것으로 봅니다. 9월이면 대학들이 개강하고, 대학생들이 북한 지지로 나올 겁니다. 그리고 진보적 시각이 광범위하게 번질 겁니다. 그런 식으로 간다면 김정일이 올 수도 있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김정일이 여기에 왜 옵니까? 그러니까 김정일의 서울방문은 8·15부터 시작해서 9월 들어 본격화될 국내 정치투쟁 양상에 달려 있는 겁니다.”

    ─ 대학가 등지에서 김정일 답방 환영 분위기가 고조되면 그에 자극받은 보수우익 단체들의 반발도 비례해서 증대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것이 김위원장의 서울방문 자체에 영향을 끼칠 가능성은 없을까요?

    “김위원장의 서울방문 자체가 어려워질 수 있지요. 그런데 보수에서 조직적인 반대운동을 벌이거나 보수주의 정치운동으로 나가기에는 시간이 걸릴 것이고, 진보진영의 움직임은 준비된 거니까 이게 먼저 나갈 거라구요. 그러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김정일의 방문이 빨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10월 방문설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초기에, 진보세력의 정치운동이 활발할 때에 올 수 있고, 그 시기를 놓쳐서 그 때 못오면 다시 오기 어려워질 거라는 말입니다.”

    ─ 현 정부 외교안보팀의 대북관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특히 김대통령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으며 정상회담에서 막중한 역할을 해온 임동원 국정원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임원장을 아주 호의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아주 선량한 분이거든요. 그런데 선량하기 때문에 북한에 대해 항상 그런 선의(善意)가 앞섭니다. 다 같은 단군할아버지 자손들인데 민족문제를 논의한다면 북한도 거기에 동의하지 않겠느냐, 이런 생각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북한과 화해하자고 타이르면 김정일도 돌아설 수 있다고 믿는 거예요. 그렇게 믿는 것은 좋지만, 제가 보기에 북한은 그렇지 않거든요.

    이건 마치 수학에서 유클리드 기하학에 나오는 공리(公理)를 따지는 것과 같습니다. 공리는 증명할 수 없지만 서로가 그렇다고 전제해놓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공리 하나만 바뀌면 비(非)유클리드 기하학이 돼버립니다. 임원장의 애국심이나 우리 보수에서 보는 애국심은 다 똑같고, 이 민족이 잘되게 하자는 것은 똑같은데, 어디서 차이가 나느냐 하면 북한을 믿을 수 있는가 없는가에서 차이가 납니다.

    임원장은 북한을 믿을 수 있다고 보고 있고, 그 사람들도 민족적 대의(大義)를 내세우면 설득이 되리라고 보고 있는 거예요. 과거 김구선생이 남북대화를 하려고 38선을 넘어갈 때처럼 ‘같은 조선사람끼리 무릎을 맞대고 앉으면 안될 게 뭐 있느냐’ 그런 식이죠. 이건 너무 나이브할 뿐만 아니라 자기 논리에 심취돼 있어요. 전형적인 로맨티스트 스타일이에요. 북한은 이를 최대한 활용하고 있구요.

    그러나 전통보수 사람들은 과거 50년의 행적을 볼 때 북한은 근본적으로 우리와 다르고, 설득될 수 없고, 우리가 잘해준다고 해서 거기에 호의로 반응할 사람들이 아니라고 믿는 거예요. 이게 근본적 차이입니다.”

    ─ 최근 김정일에 대한 남한사회의 호의적 시각에 대해 보수층의 우려가 큰 것 같습니다. 그러나 김정일을 정말 통일대통령으로 모시고 싶어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김정일에 대한 호의는 과거의 잘못된 자세를 풀고 개방적 전향적 자세로 세계사적 흐름에 맞춰 공생하자는 일종의 격려와 기대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문제는 북한체제의 특수성입니다. 북한이 보통의 국가라면 그게 다 맞는 얘깁니다. 그러나 연구하면 할수록 북한은 특수사회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북한은 바뀔 수가 없는 나라입니다. 대남전략도 확고부동한 원칙에서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남관계에서 자기네가 이기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북한이 남쪽에서 우상화되다 보면, 우리 4000만 국민이 다 북한전문가가 아니니까 북한에 대한 경계수위를 낮추게 되고, 그렇게 되면 북한의 소위 ‘대남해방’ 전략에 말려들 수밖에 없다는 게 전통보수의 생각이에요.”

    ─ 그러나 한꺼번에 근본문제를 다 풀어나갈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가령 6·25전쟁의 책임문제나 체제 이념의 문제를 우선 해결하자고 하면 현실적으로는 어떤 대화도 불가능한 것 아닌가요?

