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태우(盧泰愚)전대통령 비자금 사건 폭로 주역 박계동(朴啓東)전의원이 세간의 관심 속에 ‘서울의 택시운전사’가 된 지도 벌써 두 달. 박전의원은 오늘도 하늘색 기사복을 입은 채 금구상운 소속 서울 33자 1259 프린스 택시를 운전하며 서울 거리를 누비고 있다.》
박전의원은 불과 5년 전만 해도 전국적 주목을 받는 스타 의원이었다. 92년 14대 총선에서 금배지를 단 박전의원은 95년 10월19일 본회의장에서 모은행 서소문지점에 300억원이 예치된 예금계좌를 공개하며 “노태우전대통령이 조성한 비자금 4000억원 중 일부”라고 주장했다. 박의원의 주장은 곧바로 노전대통령에 대한 수사로 이어져 그 해 11월16일 노전대통령은 수뢰혐의로 구속됐다.
그러나 박전의원은 그로부터 불과 3개월 남짓 후인 96년 2월, 15대 총선을 코앞에 둔 시점에 선거법위반으로 벌금 600만원 형이 확정돼 5년간 피선거권을 상실, 정치일선에서 퇴장했다. 혜성처럼 나타났다 유성처럼 사라진 셈이다. 이후 사면 때마다 그의 이름이 거론됐으나 지난 3·1절 사면에서도 복권대상에서 제외돼 결국 4·13총선에 출마하지 못했다. 불행한 망명객 홍세화씨는 생존을 위해 ‘파리의 택시운전사’가 된 뒤 차창을 통해 파리를 엿보고 조국을 향해 ‘똘레랑스(상대의 존중)’라는 화두를 던졌다. 같은 택시 기사석에 앉아 바라본 서울에 대해 그는 과연 어떤 ‘화두’를 꺼낼까.
─택시운전하기가 만만치 않으실 텐데….
“요즘은 야간조를 뛰는데 오후 3시부터 다음날 새벽 3시까지 운전을 합니다. 하루에 대략 200여km를 뛰는데 주야간으로 서울의 동서남북을 몇번씩 오가게 돼요. 서울을 24시간 지켜보는 셈이죠. 운전대를 잡고 8시간이 지나면 피로가 가중되면서 안전벨트가 몸을 옥죄는 느낌이 들기 시작해 벨트를 자꾸 늦추게 돼요. 그러나 10시간이 넘어가면 그런 자극도 없어지고 마치 포승에 묶여 옴짝달싹 못하는 느낌이 듭니다. 지난 6월27일부터 운전을 시작했는데 엉덩이가 완전히 헐었어요.”
“월급요? 이래저래 빼고 한 50만원…”
─월급은 얼마나 받습니까.
“내일(8월12일)이 정식으로 월급을 받게 되는 날인데 80만원 정도가 될 것 같아요. 그런데 이미 안테나를 2번 부러뜨렸고 지난 7월18일 피자배달 오토바이와 충돌사고로 차문짝이 부서져 차량수리비로 21만원이 나갔어요. 또 7만원짜리 속도위반 딱지도 2번 끊었어요. 이래저래 빼고 나면 50만원정도 집에 가져갈 것 같아요. 내가 초보라서 특별히 못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택시기사들이 생존차원에서 합승도 하고 장거리도 뛰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 택시운전사들은 거의 한계상황에 도달했어요. 파업을 하지 않는 것은 파업에 대해 여론이 좋지 않은데다 파업 결과 생기는 이익이 결국 회사로 돌아가기 때문이예요. 그러나 이대로 가면 조만간 폭발할 수 밖에 없다구요. 79년엔 택시 기본요금이 600원이었는데 그 돈으로 목욕탕을 3번 갈 수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 기본요금 1300원을 두 번 받아도 목욕탕을 1번도 못가죠. 결국 택시기본요금은 6분의 1로 떨어진 셈입니다.”
─당분간 선거에 출마할 수 없으니 유권자를 의식한 것도 아닐 테고 홍세화씨처럼 먹고살기 위한 것도 아닐 텐데 도대체 왜 택시운전을 시작했습니까.
“내 주변에서나 나 자신도 16대 총선 전에는 복권이 될 줄 알았는데 지난 3·1절 사면에서도 제외됐어요. 95년말 내가 본부장을 맡고 있던 ‘희망물결본부’에서 시국강연회를 열었는데 여기서 노무현의원의 일부 발언이 사전선거운동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본부장인 내가 기소됐어요. 이 정도 혐의인데도 계속 사면복권에서 제외되자 좌절감을 느꼈습니다. 국민에게 봉사하겠다는 신념에도 혼란이 왔고.
이런 정신적 고통을 육체적 고통으로 해소해야겠다는 게 택시운전을 시작한 직접적인 이유입니다. 물론 정치인이니까 정치적 의미도 있어요. 택시운전을 통해 서민대중과 접하면서 현실을 직접 체험하고 싶었습니다.”
─택시회사에 취업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택시운전을 해볼 생각으로 잠실교통회관에서 택시기사 자격시험을 치르고 3일간 교육과 적응시험을 치른 뒤 자격증을 받았어요. 시험관들이 모두 ‘왜 시험을 보느냐’고 자꾸 물어봐요. 아마 어딘가에 내가 택시운전을 하려는 것이 보고돼 이유를 알아보라는 지시가 내려온 것 같았어요. 그래서 조금 시간을 두고 있다 우리 집(강서구 화곡본동)에서 제일 가까운 택시회사인 금구상운에 가 취직을 시켜달라고 했죠.
사장이 처음에 ‘택시업계 비리를 캐러왔느냐’, ‘노조결성하러 왔느냐’며 난색을 표시하기에 서울시 교통체계도 알아보고 여론도 파악하려고 한다’고 사정했더니 받아주었어요. 최근 택시업계에는 퇴직금 등을 고려,장기근속자를 몰아내려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풍조도 내가 취업하는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밤거리에 비치는 빈부격차
─택시운전을 하면서 인상적이었던 서울의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어느 도시나 비슷하겠지만 서울은 특히 밤과 낮이 뚜렷이 구분되는 도시인 것 같아요. 서울의 밤은 포장마차의 등장으로 시작되고 서울의 낮은 미화원들이 열어요. 포장마차가 불을 밝히면 밤의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집니다. 머리엔 염색을 하고 귀에는 귀고리를 달고 마이클 조단이 입는 러닝티를 입은 젊은 남자들과 역시 머리에 염색을 하고 몸에 달라붙는 티셔츠와 바지를 입은 야한 옷차림의 여자들이 몰려나오면서 서울의 유흥가들은 흥청거리기 시작하죠.
새벽 2시가 되면 밤은 절정으로 치닫고 거리는 밤의 사람들이 버린 오물로 뒤덮여요. 지하철 환기구엔 담배꽁초가 겹겹이 쌓이고 먹다버린 컵라면 용기와 종이컵이 거리를 뒹굽니다. 그 사이로 술 취한 사람들이 비틀거리며 지향없이 떠돌고. 그러나 이들도 새벽을 여는 미화원들이 나타날 시간이면 자신들이 사라질 시간임을 깨닫는 것 같습니다.
이때 택시들은 부지런히 이 사람들을 실어날라야 합니다. 미화원들은 1시간30분이면 그 많은 오물을 말끔히 치우고 서울은 다시 태어나요. 그리고 새로운 서울 거리 위로 새벽시장 보러가는 사람과 우유배달원, 신문배달원들이 내닫죠. 뒤이어 이른 출근을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면서 서울은 다시 활기를 찾습니다. 야간 근무로 피로하지만 택시운전사들은 이들을 태울 때 보람을 느낍니다.”
─정부는 IMF를 극복했다지만 시민들은 여전히 IMF 사태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요즘 서울시민들의 분위기는 어떤가요?
“택시손님은 부유층과 빈곤층을 제외한 서민대중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낮에는 택시손님이 거의 없고 설사 택시를 타더라도 지하철역이나 가까운 거리를 가는, 1300원에서 많아야 2000원짜리 손님들이 대부분입니다. 서민대중들이 여전히 IMF에 시달리고 있다는 증거예요. 손님 중 음식점, 옷가게 같은 중소 자영업자들은 대부분 장사가 안되고 금융비용에 부담을 느낀다고 호소하고 있어요. 상류층을 꿈꾸던 중산층도 흔들리고 있습니다. 목동아파트나 강남 일부지역에서 타는 손님들에게서도 경제적 불안감이 느껴진다니까요.