    “북한이 변화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기왕에 50년을 기다렸는데, 조금 더 기다려야지요. 북한이 변화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가 오고 있어요. 그만큼 체제유지가 어려워지고 있거든요. 우리가 인도적 차원의 지원은 계속하고, 북한과 평화의 제도화에 관한 문제를 열심히 설득하고 협상하자는 거예요. 한꺼번에 해결하자는 게 아니에요. 북한을 하루 아침에 어떻게 민주화합니까? 우선 전쟁을 하지 말자는 합의, 평화의 제도화에 집중해서 북한과 교섭해야 한다는 거예요. 점진론이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인데, 전통 보수에서는 원리원칙대로 하나하나 차곡차곡 조절해나가자는 얘기고, 진보쪽에서는 그걸 다 뛰어넘자는 얘기니까 의견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아직 통일을 논할 단계가 아닙니다. 전쟁을 하지 않기로 합의하는, 가령 평화협정을 체결하자는, 그런 방향으로 북한을 유도하자는 거예요. 북한이 이에 동의해준다면 그 범위 내에서는 우리가 본격적으로 경제원조도 하고, 다 할 수 있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그런 다짐도 받지 않고 경제원조를 하겠다는 것은 무슨 말이냐 이거죠.”

    ─ 미국에서 보수적인 공화당정권이 연말 대선에서 승리할 경우 남북관계에는 어떤 영향이 있을까요? 부시 후보는 ‘냉전적 사고’라는 비판이 나올 만큼 강경한 대북정책을 공약으로 내놓고 있는데요.

    “아시다시피 미국에서는 집권당이 바뀌었다고 해서 정부정책이 크게 바뀌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한반도 정책이란 것은 분명해요. 그건 미국과 이념을 함께 하는 나라를 지원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대한민국이 계속 자유민주주의를 확고히 수호하겠다는 결의만 보이면 한미관계는 아무 문제가 없어요.

    그런데 한국이 이념수호에서 그것을 좀 약화시키고 초이념적인 통일을 모색한다면 미국 시각에서, 특히 원칙론자인 공화당 시각에서 보면 한미동맹의 근거가 깨졌다고 보는 거지요. 그렇게 되면 한미관계가 흔들리고, 한미관계가 흔들리면 남북관계도 영향을 받게 될 겁니다.”

    보혁갈등, 남북관계 발목 잡을 것

    ─ 주한미군의 장래 문제와 관련해서는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최근 매향리문제, SOFA협상 등을 계기로 반미기류가 부쩍 확산된 느낌인데요. 김대중 대통령까지 최근 ‘정책비판은 할 수 있지만 반미로까지 나가는 것은 곤란하다’고 우려를 표명할 정도인데요. 그런데 다른 한편 북한은 이번 정상회담에서 예상과 달리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하지 않고 주한미군의 존재를 현실로 인정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북한은 본래 미군철수를 강력히 요구해왔습니다. 그럼데 이번에 남북관계가 진전되면서 남쪽에서 분위기가 바뀌었어요. 남쪽 국민들이 ‘이제 전쟁은 없으니까 미국은 나가라’, 이런 식으로 미군철수를 강력하게 주장할 것을 북한은 기대하고 있어요. 남쪽 국민이 그렇게 강력히 요구하고 정부가 거기에 호응한다면 북한이 먼저 나서서 ‘미군 나가라’고 할 필요가 없는 거지요. 그러니까 북한이 미군철수 요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전략에는 하등의 변화도 없이 전술적 변화만 시도하고 있는 겁니다.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미군이 여기 주둔하고 있는 것은 한국과 미국의 공통이익이 있기 때문이라는 점입니다. 서로 필요성이 있으니까 주둔하는 거예요. 그러나 결정은 미국이 하는 겁니다. 우리가 있어 달라고 해서 미국이 있는 게 아닙니다. 미국이 모든 걸 판단해서 미국이 결정할 거예요. 그런데 미국의 전통은 우리 국민과 정부가 ‘나가라’고 강력하게 요구할 때는 더 이상 있지 않습니다. 나갑니다. 필리핀의 경우 국민과 함께 정부가 ‘나가라’고 하니까 수빅만과 클라크기지에서 그냥 나가버렸어요.”

    이 쯤에서 이교수는 갑자기 창 밖을 가리키며 “교문을 들어오다가 여기저기 걸려있는 플래카드를 보셨습니까?” 라고 물었다. 대학 구내에 나붙은 정상회담 관련 플래카드 중 특히 반미구호가 적힌 것들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개중에는 4행시 형식으로 미군철수를 기대하는 이런 것도 있었다.

    “마주앉아 남북은 얘기도 할 수 있답니다, 형님.”

    “한반도에서 미군도 곧 사라지고요.”

    “일루 와서 얘기해봐라, 아그야.”

    “통일이 곧 이루어질 것 같습니다, 형님.”