지금 우리 사회에는 무한경쟁과 퇴출, 구조조정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신자유주의 노선이 판을 치고 있어요. 그러나 미국을 제외하고 신자유주의는 세계의 주류가 아닙니다. 독일의 폴크스바겐사는 경영위기를 맞아 노동일수와 노동시간, 임금을 조정함으로써 국내 40만 노동자와 해외 30만 노동자 중 한 사람도 해고하지 않았고 지금은 원상회복을 했어요. 독일은 이런 과정을 통해 명퇴금과 재취업 비용 등을 줄였고요. 국가는 원론적으로 완전고용의 책임이 있습니다.”
─빈부격차가 심해진다는 분석이 택시운전을 하다보면 피부에 와닿나요?
“빈민층이나 중산층은 흔들리는데 밤의 사람들로 대표되는 부유층은 다릅니다. 가짜 오렌지도 있고 평범한 샐러리맨도 있지만 대부분 여유가 있어요. 일단 택시를 타면 평균 1만원 이상의 거리를 갑니다. 택시수입의 3분의 2가 술먹는 사람들로부터 나오고 대부분은 젊은 사람들이에요. 소위 오렌지들은 여자들과 부킹에 실패하면 하룻밤에도 강남과 영동, 홍익대앞 신촌 등을 오갑니다.
택시를 탄 웨이터에게 들었는데 한 테이블 술값이 1000만원 하는데 그것도 미리 예약을 해야 한다더군요. 도저히 계산이 안 나와 술값내용을 물어봤더니 5명 정도 오면 100만원 이상 하는 발렌타인 30년 같은 고급 위스키 3~4병 마시고 아가씨 팁을 1인당 50만원씩 주고 고급안주 몇 개 시키면 1천만원은 금세 넘는다고 설명합디다.
이처럼 중산층이 붕괴되고 빈부격차가 심해지면 유럽과 달리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장치를 갖추지 않은 우리나라에서는 폭동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구요. 그런데도 정치권은 이런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고 언론도 ‘신자유주의’만 부르짖고 있단 말입니다.”
─정말 폭동의 위험이 체감됩니까?
“폭동은 아닐지라도 심각한 균열이 발생할 수 있죠. 택시운전사들도 이 상태로는 몇 년 버틸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요. 불만이 축적되고 있지만 정치는 이를 외면하고 있고요. 60년대와 70년대의 노동자 억압정책이 80년대 노동운동의 폭발을 가져왔듯이 신자유주의의 억압도 언젠가 폭발할 것입니다.”
─흔들리는 중산층 중 기억나는 손님이 있습니까?
“7월 중순 청담동에서 30대 여자가 술에 취해 택시를 탔어요. 처음엔 지하철 역으로 가자더니 ‘일산까지 갈 수 있냐’고 묻는 거예요. 시외로 갈 수 있느냐는 뜻이 아니라 외상으로 갈 수 있느냐는 뜻이었어요. 그 여자와 남편이 모두 명문대를 나온 엘리트들인데 남편이 IMF를 맞아 주택은행에서 명퇴를 했는데 퇴직금도 다 쓰고 아직 취직이 되지 않아 그 여자가 벤처회사에 나가고 있다고 합디다. 생활비가 200만원 이상 드는데 자기가 받는 월급은 150만원에 불과해 어려움이 많다고 해요. 그래서 낮 12시에 선배가 사는 청담동에 와 술을 마시기 시작해 9시까지 술을 마셨는데 취한 얼굴로 전철을 타려니 그렇고 택시비는 모자라고 해서 외상택시를 탔다더군요. 택시비가 2만2000원 나왔는데 1만2000원밖에 없다고 하면서 자기 명함을 주는 거예요.
기사식당에서 만난 한 택시운전사는 중소기업을 운영하다 부도가 나 동생까지 재산을 날렸대요. 아들 2명이 서울공대에 다니는 이 운전사는 자살을 하려고 15일간 방황하다 택시운전을 하게 됐다고 하더군요. 우리 회사에도 수출업체 사장 출신이 있는데 부도가 나 생계를 걱정하고 있던차에 ‘박계동 전의원이 택시운전사가 됐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곧장 우리회사로 와서 취업을 했어요.”
서울발전 가로막는 한심한 교통체계
─서울시민 못지 않게 서울도 중병을 앓고 있지 않습니까?
“서울처럼 아름다운 도시가 없어요. 런던의 템즈강이나 파리의 센 강은 한강과 견줄 것이 못돼요. 그러나 한강 주변의 아파트는 서울을 삭막한 도시로 만들었어요.
그리고 서울이 동북아 중점도시로 성장하는 것을 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바로 교통문제입니다. 서울의 교통체계는 최소한의 기본도 못 갖추고 있어요. 우선 도로표지판만 봐도 외국인은 물론 택시운전사인 나에게도 어렵다니깐요. 예를 들어 연세대학 앞에서 수색으로 가는 표지판을 보고 가다보면 두갈래 길에서 ‘성산대교’와 ‘모래내’라는 표지판이 나옵니다. 수색이 사라져버린 것이죠. 결국 두 곳 중 한군데를 찍어 운전을 해야 해요. 이런 상태에서 미리 차선을 변경하는 등 안전운전을 할 수가 없다 이 말이에요.
또 서울의 도로에는 도로번호가 없어요. 96년 미국 미주리대에서 공부할 때 방학을 이용, 미국 주요도시를 돌아다녔는데 표지판과 도로체계가 확실해 처음 가는 나도 운전을 해 목적지를 찾는 데 무리가 없었어요. 예를 들어 시카고의 경우 20여km인 16번도로 주변에는 4000여개의 번지가 홀짝으로 나뉘어 순번대로 배열돼 있어 도로지도만 있으면 누구든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서울의 대기를 포함한 환경문제도 심각해요. 적어도 디젤차는 서울도심 진입을 금지하는 등 획기적인 조치가 필요합니다.”
─택시운전을 하다보면 에피소드도 적지 않을 것 같은데.
“지난달 하순 새벽 2시경에 이문동에서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미모의 손님이 망우동으로 가자고 해요. 망우동은 공동묘지가 있는 곳이잖아요. 순간 오싹해 백미러를 통해 손님을 봤더니 말없이 차창을 응시하고 있었어요. 마른침을 삼키고 운전을 해 망우동 한 교회 앞에서 여자손님을 내려줬더니 이번에는 스포츠 머리에 덩치가 큰 남자손님이 타더니 불암산으로 가자는 겁니다. 그 손님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갑자기 ‘택시강도가 아닐까’하는 불안이 엄습하잖아요. 불암산 자락으로 접어들면서 조심스럽게 “왜 새벽에 산엘 가느냐”고 묻자 “어제 술을 먹고 차를 절앞에 세워둬 차를 찾으러 간다”고 대답하는 겁니다. 한참 산길을 따라가다 그 손님 차로 보이는 승용차를 보고야 안심했어요.”
─택시운전을 하면서 가장 어려운 점은 무엇입니까?
“생리현상이에요. 오후 3시에 교대를 해서 나오면서 ‘건강을 생각해 식사 후에 30분은 꼭 쉬어야지’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회사를 나서면 거리에 빈 택시들이 20~30m 간격으로 달리고 있어요. 지하도 입구나 건널목 같이 사람이 많은 곳에는 빈 택시가 몇대씩 서 있구요. 골목길로 접어들면 이미 한바퀴를 돌고도 손님을 못태운 택시가 골목길을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이 계속되면 식사를 하고도 5분을 쉬지 못해요. 밥을 먹고 바로 차를 타면 배가 접히면서 소화가 안되고 자꾸 방귀가 나오려 합니다. 졸음도 간단치 않은 문제죠. 허벅지를 꼬집고 손님에게 이야기도 걸지만 일단 졸음이 오기 시작하면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억지로 졸음을 참다보면 내장이 부글부글 끓으면서 타들어가는 느낌입니다.”
─택시운전사 월급으로는 생활이 안될텐데….
“25평짜리 아파트가 재건축에 들어가면서 3억3천만원에 처분한 뒤 1억4천만원정도 되던 빚을 갚고 8천9백만원짜리 전세를 얻었습니다. 차액 1억8천만원과 광주민주화운동 보상금으로 받은 6천7백만원을 잘라먹으면서 살고 있어요.”
박전의원은 앞으로 두 달 정도 더 택시운전을 할 예정이라고 했다. 그리고 택시운전을 하면서 직접 보고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서울의 교통체계를 개선하기 위한 대안을 마련해볼 예정이라고 했다. 또 틈틈이 준비중인 국가개혁프로그램 관련 저서에도 택시운전 체험이 반영될 것이라고 했다.