    9월이 되면 전 대학에서 이런 사고에 따른 미군철수 주장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고, 이런 목소리에 우리 정부가 조금이라도 동조하는 경향을 보이게 되면 미국은 우리 정부가 미군철수를 요구하기 전이라도 나가버릴 수 있다는 게 이교수의 주장이다.

    “특히 부시정권이 들어서면 더 그래요. 미군이 굳이 한국에 주둔하지 않고도 아시아 정책을 할 수 있거든요.”

    ─ 남북관계가 진전될수록 보혁갈등이 심화되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정부가 보수층 설득에 실패한다면 어느 시점에 가면 잠재된 불만 요인이 폭발하여 첨예한 남남갈등이 야기되고 남북관계 자체의 진전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요?

    “저도 바로 그 점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만일 정부가 투명한 대북정책을 보여줘서 이 사회의 주류를 이루는 보수세력을 납득시키지 못한다면 보혁갈등은 깊어질 것입니다. 아마 1년 이내에 그리 될 것이고, 더구나 이게 우리 대선과 맞물리면 큰 내분이 일어날 것으로 봅니다. 다음 선거에서는 보혁갈등이 가장 큰 변수로 작용하지 않을까 우려돼요. 그리 되면 남북관계가 순탄하게 나갈 수 없지요.”

    남남(南南) 통일도 못하면서…

    ─ 김대통령의 대북정책에 대한 불만이 김대통령의 통치스타일에 기인한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남북문제에 관해 대통령의 확신이 지나치고, 특히 재임중 가시적인 결실을 얻어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져 설득과 국민적 합의절차를 생략하고 독주하는 데에서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는 건데요. 이교수께서도 그렇게 보시나요?

    “김대통령이 내부나 국민적 동의를 구하지 않고 독주했다는 의견에 저도 동의합니다. 물론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닙니다. 남북문제는 워낙 예민한 문제이기 때문에 미리 내놓고 추진할 수도 없고, 다분히 비밀협상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까지도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협상의 기술에 한정되는 얘기일 뿐 근본적인 문제, 예컨대 이념의 문제에 관한 것은 선명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 일각에서는 김대중대통령이 남북관계를 아무리 잘 풀어나간다 해도 뿌리깊은 지역주의 때문에 반대층은 여전히 반대를 할 거라고 말하는데….

    “그동안 우리 정치에서 제일 큰 변수가 지역이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리고 지역만 따지면 DJ 지지세력이 가장 적습니다. 그렇게 소수이면서도 집권이 가능했던 것은 나머지 지역 사람들이 DJ의 민주투사 이미지에 호감을 갖고 동조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보혁갈등이 깊어지면 대통령의 민주 이미지에 동조했던 비호남 사람들의 태도가 바뀔 수 있어요. 이것은 김대통령에게 상당히 큰 정치적 부담이 될 거예요.”

    ─ 정치권이 사회적 이념갈등을 조정하는 역할을 해내야 할텐데 우리 정치권은 현실적으로 남한 내부의 시각차를 합리적인 토론으로 수렴하기보다는 오히려 ‘청와대 친북세력’이니 ‘보수반동 반통일세력’이니 하는 감정적 대결에서 한 발도 더 못나가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됐다고 보십니까? 이 간극을 어떻게 좁혀야 하겠습니까?

    “우리 나라에서 통일을 반대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문제는 어떤 통일한국을 원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통일 모습을 원하느냐에 따라 국민들의 의견이 갈릴 수 있거든요. 그런 심각한 문제에 대해서 국민적 합의를 도출해놓고 나서 북한과 접근해야 합니다. 이번에는 그런 과정을 생략해놓고 북한과 접근했거든요. 김대통령이 이렇게 애쓰고 있는 대북정책도 국민의 컨센서스, 일치된 지지가 없기 때문에 발목이 잡히는 겁니다.

    앞으로 이걸 극복하려면 남북화해 이전에 남남화해부터 우선해야 합니다. 가령 보수 쪽 시각을 나타내는 정당이 있다면, 예를 들어 한나라당이 보수정당이라 한다면 이 당과 논의를 해서 합의를 해야죠. 그리고 거기서 합의된 범위만큼 북한과 접근해야지요. 국내에서 국민적 합의도 구하지 못한 상태에서 어떻게 북한과 통일합니까? 남한도 통일 못했는데 남북통일을 어떻게 한다는 얘깁니까?

    김대통령이 앞으로 나가는 데에만 신경쓰지 말고, 지금 대북정책에 들이는 노력만큼 남쪽의 반대세력에 대해서도 설득하고 동의를 구하는 정치적 노력을 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것이 전제되지 않고 남북관계를 풀어 나간다는 생각은 아주 위험한 사고입니다. 화를 자초할 수도 있어요.”

    정권 바뀌면 원점으로 돌아갈 것

    ─ 대북관계에 대해 야당의 동의를 받아 나가라고 충고하셨는데, 정부 여당은 이렇게 불평합니다. 외교 교섭이나 합의에서 일일이 국회의 동의를 받으라는 식의 야당 주장은 대선을 의식한 일종의 발목잡기에 불과하다고 말이지요. 법적으로 국회 동의가 필요한 것만 동의를 받으면 될 뿐인데 한나라당은 대선에서 주도권을 잡으려는 정략적 목적에서 사사건건 동의를 받으라고 요구한다는 비난인데….

    “설령 그 말처럼 야당의 정략적인 반대가 심하다고 해도 대북관계에 관한 한 국회동의 없이는 안된다고 봅니다. 국민적 합의가 돼 있지 않은데 국민에게 엄청난 부담을 주고 체제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대북접근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겁니다. 주권자인 국민의 동의를 얻지 않고 어떻게 이런 정책을 폅니까? 그래서 어느 민주국가든지 대외교섭에서 조약을 체결할 때는 반드시 국회의 동의를 얻게 하고 있잖아요? 국민에게 재정적 부담을 지울 때 반드시 국회동의를 얻도록 하고 있는 헌법정신도 거기서 나오는 겁니다.

    대북관계는 국민에게 재정적 부담을 주고 우리나라 국체(國體)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근본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라도 국회의 동의를 받지 않으면 나갈 수 없어요. 그렇지 않을 경우 위헌이라고 생각해요.”

    ─ 한나라당이나 자민련이나 선거 때마다 보수를 표방하면서도 최근 남북관계와 관련해서는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정책 대안을 내놓지 못하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자칭 보수라는 정당들이 이처럼 무기력한 것은 무엇때문일까요?

    “좋은 지적이라고 봐요. 지금 이 나라의 이념적 혼란의 책임에서 그 절반은 야당이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소위 보수를 대변한다는 한나라당이나 자민련이 자기네 이념에 대해 순수성을 지키지 못했어요. 정략적인 생각 때문에, 예컨대 표를 더 얻고 의석을 늘리기 위해 전혀 이념을 달리 하는 사람까지도 끌어안았어요. 그럼으로써 스스로 이념의 선명성을 훼손시켰어요. 그래서야 보수적인 국민들이 한나라당을 과연 자기를 대변하는 정당이라 생각하겠어요?”

    ─ 그러나 선거 때 국민들은 이념이나 정책보다는 지역 등 이른바 전근대적 요소를 갖고 투표하는 경향이 많은 게 사실 아닙니까?

    “사실 우리나라의 어느 정당도 자기 이념이 뚜렷하지 않았고, 그동안에 그런 점은 사실 문제가 안됐기에 용서가 됐어요. 그동안은 우리 정당들이 이념과 정책을 체계적으로 발굴해서 내세운 적이 없었어요. 정당을 정치투쟁용으로만 생각했지 이념과 정책을 내세워 국민에 지지를 호소하는 정당이 없었어요.

    그러나 이제 이념갈등이 본격화되면 정당들이 이념적 선명성을 부각시켜야 할 겁니다. 가령 한나라당이 정말로 보수 정당을 표방하려면 내부정리부터 하고 들어가야 해요. 이념을 달리 하는 사람이 있으면 내보내고 이념을 같이 하는 사람을 끌어안고, 자민련에서도 이념을 같이 하는 사람은 통합할 수 있으면 통합하고. 이런 정비가 있어야 해요.

    한나라당이 이제 이념적 선명성을 되찾는 작업에서 실패한다면 한나라당은 다음 선거에서도 희망이 없을 거라고 봐요.”

    ─ 만일 2002년 대선에서 정권이 바뀐다면 남북관계는 어떻게 될 것으로 보십니까? 대북노선이 상대적으로 강경한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이런 식의 남북대화 협력은 사실상 끝 아니냐는 분석도 적지 않은 것 같은데요.

    “맞다고 봅니다. 한나라당이 비록 분명하진 않지만 전반적으로 보수층의 생각, 북한은 변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갖고 집권한다면 6·15 정상회담의 합의는 원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게 되겠지요.”

    이교수는 인터뷰 내내 북한은 변하지 않았다는 점을 역설하며, 이를 간과하고 서두르는 듯한 정부의 태도에 대한 우려를 조금도 풀지 않았다. 이교수 스스로 ‘공리’로 표현했듯 북한의 변화여부와 변화가능성에 대해 정부측도 이교수측도 현재로선 증명해보일 방법이 없다. 다만 머잖은 장래에 어느쪽이 옳았는지가 판가름났을 때 틀린 쪽은 상당히 난감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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